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와 마주하다
마추픽추와 마주하다
[이동석의 세계를 달린다 ⑥] 잉카 속으로 (하)
2018.01.22 08:22:19
1987년 10월 12일 저녁 7시 45분. 세상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눈이 KBS 1TV로 향했다. KBS가 야심차게 만든 교양 프로그램 <세계를 달린다> 제1편이 방송된 순간이다. 

당시까지 한국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이었다. 한국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했다. 미국의 시선, 일본의 시선, 유럽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당시 <세계를 달린다>는 직접 우리의 눈으로 '무엇이 그 나라를 번영케 하고, 무엇이 그 민족을 활기차게 하는가.' '겉으로 활기있고 번영한 나라에는 무엇이 아킬레스 건인가.' '외국인이 쓴 책으로 읽고, 외국인이 만든 프로그램으로만 보아왔던 세계는 진정한 세계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KBS가 야심차게 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시안>에 옛 일제의 만행을 되새기게끔 하는 취재 일기를 여러 차례 연재한 이동석 PD가 <세계를 달린다> 프로젝트의 선구자였다. 당시 이 PD팀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국산차 석 대와 취재팀 9명으로 구성된 인원으로 남미 대륙으로 무작정 건너가, 우리 눈으로 바라본 남미 대륙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줬다. 

이 PD의 당시 여행담을 총 열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제는 세계의 품에 안긴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법한 에피소드도 눈에 띌 것이다. 그러나, 1987년 한국은 영화 <1987>에서 보듯, 지금과는 다른 체제였다. 아직 소련과 중공이 건재했다.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에 실질적 테러를 감행한 위험국가였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이 펼쳐지기 전이었고, 한국인의 외국 여행은 규제되었다. 고립된 섬에서 출발한 이들이 드넓은 세상을 마주하던 시대를 그린 여행기이자, 누구보다 먼저 큰 지구를 경험한 이들의 여행담을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이 기획을 정리했다. 편집자.

쿠스코(Cuzco)는 페루 남부 안데스산맥 해발 3400미터의 분지에 있는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한때 백만 명의 잉카가 살았다는 고원도시다. 쿠스코는 잉카 언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라 한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가, 땅은 퓨마가,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건 아무려나 세계의 배꼽이건 퓨마의 모양새건, 머릿속이 편해야 흡수할 수 있는 이야기다. 도대체 우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산소결핍 때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일행 한 사람은 코피를 흘렸고 몇 사람은 두통을 호소했다. 거리의 차량들은 완전연소가 되지 않아 연기를 풀풀 내뿜고 다녔고 입에 문 담배는 빡빡 빨아도 시원치 않았다. 누우면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고, 어쩌다 겨우 잠 들어도 어느 순간에 깨어나는 토막잠일 뿐이었다. 내일부터 2~3일은 그 유명한 고대도시 마추픽추를 탐방해야 하는데... 거기도 여기 못지않은 고산지대라는데... 몸이 걱정이었다. 차라리 깨어있는 것이 맘이라도 편할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나 가져온 자료집을 뒤적거렸다. 남미대륙에 관한 자료가 절대 부족했던 80년대 중반에 이리 뛰고 저리 헤매며 얻어내고, 빼내고, 번역하고, 꿰맞춰 만든 아주 기초적인 자료집이었다. 

◇ 잉카제국 
- 13세기경~16세기까지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에 이르는 남아메리카 중앙 안데스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통일국가.
- 전성기에는 2천5백 만 명의 인구.
- 중앙집권적인 전제정치를 시행했고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었기 때문에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 ‘사회주의 제국’이라고 정의되기도 함.
- 자연 숭배의 다신교로 농업과 직물, 금세공업이 발달하였음.
- 16세기초 에스파니아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군대에게 멸망함.
 
