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북침'이 아닌, 공동체 경제의 번영으로
자본의 '북침'이 아닌, 공동체 경제의 번영으로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⑤ 성장의 경제에서 사람의 경제로
6.25동란이 만들어 낸 '폭력 사회'

한국은 심하게 말하면 거대한 노동·노예 집단, 거대한 정신병동의 폭력국가, 폭력사회였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성폭력을 비롯한 다종다양한 숱한 아동폭력, 학교폭력, 교육이라는 폭력, 이데올로기 폭력, 조직폭력, 노조 파괴 폭력, 조 씨 일가의 갑질 폭력 등등 가히 전(全) 사회가 폭력을 내면화한 폭력집단, 폭력인간이 된 근원에는 자본의 폭력까지 성장시킨 주범이자 총합으로서 국가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폭력의 기초이자 시발점은 국가폭력이며, 특히 군대, 경찰, 사법제도 등의 제도화된 폭력이다. 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가 그 정점이다.

일제의 폭력국가 유산은 깊고도 넓은 일상의 폭력이었다. 모든 갈등을 폭력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일제 잔재의 청산은 친일파의 부활과 반민특위 해체와 함께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구, 여운형 등의 암살을 포함한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폭력 일상화도 결국은 일제 폭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땃벌떼와 용팔이의 후예인 어버이연합 등의 폭력단체들도 마찬가지다.

6.25동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같은 폭력의 일상화와 국가주의라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시작조차 되지 못한 데 있었다.

6.25 동란으로 기사회생한 이승만 독재정권 이후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독재 체제, 이명박근혜의 저강도 독재 체제 등 길고도 긴 폭력국가의 지속은 한국의 인민들에게는 모태 폭력의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광주항쟁의 폭력 진압은 한국전쟁의 양민학살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1950년 대한민국 제2대 총선거인 5.10 선거에서는 사실상 초대 이승만 친일정권을 붕괴시키는 투표 주권의 혁명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전체 의원 210명 가운데 이승만의 대한국민당은 겨우 2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야당인 민주국민당도 24석이었다. 무소속 당선자는 전체의 60%인 126명이나 되었고,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총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간파도 다수가 당선되었다. 대통령 간선제였던 당시의 헌정 체제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었다. 6.25 당일 아침에도 이승만은 한가롭게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물 대통령 이승만을 살려낸 것이 다름 아닌 김일성과 박헌영 주도의 6.25동란이었다.)

국가폭력과 자본의 폭력이 결합한 정점에 다름 아닌 핵발전소와 핵무기가 있다.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과정이란 바로 이 같은 국가폭력의 근원을 인민 스스로 해체하고 치유하는 공동선의 과정이어야만 지속가능한 평화 체제 구축의 기초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치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해방 공간, 마을공동체

아이들이 어떠한 피난처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가해자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 심리적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자 피난처는 자신과 그 가해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성장시키고 확대하며 결국은 사회 폭력과 일상의 폭력을 강화시킨다.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수많은 피폭 정신질환자를 양산한 원흉은 전쟁국가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6.25동란은 전 인민을 빨갱이 사냥의 폭력에 노출된 희생자이자 폭력을 휘두르는 정신병동 사회의 폭력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의 인민들은 거의 대다수가 결국에는 권력과 힘을 추구하고, 국가폭력의 배다른 쌍둥이 폭력인 성장과 개발의 자본폭력까지 폭력을 내면화한 스톡홀름 증후군의 정신질환자 삶을 당연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진보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시 어쩌면 그런 국가폭력을 당연시한 국가주의 추구의 사회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또한 10년 동안 권력을 갖게 되자마자 똑같은 국가폭력을 인민에게 휘둘렀다.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성폭력의 해결책으로 내놓는 각종 성폭력 방지 제도화는 실제로는 오히려 국가폭력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성폭력을 더욱 조장할 수 있는, 어쩌면 문제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국가주의의 측면이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면화된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그것이 수많은 지역의 풀뿌리 모임이고, 우애와 환대의 이웃 관계를 회복하는 자립·자치의 마을공동체 운동이다. 그것이 남북한 적대적 공존을 끝장내는 평화운동이고 한반도 비핵화 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우애를 나눌 수 있는 데서 폭력의 치유는 시작된다. 서로의 피폭에 대해 공유하고 어루만져주고 자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유인들의 연합체야말로 국가폭력과 국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전체 가구 가운데 20% 이상이 1인 가족일 정도로 전쟁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산산이 깨진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4.27 평화운동은 이런 밑바닥 자유인들의 연합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거대한 국가폭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평화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연합뉴스


성장 지상주의에서 사람 우선주의로

자본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선(善)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본주의는 이제 코뚜레를 꿰어 고삐를 죄고 그 탐욕과 방임상태를 억제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결코 자본주의 경제의 헌법이 아니다. 공산주의 경제의 헌법도 아니다.

굳이 헌법의 표현을 빌리면 '국민의 경제' 헌법이다.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되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헌법 제119조)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하는, 재산권의 행사까지도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헌법 제23조)고 명시하고 있는 공동선의 경제를 추구한다.

