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핵무기 최대 피해자는 미국 국민"
"미국 핵무기 최대 피해자는 미국 국민"
[전쟁 국가 미국] 33년간 방사능 피해 은폐
미국 핵무기의 최대 피해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일본인들이다. 약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일본인과 함께 목숨을 잃은 약 4만 명의 조선인들은 더 억울한 피해자들이다. 대부분 강제로 일본에 끌려온 사람들인 데다 원폭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 십 년간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더 오랜 기간 원폭 피해를 당한 국민이 있다. 바로 미국 국민이다.

세계 최초의 핵 실험인 1945년 7월 트리니티를 시작으로 대기 중 핵실험이 금지된 1963년 8월까지 시행된 수 백 차례의 핵실험으로 적어도 1백만 이상의 미국인이 암과 기형아 출산 등의 고통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미국 정부가 30년 이상 원폭 실험에 의한 방사능 피해를 은폐하고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원폭 피해자들은 40여 년간 보상은커녕 피해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원폭 실험에 의한 방사능 피폭의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이후, 최초의 피해 보상이 이루진 것은 1989년이다. 1980년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원자력위원회(AEC) 등 미국 정부가 방사능 피해의 실상을 조직적으로 은폐해 왔다면서 2차 대전 이후 "미 국민이 미 핵무기의 유일한 희생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트리니티 은폐

원자탄을 만든 과학자들도, 미 군부도 방사능 피폭의 위험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과학자들은 방사능의 위험을 사전에 알리자는 편이었던 반면,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그로브스는 한사코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핵실험인 7월 16일 트리니티 테스트를 앞두고 과학자들은 방사능 낙진을 우려해 실험장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거나 최소한 사전 경고는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당신 뭐야, 허스트(황색 저널리즘의 신문 재벌) 똘마니야"라며 이를 묵살했고 실험 사실 자체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주민들의 안전보다는 원자탄 개발의 비밀 유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당초 과학자들의 예상은 방사능 낙진이 실험장에서 반경 3마일 이내 지역에 집중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폭 30마일, 길이 100마일의 거대한 방사능 낙진대 형성으로 나타났다. 폭심에서 25마일 떨어진 곳에서 사지가 마비된 노새가 발견되는가 하면 목장의 양들이 이상한 화상을 입거나 털이 빠지는 현상이 속출했다.

실험 당일, 핵폭발에 따른 지진과 섬광에 대해 지역 언론이 문의하자 그로브스는 윌리엄 로렌스 기자를 시켜 '탄약 창고 폭발'이라는 거짓 성명을 발표했다. 트리니티 실험장 부근 마을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필라델피아 불리틴>의 기사는 군부 검열에 의해 3분의 2가 삭제됐다.

이후 수개월간 핵실험에 따른 이상 현상에 관한 독자 편지 2백여 통이 주요 신문에 게재됐으나 방사능에 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군부 검열로 삭제된 것이다. 히로시마에 비해 경미하기는 하지만 원자탄에 의한 첫 피해는 미국에서 발생한 셈이다. 그 실상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33년 뒤의 일이다.

▲ 지난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가 실시됐다. 사진은 기념비. ⓒ미 공군


미군 포로, 원폭으로 사망

1945년 9월 초, 미국 정부에 매우 당혹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미군 포로 십 수 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헌병을 두 차례 소환해 관련 사실을 확인했으며 일부 유해를 발굴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 역사학자 피터 커즈닉이 쓴 <알려지지 않은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United States)>에 따르면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 23명이 있었다. 이중 4,5명은 원폭으로 즉사했고 나머지는 생존자들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미 군부는 이 사실을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저 일본에서 죽었다고만 통보했다. 이 사실은 30년 이상 은폐됐다. 1979년 8월 22일 <뉴욕타임스>가 기밀 해제된 전쟁부 문서를 통해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원자탄 제작 도중 과학자 사망

1945년 8월 21일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오메가 사이트에서 젊은 물리학자 한 명이 플루토늄 노심을 조립하던 도중 치명적 방사능에 노출됐다. 실수로 노심에 떨어뜨린 10킬로그램짜리 텅스텐 덩어리를 맨손으로 꺼내다가 방사능에 피폭된 것이다. 텅스텐을 그대로 놔두었다면 핵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는 수 시간 내에 이상증세를 보였고 곧 병원으로 후송됐다. 히로시마 피폭자와 똑같은 증상이었다. 그로브스 등이 프로파갠다라며 무시했던 바로 그 증상이었다. 그는 24일 동안 버티다가 9월 14일 마침내 사망했다. 과학자들은 히로시마의 업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공포의 원흉이 마침내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도 그 위력을 드러냈다"

