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존재, 알베르토 자코메티
앙상한 존재, 알베르토 자코메티
[박물관의 '주름'] <국민일보> 창간 30주년,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
앙상한 존재, 알베르토 자코메티
# '주름'의 의미는 메를로 퐁티의 '존재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움푹한 곳', 즉 이면을 말함. 여기서 표현한 '주름'의 의미는 드러난 전시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박물관의 전반적인 경영과 사회적 책임 이행을 보려는 것으로 그 의미를 담고자 한다. 박물관은 넓은 의미로 미술관과 과학관, 기념관과 유적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은 많다. 그러나 그 의미를 통해 인격적 성장을 생각하는 글은 만나기 어렵다. 전시를 보는 행위는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한 걸음이다. 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이 글은 전시비평이라 하나 교육비평에 가깝다. 전시를 교육의 시선으로 보려한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느 샌가 손가락 사이로 '의미들'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다. 그걸 붙잡고 싶어 기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독자들과 마음이 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가장 이해하지 못한 그것,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자코메디- 

우리 삶은 무언가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예술가는 가고 작품은 남는다. 작품이 울림을 줄때는 언제일까. "그렇다"고 고개가 끄덕여 질 때, 작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때, 뭔 진 모르지만 울컥하거나, 머리와 가슴에서 작품이 맴돌 때일 것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 작품은 "이해 못할 것"의 결과였다. 그에게 화두는 인간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했는가?"라는 궁극의 질문이 자코메티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에 이끌려 조각을 시작했다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는 떠났고 작품은 남았다. 거칠고 빼빼마른 조각상은 한 눈에 봐도 척 알 수 있다. 작품은 고개를 바로 세운 응시하는 인물들이다. 작품의 무엇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바람소리가 작은 틈새로 휘파람을 불던 날이었다. 전시 이름이 "현대조각의 거장"이다. 작품의 가치는 무엇일까. 전시를 본다는 것은 전시를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흔들어 놓는 울림일 게다. 내가 보기에 한강의 기적을 자랑삼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일, 성찰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사회는 빠른 것이 느린 것보다 더 선호되었다. 물질이 정신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펙이 능력보다 사회를 지배했다. 예술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단순 소비되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에 주목한 이가 있었다. 

변화는 시작되었다

2015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크 로스코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목마른 말처럼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마크 로스코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전시장은 조용해야 한다. 그리고 음악 같은 것으로 작품 감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공식을 이 전시가 깨뜨린 것이다. 누가 이러한 도발을 한 것일까? 자코메티 전시를 개최한 코바나 컨텐츠였다. 이 단체의 대표를 만났다. 왜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 김건희 대표는 어릴 적 본 작품이 가슴 속에서 싹터가면서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대표의 어린 시절, 가슴을 울린 작품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어린이가 작품을 만난 건지 작품이 어린이를 만난 것인지 의아하다. 작품의 힘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을 흔드는 위력이 분명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아래부터는 자코메티전)으로 유명한 작품을 접했다는 자랑을 일삼기는 어렵다. 작품이 탐색한 것은 오래된 슬픔이다. 나는 이 전시에서 다른 빛깔을 보았다. 이 전시는 살아있음에 질문을 던졌다. 작품을 보는 내내 관람자들은 묵직한 걸음을 걸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라고 밀쳐내는 듯한 물음에 빨려 들었다. 작품은 자코메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작품 속에 자코메티를 빼고, 관람자의 마음을 상감(象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작품은 자코메티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 되었다. 

▲ 자코메티는 한 시대를 존재의 물음을 물으며 살았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대부분의 현대미술 전시는 어렵다. 유식함을 갖추지 못하면 그 의미를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미술사 지식이 없는 관람자가 작품을 볼라치면 무식이 탄로날까 두렵게 만든다. 관람자는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는 체를 해야 한다.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수긍해야 한다. 미술관의 전시는 그렇게 구별짓기를 반복한다. 어려운 개념들이 남용된다. 거기에 다른 생각은 자리 잡기 어렵다. 한편 블록버스터 전시는 소위 '돈 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나 역시 상업성을 띤 전시들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으로 외면해 왔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 전시는 방학 때만 되면 어디서든 열린다. 그 전시는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작가의 삶을 줄줄 외는 어린이들이 생길만큼 전시는 대중에게 충분히 소비되었다. 작가의 정신보다 작가의 기괴한 행동을 더 강조하는 전시는 이제 한국 사회의 필수품처럼 보인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존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자코메티전은 존재를 탐구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어려운 전시용어를 쉽게 풀려고 노력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다른 전시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도전이다. 작품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관한 큐레이터의 고민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왜 보아야 하는가.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작품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와 같은 큐레이터의 고민이 패널에 담겨 있다. 패널은 이렇다. 