우리 헌법은 다양한 기업과 생산방식을 포용하는 자유롭고 창의로운 민주주의 경제 헌법이다. 주식회사 같은 자본주의 경제, 공기업 같은 사회주의 경제,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 자영업과 소농 등 소소유자 경제 등 다양한 경제를 모두 용인하고 포괄한다.

자본주의의 성장 지상주의는 폭력이다. 최대한의 이윤과 성장을 위해서 노동자와 국토와 대기를 비롯한 환경은 무자비하게 희생되고 파괴된다. 99%의 인민을 값비싼 기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게 노동자 노예로 부려먹다가 '노동력이 마모'되고 나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살인 미세먼지와 미세 플라스틱, 기후변화 등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지도 모를 환경 재앙의 주범이면서도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오직 이윤만을 위해 폭력국가와 일체가 되어 벌이는 삼성재벌의 정치폭력배 육성과 지원은 자본의 일탈이 아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한 노조파괴 폭력 행사는 자본의 본래 모습 그 자체다. 물론 사회주의 또한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전쟁경제, 폭력경제로 치달았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주인인 서구 산업화 경제 이데올로기다. 결코 사람이 주인인 경제가 아니다. 사회주의 또한 자본주의와 쌍둥이로 국가가 주인인 서구 산업화 경제 이데올로기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현실 자본주의도 이미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자원과 에너지 고갈, 기후변화 등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회와 유리된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폭주는 조만간 붕괴를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 외환 시장의 약 2% 정도만이 대금 결제와 직접투자 등의 이른바 실물경제에 사용된다. 나머진 모두 카지노 투기 노름이다. 이런 투기 노름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는가.

한반도 평화 경제가 이런 카지노 경제 체제에 목을 매달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이미 자본주의 경제 체제도 아니다. 그냥 대를 이어 부와 권력과 심지어 학력까지 세습하는 세습 경제 체제, 봉건 경제 체제다. 천박한 재벌 경제 체제다. 전쟁 세력의 기득권 유지 경제 체제다.

극단의 불평등과 양극화, 1% 상위 재벌들만 피둥피둥 살찌고 나머지 중소 영세기업인과 자영업자를 포함한 대다수 인민들은 나날이 삶에 짓눌리는 이런 경제 체제를 지속시킬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한반도 평화 경제의 새 시대를 맞아 우리는 사람과 공동체가 주인인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대전환을 우리 스스로의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든 전쟁 경제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사람의 경제, 지속가능한 평화 경제의 구축이야말로 이 같은 전쟁경제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게끔 만드는 방파제다.

자본의 '북침'에서 공동체 경제의 공존과 번영으로

남북한과 남북중러 사이에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고 무역 규모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면 그것이 평화체제를 담보하는 확실한 약속어음이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주로 재벌과 기업 홍보지에 가까운 경제지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 대전이 서구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제 교류가 없어서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전쟁의 문제는 다시 강조하지만 정치의 문제다.

판문점 철조망이 걷히자마자 사람이 아니라 자본부터 대규모로 자유롭게 '북침'하는 그런 평화 경제란 재앙이다. 재벌들의 투기 불로소득을 더 확대하는 신경제라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한반도 에너지전환의 계획과 실천 없이 미세먼지 배출 화석연료 발전소를 대규모로 북한에 건설하고, 거대한 송전탑을 북한에까지 마구잡이로 세우는 남북중러 슈퍼그리드 사업이라면 밀양 송전탑 사태를 북한에서도 일으키고자 하는,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한 에너지 적폐 독재 체제의 연명술일 뿐이다.

에너지와 식량은 그저 돈벌이하기 좋은 소비재 산업이 결코 아니다. 에너지와 식량은 인민의 목숨과 직결되는 생존재라는 사실을 성찰해야 한다.

동해안에 가스관을 설치하고 서해안에는 바다와 철도를 이용한 물류 등 경제 기초시설의 구축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속도로와 거대 슈퍼마켓이 생기면서 남한의 읍면동 지역경제가 초토화되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북한에서도 반복하려는 자본의 거대 물류 인프라 설비는 거대 독점자본 체제의 복사판이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바야흐로 몇 % 성장에 집착하는 성장 지상주의의 주술에서 이제는 해방될 절호의 순간이 왔다. 인민의 생활과는 관련도 없고 오로지 극소수 재벌 배만 불리는 숫자 경제는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

한반도 평화 경제는 성장에 굶주린 자본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회가 중심이 되는 국민경제, 공동체 경제의 돌파구여야 한다. 청년 일자리가 수도 없이 생겨나고 불평등과 양극화가 풀뿌리 마을경제부터 해소되는 대안의 경제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반도 번영과 평화의 경제다

사람의 경제, 한반도 평화 경제의 신천지를 여는 주체는 오직 주권자인 인민들 스스로에게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경제를 이 같은 국민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은 오직 촛불 주권자들의 실천에 달려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다른 글 보기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