200년 묵은 적폐 청산의 길, 네덜란드에서 찾다
200년 묵은 적폐 청산의 길, 네덜란드에서 찾다
[유라시아 견문] 로테르담 : Pivot to Asia 2.0
2017.07.01 16:10:42
200년 묵은 적폐 청산의 길, 네덜란드에서 찾다

1. 동인도회사 : Pivot to Asia 1.0

엄마도 그녀처럼 혼혈이었다. 할아버지가 광동 출신의 화교이고, 할머니는 토박이 자바 사람이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협조하여 이득을 챙겼던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외부 지배자와 토착인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독립 이후 그들에 대한 시선이 고왔을 리가 없다. 반감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자카르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것이다. 엄마는 이곳에서 네덜란드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니, 그야말로 다국적 가족이다. 아빠에게는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엄마에게는 인도네시아어를 익혔다. 상하이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로는 할아버지와 중국어로 얘기할 만큼도 되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암스테르담을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도 뛰었다고 한다.


전문가에게 하루를 의뢰했다. 암스테르담의 아시아를 맛보고 싶다고 했다. 주저 없이 향한 곳은 미덕가(美德街), 일종의 차이나타운 격이다. 중화요리집부터 식료품 가게, 한약방에 불교 사원까지 갖추었다. 태국과 일본, 말레이시아 식당도 나란히 자리한다. '동방잡화행'이라는 상점에 들어가니 일본의 조미료부터 한국의 초코파이까지 다양하다. 중국식당에서는 Nasi Goreng(볶음밥), Bami Goreng(볶음 국수) 등 인도네시아 음식도 내놓는다. '리틀 차이나'보다는 '리틀 아시아', 혹은 '리틀 동인도'라고 불러야 제격인 곳이다. 우리가 점심을 때운 곳은 <出島>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츄다오'(Chu Dao)라고 중국어로 읽었지만, 아무래도 '데시마'(Deshima)라고 일본식 훈독을 해야 옳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데시마를 가본 적이 있다. 나가사키에 조성된 인공 섬이다. 그곳에 '홍모인'들이 살아가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다. 일본과 네덜란드를 잇는 무역 거점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유럽을 직통하며 확립된 '란가쿠'(蘭學) 또한 그곳에서 기원했다. 그래서 일본어에도 네덜란드어의 흔적이 제법 남아 있다. 컵, 코프(コップ)는 kop에서 왔다. 맥주, 비-루(ビール)는 bier에서 왔다. 유리, 가라스(ガラス)는 glas에서 따온 것이다. 부러 아는 체 하지는 않았다. 옛 애인의 추억을 다시금 소환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은 없는 일이었다. 


▲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아 함선 재현물. ⓒ이병한

자연스레 인도네시아를 견문하던 2년 전이 떠올랐다. 자카르타는 바타비아로 불렸던 식민지 시절의 거리 명을 죄다 지웠다. 저명한 이슬람학자, 울마라의 이름을 딴 곳이 많다. 비동맹운동의 동반자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주요 도시 이름도 눈에 많이 띈다. 식민의 흔적이라면 아랍어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해둔 '현대 인도네시아어' 그 자체이다. 


반면 암스테르담에는 제국의 흔적이 거리 이름으로 많이 남아 있다. 자바 거리, 수마트라 거리, 바타비아 거리, 보르네오 거리 등 여럿이다. 북해를 접한 이곳에서 적도 이남 인도태평양의 지명을 접하니 퍽이나 이국적인 느낌이다. '데시마'에서 후식 삼아 주문한 것도 '자바 커피'였다. 데시마와 자바 사이, 아시아의 바다를 깊이 음미한 셈이다. 


400년을 거슬러 오른다. 유럽의 서북 변경이자 저지대였기에 농사짓기에는 적합지 않은 땅이었다. 어업과 해운업 등 바다로 진출했다. 그 중 일부는 리스본의 후추와 향신료 등 동방무역의 물품을 떼어다가 발트해 연안 북유럽에 팔아서 짭짤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후폭풍이 중계무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스페인과의 전쟁이 결정적이다. 신교와 구교의 다툼으로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접근이 차단당한 것이다. 수를 찾아야 했다. 자고로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직접 동방무역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동인도회사이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 발족되었고, 1603년 12월 18일 처음 출항했다. 세계사를 바꾸는 18척의 뱃고동 소리가 로테르담에서 울려 퍼졌다. 


