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唐] 오가던 포구[津]에서 무술년을 맞다
당나라[唐] 오가던 포구[津]에서 무술년을 맞다
2018년 1월 고을학교는 <당진고을>
2017.12.27 03:16:26
당나라[唐] 오가던 포구[津]에서 무술년을 맞다

2018년 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1강은 중국을 오가던 길목, 당진(唐津)고을을 찾아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 고려시대 문장가 차천로, 예학의 비조 송익필의 자취를 더듬어 보며 무술년 새해를 맞이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천주교 순교성지 솔뫼성지Ⓒ당진시


고을학교 제51강은 2018년 1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1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당진IC-합덕읍(솔뫼성지/합덕제/합덕수리민속박물관)-면천면(면천읍성/면천향교/성상리산성/은행나무/안샘/복지겸사당)-당진동(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입한재/점심식사 겸 뒤풀이/당진향교/채운포석교비)-안국사지(삼존입상/석탑/매향망각문)-차천로사당-당진포진성-송악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당진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1강 답사지인 <당진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중국으로 가던 뱃길 요충지

당진(唐津)은 충남의 최북단에 위치합니다. 북쪽으로는 서해와 아산만을 경계로 평택·화성과, 동쪽으로는 삽교천을 경계로 아산과, 남쪽으로는 예산과, 서쪽으로는 서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대체로 낮은 산악과 작은 구릉이 연결된 넓은 평야지대입니다.

당진은 서해와 접해 있으면서 동쪽으로 아산만, 서쪽으로 대호만이 감싸고 있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열렸던 오래된 포구들이 많았습니다.

당진의 초입에 있는 행담도(行淡島)는 서해대교가 이 섬을 관통하게 되면서 행담도휴게소를 비롯하여 종합휴게시설이 들어섰지만 그 전에는 초가 몇 채가 있는 작은 섬마을이었는데,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가다가 이 섬의 맑은 물을 마시고 장원급제해서 행담도라 했다는 아름다운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 도굴사건 때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000톤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으나 수심이 얕아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섬 앞에 정박한 후 소형 어선으로 갈아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덕산 구만포로 상륙, 도굴을 감행했지만 실패하고 돌아갔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당진포(唐津浦)는 당진 서쪽의 대호만에서 서해로 나가는 관문으로 백제 때 당나라로 왕래하던 나루터였습니다. 국가 조세를 수납하던 해창(海倉)이 있었으며 큰 호수가 양면을 감싸고 있는 천연요새로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했었으며 당진포진성 터가 남아 있습니다.

당진포진성(唐津浦陣城)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되었던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萬戶)가 지휘하는 병선이 있던 곳으로, 평상시는 군량과 무기를 보관하였고 유사시에는 수군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에 옹성(壅城)을 쌓았고 성체는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약 2m이며 현재 약 500m 정도 남아 있습니다. 서쪽 성벽의 남쪽 부분 약 65m는 도로 개설로 파괴된 상태이며 방조제 축조 때 성석(城石)마저 거의 유실되었습니다.

한진항(漢津港)은 당진 동쪽의 아산만에서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당나라와 해상무역을 한 항구입니다. 백제 때 이미 창(倉)과 관(館)이 있었고 당나라를 오가는 상인과 사신이 이곳을 통해 왕래했다고 하며 옛 지명은 대진(大津)이었는데 ‘큰 나루’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훈차(訓借)하여 한진(漢津)이 되었습니다.

▲면천읍성 남문Ⓒ당진시


면천면과 당진동에 읍치구역

당진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의 영역이었고 삼국시대 백제 때에는 면천에 혜군이 있어서 당진 전체를 관장하였습니다. 당진과 고대면은 벌수지현에, 정미면은 여촌현에 속했으며 사평현은 송악, 한진 방면의 넓은 해안에 산재한 영역을 관할하였습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혜군은 혜성군, 벌수지현은 당진현, 사평현은 신평현, 여촌현은 여읍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초기는 지방호족이 다스렸으며 983년(성종 2)에 전국을 12주로 나눌 때는 공주에 속했고 1018년(현종 9) 운주(지금의 홍성)에 속한 당진현이었으며 1358년(공민왕 7)에는 홍주목에 속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주목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 당진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당진군이 되어 8개 면을 관할했습니다. 1914년 면천군의 22개면과 해미군 일부와 예산군 일부를 병합하여 당진군으로 하고 10개면 123개리로 개편 관할하는 군이 되었습니다.