흐름을 쉽고, 간단하게 

"작가들은 사물의 재현과 기록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1839년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카메라기술은 미술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작가들의 관점과 시대적 메시지가 작품에 담기게 되었고, 사물의 관점과 감정, 사상을 담은 표현이 표출했다." (김건희, 2017) 

작품을 설명하기보다 왜 작품이 달라졌는지를 밝히는 패널의 설명은 독특하다. 다른 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관람안내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관람자에게 전하기 전에 작품을 '보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작품을 누군가의 설명에 의지해서 전달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는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전시 패널에서 큐레이터의 관심사는 관람자의 성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왜 우리는 전시를 보아야 하는지, 그 전시가 각 관람자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할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큐레이터는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다. 큐레이터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문제는 전시가 단순하게 소비되고 마는 현상과 '생각하지 않음'을 자신의 문제로 '본 것'이다. 

▲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작품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다. 겉이 꺼칠한 조각은 결국 '성장판'임을 말한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근대 서양에서 왜 작품은 달라졌는가. 사진기가 작품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전시 패널은 작품이 왜 일종의 기록에서 작가 자신의 관점으로 이동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키워드로 정리했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도 재현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재현의 의미가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알린다. 

"사물의 형태 재현에서 사물의 본질 재현으로 목적이 달라졌다. 현대미술이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 또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작가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김건희, 2017) 

핵심을 건드리는 '보는 법' 

대부분의 유명 전시들은 작가를 우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을 당연시한다. 대부분의 전시에서 작품 설명은 작가와 관람자 간 대화를 매개하지 않는다. 전시장에서 대중을 위한 설명 대신, 작품을 깊이 연구한 연구자의 시선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지식을 과시하는듯한 설명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전시에서 관람자들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하고 반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준비되지 않으면 전시를 보지 말라는 경고와 같다. 알면 더 많이 볼 수 있지만, 지식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런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아는 것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전제는 일반 대중에게 무식하면 작품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아닐까. 슬픈 일이다. 

▲ 아네트의 흉상 IV. 자코메티가 인간을 탐구하는 방식은 관계 속에서 내면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작가에 대한 장황한 설명과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 작품에 담긴 시대 등은 미술사 전공자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일반 대중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그런 설명은 작품을 만든 그 시대의 문화, 예를 들어 서양미술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문화를 추종케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보지 못하게 하고, '저기 그들'의 문화가 이식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런 해설은 의미를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보는 법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고 작가의 정신을 생각해보는 설명은 정말 만나기 어렵다. 

우리나라 교육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내가 보기에는 '생각'이다. 우리 교육은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점수를 잘 받는 '정답 맞히기'에 열중한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물음에 당황한다. 생각을 말하는 문화가 아직 정착되어 있지 않다. 생각을 말하기보다, '한 말씀' 받기를, 전달받아 축적하는 데 목말라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까. 큐레이터는 관람자들이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자코메티전은 이런 점에서 관람자에게 친절하다. 

"사진이 발견된 이후로는 내가 사람을 똑같이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난 초상화를 그리지도, 만들지도 못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생각한다는 것

큐레이터는 전시 패널에 이런 말을 적어 관람자를 유혹한다. 코바나 컨텐츠는 왜 이 일을 하는 걸까. 김 대표는 "문화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현대미술이 해야 할 시대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묻다가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는 대표의 말에서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 철학이 없음을 염려했다. 국공립박물관 등에서 열리는 전시가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아 폭력으로 느껴진다고도 했다. 너무 어렵다는 것. 그의 문제의식은 '관람자를 생각하게 하려면?'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하려는 문제해결은 작품을 간추리고, 대중이 알기 쉽게 설명을 곁들이고, 공감을 일으키도록 전시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재미를 주는 전시가 아니었다. 김건희 큐레이터 겸 대표는 오랫동안 교육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교육을 통해 가치를 전달하는 문화단체를 추구해 온 것이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문화생산을 위해 기업이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문화는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대중을 이끄는 것"이라고 했다. 소비만 강조되는 현실에서 사명감을 갖는 기업을 보여주고 싶다 했다. 김건희 대표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전시란 왜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는 대중을 기르는 작업이고, 이는 다른 측면에서 작가를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김건희 큐레이터 전시 패널의 발언을 보자. 