▲ 17세기의 달러였던 동인도회사의 화폐. ⓒwikipedia

동인도회사는 당대의 벤처기업이자 스타트업 회사였다. 삽시간에 굴지의 글로벌기업, 다국적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마크가 새겨진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여 '17세기의 달러'로 유통시켰을 만큼 준국가적 실체로 행동했다. 요새를 건설하고, 총독을 임명하고, 병사를 고용하고, 현지의 지배자와 조약을 맺을 권리 등을 독점적으로 행사했다. 종합상사에 조선업, 해운업까지 겸장했으니 문어발 대기업이었다고도 하겠다. 17세기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로고는 20세기의 맥도날드나 21세기의 애플 로고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북해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출했다가 유럽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은 험난한 것이었다. 


고수익을 기대하는 장기 투자가 필요했다. 위험을 분담하고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는 금융 혁신이 이루어졌다. 한 차례 항해를 마친 후에 곧바로 이익을 배당하고 회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10년간 장기간 유지되며 종자돈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할만한 것이었다. 이윤율이 무려 400%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주식시장이다. 동인도에서의 성공은 서인도까지 전파되었다. 1621년 서인도회사도 세운다.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로 향했다. 북아메리카의 허드슨 강변을 개척한 뉴암스테르담에도 주식시장을 세웠다. 훗날 영국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이름만 바뀌었다.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이 되었다. 지금도 흔적은 남아 있다. 할렘도 브룩클린도 브로드웨이도 네덜란드어 지명이다. 즉 오늘날 뉴욕이 상징하는 금융자본주의 또한 그 원조를 찾자면 네덜란드이다.


바스코 다가마 이래 1799년까지 1만 척이 넘는 배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만 따지면 200년간 1722척의 배를 사용하여 4721회 항해했다. 그 중 1470척을 회사가 소유한 조선소에서 직접 건조했다. 나머지 300여 척은 구입하거나 임차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레 지도 제작이나 항해술도 발달했다. 영어에도 흔적을 남겨두었다. yacht, schooner, jib, skipper, bow, boom, sleep, cruise, deck, wreck, blunderbuss가 모두 네덜란드어에서 기원한 어휘들이다.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 kilometers 역시 마찬가지이다. 


17세기의 아마존이자 알리바바로서 동인도회사는 어마어마한 아시아의 상품들을 네덜란드로 운송했다. 향신료와 면직물, 도자기 등 200년간 총 25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는 식물과 동물도 있었다. 생태계 수준에서도 유라시아적 교류를 수반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튤립이다. 그 선명한 색감과 단아함으로 북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꽃이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튤립 또한 토종 꽃이 아닌 것이다. 무굴제국의 북부, 오늘날 카슈미르 지대에서 종자를 수입했다. 투르크족이 많이 사는 고산지대에 피어나는 들꽃이었다. 생김새가 꼭 그들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 같았다. 터번의 페르시아어가 둘반드(عمامه)이다. 네덜란드어로는 툴르(Tulp)로 옮겼고, 영어로 튤립이 된 것이다. 중국산 차의 인기도 못지않았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만병통치약이라는 과장광고 탓에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와 유럽 간 원거리 무역만 했던 것도 아니다. 아시아 역내 무역에도 깊이 참여했다. 인도네시아의 설탕을 페르시아에 팔았고, 인도의 옷감을 아랍에 팔았으며, 일본의 은을 캐어서 중국에 지불했다. 자연스레 아시아 전역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내부에 별도의 연구소를 두었다. 그 싱크탱크의 본부가 오늘날 암스테르담대학 건물이 되었다. 이웃도시 레이던 대학 또한 유럽의 아시아학을 선도하는 세계적 대학으로 우뚝하다. 공히 Pivot to Asia 1.0, 17세기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2. 17세기의 초상

17세기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개혁개방을 선도하는 경제특구이자 혁신도시였다. 항구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선박들로 분주했으며, 시장에는 이국적인 향신료와 목재, 과일과 야채로 가득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북유럽으로 이주했다. 거리에서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폴란드어에 터키어까지 들려왔다. 세계의 만물이 집약되고 유럽의 만인이 집결하는 허브였던 것이다. 자연스레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지평이 넓어졌다. 튤립 박사가 유명하다. 의학자이자 과학자이고 동물학자였다. 저서도 여럿 남겼다. 그의 책 속에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건너온 '괴물'을 실제 크기로 그린 해부도도 부기되어 있다. 자바의 오랑우탄을 정밀하게 관찰한 것이다. 해부학의 으뜸가는 권위자였던 그는 때때로 공개강연을 통하여 해부 실습을 선보이곤 했다. 