2010년 송악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3읍 9면 149개리로 되었고 2012년 당진군이 당진시가 되어 2읍 9면 3동(138개 법정리, 11개 법정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진에는 면천면과 당진동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성상리산성(城上里山城)은 면천읍치구역에 있으며 해발 119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내부의 경사면을 삭토한 흙으로 성벽을 축조한 테뫼식 산성입니다. 길이 약 400m, 높이 외벽 4~5m, 내벽 1~1.5m이고 성벽 기저부는 1~2m입니다.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천 관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산성이며 마한 또는 백제시대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크고 당진의 행정·군사적 중심지였던 면천 지역의 역사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면천읍성(沔川邑城)은 면천면 소재지의 전역에 걸쳐 평지성으로 축성된 석성입니다.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축조하였는데, 면천저수지 공사 등의 사업에 이곳의 돌을 빼다 써서 현재는 유실된 부분이 많으며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둘레는 약 1,200m, 평면은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조선 초기 해안 지역의 전형적인 읍성으로 남문, 동문, 서문이 남아 있습니다. 남문에는 옹성(甕城)으로 둘러쳐 있고 문루는 남문과 서문에 있었으며 성벽에는 길이와 너비가 7m가 넘는 7개의 치성(雉城)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세종 때 읍성 축조계획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451년(세종 33)의 기록에는 둘레 3,225척(약 1,000m), 높이 12척(약 3.5m), 여장은 56개, 적대 7개, 문이 3개인데 2개는 옹성이 없으며, 성안에 우물이 3개가 있고, 성 밖에 해자(垓字)가 파여 있었다고 합니다.


▲안국산 자락의 안국사지Ⓒ이지누


유서 깊은 면천향교

면천향교(沔川鄕校)는 최초 창건 위치를 이동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향교로서, 조선 초기의 향교입지 형태를 규명하는데 귀한 자료의 가치가 있으며 현재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군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면천향교의 건립은 다른 향교와 같이 1413년(태종 13)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1716년(숙종 42) 대성전 서벽과 신문을 수리하였고 이후 몇 차례에 걸친 중수와 보수가 있었지만,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앞에 넓은 들을 두고 구릉지를 배경으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면천 두견주(杜鵑酒)에는 복지겸과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가 병이 들어 온갖 좋다는 약을 써도 병이 낫지 않자, 그의 어린 딸 영랑(影浪)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러자 신선이 나타나 이르기를,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면천면 성상리)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만 효과가 있다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복지겸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때 심은, 수령 1100여 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와 안샘이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은행나무는 1910년대 한일합병 후 면천초등학교를 건립할 때 터를 닦기 위해 흙으로 메워 높이가 2.3m는 묻혀 있습니다.

합덕제(合德堤)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신라 말기에 축조한 것으로, 원래는 곡창지대인 합덕평야를 관개해 주던 방죽이었습니다. 현재 저수지는 농경지로 변하고 제방만 원형대로 길게 남아 있으며 저수지에 연꽃이 많아 연지라고도 불렀습니다.

제방은 9개의 수문을 통해 6개 마을에 관개를 하였으며 평지로부터 높이 7.8m, 길이 1,771m에 이르는 규모였습니다. 흙을 쌓아 만들었으나 후에 돌을 이용하여 보수한 부분도 있고 개수할 때 그 기록을 적어둔 중수비가 5기가 남아 있으나 축조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김제 벽골제의 제방이 일직선인데 비해 이곳의 제방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당진향교(唐津鄕校)는 읍내리 남산 기슭에 위치하며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936년 군교육회가 편찬한 <군사(郡史)>에는 1480년(성종 11)에 대성전 6칸, 동서무 6칸, 명륜당 4칸을 건립하고 기념식수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로 이건된 적이 없습니다.

