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수에 도전하는 공영민 박사
고흥군수에 도전하는 공영민 박사
머슴에서 이사관까지 달려온 성공의 길
2017.09.29 16:22:48
고흥군수에 도전하는 공영민 박사

고흥군 풍양면 상림마을에서 태어난 공영민(63) 박사는 가난한 흙수저 출신에서 IMF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공헌했던 재정관리자 및 예산정책가를 거쳐 관광주도형 행정을 펼쳐 제주도 관광산업을 혁신시킨 치밀한 행정전문가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도전적인 삶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가 겪어온 IMF극복기, 제주 힐링관광의 성공모델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달려온 인물이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삼포세대’(三抛世代)를 넘어 ‘칠포세대’까지 등장하는 최근 세태에 그의 좌절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성공적인 삶에서도 늘 자신을 낮추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갑질’ 하지 않고 오히려 존경받아온 인물이다.

고흥문화원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 보면 공영민 박사의 고향인 상림마을은 임진난 당시 경남 하동군 악양에서 피난 와서 입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림과 하림마을에 주로 거주해온 공씨 집안은 공자의 후손 집안답게 공자를 모신 고흥향교의 공윤필 전교를 배출하고 공화연 전 구례군수를 비롯해 주로 행정, 교육분야에서 성공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공 박사는 1954년 고흥군 풍양면 상림마을에서 아버지 공대봉과 어머니 정동심 사이에서 6남매(4남2녀) 중 세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사회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은 고위공직자 출신이다.

공 박사는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풍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흥중학교를 합격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집안에 농사라고 해봐야 산골짜기 천수답 다섯마지기 논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된 수확을 얻기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제삿날이나 명절이 아니면 쌀밥 구경도 힘든 처지에서 셋째인 그에게 정상적인 중학교 진학은 머나먼 꿈이었다.

대신 학비가 전혀 들지 않은 비인가 학교인 고흥성중학교(성중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집안일을 도우며 10리가 넘는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일찍 농사를 체계적으로 배우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고흥읍 등암의 친척집 머슴살이로 들어갔다.

담배냄새 찌든 머슴방에서 첫날밤을 뜬눈으로 날을 샜다. 다음날 아침 논을 갈기 위해 쟁기를 지고 나가다가 멋진 교복을 차려입고 고흥농고와 여상고로 통학하는 동창들을 만났다.

그 순간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서러웠지만, 그는 반드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저 친구들 보다 더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그날 과로한 탓에 저녁에 코피가 터지면서 코와 입으로 흐르자, 놀란 집주인이 다음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다시 공부할 기회를 찾아보기 위해 형이 취직해 있던 경남 마산으로 향했지만, 형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려운 처지라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어렵게 형 친구의 도움으로 들어간 곳이 마산의 중심가인 창동 태양극장 껌팔이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객석을 돌며 좌판에 껌, 초코렛, 음료수 등을 팔고 영화가 끝나면 극장청소를 도맡아 했다.

밤 12시가 넘어 청소까지 끝나는 힘든 나날이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돈을 벌어 저축하기 시작했다. 먹는 것을 아끼기 위해 하루 세끼는 40원짜리 멸치국수 한 그릇으로 때웠다.

그렇게 배고픔을 참으며 서너달 지나니 빈혈증세가 나타났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어느날 리어카에 쓰레기를 싣고 하치장까지 버리고 돌아오다가 그냥 유리가게 유리제품을 깨뜨리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날 형 자취방에 들어와 잠을 자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형의 걱정과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을 거들다가 동네 선배의 소개로 읍내 삼성상회 서기로 취직했다. 마침 주산2단 자격증이 있어 취업이 가능했다.

여름에는 마늘, 겨울에는 김을 위탁 판매하는 곳으로 물건을 트럭에서 내리는 것은 기본이고, 물품대금 지급과 수금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못했지만, 처음 봉급을 받는 월급쟁이가 되었고, 위탁자와 상인들을 상대하면서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낼 무렵 철도청 기능직 선발공고가 신문에 나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몇 가지 과목들을 준비해 마침내 합격했다.

그의 첫 근무지는 강원도 남춘천역이었다. 얼마 후 1년여 만에 입영통지서가 나와 1975년 9월 육군에 입대했다.

