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혁명', 소련은 왜 망했나?
'도둑맞은 혁명', 소련은 왜 망했나?
[유라시아 견문] 신유라시아주의 : 페레스트로이카 2.0 <上>
2017.12.17 23:11:57
'도둑맞은 혁명', 소련은 왜 망했나?

1. 칠고초려

"아시아는 러시아의 출구가 되어줄 것이다." 


19세기 후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언이다. 


"러시아의 8할은 아시아이다. 러시아의 희망은 아시아에 있다." 


20세기 초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Никола́й Серге́евич Трубецко́й)의 언명이다. 


"러시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유라시아 국가로서만, 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20세기 후반,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 레프 구밀료프(Лев Никола́евич Гумилёв)의 진단이다. 최후의 인터뷰에서 밝힌 견해였으니 유언이라고도 하겠다.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연방, 두 번의 제국이 무너진 폐허에서 공히 솟아난 담론이 유라시아주의였다. 그 유라시아주의를 21세기에 계승하고 있는 이가 알렉산드르 두긴(Алекса́ндр Ге́льевич Ду́гин)이다.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세 번은 반응이 없었다. 수신은 했건만 답장이 없었다. 다음 세 번은 거절하는 답장이었다. 그럼에도 미세한 변화는 있었다. 거절의 변이 점점 길어졌다. 파고들 여지가 있다고 여겼다. 질문지를 첨부한 7번째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승낙을 얻었다. 칠고초려 끝, 희소식이었다. 쾌재를 불렀다.


11번의 편지가 오가는 사이 110일이 지났다. 모스크바에 입성한 것은 5월이었다. 돌연 눈발이 흩날리는 북방의 봄날이었다. 넉 달 동안 동서남북을 쏘다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부터 시베리아의 툰드라까지 눈에 담았다. 바이칼의 호수부터 북극의 북해까지 시야에 넣었다. 이르쿠츠크의 대형서점에는 유라시아주의 특별 서가가 꾸며져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는 구밀료프의 책을 읽고 있는 대학생을 만났다. 유라시아주의는 푸틴 정권의 국시(國是)일뿐더러 민간에서도 호응하는 '시대정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감질 맛이 났다. 안달이 났다. 칠전팔기를 불사했던 까닭이다. 


▲ 구밀료프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카자흐스탄 기념우표.ⓒwikipedia


인터뷰가 성사된 곳은 9월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동방경제포럼의 특별 연사로 초빙된 것이다. 장소가 아쉽기는 했다. 극동연방대학의 발해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직접 보고 싶었다. 서재는 사상을 공간화해 둔 곳이다. 작업실은 그 사람의 뇌구조를 투영한다. 연구실 배치만 보아도 인터뷰 목적의 절반은 달성하는 셈이다. 공간의 아쉬움을 덜어준 것은 절묘한 시점이었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서는 레닌 특별전이 시작되었다. 미술관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전람회가 열렸다. 러시아혁명을 피하여 만주/연해주로 피난 갔던 정교도 신자 마을의 사진 전시회였다. 알렉산드르 두긴 또한 정교 사상가이다. 그 중에서도 비주류였던 고의식파 출신이다. 외양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회색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콧수염도 덥수룩하여 입술을 죄다 덮었다. 가려진 입술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흡사 컴컴한 동굴에서 말씀이 웅웅 울려 퍼지는 듯하였다. 


성직자 같다 하여 수도원에 은신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 활동이 활달하다. 두마 의장고문에 취임하여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한 것이 1998년이다. 2002년에는 직접 정당을 창설하여 당수 노릇도 하였다. 당을 접고 유라시아주의 운동에 전념한 것이 2003년이다. 푸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하며 시민사회에 투신한 것이다. 2008년에는 모스크바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취임한다. 신학부터 지정학에 이르기까지 이론적, 학술적으로 신유라시아주의를 정립했다. 2012년 푸틴이 대통령으로 복귀하자 당대의 이데올로그, 푸틴의 책사로 간주된다. 러시아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파악하는데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 알렉산드르 두긴. ⓒ이병한


2. 혁명과 문명

이병한 : 러시아혁명 100주년입니다. 새내기 시절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었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2월 혁명은 부르주아혁명,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도식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아요. 피상적이고 교조적인 혁명사관을 학습했던 것입니다. '표토르부터 푸틴까지' 러시아 근현대사 300년의 장기적 관점으로 러시아혁명을 접근하시죠?