대충 이런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나온 페루의 학자가 쓴 논문의 한 대목을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잉카의 문화와 한국문화의 유사성을 논하면서 잉카의 언어(케추아어)중에 한국어와 같거나 유사한 낱말을 지적하였다. 논문에는 20여 개의 단어가 적시되었으나, 불행히도 지금 내 기억에는 몇 개의 단어밖에 남아있지 않다.

목 ↔ 목 (*동물의 목)
파리 ↔ 파우리
바닥 ↔ 바닥
하늘 ↔ 하난
임금 ↔ 잉카 

그 학자는 논문에서 잉카부족이란 2만5천여 년 전 시베리아와 알라스카 사이의 베링해협을 건너 남북미대륙으로 퍼져 나온 몽골리안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같은 몽골리안 종족의 본질적인 문화를 탐구했던 것이다. 나는 자료집에 '현지취재결과'라고 쓰고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잉카의 집안에도 옛날 우리 집과 똑같은 물독이 있다.'
'물독 위에는 우리와 똑같은 바가지도 떠있다.'
'잉카의 집도 흙벽에 초가지붕이다.'
'잉카의 여인도 아기를 업고, 머리에 물독을 이고 다닌다.'
'잉카인들도 고수레를 한다. 다만 밭에다 뿌리는 고수레만 목격되었다.'
 
이튿날 아침 로비에 모인 우리 아홉 명은 하나같이 기력이 빠진 얼굴이었다. 예외 없이 밤새 고소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은 마추픽추를 탐방하는 날인 걸. 로비에는 영국의 세계적인 방송사 BBC 제작팀이 나와 있었다. 규모가 엄청났다. PD는 내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물었다. 뭐 만드는 거냐고. 4개월 동안 남미를 종횡단하며 나라마다의 삶의 원리를 관찰하고 다닌다 하니 차원 높은 프로그램이라며 추임새를 넣어준다. 이어서 우리 일행을 보더니 부인은 왜 안보이냐고 묻는다. 

"내 아내는 서울 우리 집에 있다. 여기 있을 턱이 없지 않느냐."
"무슨 소리냐? 지금 출장 3개월째라면서? 이혼당하지 않냐?"
"웬 이혼?"
"영국에서는 부부가 3개월 이상 떨어져 있으면 이혼사유가 된다. 때문에 회사가 직원을 2개월 이상 출장을 보내면 거의 예외 없이 부인을 동반시킨다."

듣지 않아야 할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내가 불쌍하기도 했다.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쿠스코 북서쪽 우르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의 고대 도시다. 대륙에 실어 나른 우리 취재차량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고산지역이라 4시간을 기차로 가고, 다시 작은 셔틀버스로 구절양장의 좁은 산길을 40여분 올라가야 했다.

▲ 잉카의 비밀도시 마추픽추.


정말, 깊고 높은 산속에 도시가 있었다. 그저 한줌 손에 움켜 쥘 수 있을 것 같이 앙증맞은 도시였다. 주변은 하늘로 치솟은 날카로운 봉우리와 천길 낭떠러지다. 저 밑으로는 도도히 흐르는 우르밤바강의 흰 물줄기-. 산밑 산자락에서는 도저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는 숨겨진 도시였다. 오직 공중에서만 볼 수 있다 하여 마추픽추는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해발 2430미터. 총면적 5제곱킬로미터. 여의도의 반이나 될까, 조금 더 클까-. 절반을 차지하는 비탈은 계단식 밭으로 조성되었고, 서쪽 시가지는 신전과 궁전, 주민 거주지, 그리고 성벽으로 둘러 처져 있었다. 이 도시에서 1만여 명의 잉카족이 제국의 마지막 도시라는 자부심을 지니며 최후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 마추픽추의 계단식 밭.


▲ 마추픽추 중심 지역.


▲ 잉카의 주택. 흙벽에 잡초로 지붕을 얹은 모습이 우리 초가와 닮았다.