▲ 튤립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 작). ⓒwikipedia


그 <튤립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림으로 그린 이가 렘브란트이다. 네덜란드 하면 반 고흐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으나, 17세기에 흠뻑 빠진 나로서는 '세기의 초상'을 그려낸 렘브란트를 첫 손에 꼽는다. '시민회화'라고 할 만한 독특한 미학을 완성시켰다. 사실성에 기초한 풍속화, 동식물을 소재로 한 정물화, 생활현장을 취재한 풍속화, 작품을 의뢰한 고객을 상대하는 초상화 등 '네덜란드풍' 그림을 선도한 것이다.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회화 사이에 네덜란드의 시민회화를 자리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이병한


대표작은 역시 <야경>이다. 가로 437cm, 세로 363 cm의 대작이다. 프랑스에 루브르가 있다면, 네덜란드에는 'Rijksmuseum'(국립박물관)이 있다. 일만 점의 미술 작품을 자랑하는 곳이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아카이브, 역사박물관을 하나로 모아둔 것 같다. 네덜란드 문화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gallery of honour'에 위치한 작품이 바로 <야경>이다. 대리석 기둥과 황금 조각 사이로 널찍한 고딕풍 전시실을 홀로 차지하고 있다. 높다란 유리 천장에는 초록 잎과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으로 다가가노라니 마치 무릎이라도 꿇고 기도를 올려야 할 듯한 숭고미마저 자아낸다. 미술관에 있다기보다는 성당에라도 들어선 것 같다. 


유명세를 차치하자면,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쪽은 스무 점이 넘게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이었다. 천사와 악마 사이를 오고가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그려냈다. 내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출시켰다. 인간의 마음에, 사람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했던 것이다.


▲ 렘브란트 1660년 자화상. ⓒwikipedia


렘브란트의 화풍을 철학으로 정립한 이는 데카르트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확립한 곳도 암스테르담이었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덜하던 시기, 데카르트는 유럽 각지를 편력한다. 자신의 철학을 지지해줄 후원자를 찾아다녔다. 교회에서도 벗어나고 대학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한 것이다. 마침내 보금자리로 삼은 곳이 네덜란드였다. 1628년부터 진지를 꾸리고 저작활동에 전념한다. 1637년 레이던에서 3000부를 찍은 책이 바로 <방법서설>이다. 차마 실명을 밝히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인이 쓴 책으로 알려졌다. 이어 1641년에는 <성찰>도 출간한다. 


철학에 데카르트가 있다면, 과학에서는 갈릴레오가 있었다. 이단으로 심판받아 교황청의 비난을 사고 있을 때, 그의 저작 <천문대화>(1632)를 출간해준 곳도 레이던이었다. 책의 초고를 쓰면서 '그대로 지구는 돈다.'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철학과 과학 사이, 사회과학도 기지개를 켰다. 마흔을 넘긴 토머스 홉스는 1629년 영국을 떠나 10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한다. 각지의 사상가들을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며 이론을 다졌다. 네덜란드에 이른 것은 1634년이다. 여기서 <철학원론>을 간행했다. <시민론>의 프랑스어판 또한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그 유명한 <리바이어던>은 1651년 출판되었다.