다음 날 로스알라모스연구소는 "노동자 1명이 산업재해로 인한 화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미국 언론은 딱 한 곳이었다. 발표 엿새가 지난 9월 21일 <뉴욕타임스>가 <에이피> 통신을 인용해 "원자탄 노동자 '화상'으로 사망"이란 제목의 1단 기사로 보도했다. 노동자가 어떤 사람인지, 왜 화상을 입었고, 화상의 실제가 무엇인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희생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해리 대글리언이라는 24세의 물리학자였다. 퍼듀대의 조교였던 그는 1943년 11월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대글리언이 사망한 지 5시간 만에 그의 어머니에게 1만 달러짜리 수표를 제공했다. 법정 소송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이후 9개월 동안 대글리언의 사망 원인과 실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1946년 5월 21일, 대글리언의 이전 상사였던 루이스 슬로틴이 비슷한 상황에서 치명적 피폭을 당했다. 비키니섬 핵실험에 쓰일 원자탄을 조립하던 슬로틴은 실수로 스크루 드라이버를 노심에 떨어뜨렸다. 이 사고로 슬로틴 포함 8명이 입원했고, 전국의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슬로틴의 피폭량은 히로시마 폭심에서 1.6킬로 떨어진 곳에서의 피폭량과 같았다.

사고 3일 후 미 육군이 준비한 보도자료는 사고의 실상을 왜곡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모리슨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모든 실상을 밝히겠다고 위협하면서 사건의 실상을 은폐할 "아무런 군사적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은 "더 많은 원자탄을" 만들고 싶어 했고 "사람들이 방사능에 대한 공포를 가질 것을 우려"했다.

결국 미군과 과학자들은 슬로틴이 '핵분열 물질' 작업을 했고 "아마도" 과도한 방사능 피폭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선에서 절충했다. 9일 후(5월 30일) 슬로틴은 사망했다. 미군은 슬로틴의 행동을 미화하면서 사고 실상을 왜곡하려 했다.

'맨손으로 드라이버를 꺼내 추가 피해를 막았다'고 했고 그로브스는 '슬로틴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칭송했다. <타임>은 그를 "로스알라모스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타임>은 슬로틴이 '평화 시 핵분열에 의한 최초 희생자'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대글리언 사망의 실상을 몰랐던 탓이다. 그 정도로 미국 정부는 방사능 피폭을 실상을 은폐하려 했다.

네바다 핵실험장

1951년 1월 27일, 네바다주의 사막에서 원폭 실험이 시행됐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핵전력 증강이 본격화되기 시작할 때였다. 넓이 약 3500 평방 킬로미터의 광대한 사막에서 1963년까지 126회의 핵실험이 시행됐다. 모두 대기 중 핵실험이었다.

폭격기가 원폭을 투하하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사실상 군사 훈련이었다. 피폭 지역에는 주택을 지어놓고 그 안에 마네킹을 넣어 원자탄의 영향을 조사했다. 철창에 가둔 동물들에 대한 방사능 피폭 영향도 조사했다. 일부 목격자들은 피폭 지역에 살아 있는 사람이 묶여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그 진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피폭 지역 부근에는 가깝게는 폭심에서 2, 3킬로미터, 멀게는 10킬로미터 지점에 병사들을 대기시켜 놓았다. 이들에게는 원폭의 강렬한 섬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고글 외에는 아무런 보호 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원폭 투하 후 지상 전투를 가정한 이 훈련에 동원된 병사들을 '원자 병사(atomic soldier)'라고 불렀다. 1950년대까지는 원폭 실험이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주변 지역 주민들에게 미리 알리기도 했다.

원폭 실험은 반드시 동풍, 또는 북풍이 부는 날 시행했다. 서풍 때 시행할 경우 방사능 낙진이 인구 밀집지역인 캘리포니아 주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낙진의 대부분은 네바다 동쪽의 유타 주에 밀집됐다. 수많은 양들이 죽고 우유와 채소가 방사능에 오염됐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온 새끼 양, 다리가 3개나 5개인 기형 양들이 출산됐다. 주민들의 건강에도 심각한 위험이 발생했다. 백혈병 등 암 발병이 급증했고 신경 체계와 면역 체계 이상, 기형아 출산 등이 늘어났다.

▲ 미국 사진작가 캐롤 갤러거가 펴낸 <미국의 폭심: 비밀 핵전쟁(American Ground Zero: The Secret Nuclear War)>에 삽입된 그림. 한 번 이상 방사능 구름이 지나간 지역을 표시했다.


대기 중 핵실험, 체르노빌과 맞먹는 방사능 뿜어내

<뉴욕타임스>의 환경 전문 기자인 케이스 슈나이더는 "한 번의 (대기 중) 핵폭발은 체르노빌과 맞먹는 양의 방사능을 뿜어낸다"면서 네바다 핵실험은 "미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과학 실험"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 때 소련이 사흘간 사건을 은폐했다가 전 세계의 비판을 받았다며 "미국 핵무기 산업은 네바다 핵실험에 의한 방사능 오염을 30년간 은폐했다"고 지적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사망자는 31명이며 이후 5년간 7000명이 사망했고 70만 명이 치료를 받았다.

