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운동의 전통이 강하다. 4․19혁명과 6․10항쟁이 보여주듯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냈고, 그렇게 획득한 자유의 공간에서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어왔다. 오랜 역사의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더해 환경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정치개혁 운동, 경제민주화 운동이 그렇고, 심지어 바르게 살기도 운동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괘씸하게 보시는 분들도 있겠다. 대의에 헌신하는 운동가들의 희생과 노고를 어떻게 일개 관변단체 활동과 같은 선상에 놓고 평할 수 있냐고. 좀 더 사려 깊은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바르게 살기는 운동의 영역이 아니라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적 자율의 영역인데다 그 협의회도 운동의 순수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할 만큼 정부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많은 분들이 이런 의견에 공감할 것이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좋은 선거, 좋은 정당 만들기 운동은 어떨까? 이런 취지로 활동하는 매니페스토 운동은 바르게살기 운동과 얼마나 같고 다를까? 오늘은 이 문제를 다루고 싶다.
'참 공약' 선택으로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매니페스토 운동
매니페스토 운동은 유권자가 정당과 후보의 이미지나 개인적 연고가 아닌 공약의 내용과 실현 가능성을 보고 투표하고 당선자도 그 공약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감시․독려하는 정치개혁 운동이다. 여기서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원래 영국에서 정당의 선거 공약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영국과 같은 정책 중심의 선거를 확립하기 위한 운동이 이 용어를 내건 후 한국에서도 같은 취지의 운동에 같은 용어를 붙여 쓰면서 '참 공약'을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 2월 학계와 언론계, 시민단체 인사들이 모여 매니페스토 실천본부를 출범시킨 이래 이 운동이 펼친 활동은 무척이나 다채롭다. 우선 전문가의 도움으로 공약의 구체성(specific), 검증 가능성(measurable), 달성 가능성(achievable), 타당성(relevant), 기한 명시(timed)를 평가하는 스마트(SMART) 지수와 같은 것들을 개발해 언론의 선거 보도와 유권자의 공약 판단을 돕고자 했다. 운동의 취지에 부합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에도 성공해 정당과 후보가 유권자에게 제시하는 "선거공약서에는 선거공약 및 이에 대한 추진계획으로 각 사업의 목표․우선순위․이행절차․이행기한․재원조달방안을 게재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제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를 포함한 정치 활동 전반에 걸쳐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운동 기간은 선거관리위원회가 나서 후보들과 함께 정책 선거를 약속하는 매니페스토 협약식을 맺는 것으로 시작된다. 선거법상의 공약서는 인쇄물로 제작되고 선관위 홈페이지에도 올라 유권자 판단의 중심 소재로 홍보된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당선자들은 공약 이행 상황을 홈페이지에 올려 시민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실행되고 있는 공약을 평가하고 시상하는 매니페스토 경진대회가 해마다 열린다. 그래서 다시 선거 시기가 돌아오면 후보들은 그 공약 이행 성적을 유권자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정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당과 후보는 공약 개발에 몰두하고, 유권자는 그런 공약을 중심으로 지지를 선택하고, 선거 이후 정치는 정책을 둘러싼 토론과 논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누구도 그렇다고 쉽게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것이 없을까? 어떤 이는 한국 유권자들의 연고주의 투표를 탓하고, 어떤 이는 정치인들의 표리부동한 행태를 탓하고, 또 어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 승리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탓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이와 같은 정치개혁 운동 자체에 있다. 이유는 다섯 가지다.
