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빛'이 된 아스팔트 위 '재활용 예술가'
'소중한 빛'이 된 아스팔트 위 '재활용 예술가'
[인터뷰] 제8회 구본주예술상 수상자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2018.10.09 16:23:37
'소중한 빛'이 된 아스팔트 위 '재활용 예술가'
신유아. '재활용 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집회현장 바닥 깔개로 사용된 스티로폼을 꽃 모양을 만들어 용산 참사 남일당 펜스를 꾸민 일은 유명한 일화다. 2005년부터 문화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적(籍)은 문화연대지만 그가 존재하는 장소는 '아스팔트'다. 용산참사, 쌍용차 해고농성장, 세월호 참사, 콜트콜텍, 파인텍... 온갖 분쟁 현장을 두루 섭렵해온 그다. 

운동판에서는 이례적으로 미술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그는 문화기획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세월호, 희망버스, 쌍용차 정리해고 등을 사람들에게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주된 작업이다. 이를 위해 '문화'라는 수단을 쓴다. 

그렇게 10여 년을 '문화'를 무기 삼아 거리에서 활동해왔다. 지난 7일 제8회 구본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신유아 작가를 <프레시안>이 만났다. 선정위원들은 그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두고 "2000년대 대한민국 정치사회에서 행동주의예술을 주도하며 가장 뜨거운 현장마다 신유아가 있었다"며 "각종 억울한 이들의 농성장에서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문화 활동가로서 현장을 주도해냈다"고 밝혔다. 


실제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현장도 억울한 이들의 농성장 중 하나였다. 2009년 용산참사 남일당 건물에서 작가들과 회의하는 모습이 그와의 첫 장면이었다. 길바닥에 탄 자국이 아직 채 지워지지도 않은, 폐허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용산 참사) 뉴스를 접하고 곧바로 용산으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용산 참사 대책위에 들어가 문화 기획을 맡았죠. 그렇게 시작했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처음에는 집회나 추모제를 계속 진행해야 했죠. 분노가 넘쳐났기 때문이에요. 추모제 할 때도 추모곡 이상은 틀 수 없었죠."

우울함의 극대화 되는 장소가 용산 참사 남일당 건물이었다. 신유아 씨는 그러한 우울함을 극복하려 했다고 했다. 작가들이 끊임없이 용산 현장을 찾아올 수 있는 '꺼리'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신유아 씨는 "우울해서 침체된다면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누군가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연대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과정에서 용산 참사 현장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용역들의 '철거' 스프레이로 도배돼 있던 현장은 작가들이 그린 꽃과 사람 벽화로 대체됐다. 검게 그을린 바닥에는 텃밭이 만들어졌다. 추모곡 대신 홍대 인디밴드들의 흥겨운 노랫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삭막한 풍경으로 가득했던 공간은 어느새 사람 냄새 나는 장소로 변화했다. 

"즐기면서 싸워야 해요. 고립된 싸움은 괴로워요"

신유아 씨의 기준은 명확하다. '즐기는 싸움'이다. 고립된 싸움,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싸움은 힘들고 괴롭기 마련. 그런 싸움에서 탈피해서 좀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함께 하는 싸움을 고민한다. 

"2005년 코스콤 비정규직 싸움 초창기 때, 노동자들이 여의도에 농성장을 차렸어요. 그때는 저도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죠. 당시 여의도에는 지금처럼 천막을 설치할 수 없었어요. 각목, 나무 등을 기둥삼아 투명비닐을 치는 게 고작이었죠. 그런데 당시 그렇게 설치된 농성장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어요. 설치된 나름의 홍보물들이 눈에 밟혔죠. 

투명비닐에 빼곡히 적힌 대자보가 연달아 붙여져 있을 뿐 아니라, 각목 등에는 빨강, 노랑, 파랑 천 조각들이 매달려 있었어요. 당시엔 그런 게 농성장 유행이었죠.(웃음) 그런데 저는 그것이 너무나 보기 싫었어요. 일반인들은 그런 것들이 매달려 있는 농성장이 무서워 빠르게 지나갔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농성장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공간으로 남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색다른 기획을 하게 된 배경이다. 무당집처럼 보이게 하던 빨강 파랑 노랑 천을 모두 철거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트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구슬과 전구도 붙이고 철거한 알록달록 천들도 설치했다. 그러자 농성장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여의도의 번쩍거리는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함에 맞서는 대응이었다. "왜 우리는 늘 초라해 보여야 하나."