철도공무원출신이라고 경기도 포천 5군단 직속부대의 수송행정병으로 발탁돼 34개월 동안 행정일을 맡아 했다. 고참들은 정비를 하느라 기름칠투성인데, 그는 편한 사무실에 근무하다보니 그들의 괴롭힘은 지독할 정도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간이역이었다. 하루 완행열차만 몇 차례 들리는 한가한 덕분에 그곳에서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역무경시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역으로 발령 받았지만, 힘든 업무 탓에 야간 학원 강의는 졸기 일쑤였고, 연거푸 낙방의 쓰라린 맛을 보았다.

그때 구세주가 한명 ‘짠하고’ 나타났다. 고향 여자동창이 자기 친구라며 소개한 여인은 바로 서울역 앞 대우빌딩 외국회사에 다니던 지금의 아내였다.

홀로 외롭게 생활하던 그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1년 9월 결혼해 효창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후에도 과중한 업무 탓에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였던 아내가 사표를 내고 공부에만 전념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하여 신설동고시원에 들어가 준비한 결과, 그해 1985년 당당히 7급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합격 후 발령대기하면서 고교자격 검정고시도 통과했고, 방송통신대 경제학과에도 입학해 5년 만에 학사학위 취득과 대학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1987년에 과천 경제기획원으로 발령을 받아 심사평가국에 배치되어 KT, KBS 등 정부투자기관을 관리하는 심가평가국에 배치되었고, 그는 농수산부와 산하기관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딸 둘이 태어났지만, 맞벌이 덕에 큰 어려움 없이 동료들과 술잔이라도 기울일 수 있었고, 효창동에 작은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공직에 진출해 보직이 무엇이던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스스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읍내 마늘 위탁상회 근무할 때 익혔던 인간관계의 심리는 그의 공직생활에도 많은 보탬이 되었다. 좋아하는 축구, 테니스 등 스포츠에서도 즐기며 최선을 다했다.

1997년 한국은 금융기관의 부실과 차입 위주의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한 대기업의 연쇄 부도, 대외 신뢰도 하락, 단기 외채의 급증 등으로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그는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금융차입 등 현장의 실무자였다. 1년 이상 휴일도 없이 야근까지 하였고, 나중에는 위장병까지 생길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어 외환위기 책임론까지 불거져 특별감사를 받아야 했고, 구조조정까지 이어졌다.

국세심판원으로 옮겨서 세법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나름 성실성을 인정받아 종합민원실장, 홍보담당관까지 승승장구했다. 2009년에는 기획재정부 직원들이 뽑은 ‘가장 닮고 싶은 상사’로 뽑힐 정도였다.

그의 포용력이 부하직원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는 바쁜 업무 중에도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야간 대학원에 진학했다.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와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획득했으며, 한성대 대학원에서는 정책학 박사과정을 공부해 박사학위도 마쳤다.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면서 당시 우근민 제주도지사에게 발탁돼 제주도 지식경제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초 1년만 있다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업무보고를 받고 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고민 끝에 제주도를 위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보자는 결심이 생겨 아예 제주도로 주소까지 옮겨버렸다.

당시 제주도의 관광산업은 아우성이었다. 인구감소와 불친절, 바가지요금 등 심각한 상태였다.

먼저 제주시 5일장 활성화부터 관광서비스 개선 정책을 추진했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도 밀어 붙였다. 많은 통신요금 탓에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언론인터뷰에서 당당히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처럼 다시 도전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지만, 후대들이 통화료가 없어 한번 뿐인 기회를 놓쳤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반박했다.

그 덕에 중국 관광객 붐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제주도가 글로벌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재임시절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 에너지공사를 설립해 풍력발전을 추진하였고, 전기차 인프라도 획기적으로 확충했다.

2013년에는 제주발전연구원장이 되어 지하수인 제주삼다수의 수출정책을 추진하는 등 제주비전을 위한 연구를 독려하였고, 퇴임 후에도 (사)제주미래발전포럼을 설립해 좋은 대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근무했던 5년 동안 제주도는 매달 인구 1500명 이상 증가했고, 부동산 가격도 과열이 걱정일 정도로 올랐다. 관광 비수기, 성수기 구분이 거의 사라졌고 불친절과 바가지요금도 사라졌다.

제주도를 위해 정열을 바쳤던 그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쓰라린 아픔이 있는 곳. 고흥에서 다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2010년 그가 제주도에 도착했던 그 당시처럼 지금 그의 고향 고흥에도 위기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전국 최고의 고령화에 인구는 계속 감소 중이고, 30년 후 가장 먼저 사라질 지역이라는 뉴스까지 온통 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고향을 위해 꺼내 놓을 보따리는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wjs8852@hanmail.net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