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쟁과 여론 조작의 역사
미국의 전쟁과 여론 조작의 역사
[전쟁 국가 미국]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미국의 전설적 독립 언론인 이지 스톤(I. F. Stone : 1907~1989년)은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관리들이 거짓을 유포하면서 자신들도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런 나라에는 곧 재앙이 닥친다"는 말을 남겼다.

1922년, 만 열네 살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스톤은 이후 60여 년간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명제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정부의 거짓말을 까밝히는 것이야말로 언론인 본연의 임무라는 게 그의 언론 철학이었다.

그는 또 트루먼 정부 때인 1952년 "국내외적으로 무력에 의한 억압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졌다.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내 마음대로 한다'는 오만한 자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군사력을 앞세운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스톤의 지적이 정곡을 찌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련과의 핵 군비 경쟁을 비롯해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 대부분이 불필요한 전쟁, 또는 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정보 은폐와 왜곡, 조작 등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은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들을 수행하면서 주택, 교육, 의료 등 인간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들을 탕진했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도 파괴됐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경제의 한계를,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파탄을 보여주는 사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극단적 테러와 난민의 증가, 강대국 간 군사 대치의 심화 등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대중동지역은 17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쟁으로 난민이 사상 최대로 늘어났고,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나토와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북핵을 빌미로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2차 대전 후 미국 정부의 거짓말에 의해 촉발되고 수행된 수많은 전쟁들이다. 베트남전쟁과 1,2차 이라크전쟁이 대표적이다. 이들 전쟁은 미국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전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정보 은폐와 왜곡, 조작 등을 통해 여론을 조작했다.

제임스 코난트가 기획하고 헨리 스팀슨의 이름으로 발표된 <하퍼스>의 '원자탄 사용 결정' 기사는 스톤이 말한 '정부의 거짓말' 중 선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원자탄을 사용 가능한 전쟁 무기로 대중과 적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정부의 거짓말이 완전한 허위일 경우는 거의 없다. 진실의 외양을 갖춘다. 진실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전체적 진실인 것처럼 말한다. 핵심적 사실을 은폐하거나, 아주 낮은 가능성을 엄청난 위협인 것처럼 과장하기도 한다.

정부는 이를 국민 설득, 또는 여론 형성이란 말로 미화한다. 반면 비판세력은 여론 조작, 또는 프로파갠다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비판자들을 오히려 거짓 선동가로 규정한다. 코난트가 핵의 진실을 규명하려 한 작가 존 허시나 레오 실라르드 등 핵과학자들의 노력을 "역사의 왜곡"으로 규정한 것처럼, 정부와 비판 세력 간에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놓고 치열한 담론 투쟁이 벌어져 왔다.

그 결과는 대체로 정부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따라 미국은 끝없는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간전쟁 이후 지금까지 17년째 대중동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비록 저강도 전쟁이긴 하지만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전쟁이다. 이른바 '긴 전쟁(Long War)'이다. 미군 지휘관들 스스로가 50년 또는 100년,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면서 일방적 군사주의가 문제의 근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미국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미국을 끝없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어 왔다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일방적 군사주의를 맹신한다. '전쟁 국가 미국'이 변화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 지난 2002년 1월 29일(현지 시각)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가진 시정연설에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며 "악이 축"(Axis of Evil)이라고 규정했다.이후 1년이 지난 2003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정보 은폐에 의한 핵무기 정당화

스팀슨은 원자탄 사용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은폐했다. 첫째 소련의 대일 참전, 그리고 전후 미소 관계에 대한 고려가 원자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둘째 천황제 유지 보장을 통해 일본의 조속한 항복을 받아내려는 조셉 그루 국무장관 대행의 노력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우선 후자의 경우. 그루 국무장관 대행은 천황제 유지를 보장해준다면 일본이 항복에 응할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트루먼에게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것을 촉구했다. 1945년 1월 국무장관 대행을 맡은 그루는 1932년부터 진주만 기습 때까지 9년 이상 일본 대사를 역임한 미국 최고의 일본통이다.

