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억 원짜리 '서류 고아'였다"
"나는 1억 원짜리 '서류 고아'였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추방 입양인' 아담 크랩서 인터뷰 ①
2017.10.31 09:00:01
"나는 1억 원짜리 '서류 고아'였다"

아담 크랩서, 한국 이름 신성혁. 지난 5일 재방송된 MBC '휴먼다큐 사랑'의 주인공이다. 그는 만 세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으나 41세에 한국으로 추방됐다. "부유한 나라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미국에 입양을 보냈지만, 양부모들은 그를 때리고 학대했다. 16세에 그는 2번째 양부모에게 버려져 노숙자가 됐다.

2016년 11월 한국으로 돌아온 아담에게 지난 1년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하루 하루 자살로 내몰리는 삶"이었다. 미국에서도 유색인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그는 한국에서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나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37년을 한국과 유리된 삶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독자적인 생계를 꾸려야 하는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가 친어머니를 만났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아담의 굴곡진 삶은 해외입양이 얼마나 허술한 시스템이었는지 보여준다. '미국에 가서 잘 살 것'이란 장밋빛 환상만 있었지, 이런 환상을 현실로 만들 법과 제도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 다 담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지난 10월 25일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영어로 진행된 이 인터뷰는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와 함께 진행했다.


▲아담 크랩서 ⓒ프레시안(최형락)



"나는 '서류 고아', 120일 만에 해외입양 보내졌다"

아담은 세살 때인 1979년 두 살 위인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됐다.(아담은 1975년 생이다. 이 기사에 쓰인 연령은 모두 만 연령이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뒤,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친척의 소개로 제천 영육아원에 아이들을 맡겼다. 고아원에서는 어머니에게 미국으로 입양 보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입양이 결정되는 과정에 대해 아담은 "나는 그들(고아원과 입양기관에서) 왜 그렇게 서둘러 입양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것에 대해 힘들어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누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지냈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내 상황을 보고 새로운 나라에 가서, 새로운 부모와 지내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한해 수천명씩 해외입양을 보내던 1970-80년대에는 입양을 위해 '고아'가 만들어지던 때다. 아담과 그의 누나의 입양이 결정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서류 고아(paper orphan)'였다. 그들(입양기관은) 내 엄마를 알았고, 내 친척들의 존재도 알았다. 나는 고아가 아니었고, 버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가 우리를 키우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고, 의료적인 문제도 알았다. 그들은 엄마에게 용기를 주고 상담을 하는 것을 먼저 했어야 했다. 우리를 120일 만에 해외입양을 보내는 게 아니라.

나는 2살 위인 누나와 일종의 '패키지'였다. 첫번째 양부모는 이미 1명의 한국 여자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누나와 나를 사진을 보고 골랐다. 그들은 우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사진을 보고 입양을 결정한 것이다. 반려동물 사진을 보고 '너무 귀여워'라고 결정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입양기관이 제공한 사진과 정보에 내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과 싸운다거나, 어른들과는 전혀 얘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아직 용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사실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과 그의 누나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됐다. 어머니가 있지만, 홀트는 그의 단독 호적인 '기아 호적(고아 호적)'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 호적에는 그의 한국 이름이 '신송혁'으로 잘못 기재됐다. 그는 자신의 한국 이름이 '신성혁'이라는 사실을 2016년 친어머니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이처럼 당시 관행이기도 했던 '기아 호적'은 이후 입양인이 친생부모를 찾는데 어려움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첫번째 입양, 학대, 리홈(파양)..."나는 그때 한국으로 돌려보내졌어야 한다"

아담과 그의 누나는 미시건주에 사는 한 부부에게 입양됐다. 4명의 친자녀가 있던 첫 번째 양부모는 종교적 선교의 차원에서 3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했다. 당시 미국의 중산층 기독교 가정에서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아담은 "이웃 중에 5가정이 한국 아이를 입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양부모는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담과 누나를 학대했다. "첫 번째 양부모는 나를 가죽벨트로 때리고 지하실에 가뒀다. 그들은 매우 가학적이었다."

게다가 이들 부부는 5년 뒤 직장을 옮기며 오리건주로 이사를 가면서 아담과 누나를 지역 사회복지기관에 맡겼다. 첫 번째 입양이 실패하고 두 아이는 사실상 버려졌으나, 입양기관이나 사회복지기관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리건주는 우리의 후견인이 됐다. 당시 나는 10살이었다. 시민권 문제와 관련해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그때 왜 내가 다시 한국으로 보내지지 않았냐는 점이다.

홀트코리아와 홀트인터내셔널(미국 입양중개기관)은 첫 번째 입양 이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입양 실패 후 입양기관이나, 나를 인계받은 사회복지사들 중 누구 하나는 '이 아이는 미국 시민권이 없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고, 미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한국의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자'고 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에 누나와 내가 헤어졌다."

첫 번째 입양 실패 후 아담과 누나는 각각 다른 가정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이혼했고, 나는 그 가정에 입양될 수 없었다."

다시 오리건주의 사회복지시설에 맡겨진 아담은 세 번째 가정, 크랩서 부부에게 입양됐다.

ⓒ프레시안(최형락)

"두 번째 양부모는 사이코패스...돈 때문에 입양했다"

첫 번째 양부모도 그를 학대했지만, 크랩서 부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부는 아담의 목을 조르고, 머리를 벽에 짓이기고, 양손을 묶고, 뜨거운 물에 손을 억지로 집어 넣으라고 하고, 입에 더러운 속옷을 쑤셔 박고, 11월 중순에 수영장에 빠뜨리고, 오줌이 든 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재미'로 즐겼다. 