급경사의 구릉에 외삼문을 두지 않고 곧바로 명륜당을 전면에 배치하였고 명륜당 동서에는 각각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는데 양재의 측면을 명륜당 전면 열에 맞추어 배치하여 양재의 측면이 향교 앞에서 바라보이게 하였으며 명륜당과 동재 사이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북쪽에 한 단 높여 대성전을 배치하였습니다.

채운포석교비(彩雲浦石橋碑)는 당진의 채운포에 돌다리를 놓은 것을 기념하고자 세워 놓은 비로, 원래 역천 갯가에 있던 것을 1960년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채 비신만 남아 있습니다.

비석 이마 부분에 ‘채운포석교명(彩雲浦石橋銘)’이란 명문은 확인하였으나 그 밑의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데, 맨 끝 부분에 ‘숭정기원후61(崇禎紀元後六十一)’이라고 음각되어 있어 건립연도가 1688년으로 추정됩니다. 비석의 양 옆면에 ‘석수비구, 시주비구, 조역비구(石手比丘, 施主比丘, 助役比丘)’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 다리의 건립이 사찰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면천 은행나무는 수령 1,100여 년을 자랑한다.Ⓒ당진시


복지겸, 차천로, 송익필의 사연

당진에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고려시대 문장가 차천로, 예학의 비조이며 서인의 숨은 실력자 송익필의 사당이 있습니다.

오산사(五山祠)는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의 사당으로, 달리 문원사(文苑祠)라고도 합니다. 차천로는 송도(개성) 출신으로 간이(簡易) 최립(崔岦), 석봉(石峯) 한호(韓濩)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일컬어지던 당대의 문장가로 서화담의 문인입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판관, 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대부분 외교문서를 담당하였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청원문(請援文)을 썼는데 그 문장이 천하의 명문이어서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차천로 3형제와 그의 아버지 식(軾), 할아버지 광운(廣運)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차문 삼세 오문장(車門 三世 五文章)으로 불리고, 송나라의 소동파 3부자인 소순, 소식, 소철(蘇洵, 蘇軾, 蘇轍)을 일컫는 삼소(三蘇)와 비유되기도 합니다.

저서로 <오산집(五山集)>, <오산설림(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을 비롯한 7,00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입한재(立限齋)는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의 사당입니다. 송익필은 본관이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시호는 문경(文敬),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입니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습니다.

특히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일찍부터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어울렸고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선조 대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하여 심의겸, 이이, 성혼, 정철 등과 정치적 의리를 함께하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여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였고 김장생을 첫 제자로 받아들여 김장생 또한 예학의 대가로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정엽, 서성, 정홍명, 김반 등을 제자로 두고 이후 그의 학맥은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최명길, 숙종 대 노론의 영수 송시열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송익필은 당진과 인연이 닿아 송산면 매곡리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으로 율곡이 찾아와 산을 바라보며 은거생활의 고통과 우정의 회포를 나누며 바라보았다는 신평의 망각산의 일화도 전해집니다.

무공사(武恭祠)는 복지겸(卜智謙)의 사당입니다. 원래는 제단, 신도비, 태사사(太師祠)가 있었는데 2009년 정비사업 후 사당(무공사), 내삼문, 외삼문, 재실 등이 건립되었습니다.

복지겸은 면천복씨의 시조로서 태봉(奉封)의 마군(馬軍) 장수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습니다.

그 뒤 장군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주살하였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994년(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무공(武恭)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된 기지시 줄다리기

당진은 넓은 평야지대와 포구가 발달한 관계로 그에 상응하는 농경의식의 하나인 민속놀이가 전해져 오는데 바로 기지시 줄다리기입니다.

기지시(機池市) 줄다리기는 송악읍 기지시 마을에 5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길쌈이라고도 하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입니다. 마을을 육지와 바닷가 두 편으로 나누어 싸움을 하여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바닷가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진의 기지시리(機池市里)는 풍수적으로 옥녀가 베 짜는 형국이어서 베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한데서 줄다리기가 생겼다고도 하고, 지형이 지네 형이라서 지네 모양의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줄다리기는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며, 줄다리기를 통한 농촌사회의 협동의식과 민족생활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윤년 음력 3월초에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고 이어서 행해졌습니다.

