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도, 미군 지휘관들도 "원폭 사용 반대"
맥아더도, 미군 지휘관들도 "원폭 사용 반대"
[전쟁국가 미국] 그로브스 "원폭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
2400명 희생에 34만 명 살해로 보복한 미국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서 시작돼 1945년 8월 9일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공격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미군 전사자는 2335명. 민간인 사망자는 68명이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34 : 1. 전투원만을 노린 정밀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4만 명이 즉사했는데 이중 군인은 250명이었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1 : 159.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1945년 말까지 7만 명, 1950년까지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로시마에서는 8만 명 즉사에 1945년 말까지 14만 명, 1950년까지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공식 발표를 통해 히로시마에서의 일본군 사망자는 3242명이라고 밝혔다.

진주만 기습의 사망자는 2413명인 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는 34만 명으로 진주만 사망자의 141배에 이른다. 한마디로 지나친 복수극이라 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가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부른 이유다.

히로시마 당시 트루먼은 포츠담회담을 마치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오거스타호 선상에서 저녁을 먹다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실을 보고받은 그는 펄쩍 뛰며 "정말 역사적인 일이야"라고 환호했다. 얼마 후 그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공표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행복한" 발표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이틀 후, 트루먼이 환호했다는 소식에 민주당의 한 정치인이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 주의를 당부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장치에 대해 환호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환호한 이유는 파괴가 아니라 이제 파괴가 종식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참전 이전 '민간인 학살 중단'을 호소했던 루스벨트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중단하자며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투 행위의 와중에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습은 (중략) 문명 세계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인류의 양심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비극적 대재앙의 시기에 이처럼 비인도적인 야만이 행해져야 한다면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현재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정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긴급한 호소를 공개적으로 하려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도, 방어 수단이 없는 도시의 민간인들에 대한 공습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랬던 미국이 정작 참전 후에는 세계 최악의 공습을 단행했다.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1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이 그것이다.

역사가들은 그 원인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복수심과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꼽는다.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인간으로 느꼈으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나 쥐새끼쯤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루먼은 8월 11일, 원폭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원자탄 사용에 대해 나보다 더 고민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부당한 진주만 기습, 그리고 미군 포로 살해에 대해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알아듣는 언어는, 그동안 우리가 계속해 왔던 공습뿐입니다. 짐승을 대할 때는 짐승으로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복수심이나 인종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군 고위 지휘관 대다수가 원폭 사용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등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반대했다. 이는 원자탄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 무기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나아가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됐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미국 최고위층이 원자탄을 전후 세계 질서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즉 소련을 염두에 둔 것이다.

▲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뜨린 핵폭탄이 폭파하는 모습. ⓒwikipedia.org


참전 이후에는 미영 핵 독점 추구

마틴 셔윈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이미 1943년부터 외교 수단으로서의 핵무기의 가치를 인식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의 처칠은 미영 공동의 핵 독점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전후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루스벨트는 핵 개발 사실을 소련은 물론 미국 국민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오직 처칠과만 핵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닐스 보어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제의한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처칠이 제안한 미영 핵무기 독점을 추구했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내심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초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소련을 겨냥한 핵 개발로 그 성격이 바뀐다.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는 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발언이다.

그는 1944년 3월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인 조셉 로트블랫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가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건 당신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고 말해 로트블랫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 1954년 4월에 열린 미 의회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고 나서 두 주일 뒤에 러시아가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프로젝트는 바로 그런 토대 위에서 진행됐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44년 9월 루스벨트는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처칠과 함께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을 승인하는 비밀각서를 체결했다. "충분한 숙고 후에 일본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의 패배가 분명해진 지 3개월 후였다. 같은 달, 그로브스는 핵 공격을 위한 특수비행단을 창설했다. 175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509혼성그룹은 태평양 티니안섬에서 원폭 투하 훈련을 시작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사망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직을 물려받은 직후 원폭 개발 사실을 알게 된다. 4월 13일 루스벨트의 측근이자 트루먼의 정치적 멘토였던 제임스 번스는(7월 3일 국무장관 취임) 트루먼에게 원자탄이 있으면 "전쟁 종료 후 우리가 원하는 평화협정 조건을 강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 25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비밀메모를 통해 트루먼에게 "이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 문명을 보전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보고했다.

4월 27일, 첫 목표물선정위원회(Target Committee)가 개최됐다. 그로브스 등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미군 공습을 받지 않은 도시를 대상으로 '인구 밀집 지역 내 지름 3마일 이상의 도심'을 폭격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히로시마 등이 주요 목표지역으로 거론됐다.

이후 몇 차례 관련 회의가 열린 끝에 5월 31일 스팀슨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가 열려 최종 방침을 결정했다.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노동자 주택들로 둘러싸인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사전 경고는 없다"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지만, 최대한 많은 주민에게 최대한의 심리적 충격을 가한다"는 원칙이 추가됐다.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든가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자 거의 전부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 투하 사실을 발표하면서 적의 군사기지를 폭격했다고 강변했다.)