볼테르는 평생에 걸쳐 7차례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존 로크 역시도 한 철 암스테르담에서 지낸 바가 있다. 자유의 공기와 저렴한 책 가격을 상찬해 마지않았다. 바티칸의 교황에서도, 파리와 런던의 절대군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상의 해방구이자, 예술의 전당이며, 과학의 메카였던 것이다. 자연스레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출판사 40여개가 밀집한 출판단지는 17세기의 반(反)문화를 실험하는 전위이기도 했다. 당대의 이단아이자 미래의 선각자였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던 까닭이다. 네덜란드를 다녀온 다니엘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탈고했다. 훗날 근대적 개인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유럽의 주변부이되 아시아와 연결되는 첨단으로서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은 창조도시, 창의도시의 전범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환경 속에서 스피노자가 나고 자랐다. 일찍이 레이던 대학에서 청강하며 데카르트 철학의 세례를 입었다. 훗날 스피노자 특유의 범신론과 신학과 절연한 정치학이 여기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24세가 되던 해, 모태신앙이었던 유대교와 관계를 끊는다. 자유의지로 생을 결단하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대대손손 이어지던 유대인 단체에서는 파문을 선고 당한다. 고독하게 렌즈를 세공하며 사색하고 집필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냈다. 렌즈를 닦으며 생계를 해결하면서 사유의 날을 버렸던 스피노자의 모습이 퍽이나 상징적이다. 망원경의 도입과 현미경의 개발과도 무연치 않은 자태이다. 우주 천체부터 미생물 세포까지 세계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기 시작하던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 새 시대의 혁명 사상을 담금질하는 근대 철학의 기수였다. 


▲ 쿤밍까지 연결되는 로테르담 철도역. ⓒ이병한


3. 서세동점의 끝

로테르담시가 매년 주최하는 학술회의의 올해 주제가 "바다와 철도가 만나다"(Ocean meets Rail)였다. 로테르담의 연결망이 새로이 재구성되고 있었다. 더 이상 항만을 통해서만 아시아와 만나지 않는다. 내륙을 통해서도 아시아와 만나는 길이 열렸다. 2015년 7월, 중국의 쿤밍에서 출발한 열차가 로테르담 역까지 다다랐다. 80개의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는데 15일이 소요되었다. 인도양 바닷길에 비해서 20일이나 빠른 것이었다. 자연스레 여러 나라의 국경을 통과해왔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와 폴란드 등 유라시아의 중앙부를 관통했다. 바다를 통해 아시아와 접속했던 17세기 이래, 'Pivot to Asia 2.0'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육로와 해로가 합류하여 신실크로드가 업그레이드된다. 철도로 아시아와 이어진다고 하여 항구도시의 위상이 위축될 것 같지도 않다. '대항해 시대'에 버금갈만한 또 다른 바다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북쪽 바다, 북해가 주목받고 있다. 북극항로가 각광받고 있다. 극서항구 로테르담과 극동항구 블라디보스토크를 불과 열흘 만에 주파할 수 있는 아이스 실크로드, '얼음길'이 열리고 있다. (북극항로는 러시아의 북방 항만도시 편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 유럽 최대의 물동량을 자랑하는 로테르담 항구. 북극 항로와도 이어질 것이다. ⓒ이병한


로테르담 거리는 암스테르담과도 또 달랐다. 무엇보다 이슬람풍이 완연하다. 네덜란드에 터키계가 40만, 모로코계가 35만이라고 하는데, 상당수가 로테르담에 밀집해 사는 모양이다. 토박이 네덜란드인과 떠돌이 이주자의 비율이 5:5를 이루고 있다. 내국인과 외국인을 무 자르듯 갈라치기 힘들 정도이다. 그래서 오래 살았던 이들을 오토스톤(autochtoon)이라 부르고, 신참자들은 아로스톤(allochtoon)이라 칭한다고 한다. 내/외가 아니라 신/구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이다. 먼저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 사이에 나와 남의 구별은 부질없는 짓이다. 국민국가 이후를 주도할 글로벌 도시의 미래상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터키어는 물론이요 아랍어 간판도 즐비해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유럽의 서북단에서 구경하는 모스크와 바자르는 그 맛이 또 색다르다. 곳곳에서 케밥 냄새도 솔솔 풍겨온다. 삼시세끼를 할랄 식당을 돌아다니며 아침에는 broodje kass(아랍식 샌드위치)를, 점심에는 수리남의 로띠를, 저녁에는 모로코의 tagine(고기야채 찜)를 즐길 수도 있었다. 카페에서는 터키식 커피에 달달한 바클라바(baklava)를 곁들였으니 하루 사이에 16억 이슬람세계를 순례한 셈이다. 과연 히잡을 두른 여성들도 많고, 장거리 전화카드를 파는 상점도 여럿이다. 여행사 유리창에는 카사블랑카와 아나톨리아를 오고가는 저가 항공권 광고가 가득하다. 아파트에도 유독 위성방송 안테나가 많이 달려있다. 지역 신문 광고란에는 여성 전용 피트니스도 있었으며, 돼지고기를 팔지 않는 할랄 슈퍼마켓도 등장했다고 한다. 로테르담에는 네덜란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슬람대학도 자리한다. 과연 시장 또한 모코로 출신의 아흐메드 아부탈레브(Ahmed Aboutaleb)이다. 2009년에 당선되어 지금껏 오래 시정을 이끌고 있다. 그가 소속된 노동당이 이번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다면 총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유럽 최초의 무슬림 총리가 네덜란드에서 등극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그리 멀지 않은 것도 같다. Pivot to Asia 2.0 시대의 상징적 풍경이 될 것이다. 


