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아이들', 어디로 가야 하나?
'사라예보의 아이들', 어디로 가야 하나?
[유라시아 견문] 사라예보 : 백년의 대란
2017.07.22 18:22:38
'사라예보의 아이들', 어디로 가야 하나?

1. 발칸의 예루살렘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겨울 내 채 녹지 않은 하얀 눈이 산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산꽃과 들꽃이 만발한다는 4월이 되려면 열흘은 더 지나야 했다. 유독 많은 터널을 지나야 당도하는 곳이 사라예보다.


발칸 반도에 역삼각 꼴로 위치한 보스니아는 국토의 거개가 산지이다. 사라예보 또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한다. 지형 탓에 아침마다 안개가 낮게 깔린다. 동쪽 산 너머 해가 떠오르면서 옅은 연무도 차츰 걷혀간다. 안개가 사라지며 눈에 드는 도시의 정경은 '경치를 본다'보다는 '역사를 읽는다' 쪽에 더 가깝다. 동에서 서로 걸어야 제 맛이다. 사라예보의 시가 또한 세월에 따라 서편으로 길쭉하게 확산되어갔기 때문이다. 적색 벽돌로 쌓아올린 구시가는 오스만풍이 완연하다. '작은 이스탄불'인양 모스크의 첨탑과 가톨릭의 종루와 정교회의 돔이 옹기종기 솟아있다. 라틴 다리를 지나서는 오스트리아의 빈을 옮겨다 둔 것 같다. 크림색 벽으로 세워진 중후한 서양풍 건축물이 즐비하다. 더 서쪽으로 내딛으면 15층 안팎의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다. 유고슬라비아공화국, 사회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미니멀리즘이라고 우기기에는 너무나 투박하다. 최서단에 닿으면 투명한 유리창들이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빌딩들이 우뚝하다. 흡사 상하이나 뭄바이, 두바이에 있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 거리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다양성은 줄어들고 신성함은 감소한다.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600년 역사기행을 하는데 서너 시간이면 족하다.


▲ 사라예보 트램. ⓒ이병한


돌아오는 길은 트램을 탔다. 1885년 유럽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다음으로 두 번째 깔렸다는 유명한 트램이다. 역사적 위상만큼이나 도로 한 복판을 가르며 도시를 달린다. 이 산골 벽촌이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이다. 공식적으로는 1461년에 사라예보가 세워졌다고 한다. 오스만제국의 산물이다. '발칸'이라는 지명부터가 터키어로 산악을 일컫는다. '사라예보'는 집, 또는 성이라는 뜻이다. 이스탄불과 발칸을 잇는 허브로 사라예보를 삼았다. 발칸에서 가장 큰 바자르가 사라예보가 들어섰고, 발칸에서 가장 많은 모스크가 세워진 곳도 사라예보였다. 17세기에 인구 10만을 돌파한다. 이웃도시 베오그라드나 자그레브가 19세기까지 겨우 1만을 넘는 소도시였음에 견준다면, 사라예보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팍스 오스마니카'의 선물이었다. 


▲ 구시가 바자르. ⓒ이병한


칼리프의 치세 속에서 자연스레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5세기부터 발칸으로 유입되었던 슬라브 민족은 크게 가톨릭을 신앙하는 크로아티아인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으로 갈렸다. 천년이 흐른 15세기 이후로는 '슬라브계 무슬림'도 생겨난 것이다. 특히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직종 상 도회적이고 세계적인 이슬람이 취향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아웅다웅하지는 않았다. 무슬림, 가톨릭, 정교회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체제를 이루었다. 지금도 구시가 한복판에 자리한 공중우물과 공중목욕탕이 다문화주의의 전당이자, 다문명세계의 정수였던 사라예보의 영화를 웅변하고 있다. 그래서 십자군전쟁 이래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새 보금자리로 삼은 곳도 발칸 반도였다. 


숯불에 익힌 양꼬치에는 칭따오 맥주가 제격이건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노교수는 가루가 텁텁한 터키식 커피를 고수했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며 금주령이 해제되어 살판이 났었는데, 발칸으로 남하하니 다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돼지고기를 꺼리는 이들마저 있으니, 유럽보다는 아랍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머무는 내내 육즙이 풍부한 양고기를 실컷 즐겼다. 그는 사라예보를 '유럽의 예루살렘',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더라는 나의 전언에도 딱히 수긍하지 않았다. 더 오랜 세월을 '북방의 다마스쿠스'라고 불렸다며 수정해준다. 과연 사라예보 대학에서 발칸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답다. 3대를 잇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역사학자였다. 게다가 3대가 줄곧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서재에는 할아버지가 모은 책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한다. 견문 3년차, 읽은 책을 미련 없이 버리는 습관을 들여왔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 여러 숙소와 카페에 읽은 책들을 남겨두고 왔다. 책 욕심도 물욕인바, 욕심 하나를 덜어내었다며 자위하고 자족하던 바였다.


