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명월(淸風明月) 고을에서 만난 깊은 가을
청풍명월(淸風明月) 고을에서 만난 깊은 가을
2017년 10월 고을학교는 <제천고을>
2017.09.26 02:24:53
청풍명월(淸風明月) 고을에서 만난 깊은 가을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8강은 풍광 수려한 물줄기에 기댄 정자가 많아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을로 유명한 제천에 들려 남한강변에 드리운 깊은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즐겨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호수 위의 작은 민속촌 청풍문화재단지ⓒ제천시


고을학교 제48강은 2017년 10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8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제천IC-봉양읍(배론성지/자양영당/의병전시관)-제천시(의림지/영호정/경호루/장락동칠층모전석탑/제천향교/교동벽화마을)-점심식사 겸 뒤풀이-청풍면(문화재단지/한벽루/팔영루/금남루/금병헌/응청각/청풍향교)-한수면(황강영당·수암사/덕주산성북문/덕주산성남문)의 순입니다.

▲<제천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8강 답사지인 <제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저수지[堤]와 물줄기[川]가 많은 고을

제천(堤川)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사방이 연봉(連峯)으로 형성된 분지형(盆地形) 구릉지대로, 중앙에는 남한강이 흘러 곳곳에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평야의 대부분은 수몰되었고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저수지[堤]와 여러 물줄기[川]가 있는 고을입니다.

산줄기는 진산(鎭山)인 용두산(龍頭山)을 중심으로 좌청룡(左靑龍)은 송학산을 뒤로 감싸고 뱃재에서 다시 동남으로 솟아 조릿재, 오작산, 부곡산을 지나 강원도로 이어지고, 우백호(右白虎)는 백운산, 구륵산, 구학산, 박달재를 휘어 감고, 마침내 청룡과 백호에서 떨쳐 나와 내룡(內龍)과 외룡(外龍)이 힘을 다하여 의림지를 싸안고 있는 형국(形局)입니다. 의림지는 제천의 모든 산줄기가 정기를 듬뿍 쏟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남산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자주 화재가 발생한다고 하며, 1766년(영조 42), 1809년(순조 9), 1907년(순종 1), 1941년, 1962년에 실제로 대화재가 발생했다고 전하는데, 이를 비보하기 위해 남산의 북쪽 기슭에 10여 가마의 소금을 묻고 농악대를 동원하여 줄다리기를 했었다고 합니다.

물줄기는 오대산(五臺山 1,539m)에서 발원한 남한강(南漢江)이 충북으로 흘러들어 서남쪽으로 흐르다 단양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바꾸고, 한수면 황강리에서 제천천(堤川川)과 합쳐져 제천시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충주 달천(達川)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경기도 여주로 흘러갑니다.

봉양읍을 흐르는 용암천(龍岩川)은 자작동의 갑산과 가창산 사이에서 발원한 장평천(長平川)과 합류하여 봉양읍 주포리에서 주포천(周浦川)으로 흘러 들어가고, 금성면 동막리 북쪽에서 발원한 고교천(高橋川)은 구룡천(九龍川)과 합류하여 각각 청풍호로 흘러듭니다.

그리고 제천 지역에는 관개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와 소류지가 많은 편으로 의림지(義林池)를 비롯해 백마저수지, 월림저수지, 신곡저수지, 오미저수지, 백곡제, 안말제, 광암제, 장치미못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의림지는 용두산(874m)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였으나 고려 성종 대 제천이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이름이 바뀌었는데 제천의 옛 이름인 ‘의(義)’자에 저수지의 이름인 ‘임지’의 ‘임(林)’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의 하나이며 호반 둘레 약 1.8㎞, 면적 15만 1470㎡, 저수량 661만 1891㎡, 수심 8~13m의 규모입니다.