히로시마와 네바다 핵실험을 비교하면 폭심 부근의 대규모 사망자가 없다는 점만 다를 뿐, 방사능 피해는 똑같다. 말하자면 네바다 인근의 주민은 물론 미국 국민 전체가 12년에 걸쳐 126번, 한 달에 한 번 꼴로 체르노빌 급의 방사능 피해를 입은 셈이다.

1953년 5~6월 네바다 실험장 동쪽에서 1만4천 마리의 양 중 4500마리가 사망하면서 최초의 피해보상 소송이 제기됐다. 1955년 목장주들이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연방지법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56년 9월 시작된 이 재판에서 주민들은 패소했다. 정부가 일체의 관련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서 방사능이 인체에 해를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한 때문이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이 원자력위원회(AEC)에 대해 원자탄 실험 자료의 공개를 명령하면서 미국 내 방사능 피폭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핵실험 이후 33년 만이다. 1980년 방사능 피폭의 실상을 조사한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실행한 대기 중 핵실험의 최대 아이러니는 바로 미 국민이 미 핵무기의 유일한 희생자가 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사위원회는 특히 원자력위원회가 핵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방사능 피폭의 실상을 치밀하게 은폐했다고 결론 내렸다. AEC의 내부 메모에 따르면 연방 및 주 정부 소속 수의사들이 죽은 가축의 장기에서 치명적 방사능 피폭을 확인했으나 AEC가 발표를 막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947년 4월 17일 원자력위원회(AEC)는 오크리지연구소에 보낸 메모에서 방사능 피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인체 대상 실험, 그리고 여론에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법정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실험에 관한 문서들은 공개되지 않는 것이 좋음. 이런 실험과 관련된 문서들은 '비밀'로 분류돼야 함"

또 원자력위원회의 후신인 에너지부가 1993년부터 공개한 방사능 관련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수천 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당사자의 동의 없이 방사능 피폭 실험을 했다.

캐롤 갤러거의 <비밀 핵전쟁>

미국 정부는 수십 년간 자국민에 대한 방사능의 영향을 은폐해 왔기 때문에 그 피해 규모와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93년, 캐롤 갤러거라는 사진작가가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펴낸 <미국의 폭심: 비밀 핵전쟁(American Ground Zero: The Secret Nuclear War)>이란 책에는 피폭자들의 인간적 참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 미국 사진작가 캐롤 갤러거가 펴낸 <미국의 폭심: 비밀 핵전쟁(American Ground Zero: The Secret Nuclear War)>

갤러거는 1983년부터 유타 주에 머물면서 피폭자 60여 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원폭 실험에 동원된 병사, 그리고 방사능 낙진이 집중된 유타 주 등의 주민들이다. 갤러거는 이 책의 서문에서 방사능 피폭의 "진실은 픽션보다 더 기괴했다"고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이 책의 표지 인물로 등장한 켄 케이스라는 인물은 1954년부터 핵실험장의 '원자 카우보이(atomic cowboy)'로 일했다. 핵 실험이 끝난 직후 소와 말들을 폭심 주변으로 몰고 가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방사능 피폭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1984년 1월에 있었는데 당시 그는 말기 암이었으며 11번의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와 말도 암에 걸렸고 나도 암에 걸렸죠. 차이가 있다면 가축들은 폭심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람보다 일찍 죽었다는 점이죠"

그는 핵실험에 동원된 원자병사 2백 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인터뷰 당시까지 살아남은 병사는 4~6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5년 7월에 사망했고 부인도 직후에 사망했다.

갤러거는 방사능의 공중 이동을 비행기로 모니터했던 한 공군 대령의 말을 빌어 "미국 어디에도 방사능 안전지역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방사능에 고도로 오염된 지역이 4만 5000곳이며, 면적으로는 90만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남한 국토의 10배다. 나아가 지구상의 방사능 낙진 중 플루토늄의 양은 무려 5톤이나 된다고 한다. 플루토늄 몇 파운드면 모든 인류를 죽일 수 있다.

한편 <미국의 히로시마>를 쓴 제이 리프턴 박사는 방사능 피해 규모를 대략 다음과 같이 추산한다.