그루의 오랜 친구인 스팀슨도 당시 그의 입장에 동조했다. 당초 스팀슨은 <하퍼스> 기사에 '천황제 유지' 논란을 다뤘으나 논점을 흐린다는 코난트의 주장에 따라 삭제했다.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원자탄 사용의 진짜 목표는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였다. 예컨대 트루먼은 45년 5월 15일 자 자신의 일기에 원자탄이라는 신무기가 향후 소련과의 외교 대결에서 '마스터 카드'가 될 수 있다고 적었다. 이른바 핵을 앞세운 강압 외교(nuclear diplomacy)를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천황제 유지' 논란이 스팀슨의 초고에 수록된 것과 달리 원자탄과 소련과의 연관성은 애초부터 언급되지 않았다. 원자탄이 소련을 겨냥한 무력 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스팀슨도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판단했던 것이다. 미국의 도덕성과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퍼스> 기사에서 스팀슨은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정부의 공식 입장을 담았다. 반면 1948년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도 원자탄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부의 검열 때문에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스팀슨 기사가 발표된 직후 그루는 스팀슨에 편지를 보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스팀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만일 트루먼이 천황의 지위를 보다 일찍 보장해 주었다면 "원자탄은 전혀 사용될 일이 없었고...세계 모두가 승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맥조지 번디에 따르면 당시 스팀슨은 "그루가 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스팀슨과 번디는 당시 마무리 단계에 있었던 스팀슨의 자서전에 그루의 '천황제 유지를 통한 조기 항복' 노력을 새로 써넣었다. 나아가 스팀슨은 그루의 시도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그 자신도 트루먼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었다. 심지어 "언젠가 역사는 미국이 무조건 항복을 고집함으로써 전쟁을 오래가게 했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쓰기까지 했다.

자서전에서는 소련과의 연관성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45년 4월부터 "원자력에 관한 미국 정책의 핵심적 문제들이 소련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음"이 분명해졌으며,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소식을 접하고 미국 지도자들은 드러내놓고 만족감을 표했다는 것, 그 이유는 원자탄이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서방이 간절하게 원하는 군사적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나 원자탄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딱 여기서 그친다. 그 이유는 미 국무부의 사실상의 검열 때문이었다. 당초 자서전 원고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9월 11일 자 스팀슨의 메모가 포함돼 있었다. 소련과의 치명적 핵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해 소련과 직접 솔직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건의였다.

이와 함께 스팀슨은 번스 장관의 국무부가 "원자탄을 일종의 외교적 무기로 간주"하고 일부 국무부 인사들은 "원자탄을 비장의 외교 무기로 활용하려 하며 (중략) 미국 정치인들은 원자탄을 엉덩이 밑에 깔아놓고 소련 협박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스팀슨과 번디는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이 부분의 초고를 조지 마샬 국무장관에게 보내 검토를 요청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파악한 마샬은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단장을 맡고 있던 조지 케넌에게 자문을 구하게 했다. 초고를 읽은 케넌은 격노했고 스팀슨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만일 이러한 발언들이 스팀슨 씨의 공식 전기에 수록된다면 상당수 독자들은 원자탄 투하가 소련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정됐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결론 내릴 것으로 심히 우려됩니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자주 우리의 '핵 외교'를 얘기해 왔으며, 미국이 핵폭탄으로 세계 전체를 위협하려 한다고 비난해 왔습니다"

(역사학자 바튼 번스타인에 따르면 케난 자신도 46년 말 미국의 원자력 국제 관리 계획을 소련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암묵적 핵 위협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즉 미국 정부는 실제로는 핵 위협을 가하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위선적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이 내용은 스팀슨의 자서전에 실리지 못했다. 역사학자 바튼 번스타인은 만일 이 내용이 자서전에 수록됐다면 미국의 원폭 결정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원자탄 사용의 진짜 목적이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라는 관점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 : 히로시마와 포츠담>을 출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스팀슨 기사를 기획한 코난트의 의도는 단순히 '히로시마'라는 과거의 원자탄 사용을 정당화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미래에도 언제든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를 미국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특히 소련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난트는 스팀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자탄 사용에 반대하는 프로파갠다가 저지되지 않고 방치된다면, 원자탄 개발로 확보된 미 군사력의 강점이 약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원자력 국제 통제에 관한 협상을 타결시킬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다량의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고 다음 전쟁에서 주저 없이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소련에 인식시킨다면 소련은 결국 원자력 통제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이라는 미국의 제안에 응할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겉으로는 원자력에 관한 국제 통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련에 대한 무력 위협을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 정부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인정하거나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의도와 결의에 대해 소련에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셈이라고 그는 우려했다.