그러나 욕심을 다스리는 것은 평생의 수련이고, 욕심에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인 모양이다. 3대가 100년이 넘도록 모아왔다는 장서를 떠올리니, 3년간 버렸던 책들이 심히 아까워졌다. 어느 곳에 어떤 책을 두고 왔는지 꼼꼼하고 쫀쫀하게 떠올랐다.

성성한 백발에 회색 눈빛이 유독 지적으로 보였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사라예보의 500년을 복기해 주었다. 격동의 현대사를 풀어나가면서도 어조의 변화조차 거의 없었다. 비단 외국어(영어)로 말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타고난 잔잔한 성품에 역사학자로 훈련된 사후적 기질도 보태어졌을 것이다. 


"옛날 옛적, 사라예보 사람들은 '너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죠. 됨됨이, 사람됨을 중시했지 귀속 여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한 가족, 친족에도 여러 민족이 뒤섞이는 경우가 다반사였어요. 다들 한 마을 이웃사촌인데 남녀가 눈이 맞고 몸을 섞는데 출신 여부를 따지지 않았죠. 말부터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무슬림도, 가톨릭도, 정교회도 입말은 거의 동일했어요. 어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사투리 정도였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종적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얼굴만 봐서는 구별 지을 수도 없죠.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좋은 사람과 덜 좋은 사람, 양심적인 인간과 욕심 많은 인간이 있었을 뿐입니다." 


즉 발칸이 '발칸화'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지리적인 명사가 지정학적 개념으로 전변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의 천하대란 못지않은 발칸 대란이 백년이 넘도록 지속된다. 오스만제국이 쇠락하면서, 발칸이 '유럽의 화약고'로 전락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보스니아는 화약고의 총성이 가장 먼저 울리고 가장 격하게 격발된 곳이었다. 500년 다문명세계의 축복이 20세기의 저주가 되었다.

▲ 사라예보 전경. ⓒ이병한


2. 잃어버린 20세기

오스만의 틈을 먼저 파고든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제국이 발칸으로 남하했다. 명분도 그럴싸했다. 무슬림제국 아래 정교도를 보호하겠다고 했다. 서유럽 열강들의 입장에서 오스만제국을 지중해에서 밀어내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반면으로 또 다른 '동양적 전제국가' 러시아의 진출 또한 억제되어야 했다. 이른바 '동방문제'의 출현이다. 1878년 베를린 회담에서 이른 담합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화였다. 어부지리로 보스니아를 얻게 된다. 발칸에서 가톨릭제국의 영향력을 확산시킴으로써 이슬람제국과 정교회제국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고로 19세기말 보스니아의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아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지배가 미쳤다. 청나라와 메이지일본 사이, 조선말의 '자주속국'과 비슷한 상태였다. 


식민지가 공식화된 것은 조선보다 2년이 빨랐다. 1908년 보스니아는 합스부르크에 병합된다. '식민지 근대화'의 쇼윈도가 되었다. 오스만적 초기 근대를 지우고 유럽적 근대를 삽입했다. 이스탄불을 동경하던 구시가를 대신하여 빈을 선망하는 신시가를 건설했다. 네오고딕 스타일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이때 들어선다. 문자 또한 키릴문자에서 로마 알파벳으로 전환되었다. 


▲ 합스부르크 시절에 세워진 예술 아카데미.ⓒ이병한


그러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힘만으로는 권력이 (오래) 작동하지 못한다. 뜻이 통해야 한다. 죽이 맞아야 한다. 보스니아 사람들은 오스만도 합스부르크도 아닌 독립 국가를 염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만 해도 여전히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칸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최대한으로 규합하는 남슬라브인의 나라, 즉 '유고슬라비아'를 지향했다. 북방에 슬라브 대국 러시아가 있다면, 남쪽에는 유고슬라비아를 세울만하다. 19세기 베트남이 남쪽의 중화제국, '대남제국'을 자칭했던 것과도 유사한 발상이다. 이들이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암살을 모의했다. 1914년 6월 마지막 주,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이 된 기차를 타고 빈에서 사라예보로 시찰을 나온 황태자 부부를 겨냥한 것이다. 오픈카에 올라 퍼레이드를 펼칠 때를 노렸다. '청년 보스니아' 소속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탄이 황태자 부부를 쓰러뜨렸다. 마침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부인의 뱃속에는 다음 대를 이어갈 태아도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생명줄을 끊어버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순간이기도 했다. 암살의 배후로 이웃나라 세르비아를 지목했고, 막후 실세로는 러시아를 겨냥했다.