어쨌든 마추픽추는 1987년 당시 한국인에게는 외신 또는 영화의 몇 장면으로만 소개되었을 뿐이다. 직접 영상으로 담은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그 무거운 의미가 등을 떠미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씩씩하게 장비를 들고 도시 속으로 들어갔으나, 그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카메라와 삼각대 조명등을 메고 10미터만 움직여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고소증세는 해발 3400미터의 쿠스코보다 더 심했다. 더구나 이곳은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조성된 도시라서 촬영의 동선도 더욱 어려웠다. 지렁이 움직이듯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며 우리는 이틀 동안 마추픽추 르포 60분짜리를 만들어야 했다.

▲ 산소결핍으로 인해 10미터만 움직여도 숨이 차 올랐다.


▲ 이틀 동안에 60분짜리 한편을 만들어야 했다.


워낙 신비에 싸인 이 도시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였다. 스페인 정복자를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최후의 요새라고도 했고,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조련했던 비밀도시라고도 했다.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는 견해도 있었다. 360톤, 200톤이나 되는 엄청난 바위를 바위산에서 잘라내어 수십km나 떨어진 이 산속으로 옮겨와 신전과 집을 지은 수송 방법도 신비롭고, 큰 바위 작은 바위를 자연스럽게 쌓아 올렸는데도 사크사후아만 성채처럼 그 틈새가 바늘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정교한 것도 경이로웠다.

구리를 쇠처럼 단단하게 제련하여 무기와 농기구로 사용했다는 점, 가파른 비탈길을 계단식 밭으로 조성하고 관개시설을 만들어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는 점, 5층 건물만한 큰 바위와 작은 바위를 기묘하게 짜 맞춰서 콘도르가 날아오르는 형상을 만들어 놓은 모습 등을 차곡차곡 화면에 담았다. 어느 것 하나 그 원인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추측과 추론으로만 세상에 알려진 이 고대도시를 우리는 그저 충실히 화면에 담아가기만 해도 성공이었다. 

▲ 잉카의 상징적인 얼굴.


그 날은 마추픽추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 밤도 여전히 잠 못 이루는 밤이었으므로 나는 어제처럼 자료집을 뒤적거렸다. 그 속에는 '스페인이 남미대륙을 정벌할 때 두 가지 무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카톨릭이라는 종교이며, 또 하나는 성병이었다. 인디오(남미의 몽골리안)들은 정복자(유럽 에스파니아 군대)의 칼에 맞아 죽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정복자들이 퍼뜨린 임질과 매독으로 풀잎처럼 쓰러져 죽었다.' '리마의 황금박물관에서는 황금의 제국 잉카의 세금술을 볼 수 있으며 섹스박물관에서는 잉카족의 생활상과 풍습을 볼 수 있다.' 그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튿날이었다. 어제 분주히 움직여 많은 부분을 촬영했으므로 오늘은 느긋하고 섬세하게 이 도시를 즐기며 일할 생각이었다. 미국의 듀오 사이먼&가펑클이 부른 잉카의 전래민요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철새는 날아가고)'를 떠올리며 그에 맞은 영상도 생각해보는 참이었다. 저 쪽에서 올라오는 셔틀버스가 보였다. 모텔 앞에 버스가 서고 십여 명의 승객이 내렸다. 찬찬히 보니 그들은 일본의 민간방송 촬영팀이었다. 얼마 후 모텔 식당에서 그들을 만났다. 무슨 프로그램이냐, 잘 되고 있느냐,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까지 같은 업종끼리의 의례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저쪽에서 출장이 며칠 째냐고 물었고 나는 어제 BBC팀에게 했던 것처럼 대강대강 대답했다.

"4개월 출장예정인데 오늘까지 3개월쯤 되었다."
"몇 개를 만드냐?"
"모두 60분짜리 9편이다. 여기서는 이틀 동안에 60분짜리 한편 만든다. 너는?"

구레나룻이 긴 내 또래의 일본인 PD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는 다큐멘터리팀이 아니라 연예프로그램 제작팀이다. 어떤 가수가 ‘엘 콘도르 파사'를 부르기로 했는데 그 노래에 삽입할 영상을 만들러 왔다."
"몇 분짜리냐?"
"일분 반."
"며칠 촬영할 거냐?"
"일주일. 필요하면 더 연장할 수 있다. 지난번에 촬영해갔는데 시사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 왔다."