의림지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김제 벽골제 등과 같이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둘째는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대의 악성 우륵(于勒)이 축조했다는 설로서 이는 의림지에 우륵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셋째는 조선시대에 박의림(朴義林)과 정인지(鄭麟趾) 등의 인물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이곳에 예전에는 진섭헌, 임소정, 호월정, 청폭정 등과 같은 정자와 누각과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우륵대(연자암)이 있어, 예로부터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라 예술가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격조 높은 문화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지금은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만 남아 있습니다.

제천 지역은 남한강 줄기를 따라 발달한 동굴유적에서 보듯이 구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삶을 영위해 온 곳으로 청동기시대의 수많은 고인돌과 함께 인골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인 주목을 받은 곳입니다.


▲삼한시대의 유물 의림지ⓒ제천시


지정학적 요충지로 성터와 설화 가득

삼국시대는 접경지역이면서 주변의 철산지와 물류의 핵심인 남한강 물길을 확보하려는 3국의 이해가 서로 부딪쳤기 때문에 이곳에서 잦은 전쟁이 있었고 그 흔적을 알려주는 많은 옛 성터와 설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천의 최초 행정구역 이름은 고구려 때의 내토(奈吐) 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며, 이후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내제군(奈堤郡)으로 바뀌었고, 관할에 청풍현 등을 두었습니다.

고려 전기에는 제주(堤州)로 이름이 바뀌었고 성종(成宗) 때는 ‘의천(義泉)’ 또는 ‘의원(義原)’이라는 별호를 받았으며 중원도(中原道) 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는데, 1018년(현종 9)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제주는 원주목에, 청풍은 충주목으로 나누어 속했습니다.

12세기 이후 제주와 청풍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이전까지는 지방관을 따로 파견하지 않고 지역의 유력자인 향리가 충주목사나 지원주군사(知原州郡事)의 일정한 통제를 받으면서 조세와 부역, 소송 등 행정업무를 맡았으며, 청풍현은 뒤에 이 지역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충숙왕(忠肅王)의 왕사(王師)가 되자 청풍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제천현과 청풍군은 나란히 충청도의 50여 고을에 속하게 되었고, 이웃한 단양, 영춘과 함께 사군(四郡) 또는 내사군(內四郡)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처럼 제천과 청풍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고을이면서도 주현(主縣)과 영현(領縣)의 관계로 얽히기도 하고, 별개의 행정구역에 따로 속하기도 하면서 역사를 이어 왔으며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지만 5소경 중 북원경(北原京)과 중원경(中原京)에 이웃하였던 만큼 고급문화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종(顯宗) 즉위년 왕비의 본관지라는 이유로 제천현보다도 작은 고을이던 청풍군이 밀양, 남원 같은 큰 고을과 동급인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이로써 청풍은 명읍(名邑)으로 여겨져 명사들이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고급문화가 전해졌습니다.

고급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대체로 동성(同姓) 마을을 이루고 조상들의 불천위묘(不遷位廟)와 서원(書院) 등을 내세우며 그것을 통하여 결속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청풍에 은거하면서 제천 지역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강서원, 병산서원 등과 조선 후기에 세워진 창주정사, 자양영당이 있습니다.

재지사족의 대표적인 예로는 청풍김씨는 김식(金湜), 김육(金堉) 등을 배향한 봉강서원(鳳岡書院), 안동권씨는 권상하를 배향한 사액서원인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일정씨는 정익하(鄭益河)의 불천위를 모셨고. 진주강씨와 의흥박씨도 강유(姜裕)를 배향한 남당서원(南塘書院), 박수검(朴守儉)을 배향한 임호사(林湖祠)를 중심으로 가문의 위상을 공인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천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항쟁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호좌의진(湖左義陣)의 기치를 내건 의병부대가 단발령 이후부터 조선이 망한 이후까지 활동하면서 반외세 투쟁을 전개했으며, 유인석(柳麟錫)과 이강년(李康秊) 같은 유명한 의병 지도자가 활동한 중심 무대였습니다.

