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정치' 뭉개버린 '어떤 진보진영'
'생존자의 정치' 뭉개버린 '어떤 진보진영'
[기자의 눈] '성폭력'은 '섹스' 스토리가 아니라 치명적 '폭력'이다
2018.02.26 15:54:31
'생존자의 정치' 뭉개버린 '어떤 진보진영'

방송인 김어준 씨의 '미투(#Me Too)’ 관련 발언을 놓고 논쟁이 뜨겁다. 김 씨는 지난 24일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미투'를 보면 '지지해야겠다', '이런 범죄를 엄단해야겠다'는 게 일반적 정상적 사고방식"이라면서 "그런데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냐. '첫째, 섹스, 좋은 소재. 주목도 높다. 둘째, 진보적 가치. 그러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서 진보매체를 통해 등장시켜야겠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5일 "피해자들의 인권 문제에 무슨 여야나 진보·보수가 관련이 있느냐“고 비판했다. 야당인 바른미래당도 논평을 내고 김 씨의 발언이 "성폭력 피해자를 '공작원'으로 모독"한 것이라며 "성폭력 피해자마저 보수와 진보, 좌우의 정치 논리로 악용한 김어준의 망언은 지금껏 드러난 그 어떤 추악한 성폭력보다 질이 나쁘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비판이 쏟아지자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은 "금태섭 의원님, 이것은 '댓글단'의 공작이다. (김 씨에게) 생채기를 내려는 악성 댓글공작"이라고 김 씨를 옹호하고 나섰다. 손 의원은 "시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과 고2 국어 수준의 독해력이 필요한 문장이었지만 이렇게 해석이 분분할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정청래 전 의원도 금 의원을 겨냥해 "난독증도 이런 난독증이 없네. 뜨고 싶었나. 냅둬요. 천지분간도 못하기는"이라고 비난했다.

김어준의 '음모론'은 '선동'이 목적이다

김어준 씨는 자신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26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진행하면서 "'미투' 운동을 공작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거지 '미투' 운동이 곧 공작이라고 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주장의 요지는 미투 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며 "일부 언론과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나를 모략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보통 나에 관한 대부분 부정적인 기사만 외부에 노출한다”고 또 다른 차원의 '공작론'을 제기했다.

김어준 씨의 미투 관련 발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공작, 내지는 음모론이다. 사실 본인 스스로도 말했지만, '음모론'은 딴지일보 총수, 나꼼수 진행자 등 방송인으로서 그의 일관된 '관점'이었다. 따라서 그의 발언이 미투 운동에 대한 평가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옹호자들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김어준 발언의 목적은 "예언”이며, 그 예언의 내용은 '앞으로 벌어질 공작 정치에 대한 경고'이자 자신의 발언에 동조하는 이들에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선동이다. 현재도 문재인 대통령을 공개 지지한 이윤택 연출가, 고은 시인 등 일부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미투'가 터져나오고, 이런 흐름이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거취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등 정치적으로 여권에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기도 하다. 김어준 씨는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지거나, 더 거세질 경우에 여권 지지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선동'을 하고 나선 셈이다.

'성폭력'을 '섹스' 이야기로 표현한 김어준의 '감수성'

김어준 씨가 현재까지 발생한 '미투' 운동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정치공작으로서 미투'를 상정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진 '미투' 운동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던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문화에 저항하는 '미투' 운동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또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선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공작의 사고 방식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냐. 첫째, 섹스.”라는 김 씨의 발언을 보면, 성폭력을 '섹스 스토리' 정도로 단순화하고 있다. 성폭력은 치명적인 수준의 폭력이다. 백번 양보해 '대중은 성에 관한 이야기에 무조건적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단어 선택에서 성폭력에 대한 그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 씨와 그의 지지자들은 '공작 정치'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섬에 따라, 현재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위드 유(#With You)' 운동을 벌이고 있는 많은 이들과 분명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미투' 운동이 진보진영의 '분열'을 가져올 것을 걱정했지만, 오히려 그의 '예언'이 진보진영의 '분열'을 가시화 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생존자의 정치'를 외면하는 '어떤 진보진영'

페미니즘에선 성폭력 피해자를 '생존자'라고 부른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피해자'를 넘어서, 끔찍한 폭력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용기를 강조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피해 경험을 폭로하고 가해자의 잘못을 고발하고 나선 '증언자'는 생존자에서 한발 더 나간 정치적 주체다.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가해자(내지는 가해집단)는 자신이 가진 힘(권력)에 기반해 폭력을 휘두른다. 때문에 피해자(피해집단)는 자신이 겪은 피해를 증언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행여 목격자가 있더라도 가해자의 권력이 두려워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침묵'을 깨는 행위는 큰 용기와 정치적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미투' 운동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까닭도 바로 폭로에 나선 여성들과 그 동조자들에게 내재된 '힘' 때문이다.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저항 또는 순응을 택했던 여성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를 각자의 자리에서 표출하고 있다. 나의 이름과 얼굴을 걸고 '폭로'를 하는 행위는, '당신'들이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다.

이런 '생존자의 정치학'은 비단 여성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장애인, 아동, 시설 수용자 등 우리 사회에서 '인권의 최전선'에 서 있는 숱한 소수자들이 보여주는 정치 동력이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이런 다양한 소수자들의 기본권에 대한 정치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김어준 씨의 '미투' 발언과 그에 대한 동조는 한국의 '어떤 진보세력'이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위치를 극명히 보여준다. 보수세력의 대척점에 위치하며, 여성 등 소수자 인권 문제는 자신들에게 불리할 때 외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다. 이들이 '나'를 대의하거나 대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김어준 씨처럼 '성폭력'을 '음모론'이나 '진영론'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피해 여성에게 쏟아지는 '꽃뱀'이라는 비난이 바로 가장 저급한 음모론이 아닌가. 또 정치권 내 성폭력 사건은 항상 '상대 진영의 음모'라는 반론이 있어왔다. 가해자가 주로 자유한국당 등 보수정당이었고, 보수정당 쪽이 '음모론'을 주장했다는 점만 다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홍기혜 기자 onsca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 프레시안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프레시안 기자들과 함께 취재한 내용을 묶어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등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도 계획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아이 덕분에 무계획적인 삶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