기지시 마을은 이름과 같이 큰 시장이 열렸고,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업과 어업, 시장에 근거를 둔 상업까지 줄다리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줄의 재료가 짚인 것에서는 농업, 줄을 제작하는 방식에서는 어업에서의 닺줄 꼬는 방식을, 많은 돈이 들어가는 줄 제작과 줄다리기에는 시장 상인들의 모금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이 기지시리(機池市里)가 되었는데 베틀을 뜻하는 '틀[機]'자와 길쌈을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함으로 연못의 '못[池]'자가 합쳐서 '틀못[機池]'이라 하였고 이곳에는 저자거리[市場]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이를 합쳐 ‘틀못시’, ‘틀모시’ 또는 '틀무시’ 라고도 하였는데, 이를 한자어로 바꾸면 ‘기지시(機池市)’가 되었고 말로 할 때는 '틀못시'-'틀모시‘-’틀무시'로 되었습니다.

2015년 기지시 줄다리기를 비롯한 한국의 줄다리기 6종목과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의 줄다리기 등 4개국이 함께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태어난 솔뫼성지

내포지방의 고을이 대부분 그렇듯이 당진도 천주교 순교성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입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조부, 부친 그리고 자신까지 4대가 순교하였는데 이곳에는 생가, 동상,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을 지닌 우강면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초창기 한국 천주교는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질곡의 세월을 겪는데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876년 개항 때까지 100년여의 세월동안 박해를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순교하게 됩니다.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라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당파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였습니다.

당시 로마교황청에서는 한국의 전통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금하였는데, 이러한 제사 문제가 발생하자 남인들로 이루어진 시파(時派)를 적대시하던 벽파(僻派)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1801년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지교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하는데 대표적인 '4대 박해사건'은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였습니다. 그중에도 신유박해와 병인박해가 가장 큰 규모로 신자들의 희생도 컸으며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안국산 중턱의 불교유적지, 안국사지

당진에는 서산과 접경지역에 중요한 불교유적지인 안국사지가 남아 있습니다. 안국사는 안국산(일명 은봉산) 중턱에 위치한 폐사지로 절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1929년에 재건하였다고 하나 다시 폐사가 되었는데 사지에는 석조(石槽) 1기와 5층 석탑의 옥개석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안국사지 석불입상과 안국사지 석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높이 5m에 가까운 거불로서 머리는 원통형이고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보안(寶顔)은 눈을 감고 있으며 코는 납작하고 입은 다물고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塊體化)한 고려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안국사지 석탑은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는 없으나 탑신의 조식이나 옥개석에서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이나 양식의 흐름을 살필 수 있습니다.

기단부는 2단의 장대석을 놓아 지대석으로 삼았는데 상면에는 낮은 괴임이 표출되었을 뿐이고 그 위에 중석 1매를 얹었으며 우주(隅柱)나 탱주(撐柱)는 없고 갑석은 지대석과 같은 방향으로 2매 판석을 얹었는데 이 또한 부연이나 상면의 괴임이 매우 희미합니다.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되었는데 탑신은 초층만 남기고 결실되었고 초층 탑신의 사방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다른 1면에는 문비형(文扉形)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을 1구씩 새겼으며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안국사지 매향암각(埋香岩刻)은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의 자연석의 통바위로 그 형태가 배 모양 같아 '배바위', 고래모양 같아 '고래바위', 베틀에 딸린 북 모양 같아 '북 바위' 등으로 불리며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습니다.

암각명문은 매향과 관계된 고려 말, 조선 초의 기록으로서 매향 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로 ‘경오이월일(庚午二月日)’로 시작되는 명문과 ‘경술시월일(庚戌十月日)’로 시작되는, 조성시기가 다른 2건의 명문이 있어 안국사지 및 주변 지역의 역사와 매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향은 향나무를 땅에 묻는 불교의식으로 향나무를 통해 소원을 비는 자와 미륵불이 연결되길 바라는 신앙의 한 형태로서, 고려시대 몽고와 왜구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지역민들이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자 미륵신앙의 안식처로서 안국사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아이젠,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 신청 안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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