투명비닐에 붙은 대자보도 다 떼어냈다. 대신 대형 현수막 걸개그림을 그렸다. 당시로써는 이색적으로 텍스트 없는 그림이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이미지 컷으로 대형 현수막 6장을 연달아 코스콤 벽면에 붙였다. 신유아 씨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게 뭐예요?'라고 물어보게끔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일종의 전시회나 다름없었다. 일반인들이 농성장하면 떠올리는 괴리감을 예술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좁히려 했던 셈이다.  

당시의 노동운동은 천편일률적이었다. 관습적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텍스트로 된 현수막을 설치했다. 농성장 텐트에는 빨간 깃발 올려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면서 노동운동 이미지는 굳어졌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대중에게 우울하고 딱딱하게 다가왔다. 

▲ 광화문촛불문화행동, 신유아 작가 ⓒ구본주예술상운영위원회


"기획자로서 중요한 것은 현장과의 네트워크"

신유아 씨는 자신의 활동 근간으로 '재미'를 꼽았다. 재미가 없다면, 즐겁지 않을 뿐더러 싸움도 오래가기 어렵다는 것. 신유아 씨는 "힘들수록 즐겁게 하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연대하는 사람들도 다 떨어져나간다"며 "나도 우울한 현장은 가기 싫어진다"고 설명했다. 

코스콤 농성장 이후, 이 기조를 유지해온 그다. '농성의 이유'를 좀더 많은 이와 공유하고 함께 하고 싶단다.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용산 참사도 그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신유아 씨는 그런 일련의 활동이 자기 혼자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용산 참사 전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당시 거리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이 다양한 활동을 했죠. 그때 활동했던 작가들이 용산으로 넘어왔어요. 그리고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죠. 그것을 취합하고 정리하는 일을 제가 한 것뿐이에요. 제가 모든 것을 기획한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받아서 구체화한 것뿐이에요. 다른 일련의 활동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문화기획자였다. 그런 역할은 쌍용차 해고농성장, 파인텍 등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신유아 씨는 문화 기획자로서의 노하우로 '현장'을 꼽는다. 

"지속성이에요. 현장에 가서 뭐라도 꼼지락거려야 다음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어요. 그러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와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설득도 안 되고요. 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과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위해서는 지속해서 현장 사람들을 만나야 하죠.

싸우는 주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 시점에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읽을 수 없다면, 결국 문화기획자도 수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요. 문화예술인들이 도구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려면 그들과 같이 있어야 해요.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이들의 능력,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게 된다면, 그런 요소들을 종합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어요. 그러면 농성장은 더욱 활발해지죠."

작지만 소중한 빛

어려운 현장, 답이 없는 현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소규모 장기투쟁사업장이 그의 주된 현장이다. 그렇기에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셈이다. 어느 정도 성과도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투쟁'과 '문화'를 접목해 다시금 대중에게 각인하는 일을 한다.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송경동 시인은 그를 '작지만 소중한 빛'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만큼 그를 정확히 표현하는 문장이 있을까. 그의 앞길이 빛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지난 십수 년 수많은 투쟁과 저항과 아픔의 현장에서 작지만 소중한 '빛'이었다. '유아'라는 이름처럼 천진난만한 그의 마음과 정성이 보태지면 어둡고 무겁고 한없이 딱딱하며 침울하던 현장이 일순간 밝아지곤 했다. 특별한 것이 아닌데도 그의 정성이 들어간 작품이 하나 끼어들면 죽었던 몸에 호흡이 돌아오고 핏줄이 돌 듯이 이내 어두웠던 현장에 생기가 돌고, 조금은 밝아진 말들이 오가는 기적들이 있었다. 어떤 고매하고 대단히 탁월하며 심오한 예술 활동도 아니었다. 꼭 필요한 마음이, 꼭 필요한 현장에, 꼭 필요한 만큼 표현되는 소박함이 때론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를 그를 통해 확인하곤 했다. 특별한 전시공간과 오브제가 필요치도 않았다. 그가 마다하지 않는 애칭이 '쓰레기 예술가', '재활용 예술가'이듯 그는 모든 버려진 공간, 버려진 사물, 버려진 인간들에게로 다가가 그 모든 버려진 것들도 온당하게 가져야 할 생명의 빛과 온기에 대해 말하고, 시위하고, 저항했다." 버려진 예술에 대한 찬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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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기자 kakiru@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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