또 김샜다. 그리고 맥이 풀렸다. 어제 BBC팀에 이어 연 이틀 동안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미워졌다. 질투심이었겠지. 국력과 방송 제작 환경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수가 어떤 노래를 부를 때 가수 얼굴만 계속 비추는 지루함을 면하기 위해서 간간히 그 노래 분위기에 걸맞은 영상을 삽입하곤 했다. 이를 인서트(insert film)라고 한다. 우리는 고소증에 시달리며 이틀 동안 60분 한편을 만드는데 저들은 일주일동안 일분반짜리 인서트를 만든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날아와서... 그날 오후부터 우리들의 발은 더욱 무거워졌고, 숨은 더욱 가빠졌을 것이다. 하늘높이 치솟은 봉우리와 천길 낭떠러지 사이에는 '철새는 날아가고'의 아름다운 멜로디보다 우리들의 거칠고 맥 빠진 숨소리가 더욱 멀리 메아리쳐 나갔을 것이다.

▲ 잉카의 전통악기 싼뽀니아(Zamponia).


페루 리마로 돌아온 것은 며칠 뒤였다. 자료집에 메모된 대로 우선 황금박물관을 찾아갔다. 찾아온 취지를 알리니 돈을 내라고 하는데, 도대체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봉 잡았다는 표정 같았다. 아르헨티나에서부터 동행한 교민 2세 가이드가 머리를 짜냈다. 자기가 장시간 흥정하고 떼쓰고 협상하는 척 할 테니 그동안에 슬쩍슬쩍 필요한 만큼 촬영하라고. 그렇게 몇 점의 유물을 촬영했다. 부러진 이 대신 금니를 해 박은 것도 있었고, 믿기지 않게끔 깨지고 터진 머리통을 금으로 메운 해골도 있었다. 가로 세로 3센티미터는 충분히 될 것 같은 크기의 금으로 메운 머리통! 잉카의 세금술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설명이 아래에 깔려있었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잉카의 섹스박물관을 찾아갔다. 역시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으나, 아예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온갖 머리를 다 짜내어 설득을 해도 어인 일인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신 박물관이 만들어낸 도록을 내주었다. 그 도록에는 제대로 찍은 그릇들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물병이었다. 가이드는 도록을 읽고 설명해주었다.

'깊고 높은 산속에서는 물이 귀하여 한모금의 물을 얻으려 해도 저 아래 계곡까지 내려가 물을 뜨고 올라와야 한다. 그 길이 멀고 지루하며 험하기도 해서 잉카는 지루함과 무서움을 덜기 위해 물병에 재미있는 조각을 새기기도 하고, 물병 자체를 노리개처럼 만들기도 했다.'

사진에는 남성의 거대한 물건으로 만들어진 물병 손잡이가 있는가 하면, 여성의 그것도 확대되어 새겨져 있었다. 지금 둘이 합치는 모양이 있는가 하면, 요즘 포르노를 뺨치는 요지경 모습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기도 했다. 어느 것은 라마나 알파카 등 그 산중 동물에게 사람이 욕정을 푸는 동물적인 장면도 보였다. 방송은 물론 어느 공개매체에도 싣기 민망한 장면들이었다. 생각하면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인간의 저변이기도 했고, 험한 산중에 사는 잉카가 고단하고 메마른 삶을 견뎌내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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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1973년에 TBC에 입사, 이후 35년간 다큐멘터리에 매달렸다. 성철스님 일대기, 손기정 다큐멘터리 등 다수의 인물 다큐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진실을 밝힌 <잊혀진 전쟁>을 기획, 연출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추적한 <종군위안부>로 1993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정통다큐멘터리 월요기획을 만들었고, 인간극장, 한국탐구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기획,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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