▲ 포츠담 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탈린, 트루먼, 처칠(왼쪽부터).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원폭 투하, 일본 항복 여부와 관련 없었다

트루먼은 원자탄을 투하하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포츠담회담(7월 17일~8월 2일)에 참석 중이던 7월 25일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이 서명한 작전명령을 승인했을 뿐이다. 명령서 요지는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이른 시일 내에 원자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5일은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이다. 즉 미국은 일본의 항복 수락 여부와 관계없이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것이다. 국내 일부 문헌들은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원자탄 공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틀린 내용이다.

게다가 트루먼은 포츠담선언 서명식에 스탈린을 초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선언에는 스탈린의 서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일본은 소련의 도움을 얻어 좀 더 나은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는 허망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가사키 원폭 공격까지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주임 검사로 활동한 미국인 텔포드 테일러는 나가사키 원폭을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잘한 일이냐 못한 일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미국에서는 원폭 1,2개로 전쟁이 그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소한 3개는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게다가 7월 25일 트루먼의 원폭 사용 승인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8월 3일 이후에는 군부의 판단에 따라 원폭을 몇 번이고 투하할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원폭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1945년 6월 사실상 항복 결정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3차례 일본 총리를 역임한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은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의 패배가 불가피"하며 "이제 걱정해야 할 것은 패전에 따라 일어날지 모를 공산혁명"이라고 경고했다.

1945년 4월초 소련은 일본과 1941년에 체결한 소일 중립조약(Neutrality Pact)을 갱신하지 않고 폐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소련의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1945년 6월 18일 천황은 최고전쟁지도회의에 신속한 평화 회복을 원한다고 통보했다. 회의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련이 중재자로서 천황의 안전과 천황제 유지를 보장할 수 있는 항복 조건을 주선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속사정을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7월 6일 미 합동정보위원회는 포츠담에서 회동하기로 한 연합국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 <적 상황 평가>에서 일본의 '항복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지배층은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점차 타협을 통한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조건 항복은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일본인의 상당수가 이제 군사적 완패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에 따른 피해 누적-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고 주요 도시 대부분의 시가지 25~50%가 파괴됐다-으로 그런 생각은 더욱 보편화 될 것이다"

"무조건 항복 요구가 평화의 유일한 장애물"이라는 7월 18일 자 일본 측 암호 전문도 해독돼 미 정부 최고위층에 전달됐다. 그러나 트루먼과 번스 국무, 스팀슨 전쟁부 장관 등은 "평화를 얻어내기 위한 일본의 술수"라며 애써 무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탄 제조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자들은 원폭 사용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1945년 5월 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 화학자 해럴드 유리와 천문학자 월터 바트키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에서 제임스 번스를 면담했다. 헝가리 출신의 실라르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원폭 개발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다음은 실라르드의 전언.

"번스씨는 전쟁에 이기려면 일본 도시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다른 행정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사실상 이미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당시 번스 씨가 훨씬 더 우려한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문제였다. 그는 우리가 원자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면 유럽 문제에서 소련을 다루기가 한결 쉬워진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의 원폭 철회 노력 좌절되다

1945년 6월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의(원자탄 제조의 출발점인 핵연쇄 반응을 성공시켰다) 과학자들은 원자력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하는 여러 위원회를 꾸렸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정치위원회는 '원자탄 사용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원자탄을 비밀리에 개발해 일본에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공격한다면 미국의 도덕적 입지가 훼손될 뿐 아니라 '완전 멸망'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소련과의 핵무기 개발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원자탄의 과학적 원리는 비밀이랄 게 없기 때문에 소련은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은 보고서와 함께 대통령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와 오크리지 우라늄농축공장의 과학자 155명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원자탄을 실제로 제작한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청원서 회람을 금지하고 이 사실을 그로브스 장군에게 알렸다. 이에 따라 과학자들의 청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해군부 차관 랠프 바드와 전쟁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 등 일부 정부 관리도 원폭 사용 반대를 건의했다. 원폭 사용을 최종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해군부 대표이기도 한 바드 차관은 6월 27일 스팀슨 장관에게 메모를 보내 "위대한 인도주의 국가인" 미국은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참전하고 원자탄이 완성 직전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알리고 항복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며칠 후 바드는 해군 차관 직을 사퇴했다.

