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렸다"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렸다"
[전쟁 국가 미국] 히로시마 은폐 (2)
'원자탄' 하면 떠오르는 시각적 이미지는 거대한 버섯구름이다. 반면 원자탄에 의해 죽거나 다친 수십만 희생자들의 사진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예컨대 네이팜탄에 의해 벌거숭이가 된 어린 여자아이가 울면서 도로를 뛰어가는 사진은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그리하여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34만 명이 죽고 37만 명이 후유증을 앓았다는 원자탄의 경우, 피해자의 끔찍한 고통을 보여주는 사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왜 그런가?

미국이 막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원자탄의 인간적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피폭자 증언 등의 공개를 철저히 차단했다. 히로시마 당일 유일하게 피폭의 참상을 찍은 한 일본인 기자의 사진은 꼭 7년이 지난 후에야 공개될 수 있었다. 나가사키 피폭의 희생자인 동시에 구호작업에 나섰던 의사의 수기는 원고 완성 이후 2년 반이 지나, 그것도 일본군의 마닐라 학살에 관한 내용을 덧붙인 뒤에야 책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마츠시게 요시토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탄이 폭발하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주고쿠신문>의 사진기자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 1913~2005년)는 자신의 집에 있었다. 막 아침상을 물리고 신문사로 출근하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하얀 섬광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이어 1층과 2층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당시 윗옷을 벗고 있었던 마츠시게는 "수 백 개의 바늘이 동시에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그의 집은 폭심(ground zero)에서 2.7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3백여 미터만 더 폭심에 가까웠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폭심에서 반경 2.4킬로미터 이내는 폭발 효과에 의해 모든 것이 파괴된다. 그는 깨진 유리창에 의한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이었다.

피폭 40분 후 그는 카메라를 들고 신문사로 향했다. 그러나 거대한 불길 때문에 신문사에 닿을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시내로 이어지는 미유키 다리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경찰 파출소가 있었고, 한 무리의 중학생과 경찰들이 있었다. 경찰은 학생들의 몸에 식용유를 부어주고 있었다. 피폭 당시 야외에 있었던 학생들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자탄의 강력한 열선에 그대로 노출된 학생들은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 다음은 그의 회상이다.

"학생들의 등, 얼굴, 어깨, 팔 등에 공 크기의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얼마 후 물집이 터지면서 피부가 마치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렸다"

경찰과 중학생들 뒤로는 원자탄의 버섯구름이 여전히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파출소 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마츠시게는 카메라를 집어 들었으나 첫 번째 셔터를 누르기까지 최소 20분이 걸렸다. 파출소 앞 광경이 너무도 끔찍했던 탓이다. 그의 회상.

"아마도 20분은 망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용기를 내 한 컷을 찍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을 찍기 위해 4,5미터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나의 눈물로 뷰파인더가 뿌옇게 보이던 그 순간이..."

마츠시게는 24장짜리 필름 두 통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그날 10시간을 돌아다니면서 셔터를 누른 것은 고작 7번뿐이었다. 피폭자들의 고통이 너무도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그가 필름을 현상한 것은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후였다. 밤중에, 폐허가 된 그의 집 앞 야외에서, 방사능으로 오염된 시냇물로 현상액을 닦아내고 인화지는 불에 타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아 말렸다. 이렇게 해서 7장의 필름 중 5장이 사진으로 탄생했다. 원폭 피해를 찍은 인류 최초의 사진이다.

▲ 마츠시게 요시토가 원자폭탄이 떨어진 당일 히로시마에서 찍은 사진 ⓒ히로시마 평화 미디어 센터


그러나 수 주일 후 그의 사진은 히로시마에 진주한 미 점령군에게 압수됐다. 8월 6일 이후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도 압수됐다. 다행히 필름만은 간직하고 있었던 마츠시게는 복사본을 만들어 미국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 보도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진은 보도되지 않았다.

마츠시게의 사진이 공개된 것은 히로시마 피폭 7주년인 1952년 8월 6일이다. 미국의 일본 점령이(1952년 4월) 끝난지 4개월 후다. 일본 잡지 <아사히 구라푸>가 '원폭 피해의 첫 번째 모습'이란 제목으로 특별판을 제작한 것이다. 이 특별판은 이후에도 4번 더 추가 인쇄돼 모두 70만 부가 팔렸다.

다음 달인 1952년 9월 29일, 미국의 <라이프>가 '원자탄 공격-무삭제판(When Atom Bomb Struck-Uncensored)'이란 제목으로 마츠시게의 사진 5장 중 2장을 공개했다. <라이프>는 일본 사진기자가 찍은 이 "삭막한" 사진들은 "지난 7년의 점령 기간 동안 미군의 검열에 의해 빛을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나가이 다카시

나가사키 의과대학 조교수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8~1951년)가 쓴 <나가사키의 종(鐘)>은 최초의 피폭자 수기다.