제천 지역은 한강 상류의 교통로 확보와 남북으로의 진출에 사활을 걸었던 삼국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경계지역으로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이러한 성곽을 근거로 하여 고려시대에는 거란과 몽골,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역사적 현장이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전과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천 지역은 원래 마한에 속했으며 처음으로 장악한 것은 백제였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성곽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백제는 1세기 중엽 한강을 거슬러 올라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특히 다루왕은 신라와 10여 년에 걸쳐 공방전을 거듭했는데 이 시기 제천 지역에 관방시설이 축조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천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공방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축성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백제 고이왕은 255년 9월 괴곡(槐谷)에서 신라군을 물리쳤고,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의 봉산성(峰山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278년에는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에 전하는데, 괴곡성과 봉산성은 지금의 청풍과 단양 지역으로 비정됩니다.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이 한강 상류의 단양, 영춘 지역까지 진출하고 이어 장수왕이 계립령과 죽령을 넘어 경북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천은 삼국의 경계지역이 되었습니다. 551년 나제동맹 연합군에게 제천 지역을 상실한 고구려는 재탈환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출전한 영양왕 대의 온달(溫達)의 기록과 보장왕 대 김춘추(金春秋)를 억류하면서 “마목현(계립령)과 죽령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던 기록에서 제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기 위해 문무왕 13년 8월에 청풍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는데,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성장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견고한 성곽의 축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는 매우 발달된 축성술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가 되면서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는 양상이 두드러졌고, 산성은 대규모의 대피용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몽골의 6차 침입 때 적군을 물리쳤던 제천 덕주산성의 예처럼 이 시기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면서 산성은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벽의 높이가 낮아지고 성벽의 너비도 좁아지며 축성도 규칙성이 흐트러진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천 지역에는 대표적인 평지 토성인 청풍토성을 비롯하여 성산성, 작성산성, 대덕산성, 황석리산성, 망월산성, 덕주산성, 감암산성, 제비랑산성, 와룡산성, 견제산성, 저산성, 가은암산성, 비봉산 보루 등 많은 산성과 보루가 남아 있습니다.

망월산성은 물태리에 있는 망월산(373m) 정상을 돌로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 둘레는 495m이며 '사열이산성' 또는 '성열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사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래 청풍은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는데, 신라에 귀속되면서 757년(경덕왕 16)에 청풍현으로 고쳐져서 내제군으로 개칭한 제천의 영현이라 한 것으로 보아 사열이현 시대에 이 성이 쌓아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 성벽은 완전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습니다.

덕주산성은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1256년(고려 고종 43)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하며,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로서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둘레가 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월악루), 동문(덕주루), 북문(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있고 내외 5겹의 성벽은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봉수는 오현봉수와 단령봉수가 확인되며, 이중 오현봉수만이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오현봉수가 제2봉수로의 직봉 노선에 속했던 것에 비해 단령봉수의 경우 간봉 내지는 일시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오현봉수는 1894년 봉화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현봉수와 단령봉수는 등은 부산 다대포진의 응봉을 출발하여 단양을 거쳐 오는 신호를 받아 충주로 연결되는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청풍의 남쪽 오현(吾峴)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단양의 소이산, 서쪽으로는 충주의 오성(梧城)과 닿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육신 원호의 충의가 서린 관란정ⓒ제천시


찬란한 중원문화 이루었던 곳

청풍(淸風)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선사시대 문화의 중심지로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 쟁탈지로 찬란한 중원문화를 이루었던 곳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중심지로 수운을 이용한 상업과 문물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부터 시작된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제천시 청풍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 61개 마을이 수몰되자 이곳에 있던 각종 문화재들을 한 곳에 모아 ‘청풍문화재단지’를 조성했는데, 단지 내에는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 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 점이 원형대로 이전 복원되어 있습니다.