이에 앞서 6월 18일 존 매클로이는 트루먼이 합참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해 "천황은 무사할 것이며, (종전 후) 정부 형태는 일본인의 선택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신형 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7월 2일에는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윌리스 화이트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 대한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당 소속의 호머 케이프하트 의원은 같은 날 늦게 기자회견을 통해 화이트의 요구를 지지했다. 특히 그는 천황을 폐위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장해주면 항복하겠다는 일본 측 의사를 백악관이 이미 접수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6월 11일 자 사설에서 '무조건 항복'이란 일본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켜 전투 종식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불길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미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원폭 사용 반대

고위 군사지도자들도 대부분 원폭 사용에 반대했다. 이들은 원폭 투하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하며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에는 2차 대전 때의 전공으로 원수로 진급한 5성 장군이 7명 있었는데 이중 6명이 반대 의견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육군 항공단(미 공군의 전신) 사령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 해군의 윌리엄 리,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 원자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유럽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워는 포츠담회담 당시 스팀슨으로부터 원폭 사용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가 내 의견을 묻더군요.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반대했지요. 첫째, 일본은 이미 항복할 태세가 돼 있다. 그런 가공할 무기로 그들을 칠 필요가 없다. 둘째,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무기를 최초로 사용한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뉴스위크> 63년 11월 11일 인터뷰)

이이젠하워 전기를 쓴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트루먼과 최고위급 보좌관들에게 반대 의사를 직접 밝혔다고 한다.

극동지역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원자탄은 "군사적 관점에서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45년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이미 졌다" "다음 전쟁은 그 참혹함이 지금보다 1만 배는 클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맥아더는 후버 전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이 항복 조건을 완화해 주었다면(천황제 유지) 전쟁은 몇 달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후버의) 현명하고도 정치인다운 충고를(1945년 5월 30일 후버는 트루먼에게 메모를 보내 항복 조건 변경을 촉구했다) 따랐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학살극을 예방했을 것이고, 폭격으로 인한 그 많은 파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항복) 조건을 일본인들이 흔쾌히 수용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단 사령관은 1949년에 낸 회고록 <지구적 사명(Global Nission)>에서 "우리는 원자탄을 쓰든 안 쓰든 일본은 이미 붕괴 일보 직전이라고 보았다"고 밝혔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유튜브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합참 의장이었던 윌리엄 리 제독은 원자탄은 화학무기, 생물학무기와 함께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모든 기독교 윤리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시 법규에" 대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이렇게 단언했다.

"일본은 이미 패했고 항복할 태세가 돼있었다 (중략) 이 야만적인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한 것은 일본과의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수준은 암흑시대 야만인과 같은 차원으로 전락했다.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전쟁에 승리할 수는 없다" (1950년 회고록 )

1949년 언론인 조너선 대니얼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분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은 나에게 '(핵무기) 사용에 합의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군사목표물만 친다는 것이었죠. 물론 그러고는 최대한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해군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은 보좌관에게 "이 마당에 꼭 그래야 한다고(원폭 투하) 생각하지 않네. 그럴 필요가 없어"라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난 원자탄 같은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어"라고 말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1945년 10월 워싱턴 기념탑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사실 평화를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로 원자력시대가 공표되기 전에,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장군은 1945년 8월 7일의 일기에 "처음 워싱턴에서 내게 원자탄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주민 전체를 죽이는 도시 폭격에 대해서는 원래 찬성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 남태평양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은 "첫 번째 원자탄은 불필요한 실험이었다 (중략) 그걸 투하한 건 실수였다. 그 때문에 수많은 쪽발이가 죽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러시아를 통해 꾸준히 평화를 타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49년 의회 증언에서 "나는 민간인에 대한 폭격, 특히 원자탄 폭격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고 밝혔다.

도청한 적대국 외교 전문의 요약보고서 작성책임자인 카터 클라크 준장은 해상 봉쇄만으로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의) 상선을 계속 침몰시키고 기아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적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 발의 원자탄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재래식 폭탄에 의한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원자탄과 러시아의 참전이 없었어도 일본은 2주 안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945년 9월 21일 <뉴욕타임스>)

1945년 8월말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번스 국무장관조차 원자탄이 전쟁 종식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45년 8월 30일 <뉴욕타임스>는 번스가 "일본이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탄이 떨어지기 이전에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러시아 쪽 증거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위 군 지휘관들이 원폭 투하 전에 이러한 입장을 대통령에게 강하게 주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로브스가 야전 지휘관의 폭격 관련 발언은 모두 전쟁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맥아더를 비롯한 장군들 입에서 원자탄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길 원치 않았다"

요컨대 미 군사지도자들의 반대는 개인 의견에 불과할 뿐이었다.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또는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2차 대전의 또 다른 승전국 소련을 의식한 무력 과시가 목적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맥아더, 아이젠하워 등 원폭 사용에 반대했던 이들이 후에는 핵무기 옹호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게 패퇴하자 북한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강력히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대통령이 된 후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을 미국의 공식 군사전략으로 채택했다.

하긴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으로 대량보복 독트린을 수립한 존 포스터 덜레스도 히로시마 당시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규탄했다. 당시 미국교회연합회 지도자였던 덜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국가라고 자칭하는 우리가 원자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온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원자무기는 정상적인 무기의 하나로 여겨지고 그리하여 인류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파멸하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무엇을 말하는가? 히로시마 이후 미국 정부는 '원자무기를 정상적인 무기로 여겨지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대중에 대한 정보 은폐와 왜곡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다음 회에는 지난 회에 이어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inky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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