미국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히로시마를 타격했으며, 앞으로도 원자탄을 정당한 전쟁 무기로 사용할 것임을 적들에게 각인시킨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수 개월 후 코난트는 미군 최고 교육기관인 국방대학에서 군 장성들과의 비밀회동을 갖고 미군 고위의 "공식 소식통"이 미래의 전쟁에서 핵무기가 "군사적으로 필요할 경우" 주저 없이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공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스팀슨의 기사가 이러한 미군 방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서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핵무기는 정당화됐고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핵심적 수단이 될 터였다.

▲ 미국은 히로시마가 안전하다고 했지만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는 사실상 폐허나 다름 없었다. 사진은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위키피디아


일방적 군사주의의 실패와 지속


2차 대전 후 미국의 대외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군사주의(militarism)'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미국의 의지란 세계를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지도부의 이러한 목표는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막대한 전쟁 특수로 미국 경제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원자탄이라는 절대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으로 독일, 일본 등 적대국은 물론이고 영국, 소련 등 동맹국의 경제도 폐허가 된 반면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막강한 생산력을 확보했다. 미국 자체는 물론 영국, 소련 등의 전쟁 물자 대부분, 심지어 독일의 전쟁 물자 일부까지도 미국이 생산한 탓이다.

게다가 미국은 독립 이후 단 한 차례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지 않은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멕시코전쟁(1846~48년)으로 미국 영토를 3분의 1 이상 늘렸고, 스페인전쟁(1898년)으로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 괌 등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를 획득했으며, 1차 대전을 통해서는 세계 최대의 채권 국가가 됐다. 여기에 핵무기까지 독점했으니 세계 패권을 향한 미국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군사력의 우위가 곧 정치경제적 지배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다. 10월에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됐다. 국민당 정권의 중국을 아시아 및 세계 경영의 파트너로 삼으려 했던 미국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인 서유럽의 경제 회복이 지지부진했다. 이른바 '달러 갭(dollar gap)'이다. 미국은 과잉 생산된 미국 상품을 해외에 팔아야 했다. 당시에는 서유럽이 가장 유망한 소비시장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에는 미국 상품을 살 달러가 크게 부족했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서유럽은 살길을 찾기 위해 제3의 길을 모색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거리를 둔 사회주의, 또는 중립주의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지도부에게 이는 미국의 국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서유럽이 독자 노선을 걷는다면 미국의 과잉 생산력을 해결할 방도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책으로 나온 것이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1950년 4월에 작성된 이 극비문서는 군사력의 대대적인 증강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연간 국방비를 기존의 3~4배로 대폭 늘리는 한편 병력 규모도 2~3배로 늘려 유럽에 배치하자는 것이었다.

서유럽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인 마샬 플랜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대대적 군사 원조로 완성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서유럽의 독자 노선을 가로막는다는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국민이 전시도 아닌 평시에 대대적 국방비 증액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더 내며, 자국도 아닌 타국(서유럽) 방위를 위해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는가.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군부와 학계, 교육계 등의 저명인사들을 동원해 결국은 NSC-68을 관철해 낸다.

있지도 않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한 것이 주효했다. 특히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미국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일성 주도의 통일을 위한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 지시에 의한 세계 공산혁명의 전주곡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대대적 재무장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이로써 냉전은 미‧소 간의 정치외교적 대결에서 군사적 대결로 전환된다. 이른바 냉전의 군사화다. 1953년이 되면 미국의 군사력은 타국의 어떠한 추종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 우위를 누린다. 당시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군사력은 라이벌 소련보다 최소 9배 이상 강력했다고 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다.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천명한 '전 부문에 걸친 군사력의 압도적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는 이미 이때 시작된 것이다.