두긴 :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제국의 성립은 철저하게 표토르 대제의 기획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러시아문명, 정교 전통을 전복시키는 혁명이었습니다. 근대화를 명분으로 서구화를 추진한 것이죠. 예카테리나는 표토르의 실험을 완성시킨 여제였고요. 교시로써 러시아는 '유럽 국가'라고 못 박았습니다. 예카테리나는 그 오랜 집권 기간 동안 모스크바를 행차한 적도 몇 차례 없어요. 표토르가 건설하고 예카테리나 때 절정을 구가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파리 같은 곳이었습니다. 상류층은 러시아보다 프랑스어 쓰기를 더 좋아했죠. 의복부터 식습관, 학문과 예술까지 전반서화(全般西化)가 만연했습니다.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수염을 기르고 다니면 경찰에 의해 제지받았을 정도이죠. 이러한 서구화, 근대화에 저항했던 기층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정교도 신자들이었어요. 특히 고의식파 숫자가 전체 인구의 1/3까지 확산된 것이 20세기 초의 상황입니다. 이들이 1917년 러시아혁명에 적극 가담하죠. 그래서 표토르가 폐지했던 총주교를 회복시킵니다. 수도도 모스크바로 되돌리고요.

이병한 : 저 또한 고의식파의 관점에서 본 러시아혁명사가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국가로 흡수되어버린 제도권 정교와 일선을 긋는 '민간 정교', '민주 정교'라고 할까요? 실천 정교, 생활 정교였습니다. 그 '인민 교회'(=소비에트)가 권력을 접수해가는 과정도 인상적이었죠. 조선 말기에 동학운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와 다른 '민중 유교', '민주 유교'였죠. 그 조직으로 집강소가 있었고요. 서당과 성당과 정당이 결합된 '인민 서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894년 동학혁명은 실패했지만, 1917년 정교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두긴 :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을 도둑맞았죠. 볼셰비키들이 혁명을 낚아챘습니다. 또 다른 서구화가 시작되었거든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서유럽의 산물입니다. 유럽의 특수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전제로 등장한 이념이에요. 


결국 볼셰비키의 실험은 18세기 이래 추진해왔던 러시아의 유럽화를 더더욱 심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매우 다른 환경과 조건에다가 유럽 기원의 제도를 이식하려다 보니 무리수를 연발한 것이죠. 따라서 볼셰비키의 세계혁명이 완수되었다고 해도 그 결과는 유럽으로의 완벽한 동화에 그쳤을 것입니다. 즉 러시아 문명의 완전한 소멸, 좌파 버전의 '역사의 종언'이었겠죠.


소련 시기 달을 정복하고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동안 러시아인들의 영혼은 피폐해졌습니다. 마을은 사라지고 성당은 폐쇄되고 인간들은 기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갔죠. 전통은 말소되고 장소의 고유함은 사라지고 그 광대한 영토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똑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살아가는 끔찍한 시절이었습니다. 최고의 과학기술과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순식간에 소련이 몰락했던 까닭입니다. 영혼이 가난했습니다. 심성이 각박했습니다. 러시아의 기층과 전혀 상응하지 않는 외래문명이 겉으로만 군림했기 때문입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러시아의 전통문명은 다시금 부활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또 다른 표토르주의자들, 옐친과 같은 우파 서구화주의자들이 집권했죠. 그러나 최악의 혼란 끝에 푸틴이 집권하면서 안정을 되찾아갑니다. 푸틴은 표토르 이래 300년 러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리고 있습니다.

이병한 :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여 러시아를 떠난 망명지식인들이 1920~30년대에 모색한 이념과 사상이 유라시아주의였습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wikipedia

두긴 : 19세기로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슬라브주의라고 했죠. 물질문명을 최우선하는 서구파의 대척점에 섰던 일련의 사상가들입니다. '인민 속으로', 나로드니키의 출발이었고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또한 그 계보에 세울 수 있습니다. '정교도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이 유별난 것만도 아니었어요. 1910년대 이미 '서구의 몰락'이 운운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문명의 위기를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유물론과 무신론이 더욱 심화되고 말았습니다. 소비에트가 아니라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한 것입니다. 인민교회가 국가기구에 배반당한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떠받들었습니다. 