"핵무기산업 종사 노동자 50만 이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미국 내 핵실험장에 있었던 군인 25만 명, 네바다 핵실험장 인근의 민간인 수 십만 명이 심각한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방사능 피해자와 핵마피아

방사능 피폭 피해와 관련된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 판결이 나온 것은 1989년이다. 그 과정을 보면 미국 정부의 은폐 시도가 얼마나 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우선 1956년 원고 패소로 끝난 첫 배상소송의 경우. 1982년 5월, 주민들이 1980년의 의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심을 요청했다. 1982년 8월, 당시 재판을 맡았던 셔먼 크리스텐슨 판사는 재심 결정을 내린다. 56년 재판에서 정부의 고의적 은폐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재심 결정은 상급법원에서 뒤집혔다. 1983년 제10 연방항소법원은 첫 재판 당시 정부 측 증인이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으며 목장주들에게 관련 정보를 은폐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 결정을 무효화 했다. 이 결정을 내린 판사는 1962년의 한 소송에서 로스알라모스연구소를 변호했던 유명 로펌 출신이었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핵마피아, 원전마피아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1982년 9월, 두 번째 소송이 제기됐다. 남서부지역 주민 1200명이 암 발병 피해와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을 역시 솔트레이크시티 연방지법에 제기했다. 암 환자 24명의 병력을 집중 심리했는데, 이중 어린이 4명과 성인 14명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브루스 젠킨스 판사는 4개월간 증인 98명을 소환해 심리한 끝에 1984년 5월, 무려 489쪽의 판결문을 통해 "정부 주도의 핵무기 실험에 따른 방사능으로 암이 발병했다"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판결 역시 상급 법원에서 번복된다. 1987년 제10 항소법원은 "'연방 정부는 국민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 없이 정부 사업을 시행할 권리가 있다'는 연방배상법에(1946년 제정) 의해 보호 받는다"며 대기 중 핵실험에 의한 피해를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쉽게 말해 국민들의 목숨보다는 핵무기 개발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1988년 연방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심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원고 패소가 확정된 것이다.

이후 10개 주에서 질병 및 환경 파괴에 대한 집단소송이 이어졌고 1989년 최초의 승소 판결이 나왔다. 오하이오 주의 한 주민에게 7800만 달러의 배상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우라늄처리공장이 촉발한 방사능 오염으로 입은 재산상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의 결과였다.

피폭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제도화 된 것은 1990년 부시 행정부에서 '방사능피폭보상법(Radiation Exposure Compensation Act)'이 제정된 이후다. 히로시마 후 45년 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방사능 피폭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선 이 법은 13종류의 암만을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유방암은 미국 여성 6, 7명 중 한 명꼴로 발병하지만 방사능 피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독립적 전문가들은 모든 암에 대해 방사능 피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최초의 배상 판결이 인명 피해가 아닌 재산 피해에 적용됐다는 것도 수상쩍다. 즉 핵실험이 연방 정부의 권리라는 이유로 인명 피해에 대한 배상은 거부하면서도 재산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준 것이다.

정부와 과학자들의 은폐 공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내 방사능 피폭의 전모와 실상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속사정을 존 고프먼이라는 한 독립적 과학자의 행로를 통해 알 수 있다.

고프먼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생화학자로 방사능의 인체 영향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다. 그는 세계 최초로 플루토늄 수 밀리그램을 추출해냈고, 노벨상 수상자인 글렌 시보그와 함께 우라늄 동위원소인 우라늄 233을 발견했다. 그는 1963년 시보그의 초빙으로 리버모어연구소 생화학팀의 부책임자가 된다.

그의 불행은 1969년 말의 학 학회에서 시작된다. 이 학회에서 그는 미국 과학계가 방사능에 의한 발암 위험성을 실제보다 20분의 1로 낮게 추정하고 있다면서 기존의 방사능 피폭 허용치를 유지할 경우 매년 1만6천-3만2천 명의 추가 암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원자력위원회는 "기존 허용치보다 100배 이상 피폭돼도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맞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청문회를 열어 그를 맹공격했다. 제도권 과학자들을 앞세운 것이다. 마침내 1972년 그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강제로 중단시키면서 그를 연구소에서 내쫓았다.

미국 정부와 과학계는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을 어떻게 은폐했는가? 고프먼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려준다.

"1962년 말 유타주의 우유에서 갑자기 방사성 요드가 허용치의 3배 이상 검출됐다.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은 방사성 요드의 허용 기준치를 3배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연구비의 대부분(80-90%)을 정부 자금에 의존하는 미국 과학계의 실상을 다음과 폭로했다.

"과학자들은 자기에게 밥을 주는 손을 절대로 물지 않죠. 자신의 직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자신의 연구가 계속될 수 있게 하는 의견만 제시할 뿐입니다. 간단하죠. 내부 고발의 역사는 공범자 대열에서 이탈하는 순간, 흠씬 두들겨 맞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방사능 피폭에 관한 한 국방부, 에너지부 등 미국 정부의 자료를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핵마피아(nuclear establishment)는 방사능 피폭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죠. 소련이나 프랑스, 영국도 마찬가집니다...그들은 지구의 악당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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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