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전두환의 '공조자'들은 누구인가"
"형제복지원, 전두환의 '공조자'들은 누구인가"
[토론회] 또 하나의 1987, 형제복지원
2018.02.09 09:31:44

19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전국민의 분노를일으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같은 해 1월 드러난 형제복지원 513명의 죽음은 31년째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형제복지원 사건의 본질은 국가 폭력이다"


31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법무법인 한별)는 8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또 하나의 1987, 형제복지원을 생각한다' 토론회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86년 12월 21일, 울주 작업장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작업자들을 제 눈으로 봤다. 사건 수사의 시발점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들 여러 명이 노역을 하고 있고, 이를 몽둥이를 든 남자들이 감시하고 있고, 사나운 개 몇 마리가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보는 순간, 이건 아주 중대한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이렇게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군인, 아니면 재소자인데, 눈앞에 벌어진 장면은 둘 다 아니니까."

김 변호사는 "그때 내 눈으로 보고 확신했던 것에 대해 대한민국의 수많은 법조인, 지식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 싶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당연히 배상의 책임을 진다. 이걸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 박인근 원장의 횡령, 착복, 인권유린 등의 문제냐? 이건 핵심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주도를 한 극도의 인권 침해 사건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죄 없는 수많은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남녀, 성인, 아동, 가리지 않고 수용자를 감금, 치사, 살인, 성폭행, 적절한 급식과 의료 서비스의 거부, 학령기 아동에 대한 학습 불이행 등을 저질렀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 숫자는 얼마나 될까? 1987년 1월 10일 부산 형제복지원을 방문해 검찰이 수사하던 그 시점에 부산 본원 수용자가 3174명이고, 울주 작업장에 180명이 있었다. 그동안 들어왔다 나간 피해 연인원의 수를 따지면, 2-3만 명이라고 추정된다. 사망한 숫자는 형제복지원 문서에 따르면 513명(1975년부터 1986년까지)인데, 이는 전혀 신뢰할 수 없고, 미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숨겨진 사망자가 상당 수 있을 수밖에 없다.

피해생존자의 경우, 장기간 수용으로 인해 정신, 신체 피해가 커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김 변호사는 또 형제복지원 등 당시 부랑인 시설을 통해 국가가 이들을 감금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인권 침해인지 형사 사건 범죄자의 경우와 비교해 설명했다.

"국민이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상당함 혐의가 있을 경우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통해 구속된다. 그러면 국가가 일정한 기준에 따라 만든 감옥에 수용이 되고, 급식을 주고, 병이 나면 일정 정도 치료를 해준다. 그러다가 무죄판결이 나면 수용된 기간 동안 최저임금 일당의 5배까지 일당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등 부랑인 수용시설을 보면, 아무 죄 없이 끌려갔고, 수용돼 있는 장소가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고, 먹는 것도 영양실조 걸리기 딱 좋은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병이 나면 죽으라고 따로 격리해 방치했다. 구타 등 폭행도 매일 있었다. 이런 사람이 한달 만에 석방이 됐다면 얼마를 보상받아야 하나? 우리가 형사보상법은 잘 시행하면서 부랑인 시설에 갇혔던 사람은 왜 외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법원이 2번 무죄라고 파기환송한 사건은 형제복지원이 유일하다"

그는 또 당시 박희태 부산지검장 등 검찰 고위직에서 형제복지원 수사를 무마하려고 했던 정황에 대해 거듭 밝혔다.

"내가 1987년 1월 13일에 보고서를 들고 부산지검에 찾아갔다. 당시는 부산지검 울산지청이었고, 부산 형제복지원 본원이 주된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서 보고를 하러 갔다. 당시 부산지검장은 나중에 정치권에 가서 국회의장까지 지낸 분이다. 박 검사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알았다고만 하길래 보고를 마쳤다고 생각을 했다.

당시 거물을 수사할 때 요령이 있는데, 토요일 구속영장을 치면 소위 ''을 못 친다. 그래서 내가 금요일 밤에 잡아서 일요일에 집어넣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고, 이렇게 안했으면 형제복지원 수사를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하고 그곳 간부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압수수색할 때, 한 방에 들어가려는데 '검사님 여기는 가지 마시죠' 하길래, 왜 그러냐니까 폐결핵 환자들이 있는 방이라고 하더라. 들어가니 당시가 한 겨울인데, 난방도 제대로 안 해서 아주 추웠다. 환자들을 한데 모아놓고 그냥 빨리 죽으라는 것으로 보였다. 그 다음날 바로 박인근 원장 등을 구속했다.