소련은 치명적 군비 경쟁에 돌입했고 결국은 스스로 붕괴한다. 한편 미국은 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군사 개입, 즉 일방적 군사주의에 돌입한다. 베트남전쟁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하면서 끝날 수 있었다. 뒤이어 열린 제네바회의에서 합의한 2년 내 남북 베트남의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말이다. 이 합의를 파기한 것은 미국이다. 총선이 실시된다면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통일 베트남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아이젠하워 정부는 합의 이행을 거부했고, 미국에 거주했던 가톨릭 신자 응오딘지엠을 앞세워 남베트남에 반공 정권을 세웠다.

그 결과는 20여 년에 걸친 처참한 전쟁이다. 핵무기 등 압도적 화력의 미국은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진 농민 게릴라들의 항쟁을 꺾지 못했다.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반대도 한몫을 했다. 1968년 테트(구정대공세)의 여파로 그해 3월 존슨 대통령이 재선 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베트남전쟁의 승패는 결정 났다. 압도적 군사력의 미국이 베트남 인민의 강인한 독립 의지에 패배한 것이다.

▲ 1971년 4월 워싱턴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 시위. ⓒ위키미디어커먼스


베트남전쟁은 압도적 군사력만으로는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즉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임을 드러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2차 대전 후 지속돼온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를 포기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969년 집권한 닉슨은 키신저와 함께 데탕트를 추구했다.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중국과는 관계를 정상화하며, 소련과는 핵 군비통제 협상을 시작하는 등 현실주의 외교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닉슨-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는 1976년을 고비로 파탄에 직면한다.

우선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1974년 8월 사임한다. 1975년에는 훗날 네오콘의 수장으로 활약하는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포드 행정부의 핵심 요직에 진출한다(럼스펠드는 백악관 비서실장, 체니는 국방장관). 이들은 키신저의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을 박탈하는 한편, 중앙정보국(CIA)의 소련 군사력 평가를 '미국과 대등'에서 '미국보다 우위'로 바꿔치기 한다.

원래 소련 군사력 평가는 CIA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CIA의 당초 군사력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럼스펠드 등은 외부 전문가들로 별도의 팀(Team B)을 구성해 소련의 군사력 위협을 과장했다.

외부 전문가가 CIA 고유 기능인 군사력 평가를 맡는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윌리엄 콜비는 이에 저항하다 결국은 쫓겨났고 후임 조지 H. W. 부시가 이를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군사력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됐다. 이와 함께 소련과의 군비통제 협상(SALT 2)도 무산된다.

그리고 1981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소련과의 군비 경쟁은 다시 격화된다. 특히 이때부터 미국이 전력을 기울인 것은 전략방위구상(SDI)으로 알려진 미사일 방어망의 구축이다. 미사일 방어망은 72년 요격미사일금지조약(ABM) 위반이다. 이 때문에 클린턴 정부 때까지 미사일 방어망 구축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지만 2002년 부시 행정부가 ABM조약을 파기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사실 미사일 방어망은 1960년대 말부터 미 군산복합체의 숙원 사업이었다. 이것만큼 오랫동안 커다란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네오콘 등 전쟁 세력이 소련과의 군비 통제 협상에 반대하고 레이건 정부에서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선 것도 미국의 안보 때문이 아니라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부합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1년 퇴임사에서 경고한 군산복합체의 위험, 군산복합체에 의한 미국 경제의 군사화는 1970년대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89년 냉전의 종식은 미국이 군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2의 기회였다. 실제로 미 국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냉전 종식에 따른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91년 1월 미군이 이라크군을 공격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미 국민은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쟁에서의 승리에 환호했고, 군부는 자신감을 되찾았으며, 군산복합체는 그동안의 재고 무기들을 처리하는 한편 미제 무기의 대외 판매 기회를 얻었다. 군사주의가 다시 득세한 것이다.

1차 이라크전쟁(걸프 전쟁)은 과연 불가피한 전쟁이었을까?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이 선택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1979년부터 10년간 은밀히 지원한 1차 아프간전쟁과 함께 현재 대중동지역의 내전과 혼란을 초래한 씨앗이었다. 결국 미국은 결코 군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전쟁들 배후에는 전쟁을 가능하게 한 미국 제도권의 치밀한 여론 조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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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