▲ 서있는 아네트(1954년경). 자코메티는 존재의 '깊이'를 최소한의 손질로 드러냈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왜 사람들은 자코메티 생각의 가치에 그토록 높은 값을 매겼을까? 생각의 시대. 생각이 가치를 결정, 예술작품은 시대를 담는 거울이다. 시대를 알리다. 시대를 깨우다. 인간과 삶의 본질을 찾아. 나에게 숭고함은 예술 작품 속이 아닌, 정확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한다.' 욕망과 허영을 비워낸 인간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시선, '상처' 

상처를 받지 않고 자란 영혼이 있을까. 상처 없이 성장하는 생명이 있을까. 우리는 상처를 입히고 동시에 상처를 입는다. 상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상처를 외면한다. 그 상처만을 찾아내어 비추기를 수십 년 간 해낸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알베르토 자코메티다. 자코메티 스스로 가치를 만들었다기보다, 그가 머물렀던 그 시대에 그 작품을 읽어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살아 있는 게임을 이유 없이 그만 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욕망이 너의 눈을 가려 삶을 이끌었다면, 인생은 생각보다 허망하고 덧없는 꿈이었음을 탄식하리라." 

자코메티의 관심은 모든 존재의 상처였다. 그가 상처에 유독 관심을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게 상처는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살아 있는 자의 비통함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는 상처의 흔적 같은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 조각들은 전혀 매끄럽지 않다.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닭이 검불 속에서 먹이를 찾으려고 헤집어 놓은 장면 같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해체된 모습이다. 자코메티 조각에서 모든 욕망은 제거되었다. 뼈대위에 붙은 살점은 삐죽이 세운 강철의 외피일 뿐이다. 그 표피에서는 그저 껍질로만 존재를 만날 수 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누구나 패배자”라는 자코메티의 발언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패배자 인간을 조각한 자코메티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처를 관객이 다시 보도록 하였다.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인간은 해탈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비통함과 아쉬움이 묻어난다.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자코메티 작품을 만드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응시하다, 내면을 

자코메티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를 택했다. 형상을 지탱하는 골격에 간신히 붙어있는 표피들은 마치 꼬들꼬들 마른 곶감 같기도 했다. 그에게 빼기란 무엇일까.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제작 과정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걷어내는 것"이라 했다. 그는 조각에 그 어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삭제했다. 그 지우는 행위는 비워냄의 과정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는 '실존'은 덧없음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가버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그는 주목했다. 그가 말하려는 실존은 마치 구도자와 같은 모습이다. 

▲ 앉아있는 남자의 흉상 (로타르 III), 1965-1966. 밖을 향한 시선을 안으로 함축했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자코메티는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어느 날 그의 모습을 거리에서 발견하는데, "이 개는 바로 나"라고 하였다. 개가 후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듯이, 자코메티도 실존을 탐색하는 여정에 있었으니까. 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것을 작품에 남기고자 했던 자코메티 내면의 시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변하는 영혼"이었다. 그가 집중한 조각의 정수는 머리였다. 그는 생명력의 근원을 머리로 보았다. 생각할 수 있는 본질도 그 머릿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보는 시선은 흔히 어쩔 수 없어서다. 그래서 그 상처는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상처를 직시한 자코메티는 그 상처를 적극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 살아있음은 상처받는 것이고, 이는 영혼에 불을 지피는 것이라 말한다.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을 '성공에 가까워지는' 인간상으로 그렸다. 

"우리는 실패하였는가?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무언가 새로운 것이 또 시작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 한다." (김건희, 2017) 

그의 작품은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다. 머리를 떨구거나 아래를 보는 작품은 없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작품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한다. 응시의 시선은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한다. 