피폭 당시(1945년 8월 9일 11시 2분), 폭심 우라카미(浦上)에서 700미터 떨어진 나가사키 의대에 있었던 그는 자신도 머리 오른쪽부분 동맥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살아남은 의사, 의대생, 간호사 등 20여 명과 함께 구호활동을 벌였다. 10월 15일에는 구호 상황을 정리한 <원자탄 구호보고서>를 대학 측에 제출했다.

방사능의학이 전공인 그는 194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의 연구 과정에서 미량의 방사능에 장기간 피폭된 탓이다. 나가사키 피폭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도 피폭자가 된 그는 집 근처에 움막을 짓고 6개월간 머물면서 잔류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이 <나가사키의 종>이다. 즉 그 자신이 피폭자이자 방사능 전문가로서, 자신의 원자병의 실태를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원고는 1946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실제 출판은 1949년 1월에야 이루어졌다. 미군의 검열 때문이다. 미군은 일본군에 의한 <마닐라 학살>을 부록으로 추가하는 조건으로 책의 출판을 허용했다. 일본군이 행한 만행에 비추어 보면 원자탄 피폭은 자업자득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책은 1949년 8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고(<나가사키의 종> 이승택 옮김, 삼일출판사) 1950년 2월까지 7쇄를 거듭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겨우 반년 만에 한글 번역판이 나온 셈이다. 당시 한국 신문에는 "원자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 해방 후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보자!"라는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던 2011년,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나가사키의 종>(김재일 옮김, 섬)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관련 증언, 기록, 사진 통제

9월 19일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언론에 대해 새로운 검열 지침을 발표했다. 히로시마 관련 뉴스를 사실상 전면 통제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미군의 검열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밝힐 수 없게 했다. 얼마 후 책 출판에 대해서도 통제가 가해졌다.

이렇게 해서 1945년에서 1948년까지 일본에서 원자탄과 관련해 출판된 책은 4권, 그리고 시집 1권이 전부였다. 그중 하나가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이다. 다른 하나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존 허시의 <히로시마>다. 히로시마 피폭 당시 현장에 있었던 6명의 운명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이 책은 미국에서 최초의 반핵 여론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일본어 출판은 2년 이상 보류된 끝에 1948년에야 이루어졌다. 미국작가연맹의 거센 항의 덕분이었다.

일본인 연구자의 방사능 피해 연구 결과도 미군 검열 당국에 제출해야 했다. 미군은 출판을 무기한 보류시킴으로써 사실상 출판을 막았다. 검열은 1949년 10월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원자탄 관련 논문은 미군 점령이 끝날 때까지 자유롭게 발간될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원자탄은 일본에서 사실상 금지된 주제였다.

스즈키 마사오 박사는 원인불명의 새로운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관련 연구와 연구 결과 발표를 통제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맥아더는 미군의 검열은 일본에서 자행되고 있는 "악의적이고 거짓투성이인 선동캠페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 학자 모니카 브로는 미군 점령정책에 관한 저서 <억압 받은 원자탄(The Atomic Bomb Suppressed)>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검열은 특정한 사실들을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피폭 생존자들이 자신이 겪은 바에 대해 발언할 기회마저 박탈했다. 이 경험은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며, 모든 인류가 세계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다.

그들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또는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말을 할 수 없거나 말하려 하지 않았다. (미군의) 검열을 통해 일본은 세계로부터 고립됐다 (중략) 어느 누구도 일본 역사가 이마호리 세이지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원폭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킴으로써 세계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절대 안 돼, 결단코 안 돼"

9월 16일 일본 문부성은 '원폭 피해 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조사 내용을 기록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일본영화필름공사 선발대가 9월 21일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전쟁을 반대했다가 일본정부에 의해 투옥된 바 있는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가 책임자였다.

한 달이 채 안된 10월 17일 선발대의 카메라맨 한 명이 나가사키에서 미군 헌병에게 체포됐다. 이후 모든 촬영이 금지됐고 그동안 촬영된 필름은 압수됐다. 10월 19일 미군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금지시키는 한편 이전에 촬영한 필름은 모두 미군에 제출토록 명령했다.

이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촬영은 미군 주도로 이루어진다. 미 전략폭격조사단의 다니엘 맥거번 중위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 동영상은 미국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며 촬영 계속을 건의했다. "또 다시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러한 상황을 관찰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맥거번은 이와사키 팀을 지휘해 35밀리 흑백 필름으로 3시간짜리 다큐멘타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탄의 영향'을 완성했다. 이 필름은 1946년 5월 5일 미 언론의 대대적 보도 속에 미국으로 반출됐다. 그리고는 철저히 비밀에 감춰졌다.

1967년 5월 18일 <뉴욕타임스>는 "1945년 히로시마 촬영 동영상 22년간 비밀에"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 필름의 존재를 처음 폭로했다. 다음해 펜타곤은 필름의 복사본을 일본에 전달했다.