1차 대전의 의의를 꼽자면 여럿일 것이다. 나는 '제국의 해체'를 으뜸으로 꼽는다. 합스부르크제국이 무너졌다. 러시아제국도 사라졌다. 오스만제국도 해체된다. 독일 제국도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정이 시작된다. 레닌과 윌슨이 경쟁적으로 '민족자결'을 강조했다. 민족주의, 국민국가가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다문명세계 발칸에서 '민족자결'의 범위는 애매했다. 결국 들어선 것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다. 일종의 소제국이었다. 이를 좌파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이다. 그러나 백년에 미치지 못하는 소제국의 실험은 끝내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1990년대 유고연방 또한 해체되었다. 뒤늦게 분 '민족자결'의 바람은 더욱 거세었다. 후폭풍만큼이나 더더욱 거칠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민족정화'의 피바람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내전이 연발했다. 사실상 발칸 반도의 동족상잔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라틴 다리. ⓒ이병한


1992년 3월 1일. '20세기가 시작된 거리' 라틴 다리에서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보스니아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날이었다. 한 세르비아 커플이 결혼식을 올린다. 세르비아 국기를 휘날리며 카퍼레이드도 펼쳤다. 보스니아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도발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결혼식 참가자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한다. 신랑의 아버지가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유고 연방군은 세르비아인의 보호를 구실로 사라예보로 진격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멍에가 되었다. 유고 군이 산 위에서 사라예보를 포위했다. 발전소와 저수지, 공항 등 전략 거점들도 봉쇄했다. 1996년 2월까지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살고자 했던 사라예보 시민들은 땅 아래로 터널을 뚫었다. 맨손으로 땅굴을 팠다. 허리를 굽혀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1m 남짓한 높이이다. 여기에 레일까지 깔았다. 이 생명선을 따라서 식자재와 의료품, 무기가 보급되면서 장장 1425일을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


포위된 보스니아를 방문한 용감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뉴욕의 지성' 수잔 손택이 유명하다. 1993년 봄부터 여름까지 머물렀다.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고 공연했다. 발군의 글 솜씨로 사라예보의 비극성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는 역할도 했다. '전쟁으로 20세기를 시작한 사라예보는 또 다른 전쟁으로 세기를 마감하는 도시가 되었다', 고 했다. 세계대전부터 유고내전까지, 가히 '잃어버린 백년'이었다. 그러나 20여 년 만에 다시 읽어보는 수잔 손택의 보스니아론은 충분치 못하다는 인상이다. 명저 <타인의 고통> 또한 절반의 진실에 그친다. 피상적인 인도주의적 감수성에 머물고 있다. 발칸의 고유한 역사성을 깊이 천착하지 않는다. 내전의 표층만 맴돌고 말았다.


보스니아 내전이 유독 격렬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사라예보가 다문명 세계의 정수였기 때문이다. 1990년 당시에도 4:3:2의 황금비율을 지속했다. 무슬림이 4할, 정교회가 3할, 가톨릭이 2할을 차지했다. 나머지 1할은 유대인이나 집시, 공산주의자였다. 끝끝내 자신을 '유고슬라비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회주의 정권이 '봉건의 산물'인 종교를 지우려고 했으나, 종내 지워지지는 않았다. 이념보다 종교가, 이성보다 영성이 훨씬 더 뿌리가 깊었다. '민주화' 물결을 타고 더욱 거세게 부흥하였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일환으로 선거가 실시되면서 갈등은 삽시간에 악화된다. 유고공산당을 대신하여 민족주의 정당들이 대약진했다. 무슬림의 '민주행동당', 세르비아인의 '민주당', 크로아티아인의 '민주동맹'이 각개 약진했다. 최대한의 표를 얻기 위하여 저마다 최강도의 민족주의를 동원했다. 무슬림 '민주행동당'이 주도하여 보스니아 분리 독립 투표를 강행하자, 세르비아 '민주당' 역시도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유고연방 잔류를 선택했다. 저마다 '민주적인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다. 제각기 선거를 방편으로 정당성을 옹호했으니, 민주주의 제도로는 갈등이 봉합되지 않았다. 결국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보스니아도,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도, 유고연방 전체가 내전으로 빨려 들어간 이유이다. 고로 동서냉전의 종식 또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아니었다. 커녕 동서냉전 아래서, 유고슬라비아의 우산 속에서 봉합되고 있던 발칸 내전이 폭발한 것이다.