▲ 로테르담의 무슬림 시장, 아흐메드 아부탈레브. ⓒwikipedia


현미경을 대신하여 망원경으로 렌즈를 바꾸어 17세기의 초상을 다시 살펴본다. 1년 째 내 노트북 바탕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17세기 유라시아 전도에 로테르담과 카사블랑카, 자카르타를 포개어 본다. 17세기의 전위로서 네덜란드를 꼽는 것도 치우친 독법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국으로 네덜란드를 뽑는 것도 과장된 시각이다. 


바다와 더불어 내지를, 해양만큼이나 대륙을 겹쳐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17세기는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이스탄불부터 카사블랑카까지 지중해는 여전히 '이슬람의 호수'였다. 오스만의 동쪽으로는 사파비제국과 무굴제국도 건재했으니, 유라시아의 남부는 온통 이슬람제국의 전성기였다. 북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러시아의 굴기가 확연하다. 유럽이 신/구교 간 30년 전쟁으로 분열하고 있을 때, 전통적인 슬라브 세계에 투르크어와 몽골어를 사용하는 유목민들까지 아울러 우랄 산맥까지 동진해온 것이 동방정교회의 보루 러시아제국이었다. 또 유라시아 최동단에서는 만주/연해주의 여진족이 일어나 중원을 삼키고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한 것이 또 17세기이다. 이들 유라시아형 제국들의 위용에 견준다면 네덜란드의 부상, 동인도회사의 약진은 차라리 소박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영토를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국지에 거점을 차리고 장사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무역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오스만제국부터 대청제국에 이르기까지 공히 사람을 내국인/외국인으로 가리지 않는 복합국가였기 때문이다. 홍모인을 '늦게 온 사람', 아로스톤으로 수용해준 것이다. 


돌아보면 17세기는 한층 균형 잡힌 다문명세계가 작동하고 있던 시절이다. 유럽이 아시아를 압도했던 19세기 이후와는 판이했던 구세계였다. 채 20만이 되지 못하는 소국 네덜란드가 2억5000만의 대국 인도네시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예외적 시절이 다시금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21세기, '다른 백년' 중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Pivot to Asia 2.0 시대. 아시아와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얼마나 다르게 만날 것인가가 유럽의 집합적 화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메리카와 멀어지면 질수록, 대서양이 적조해지면 질수록, 아시아와의 다른 백년이 유럽의 향방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지난 200년의 묵은 적폐, '서세동점'을 청산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때를 맞춤하여 올해 아시아 연구소를 재개장한다는 레이던 대학의 안목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20세기형 유럽학과 아시아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21세기형 유라시아학으로 합류하는 극서지방의 허브로 진화할 수 있기를 힘껏 양껏 응원한다. 


▲ 아시아 연구소 재개장 준비하는 레이던 대학의 세미나 현장.ⓒ이병한


로테르담 역을 유유하게 빠져나온 유로스타가 남쪽으로 향하면서 속도를 바짝 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유럽의 수도, 브뤼셀. 마침내 EU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것이다. 창밖으로 네덜란드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목을 축인 것은 더 이상 하이네켄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맥주 호가든의 나라, 벨기에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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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