응시함은 내면을 본다는 것과 같다. 내면에는 욕망이 꿈틀거릴 테지만, 그 꿈틀거림은 내면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밖을 향하기 때문에 자칫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자코메티에게 응시는 안을 향한 시선이다. 살아있는 눈빛은 안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는다. 따라서 작품은 역동적이지 않다. 곧추세운 자세는 정면을 향해 시선을 정박하고 있다. 내면에는 "이 뭣고!"와 같은 메타적 시선이 자리한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선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죽은 자의 해골에 불과하다. 결국 죽음과 개인을 구별해주는 것은 시선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생각을 묻는 도슨트 

자코메티는 물질을 남기지 않았다. 영혼을 남겼다. 그 영혼들이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자코메티의 작업 뒤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전시장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김.찬.용. 전시해설가다. 그에게 전시는 무엇일까. 그에게 물었다. 답은 "그의 인생"이었다. 전시가 아닌 다른 것을 하려고도 했단다. 그런데 전시가 다시 그를 불러냈다. 그를 부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과거를 살았던 예술가, 현재를 살고 있는 관람자다. 그의 삶은 불안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배고프고 힘들다고 했다. 우리 청년들이 그렇듯이. 생계가 안 되는 해설을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고 했다. 가슴이 아프다. 

국공립박물관에서 대부분 도슨트(docent)는 자원봉사자로 대체되어 있다. 전문 도슨트 신규 채용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박물관은 전시에 예산을 쏟아붓지만, 전시를 대중에게 매개하는 사람에게는 인색하다. 박물관이 이미 입장료를 무료로 책정함에 따라 질 높은 전시는 제거되었다. 외국을 다녀온 많은 사람이 전문 도슨트 설명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공립박물관에서는 전문 도슨트를 찾기 어렵다. 해설이 이렇게 하향으로 곤두박질치는 이유가 뭘까. 박물관 경영자들의 의사결정이 잘못된 탓이라고 본다. 해설을 전시 패널을 읽고 전달하는 것쯤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자코메티 전시를 담당한 해설사의 설명을 맛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전시가 관람자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그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한번만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과거 김찬용 해설가의 설명에 감동한 사람이 그가 해설하는 전시를 따라 전시에 몰리고 있었다. 

▲ 알베르트 자코메티전은 김찬용의 해설로 우리의 가벼운 삶에 묵직한 '추'를 갖게끔 한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국공립박물관에서 도슨트를 채용하긴 한다. 직원으로 채용된 도슨트는 외국어를 기본으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박물관들은 중국어, 영어, 일본어 등 외국인을 위한 해설 서비스에는 돈을 쓰지만, 정작 세금을 내는 내국인 관람자를 위한 좋은 서비스는 외면한다. 내국인 관람자를 홀대하는 국공립박물관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은 큰 문제다.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의미를 발굴하고 전시를 탐색하는 관람객 층이 두터워져야 하지만, 예산은 이곳에 배분되지 않는다. 이런 정책이 박물관에서 의미를 발굴하여 그것을 나누는 사람들의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젊은이들은 전시와 공연을 일상에서 찾는다. 그만큼 문화예술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가치를 발굴하고 안목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은 매우 부족하다. 소비자의 높은 안목이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그 결과가 문화산업진흥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손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경험을 소비하는 문화소비가 문화생산으로 이어져야 한다. 작품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늘어나게끔 하려면 우선 충분한 도슨트가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 정책이 관람자의 수준을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자코메티전에서 만난 이 열정적인 도슨트 같은 해설사를 채용할 필요가 있다. 전문해설사를 양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히 해야 할 중요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다. 

관람자에게 전문 도슨트의 전시해설 평가를 들었다. 이미 그들은 전문 도슨트의 고정 팬이 되어 있었다. 이윤지, 백양숙 모녀는 춘천에서 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기위해 왔다고 했다. 전시가 쉽게 느껴지는데다, 설명이 의미를 함축해서 좋다고 했다. 경기도에서 온 이진아씨도 전시와 해설을 보고나서 '죽음과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한 60대 남성이 있었는데, 전시와 전시해설 서비스에 대해 물었더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며 어렵다는 반응도 보였다. 전시장을 나오면 나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는 벽면이 나타났다. 그 글귀들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전시의 힘이 느껴졌다. 

내가 전시를 20년 넘게 보아왔는데 이런 전시해설은 처음 만났다. 갈고 닦은 실력이 돋보이는 해설이었다. 그 해설사는 자코메티를 옆집 아저씨처럼 설명했다. 그의 예술혼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대비시키면서 아내와 동생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명했다. 그에게 각별한 과제를 남겨준 여행 중 만난 한 할아버지는 그가 죽음에 몰두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했다. 