돌아보면 1990년대의 발칸이 예외 상태였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전주곡이었다. 작년 하반기에 내가 둘러보았던 곳,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21세기를 앞서 경험한 것이다. 아프간도, 이라크도, 시리아도, 예멘도, 리비아도 온통 내전 상태이다. '아랍의 봄' 또한 '걸프만 냉전'으로 귀결되고 있다. 즉 탈냉전이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된다는 '역사의 종언'은 한 움큼도 들어맞지 않는다. 도리어 전 지구적인 내전 상태가 더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테러와 난민과 내란은 이제 발칸과 아랍을 지나 서유럽까지 당도했다. 2017년의 런던과 파리와 브뤼셀이 20세기말의 사라예보와 베오그라드와 자그레브와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유럽과 아랍을 통으로 접근하는 '유라비아적 시각'의 연마가 다시금 절실한 까닭이다. 고로 발칸은 20세기가 시작되고 20세기가 마무리된 곳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21세기가 가장 먼저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3. '사라예보의 아이들'

20세기가 온통 암흑기만은 아니었다. 하얗게 빛나던 때도 있었다.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 바로 사라예보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절정을 구가했다. 국내적으로는 다민족국가의 성취를 자부했고, 국제적으로는 비동맹외교의 성과를 자랑했다.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은 반쪽짜리 대회였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비판하며 '자유 진영'이 불참했다. 1984년 LA 하계 올림픽 또한 반쪽짜리였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빌미로 '공산 진영'이 불참하면서 응수해 주었다.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소련을 모시지 않고 비동맹운동의 좌장 노릇을 하던 유고에서 열리는 올림픽은 동서대립을 넘어서는 꼴을 취했다.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가 아니라 사라예보를 개최지로 삼은 것에도 티토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 베오그라드에는 아무래도 세르비아인들이 많았다. 사라예보야말로 유고연방이 성취한 '다문명세계의 근대화'를 자랑할 만한 장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바로 그곳에서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다만 하늘이 무심했다. 그해따라 유난히 눈이 내리지 않아서 주최 측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걱정이 태산이었건만, 개막 전날 마법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사라예보는 하루 사이 설국으로 변했다. 하얀 설경 속에서 발칸의 다채로운 전통무용을 선보이며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것이다. 런던부터 모스크바까지 동/서를 가리지 않고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1984년 이후 사라예보는 전성기를 누린다. 불과 8년 후에 내전이 격발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개막식. ⓒwikipedia


내전은 노교수의 아들도 앗아갔다. 4대째 역사학자로서 가업을 이어갈 후손이 사라졌다. 딸은 책과 펜 대신에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녀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 <사라예보의 아이들>이다. 2012년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에도 출품했다. 1976년생, 사라예보 올림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와 손잡고 구경했던 봅슬레이 경기장을 회상한 데뷔 작품이 2008년 작 <눈>이다. 두 편의 영화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히잡을 둘렀다. 20대를 통하여 보스니아 내전을 겪으며 이슬람으로 귀의했다고 한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정체성으로 무슬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모던 걸'로서 10대 시절을 보냈던 소녀가 30대에 들어서 자각적으로 무슬림이 된 것이다. 새천년 보스니아의 가장 큰 변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포스트모던 건물들이 솟아난 '뉴 사라예보'에도 합스부르크 시절과 유고슬라비아 구역에는 보이지 않던 모스크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쇼핑몰 내부에서도 하루 다섯 차례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 곳이 많다. '뉴 사라예보'는 어쩐지 20세기보다는 터키식 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 속 증조할아버지가 살았던 옛 사라예보를 닮았다. 동에서 서로 질주하다가, 서쪽의 끝에서 동으로 재귀(Re-Turn)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유럽인입니다. 동시에 무슬림입니다. 보스니아는 유럽의 모퉁이 발칸에 자리하면서, 200만 무슬림이 대대손손 살았던 땅이기도 합니다.' 


보스니아 국민이자 EU 시민이며 또 알라의 신자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12살 딸과, 8살 아들. 내전이 종식되고 태어난 '사라예보의 아이들'이 가야할 길인 듯도 하다. 과연 EU와 이슬람의 융합이 가능할 것인가. EU의 수도 브뤼셀이 오스만의 수도 이스탄불과 같은 똘레랑스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오스만은 다문명세계를 일구었기에 600년 장수 제국이 될 수 있었다. 이에 실패한다면 EU는 60년도 가지 못해 단명할 것이다. '너는 어디 사람인가?'가 아니라 '너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세계가 되돌아 올 것인가. 사라예보는 유럽의 변경이지만, 미래의 첨단이 될지도 모른다. 2014년에는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고, 2019년 유럽 청년 올림픽도 준비하고 있었다.


EU에 앞서 반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사라진 '실패한 소제국'으로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이 있다. 제국에서 국민국가로, 가 유일무이한 근대화 경로가 아니다. 제국의 근대화도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사라진 발칸에 솟아난 압축제국이 바로 유고슬라비아였다. 20세기형 제국의 실험장이었다고도 하겠다. 유고의 수도에서 세르비아의 수도로 강등된 베오그라드로 이동한다.


▲ 국립 도서관.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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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