미국의 저명한 다큐 작가 에릭 바르누는 이 필름을 보고 난 뒤 "이것은 대단한 폭로(It was a revelation)"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필름은) 우리가 핵무기의 영향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려준다...도대체 무슨 이유로, 무슨 권리로 이 동영상을 비밀에 부쳤단 말인가? 비밀 분류의 근거가 될 어떠한 군사정보도 담겨 있지 않은데"

바르누는 1년의 편집 끝에 이 필름을 <히로시마/나가사키: 1945년 8월>이라는 제목의 16분짜리 다큐로 만들었다. 뉴욕 등 미국에서 상영된 이 다큐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히로시마/나가사키: 1945년 8월>의 첫 장면 ⓒ유튜브


미군은 일본 측이 시작한 흑백 기록영화 외에 자체적으로 컬러 동영상도 만들었다. 다니엘 맥거번이 주도한 컬러 동영상은 자그마치 30시간 분량이었다. 일본이 만든 흑백 필름보다 훨씬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하지만 1946년 6월 펜타곤에 제출된 이 동영상 역시 30년 이상 비밀 속에 묻혀 있었다.

맥거번은 1983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원자력위원회(AEC), 펜타곤, 맨해튼 프로젝트 사람들은 이 필름들이 묻히길 원했죠. 그 사람들은 내게 '절대 안 돼, 결단코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동영상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공포를, 그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걸 두려워했던 겁니다. 여하한 조건에서도 이 필름들은 방영돼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방사능이 인체에,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신체에 미치는 끔찍한 영향이 알려지는 걸 막으려 했던 겁니다.

그들이 이 필름의 상영을 막으려 했던 것은 그들 자신이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죠"

"원자탄의 실상을 모른다면 핵전쟁을 막을 수 없다"


이 컬러 동영상은 1980년대 초 공개됐다. 이 동영상이 일반에 알려진 데는 당시 촬영에 참가했던 한 미국인, 허버트 수산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 외에는 핵무기가 무엇인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모른다"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아무도 이 홀로코스트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수산은 이후 37년간 이 필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 필름이야말로 핵무기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무기라는 것을 세계에 입증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필름을 미국 TV에 방영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나는 이 필름을 꼭 찾아내고 싶었다. 원자탄의 영향이 실제 어떠한지를 미국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하고 싶었다. 미국 사람들이 원자탄의 끔찍함을 알게 된다면 어떤 형태의 핵무기든 이에 대한 거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군비경쟁이 종식될 거라 믿었다. 이 필름이야말로 세계 평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호소이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나는 너무도 이상주의적이었고, 순진했다."

전쟁 이후 수산은 CBS 프로듀서로 일했다. 에미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능한 방송인이었다. 그는 1950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필름 공개를 요청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1963년에는 트루먼에 대한 다큐를 제작한 인연으로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직접 호소하기도 했다. 유명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우,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 등에게도 호소했다. 하지만 비밀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1978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한 사진 전시회에서 수산은 일본 큐레이터에게 필름에 관해 말했다. 이후 필름은 내셔널 아카이브스에서 발견됐는데 이미 기밀 해제된 상태였다. 일본에서는 필름 구매를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이 동영상은 1980년대부터 <그날 이후(The Day After)> 등 거의 모든 핵 관련 영화, 다큐멘타리의 원 자료로 크게 활용됐다. 핵시대의 가장 중요한 동영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수산은 1983년 림프종이 발병해 1985년 64세로 사망했다. 촬영 당시 피폭의 후유증이다. 그의 유언은 이렇다.

"나는 내 아이들과 손주들이 제 명을 누리고 살길 원한다. 핵전쟁은 모든 것의 끝이다"

"미군 좋아요, 미국 최고예요"

베트남전쟁의 실상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반면 원자탄의 참상이 은폐된 것은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 중이었던 데 비해 일본은 이미 미국에 패해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승자이자 점령군인 미국이 패자인 일본의 현실 인식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두세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1945년 10월 하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스타디엄에서는 10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일본 승전 축하연이 열렸다. 캄캄한 가운데, B-29 폭격기가 서치라이트를 따라 스타디엄 상공을 지나가자 요란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원자탄 투하를 재연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 장면을 두고 "너무도 생생한 파괴의 재연"이라고 전했다. 미국인들은 집단적으로 원자탄의 파괴력에 도취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7월 15일자 <타임>은 히로시마의 청소년들은 세계 어떤 나라의 아이들보다 미국을 좋아한다면서 한 일본 학생이 "미군 좋아요, 미국 최고예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아이의 어머니와 누나는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진심일까? 원자탄 투하의 실상과 의미를 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1964년 12월 6일 일본 정부는 미 전략공군사령관을 역임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르메이는 전쟁 기간 동안 도쿄를 비롯한 일본 64개 도시에 잔혹한 공습을 지휘한 장본인이다. 그 스스로가 "미국이 전쟁에 패배한다면 나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습은 사실상 전쟁범죄였다.

패자 일본은 승자 미국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얘기했다. 미국 언론도 미국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전했다. 그러면서 원자탄의 범죄적 실상은 묻혀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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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