그의 해설에는 중요한 원칙이 들어 있었다. 관람자 존중의 태도와 관람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모든 해설은 스토리텔링으로 구성되어 쉽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예술가를 영웅시하는 시각은 배제했고, 관람자가 예술가의 희귀한 행동에 귀 기울이게끔 하지도 않았다. 자코메티가 무엇을 화두로 삼아 작품에 몰두했는지, 그 문제가 해설의 중심이었다. 관람자가 '나는 어떨까'하는 생각에 머무르게끔 했다. 

김찬용 해설사는 해설하는 그도, 해설을 듣는 관람자도 이 시대의 삶에 대해서 도반(道伴)처럼 생각을 나누도록 했다. 그가 던진 해설의 절묘는 질문에 있다. 그는 관람자들에게 생각을 물었다. 해설자 자신도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보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다. 그는 작품과 거리두기를 하기보다, 작품과 함께 울고 웃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해설은 이런 특징을 보인다. 간략하게 정리한다. 

"그가 어떻게 죽음을 경험했는지를 보세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이 있기까지 그 곁에서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하세요. 조각에 어떻게 생명을 담을 수 있었을까요? 자코메티가 탐구한 실존의 의미는 조각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상처받은 이 영혼의 시선을 포착한 작품들, 시각교정을 해 주시고요, 흔히 피카소는 그냥 천재, 자코메티는 천재였던 예술가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자코메티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난 네 명의 여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야네트의 시선이 행복한 것처럼 느껴지나요? 자코메티는 이 시대의 영혼, 상처받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고통을 숭고하게 바라본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깊은 생명을 포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업적보다 예술에 빠졌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도화선이 된 여인은 바로 카롤린이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자코메티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전>은 성찰을 일으킨다. '침묵과 명상, 기도의 방'에서 사람들은 내면을 보았다. 잔잔한 음악 속에서 각자는 상처를 보듬었을 것이다. 자코메티가 했던 것처럼 상처를 보면서 그 상처가 무엇인지를 보려했을 것이다. 우리가 자코메티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세운 상처를 공감할 수는 있다. 크든 작든 상처는 내면에 딱지처럼 얹혀 우리를 속박한다. 하지만, '그 떨어지지 않는 딱지는 우리 내면에서 찌꺼기가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자코메티식 해석은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 삶을 경청하게끔 한다. 

단 한 번의 기회인 인생에는 저마다 고통이 있고 나름의 희생이 있다. 자코메티도 그런 아픔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가 경험한 실존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의 내면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걸어가는 사람>은 현존을 말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걸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 앞에도 있었고, 우리 뒤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전시에 성찰을 입힌 코바나 콘텐츠 김건희 대표는 국공립박물관(미술관)의 한계를 메운 고마운 문화사업가다. 그가 만들어낸 성찰의 힘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자못 궁금해진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나는 지켜보는 역할을 해야겠다. 그와 함께 하는 전시해설 전문가에게도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문화와 예술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것이 그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될 때. 

<슬픈 시선의 로타상>은 마치 석가모니 부처의 고행 같다. 우리의 모습도 그 작품에 내재되어 있다. 슬픈 시선을 가진 우리는 로타를 통해서 재현되었다. 우리를 보는 것은 내면을 보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평창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평화올림픽이라는 상징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열어간다. 평화라는 바람을 일으키는 그 힘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 걸어가는 사람, 1960. '우리는' 걸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걸음을 걸어야만 한다. ⓒ코바나컨텐츠 제공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김건희, 2017)

우리는 어디를 왜 걷는가?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전시를 다 보고 나서 대표와 다시 마주했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는 말이 당신 자신에게 한 말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나도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인류가 그렇게 걸어온 것처럼. 나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자코메티가 걸었던 길처럼 존재를 잇는 순례길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우리는 모두 '앙상한 존재'로 낙엽처럼 땅에 묻힌다. 그 길을 향해 우리는 걷고 있다. 그 길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순간의 켜들을 담아낸 자코메티의 조각. 그 안에서 삶이 거듭날 수 있을 듯하다. 

전시명 :알베르토 자코메티전
전시기간 : 2017. 12. 21 - 2018. 4. 15
전시장소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문의 : 02-532-4407. www.giacometti.co.kr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museumschool@naver.com 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교육학박사. 성공회대 연구교수. 박물관의 전문직인 정학예사.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기관 <새롭게보는박물관학교> 대표. 박물관은 일반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곳이다. 박물관에서 성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