마치 표토르에 반대하여 우랄산맥 동쪽으로 피난 갔던 고의식파처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이 파리와 프라하, 베를린, 브뤼셀, 소피아 등지로 망명을 떠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피아가 중요하죠. 정교세계의 성지 가운데 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병한 : 소피아는 아시아 하이웨이의 종착역이기도 하더군요. 비잔티움세계의 경계였고요.

▲ 트루베츠코이. ⓒwikipedia

두긴 : 트루베츠코이의 <유럽과 인류>(Европа и человечество)가 발간된 장소이기도 하지요. 소피아대학에 자리를 잡았던 1920년이었습니다. 


몽골의 러시아 점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파격적인 역사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러시아의 물질적 기반이 아시아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죠. 슬라브인,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이 연합하는 진정한 인류애를 통하여 압제자 유럽에 대항하자는 대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공산주의 일색의 세계혁명이 아니라, 각자의 문명을 통하여 서구 자본주의를 극복해보자는 취지였죠. 


이 책자가 망명 지식인들 사이에 대논쟁을 촉발하여 유라시아주의자라고 하는 일군의 사상집단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 논쟁을 집대성하여 1921년에 펴낸 선집이 <동방으로의 출구>이고요.

이병한 : 제목부터 도스토예프스키 느낌이 물씬합니다. '아시아로의 출구'라는 표현을 차용한 것이겠죠?

두긴 : 시인 솔로비요프의 작품 중에는 <빛은 동방으로부터>도 있습니다.

이병한 : 러시아혁명에 반하여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두긴 : 러시아문명입니다.

이병한 : 혁명의 반대편에 문명을 두는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성찰>을 연상시킵니다. 영국 하원의원이자 사상가로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시국론을 설파하죠. 올 한해 유럽부터 러시아까지 견문하면서 삼독한 책이 <성찰>입니다. 학부 시절 전공이 사회학이었는데요. 그때는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하여 버크를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어요. 경제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한편으로 봉건적 계층질서도 옹호했다는 식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이행기의 사상가 정도로 간주했죠. 그런데 올해 독서를 거듭하며 달리 보이더군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숙고한 사상가, 유동성과 안정성의 균형을 추구한 정치가로 보였습니다. 자연스레 버크와 두긴 선생님을 겹쳐서 독서하게 되었고요. 선생님을 '러시아의 버크'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두긴 : 20세기의 3대 이데올로기, 자유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와는 다른 '제4의 정치이론'을 궁리할 때 제가 자주 참조했던 인물이 버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봉건질서를 옹호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시장사회가 확립되면 봉건체제는 자연스레 해체되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상업사회에서도 봉건사회에서 추구했던 가치와 미덕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인식한 것이 핵심입니다. 아니 프랑스혁명이 문명의 파괴가 아니라 문명의 진보가 되기 위해서라도 앙시앙 레짐에서 유효했던 태도와 관습을 통째로 버리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근대사회가 온전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통사회의 원리가 기저에서 튼튼하게 바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상층계급의 공적 미덕으로서 강조된 기사도 정신이죠. 신사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사도 정신은 서유럽에서 인간 경영과 사회 운영의 노하우가 집약된 가치거든요. 문명이 지속하는 방책을 담고 있었던 비결입니다. 이것을 처분해 버리는 혁명은 결국 문명의 토대를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죠. 문명에 반하는 혁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이념이었던 자유와 평등도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자유는 절제되어야 한다. 평등은 조율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명이 지속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자유를 극단으로 추구하고 평등을 일방으로 추진하는 혁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얄팍하고 편협한 혁명파들이 결국은 반동적인 전제정치와 폭력정치를 산출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죠. 자코뱅의 테러와 나폴레옹의 독재를 예언했던 셈입니다. <성찰>이 출간된 것이 1790년이죠?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에 나온 것입니다. 위대한 저작입니다.

이병한 : 귀족계급을 타도하되 귀족이 추구하던 기사도 정신은 보존해야 한다는 역설적 논법이 흥미로웠습니다. '고귀한 복종', '존엄한 순종' 같은 특이한 표현도 많이 등장하고요.