그러는 사이 압력이 들어왔다. 울주에 강제노역 나간 180명 전원에 대해서는 인권유린 실태를 전부 조사했다. 근데 거기 여자, 아동은 없었다. 이 조사 과정에 김계원이라는 수용인이 도망치려다가 잡혀서 맞아 죽은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부산본원 압수수색 과정에서 캐비넷에서 어마어마한 돈들이 나왔고, 당시 3000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의 인권 유린 실태 등을 다 수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조사할 사항을 남녀별로 구분해 상세한 내용으로 진술서 양식을 만들었고, 울산의 검찰, 경찰에서 수사관 30명을 뽑아서 부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리고 내가 부산지검에 승낙을 받으러 갔더니, 욕을 하면서 당장 철수시키라고 했다. 당시 검찰 상황은 제가 철수 안 시켜도 부산지검에서 수사관을 철수시킬 수 있는 구조였다.

부산지검에서 수사를 못하게 막으니까 돌아가는 방법은 업무상 횡령으로 끌고 가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에 국가보조금이 1년에 10억 원이 넘게 나왔는데, 2년 동안 10억 이상 횡령했다. 절반 넘게 횡령한 것이다. 할 수 있는 것까지 수사한 액수가 11억 4000만 원이었다.

그런데 1심에서 박인근 원장에 대해 징역 10년과 벌금 6억8000만 원이 나왔다. 부산지검에서 공소장 변경을 못하게 막았다. 1심 판결 나고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재판을 7번 했다. 한 사건으로 재판을 7번 한 건 제가 알기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이 사건 밖에 없다. 고등법원으로 가니까 감금죄만 유죄로 인정받아 형이 4년으로 줄었다. 그런데 대법원으로 가니까 죄가 안 된다고 파기환송시켰다. 대법원의 이런 결정은 정권의 의지가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자 고등법원이 형을 1년 깎아 3년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다시 무죄라고 파기환송했다. 고등법원이 결국 6개월을 또 깎아서 2년6월을 선고했다.

결과적으로 부산 본원에 수용되어 있던 3000여 명에 대한 수사는 하나도 진행하지 못했다. 별도의 진상조사기구를 만들어서 상당한 기간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에서도 부지하세월...조속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현재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구제에 대한 논의는 국회에서 관련법 제정 논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자동 폐기됐고, 20대 국회에서는 다른 과거사 사건들과 함께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 중이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진선미, 정의당 추혜선 의원 등이 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도 해당 소위인 안전행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국회에서 이처럼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 토론회 참석자들은 안타까워했다. 김 변호사는 "우리 국회에서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분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니냐"며 "언제 통과가 될지 부지하세월"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형제복지원 등 부랑인 시설 문제는 피해자가 많고, 이 피해자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 자발적인 구제신청이 어렵다는 점 등 특수성이 있어 이들에 대한 특별입법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 앞에서 지난해 11월 7일부터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노숙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의 한종선 대표는 "법이 통과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작년 9월 27일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가진 뒤 청와대에 면담 요청을 해서 행정관을 만났다. 행정관에게 '청와대 차원의 입장 발표를 하거나, 국가인권위 등 독립기관에서 말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행정관이 가능할 것 같다고 답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더라. 기다리고 있다보니 피해자들은 또 트라우마가 막 일어나서 한 분은 분신을 하겠다고까지 하더라. 그래서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노숙농성을 시작했고, 농성 한달 만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공범이 아니었나"

한편, 형제복지원 등 부랑인 시설 피해자 문제가 30년이 넘게 진상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는 밑바탕에는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벌인 '사회정화사업'에 동조했던 많은 '공조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임미리 한신대 학술원 전임연구원은 "부랑아들이 끌려갈 때 박수를 치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라고 신고한 시민들도 공조자"라면서 "국민 다수가 저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했다. 

연극인 임인자 씨도 "<영화 1987>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은 기록하지만, 김계원 형제복지원 수용인의 죽음은 기록되지 못했다. 또 5.18에서 수많은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사회하층민이 싸우다 죽었지만 이들의 죽음은 누구도 기록하지 않는다. 계급적 차이로 수많은 죽음이 지워졌고, 형제복지원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것도 우리 사회에 깔려 있는 계급적 차별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인자 씨는 또 "형제복지원 수용 기록을 보면 거의 매일 경찰이 부랑인을 단속해 형제복지원으로 넘겼다"며 "당시 부랑인 단속을 했던 수많은 경찰들, 공무원들도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박순이 씨는 특별법 제정과는 별도로 국가 차원의 사과를 요구했다.

"지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배보상이 아닌 국가의 사과다. 형제복지원에 끌려갔기 때문에 내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꿈을 빼앗겼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정부의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의 사과를 꼭 받고 싶다."


▲ 8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토론회. ⓒ프레시안(전홍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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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기자 onsca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 프레시안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프레시안 기자들과 함께 취재한 내용을 묶어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등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도 계획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아이 덕분에 무계획적인 삶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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