어느 나라나 유권자는 대개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첫째,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에서 제시되는 정책 공약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지지 후보나 정당을 결정할까? 선거 연구자들은 그 기준을 크게 사회적 요인, 태도적 요인, 이벤트 요인으로 나누는데, 이들 요인을 구성하는 세부 내용은 아래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지면 제약상 이들 요인에 대한 설명은 접어두고, 소분류에 포함된 예들 중 어떤 요인이 유권자의 투표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보자.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친지와 동료들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절반 이상은 자신이 평소 지지해온 "정당 보고 투표한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위 요인들 간의 여러 상관관계를 고려하면 정당 일체감, 민주화 동조 여부, 세대, 지연 등이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데이터로도 투표 선택에서 정당이 갖는 독자적 중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다른 나라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유권자들은 대개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그런데 왜 한국 유권자들만 정책 보고 투표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들어야 할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이른바 지역주의가 투표 선택뿐 아니라 정당 일체감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동조 여부가 지역연고 못지않게 정당 일체감과 높은 상관관계를 갖고, 그 지역주의라는 것도 광주항쟁과 부마항쟁의 역사적 전통을 고려하거나 호남 유권자들이 부산 출신 노무현, 문재인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사실을 보면 민주화 균열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그 나라 역사의 분기점을 이룬 혁명적 변화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투표하는 시민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그 역사적 변화의 전통을 체화한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투표 기준을 정책으로 바꾸라는 주장은 과연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공약 신뢰 높이기, 외부 감시보다 내부 합의가 더 효과적이다
둘째, 정책 공약의 가치와 신뢰성을 높이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유권자 다수가 정당이나 그런 정당을 뒷받침하는 정치사회적 균열을 기준으로 투표한다 하더라도 선거 공약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당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가 유권자의 요구와 바람을 정책으로 구체화해 실현하는 것이라면, 그 시작을 알리는 공약도 지금보다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공약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을까? 매니페스토의 원산지 영국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 정당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메니페스토를 작성하는데, 이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당의 경험이다. 노동당은 1970년대를 거치며 당의 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을 겪는데 그 과정에서 매니페스토 작성에 모든 당내 세력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당헌 5조가 그것인데, 매니페스토는 전국집행위원회(National Executive Committee) 특별 회기에 참여하는 이해당사자들의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서만 유효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노동당에서는 의원 그룹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지구당 조직, 그 외 각종 소속 단체들 모두가 매니페스토 작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어떤 방법이 선거 공약의 가치와 신뢰를 높이는 데 좀 더 효과적일까? 내부로부터의 토론과 합의일까? 외부로부터의 조언과 감시일까? 우리가 영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매니페스토라는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좀 더 정확히 말해, 원내 의원들과 함께 사회적 기반을 가진 여러 집단과 단체, 조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당 조직과 운영 방식을 배워야 했던 것은 아닐까?
선거에서 이겼다고 공약을 마음대로 실행할 수는 없다
셋째, 정책 중심으로 선거를 치른 후 당선되었다 해도 곧바로 그 정책을 집행할 수는 없다. 선거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로 흔히 언급되는 루소의 격언을 되새겨보자. "영국인들은 의원을 뽑는 선거 때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 선거는 일정 기간 동안 정책과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할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지난 정부의 실적을 평가하고 새 정부의 운영 방향을 모색하는 제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난 정부가 취한 정책, 새 정부가 취할 정책을 둘러싼 공방이 이뤄지며 좋은 정책을 가려낼 기회도 주어진다. 그러나 거기서 모든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면 '선거주의'(electoralism)라 부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라 말할 수는 없다. 아주 쉬운 예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그의 대운하 공약도 실행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영국 정치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영국은 매니페스토뿐만 아니라 우리가 백서라고 부르는 화이트 페이퍼(white paper)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나라이기도 하다. 백서는 정책 현안을 둘러싼 주요 쟁점과 해결 방안을 담은 정부 보고서를 뜻하는데, 영국 정부는 이 백서를 통해 선택 가능한 정책 대안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의회와 시민의 견해를 모은다. 그래서 영국은 브렉시트든 지방분권이든 의료개혁이든 주요 정책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정부가 백서를 발간하고 의원들과 언론 매체가 그 백서의 분석과 제안을 중심으로 논쟁을 벌이고 동의를 모아 정책과 법률을 결정한다.
한국은 어떤가? 너무 많은 정책들이 백서 발간은 고사하고 별다른 토론과 논의도 없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것은 아닌가? 최근 논란을 부른 최저임금 산입범위 입법은 한국 입법사의 예외가 아닌 전형이 아닐까? 선거에서 다수 지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찬반이 엇갈리고 상황이 변할 수 있는 주요 정책에 대해서는 그와 관련된 자료와 쟁점을 정리한 후 다시 한 번 의회와 시민의 평가를 받으며 대중적 지지를 모으고 넓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고 그래야 정책의 정당성도 강화되고 그래야 정책의 효과도 오래간다.