두긴 : 신사 정신이라 함은 통치자와 지배계급이 사적 정념에 빠져들게 하지 않게 만드는 고도의 문명적 장치였어요. 권력이란 제도화된 폭력입니다. 그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사적 욕심, 동물적 욕망을 자제하고 억제하는 고도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작동해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정묘한 문화형식이 생겨납니다. 그런 도덕적 장치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폐기되면 권력의 폭정화, 정부의 전제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명예와 존경을 으뜸의 가치로 삼는 지배계급의 윤리의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시장사회도 시민사회도 자유사회도 원활하고 원만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혁명적인 자유(Freedom)와 문명적인 자유(Liberty)를 분별하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두긴 : 문명적 규범에 의해서 사적인 정념을 억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규제를 하지 않으면, 강권적으로 폭정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면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버크는 부르주아 혁명이 허여한 사적 정념의 무분별한 표출, 무차별적 추구가 봉건체제보다 더 극심한 반동정권과 독재체제를 낳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입니다.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 자부와 자존이라는 가치를 '봉건 윤리'라는 이름으로 폐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절도를 모르는 잡놈들이 자유롭게 권력을 행사하면 문명은 삽시간에 무너진다고 보았죠. 자아실현보다 자아극복이라는 위대한 자유, 문명적 자유를 배우고 익히지 않는 계층이 곧바로 권력을 행사하면 문명사회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본 것이죠.

이병한 : 동방식으로 말하면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의 전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기사도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사도 또한 결국 지배층을 규율하는 윤리이지 않습니까? 시장사회, 근대사회로 가면 필히 상층계급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그런 윤리를 학습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두긴 : 버크는 하층계급들에게 신사도를 요구하기는 힘들다고 보았어요. 기사정신은 물질적 자본을 갖춘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 마음 훈련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것은 종교라고 보았죠. 종교적 훈육의 사회적 역할이 바로 사적 욕망의 억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지고 어긋나기 십상인 심성을 겸허함과 겸손함으로 다스리고 다독이는 것이죠. 모든 종교의 근간이 에고를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더 큰 세계, 우주와의 공속감을 배양하는 것이죠.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신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폭발한 인간 중심주의는 영원불변한 신의 법을 인정하지 않아요. 마치 지상의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인양 착각하면서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버크는 혁명 직후부터 세속화가 초래할 장기적 효과를 근심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중세의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만들어진 전통'일 수 있어요. 승자가 쓴 역사, 즉 부르주아가 서술한 역사에 의하여 귀족과 성직자가 문명을 존속시키기 위한 역사적 진화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외면해 버린 것이죠. 버크가 <성찰>에서 거듭 귀족이라는 말 대신에 신사라는 개념을 썼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사는 신분제적 위계로서 귀족과는 다른 개념이죠. 품성과 자질을 갖춘 신진지배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생득적 신분이 아니라 후천적 학습을 통해서 말이죠. 고귀한 가치와 태도를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특권층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명화'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버크가 표방했던 것은 복고적 중세사회가 아닙니다. 더욱 고등한 문명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이병한 : <성찰>의 통찰이 러시아혁명에도 통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혁명에도 적용될 수 있겠죠. 혁명은 일시적, 단속적이고, 문명은 장기적이며 항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긴 : 자코뱅과 볼셰비키, 홍위병들의 공통점이 있죠. 단순하고 무식합니다. 단정적이고 교조적입니다. 어떠한 사회도 혁명파의 언설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무 자르듯 갈라지지 않습니다. 본래 사회구조는 다층적으로 형성되기 마련이에요. 분업화가 덜된 농경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계급투쟁으로 양극화, 양분화 시키는 것은 정치적 결집을 위하여 유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혁명 과정을 통하여 망라적이며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실제 사회 질서는 완전히 헝클어지고 엉클어지고 맙니다. 


혁명 이후 대혼란이 일어나고, 그 대혼란을 평정하기 위해 더욱 극심한 독재체제가 도래하는 까닭입니다. 즉 문명사회는 혁명파의 시각처럼 지배와 피지배의 단순 구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생관계 속의 차등으로 작동합니다. 그 차등이 얼마나 합당하고 합리적이냐의 여부를 따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생생한 현실을 부정하면 문명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순수한 민주주의가 순수한 폭정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위아래와 높낮음이 사라지면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야만 상태로 떨어집니다. 약육강식 논리가 횡행하는 것은 문명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약과 대소가 없을 수 없습니다. 문명이란 그 대소와 강약과 상하를 조화시키는 세련되고 우아한 기술입니다. 대소와 강약과 상하가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혁명은 기만입니다. 우리는 문명을 사수해야지 혁명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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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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