제천향교는 1389년(공양왕 1)에 창건되었고 1590년(선조 23)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퇴폐되었으며, 그 뒤 1907년 의병장 이강년이 왜군과 교전 중 소진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6현, 동국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청풍향교는 고려 충숙왕 때 창건하는데, 원래 물태리에 있던 것을 1779년(정조 3)에 교리로 옮겼다가 충주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으며,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등이 남아있으며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응청각(凝淸閣)은 관아(官衙)의 누각 건물로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청풍현 객사(客舍) 누각인 한벽루 옆에 나란히 세워졌던 2층 누각이었는데,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습니다.

금병헌(錦屛軒)은 동헌으로 명월정이라고도 부르는데 1681년(숙종 7)에 처음 지었고, 1726년(영조 2)에 다시 옮겨 짓고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으며, 1900년(광무 4)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충북은 예로부터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으로 북부지역의 남한강과 남부지역의 금강이 흘러 경관이 수려한 곳이 많아 강변에는 많은 누정이 지어졌습니다. 특히 제천 지역의 누정은 풍화루, 의림정, 홍류정, 영호정, 의천루, 군자루, 팔영루, 한벽루, 금남루, 응청각, 명월정, 청음정, 겸산정, 창하정, 현도관, 청풍관, 청풍선부, 수연재 등이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대표적 누정은 한벽루,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금병헌, 경호루, 영호정, 탁사정, 송석정, 관란정 등이며 한벽루,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은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있고 경호루와 영호정은 의림지에 있습니다.

한벽루(寒碧樓)는 1317년(고려 충숙왕 4)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가 되어 청풍현이 군으로 높아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입니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의 편액(扁額)과 하륜(河崙)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로,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합니다.

관란정(觀瀾亭)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이 되어 영월에서 죽자,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었던 원호가 단종을 그리면서 서강(西江)변에 단을 세우고 조석으로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하는데, 원호가 죽은 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원호의 충의를 기리고자 1845년(헌종 11)에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에 따라 '관란정'이라 하였습니다.


팔영루(八詠樓)는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누문답게 홍예를 쌓은 높은 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1702년(숙종 28)에 부사 이기홍(李箕洪)이 남덕문(覽德門)이라고 한 그 터에 1870년(고종 7)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중수하였으며, 고종 때 부사 민치상(閔致庠)의 청풍팔경을 읊은 팔영시로 말미암아 팔영루라 하였습니다.

금남루(錦南樓)는 1825년(순조 25)에 부사 조길원(趙吉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1870년(고종 7)에 고쳐지었고 1985년에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겼으며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라는 현판은 건물을 세울 당시에 부사 조길원이 썼다고 합니다. 도호부는 조선시대 특별행정구역으로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관향이 청풍이라서 1660년 도호부로 승격되었습니다.

황강영당(黃江影堂)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와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권욱(權昱)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당이고, 수암사(遂菴祠)는 수암 권상하를 모신 사당입니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이며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스승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대보단을 세웠으며, 그 뒤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유중교(柳重敎)가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는데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고쳐 세운 곳입니다. 특히 1895년(고종 32)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이소응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1907년(순종 1)에 화서학파(華西學派) 이항로(李恒老)가 소정(所定)하고 유중교(柳重敎), 김평묵(金平默)이 함께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인 <화동강목(華東綱目)>의 판목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화동강목>의 완전한 서명은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으로 940년(태조 23)부터 1367년(공민왕 16)까지 480년간의 <송사(宋史)>, <원사(元史)>, <고려사(高麗史)>를 강목체(綱目體)로 서술한 역사서입니다.

 

▲장락동에 서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칠층모전석탑ⓒ제천시


배론성지는 1801년(순조 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천주교의 성지입니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서 붙여진 것이며, 유적으로는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이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낼 '백서'를 썼던 토굴과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 조선 천주교 사상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습니다.

장락동에 남아 있는 칠층모전석탑은 탑이 서 있던 절터가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2003년부터 실시한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장락사는 삼국시대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세 번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이라고도 부르며,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만드는 형식이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장갑,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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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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