선관위가 정당과 단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넷째, 정책 선거, 공정 선거를 근거로 선거에 깊이 관여하는 선관위의 역할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영국 노동당 경험에 비춰보면, 정책 선거를 위해서도 정당 조직과 소속 단체가 자유롭게 아래로부터 당원과 지지자의 요구와 바람을 표출하고 결집하는 활동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거운동을 둘러싼 모든 활동에서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조합은 단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과 긴밀한 고리 역할을 하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 정당은 선거구 단위의 지구당이 폐지된 이래 지역 조직을 갖추고 싶어도 그런 활동을 보장할 만한 사무 공간을 가질 수 없다. 법률이 허용하는 선거운동 기간은 13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짧고, 그 짧은 기간에도 정당과 단체가 조직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크게 제한되어 있다.
이렇게 정당과 단체가 비워놓은 공간을 채우고 들어온 것이 선관위가 각종 규제 활동과 함께 펼치는 정책 선거, 공명 선거, 투표 참여 캠페인이다. 선거를 치러본 사람이면 안다. 선관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른 나라 선거를 경험해본 사람이면 안다. 그 어떤 나라도 선관위가 이렇게 많은 광고와 이벤트와 교육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입시 교육을 받아본 사람이면 잘 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두툼한 선거 홍보 책자만 갖고 정책으로 후보를 선택하는 일은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도 없이 문제집만 잔뜩 받아들고 정답 찾기를 반복하는 벼락치기 학원 수업과 다르지 않다고.
선관위는 이름 그대로 선거를 관리하는 관료 조직이다. 그런 조직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기준은 공정성과 중립성이다. 그러나 그 많은 규제를 적용하는 수많은 사례에서 그들이 얼마나 공정하고 중립적일 수 있을까? 정책 선거를 유도한다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연구․홍보․교육 사업 또한 정형화된 기준과 관료화된 처리 방식으로 기득 질서와 기존의 지배적 사고를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영국 가수가 노래했듯이, 감당할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다.
운동은 정부에 가까워질수록 쇠퇴한다
마지막으로 매니페스토 운동과 선관위의 긴밀한 관계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인간의 주체성을 고려해야 하는 사회과학에서 현상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이론이 철의 법칙으로 불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두 가지 이론이 철칙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정치학 전공자들에게 익숙한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으로 모든 조직, 심지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민당 같은 조직도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정치학자 테어도어 로위가 사회 운동의 쇠퇴 과정을 규명하며 제시한 '퇴락의 철칙'(iron law of decadence)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운동은 처음에는 풀뿌리 시민의 참여와 지지로 영향력을 확대하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점점 더 정부 정책으로 수용됨에 따라 운동의 지도부는 시민 조직화보다 정부 관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할애하게 되고, 그 과정이 심화되어 운동은 결국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운동도 비슷한 궤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의 열기와 바람 속에 족출했던 수많은 운동들이 한 때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시대 흐름을 선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가치와 정책이 정부에 수용될수록 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은 점점 더 줄어들어갔다. 급기야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이 청와대와 의회, 지방정부를 대거 점유한 지금 오히려 시민사회의 운동과 공론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황량하게 느껴진다.
매니페스토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운동의 논리에 일부 오류가 있고, 운동의 방향을 다소 잘못 잡았다 하더라도 정당이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민주 정치의 이상은 적지 않은 정치인과 전문가,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모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정당이나 단체 혹은 정치에 관심 있는 시민들보다 선관위와 함께 하는 사업에 의존할수록 그들의 명성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회적 기반은 점점 더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운동이 탄생과 성장, 쇠퇴의 사이클을 밟는 것은 인간의 출생과 성장,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운동이든 사람이든 현명한 판단과 부단한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주변 사람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일을 반드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같은 논리로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믿을 만약 공약, 책임감 있는 정책정당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운동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기 기준이 전부인냥, 자기 해법이 만병통치약인양 행세하며 운동이 정부에 가까워질수록 성과는 줄어들고 폐해는 커지게 된다.
운동은 중요하다. 운동은 정당이 되기도 한다. 운동은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밝힌다. 그러나 운동만으로 좋은 정당, 좋은 정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난 10여년의 매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배웠으면 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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