"양부(톰)는 정말 영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일에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법을 피해가는 법을 알았다. 그의 개 이름은 알렉스인데, 그는 알렉스 레스파크(크랩서를 거꾸로 쓰면 레스파크가 된다)라는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크랩서 부부는 멕시코 아동, 필리핀 아동, 흑인 아동, 한국 아동을 입양하거나 위탁해서 키웠지만,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크랩서 부부의 집에는 3명의 친자녀, 5명의 입양아동 이외에도 위탁아동 등 늘 10여 명의 아이들이 집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우리를 입양한 건 '돈' 때문이었다. 나처럼 한번 입양에 실패하거나 학대의 경험이 있는 아동은 '하드 케이스'로 따로 분류돼서 많은 지원금을 받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1억 원 이상을 벌었다.

하지만 그 집에선 크리스마스도 없고, 생일도 없고, 스포츠를 할 수도 없고, 친구와 놀 수도 없었다.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돈으로 양모는 밍크코트를 사서 입었다.

그 집에 폴과 에릭이라는 이름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9살과 10살이었다. 톰은 어느날 두 아이에게 서로 때리라고 시켰다. 그들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 때렸다. 그들의 얼굴은 엉망이 됐지만, 톰은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들은 보면서 다 울었다.

또 시슬리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톰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했다. 못을 박는 총을 다리에 쏘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시슬리는 울지도 못했다. 이건 테러 수준이다. 그는 사이코패스다."

하지만 영리한 사람이고 인맥과 영향력도 있는 크랩서 부부는 지역 언론 등에는 '모범적인 입양 가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크랩서 부부의 아동학대는 1991년 위탁 아동 중 1명이 친부모에게 알리면서 외부로 드러났다. 아담과 친자녀를 제외한 아동들은 사회복지기관으로 돌아갔고, 궁지에 몰린 양부는 아담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고 매달렸다. 이들은 강간 3건, 강간 미수 1건, 학대 14건, 폭행 2건 등으로 기소됐으나 재판 기간 동안인 3개월간 투옥됐다가 5000달러의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톰은 나를 조정하려고 했다. 그는 내게 '나는 너를 매우 돕고 싶다. 걱정하지 말라. 나와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고, 매우 유명한 로펌에 변호를 맡겼다. 양부모는 아이들에게 한 행동으로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다. 검사는 10년형을 구형했지만, 그는 겨우 3개월만 징역을 살았다."

16살에 노숙자가 되다

이 재판이 끝난 뒤, 아담은 양부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졌다. 미국에서 그는 세 가정에 입양 또는 위탁됐다가 세 번 모두 버림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어느 부모도 정식으로 입양 재판을 하지 않았다.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면서 2013년 가정법원을 통한 입양재판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 아동들은 엄밀히 말하면 '입양' 보내진 게 아니었다. 입양기관이 보건복지부를 통해 입양 대상 아동의 '이주 허가'를 받고 한국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이들은 미국에 'IR-4 비자'를 받고 입국했다. '미국 시민에 의해 미국에서 입양될 예정인 고아(orphan to be adopted in U.S. by U.S. citizen)'를 의미하는 IR-4 비자를 받고 입국한 아동의 입양부모에게는 2년 동안의 '후견권'이 주어진다. 양부모가 주법원에서 입양 재판을 별도로 해야 법적으로 양부모가 되며, 입양이 완료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을 거쳐야 입양 아동에게 미국 시민권이 주어진다. 많은 양부모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 현재 약 3만5000여 명의 입양인들이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1만9000여 명이 한국 출신이다.

"16살에 나는 노숙자가 됐다. 어린 아시아 남성이 혼자 노숙자가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는 왜 아무도 같이 있지 않냐. 아시아인이 많지 않은 동네였고, 아시아인들은 다 가족 단위로 움직였다."

크랩서 씨의 집에서 쫓겨날 때, 아담은 거의 빈손으로 나왔다. 생존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지내던 그는 미국으로 처음 입양될 때 가져온 한국어 성경책 등을 찾고 싶어 그 집에 갔다가 주택침입죄로 기소돼 25개월 징역을 살았다. 당시 양부모는 반지 등 귀중품이 없어졌다고 거짓 증언했고, 또 아담에게 유죄를 인정하면 18개월 보호관찰로 끝날 것이라고도 거짓말을 했다. 이 일은 아담이 추방을 당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미 만료된 영주권(그린카드)...2011년까지 시민권이 없다는 걸 몰랐다"

아담은 누나와 27년간 헤어져 지내다가 2011년 다시 만났다. 누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누나를 만나고 나서 시민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누나는 미국 시민권자이고 똑똑하고 교육을 잘 받았다. 누나가 자신의 입양 관련 서류를 보여주는데, 우리가 고아원에 있었을 때 사진이 붙은 귀화 증명서(Certificate of Naturalization)를 보여줬다. 내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자 누나는 문제가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당시 누나의 파트너가 변호사였는데, 같이 내가 갖고 있는 서류를 살펴본 뒤 내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며, 내 영주권도 양부모 중 누구도 연장시켜주지 않아 이미 만료됐다고 알려줬다.

내 영주권을 다시 얻는 걸 먼저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누나와 함께 이민국에 갔다. 누나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입양 관련) 자료도 갖고 있으니까. 영주권을 다시 얻는 과정에 과거 범죄 이력도 신고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이 추방당하는 계기가 됐다. 만약 내가 영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만료된 그린카드를 갖고 미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민국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모르니까. 이민국은 6개월 뒤에 내게 10년 짜리 영주권을 줬다. 나는 2022년까지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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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기자 onsca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 프레시안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프레시안 기자들과 함께 취재한 내용을 묶어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등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도 계획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아이 덕분에 무계획적인 삶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