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은 죽었다"
"'생명의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은 죽었다"
[화제의신간] 소설가 김곰치 르포 <발바닥 내 발바닥>
2005.08.27 11:46:00
"'생명의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은 죽었다"
21세기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응당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은 시인, 소설가들일 테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오죽하면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최근의 창작자들을 겨냥해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라며 "문학의 죽음"을 선언했을까.

김곰치의 르포와 산문을 모아 엮은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 2005)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는 1999년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한겨레신문사, 1999)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잘 나가는' 소설가로 나아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그는 소설 대신 발로 쓴 르포를 엮은 책으로 돌아왔다.

***'사실'이 아닌 '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글**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백미는 태백의 폐광촌,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 공사현장, 새만금 간척사업이 한창인 부안을 둘러보고 쓴 네 편의 르포다.

이 글들은 지극히 편파적이다. 한때 잠시 기사를 써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던 그이지만 이 르포를 쓸 때는 애초에 '기계적 중립성'은 관심 밖이었던 듯싶다. 쏟아지는 '사실'들 속에서 허우적대다 정작 '진실'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그것을 가리는 데 더 능력을 발휘해 온 '현직 기자'들에 대한 조롱일까. 감정선이 생생히 살아 있는 그의 글은 '사실'이 아닌 '진실'에 주목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예를 들어 그는 1980년 사북사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80년 사북사태의 광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믿는 건 몸뚱이 하나, 몇 년 고생하면 목돈을 쥘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탄광촌으로 왔을 것이다. 다른 어떤 편법이나 탈법에 기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탄광을 선택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건강한 욕망의 소유자다. 또 광부들치고 번듯한 집안 자식은 없을 것이며 가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며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자기 몸 하나 혹사시켜 가난에서 벗어나 좀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까짓 몇 년 죽도록 고생하지, 하는 그들의 결심은 또한 얼마나 정직한가. 이 건강함과 정직함은 재산이나 학벌이나 다른 뭐든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약은 수로 세상을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역설적으로 너무도 깨끗한 그들 삶의 기반에서 나온다. 바로 그만큼의 '나은 삶'을 향한, 바로 그만큼의 악착같은 그들의 소망, 80년 사북의 광부들 또한 바로 그런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에 결박당한 세상을 구원하라**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과거'로만 열려 있다면 한 때의 진실을 증언하는 '후일담'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가 발로 쓴 르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에 결박당한 기존 가치관의 전복이다. 그는 사북사태를 겪은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탄광촌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다. 노동운동에 대해서, 느낌으로는 누구나 다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진실.

"새삼 노동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대체 무얼 하자는 운동일까. 현실 노동은 결국 자본과 공동운명체, 노동운동은 죽어라고 부모 말 안 듣는 자본의 자식일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호로자식이라도 감히 지 아비를 생매장시킬소냐. (…) 더 중요한 사실은, 폐업이나 자본철수라는 극단적 상황을 떠나서도 현실의 어떠한 노동운동도 그 한계가 빤한 운동이란 점이다. 아무리 강력한 연대투쟁을 벌여도 그들은 자본의 경계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설사 노동자들의 연대체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그 또한 자본의 영역 속이다. 물론 자본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기존의 '자본'은, 아니 발전의 기획, 그 생산력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자본을 해체시키는 건 꿈도 못 꾸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 이런 르포를 써볼 것을 그에게 권한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문학의 어리석은 관습에 매달려 계간지나 독자들 꽁무니나 쫓아다니지 말고, 김곰치 씨만이라도 이 땅의 산과 바다, 강, 나무한테 사랑받는 작가가 되지 그래요." 그렇다. 그는 몇몇 소수의 '소설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라 생명 전체에게 사랑받는 작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 그의 르포야말로 오히려 근대적 '문학'의 정체성에 부합한다.

"새만금 사업에는 대한민국의 후진성이 집약돼 있다. '영남 정권이 추진한 사업, 호남 정권이 마무리 짓자'라는 피켓처럼 지역감정이 작동하고 있고, 개발이냐 환경이냐, 완강한 시대정신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고, 농업기반공사와 전라북도 도청의 힘겨루기처럼 중앙과 지자체의 갈등이 있다. 가난한 민중의 생존권이 있고 공동체가 깨지든 말든 제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라는 낯익은 처세술도 있다. 그러나 새만금 사업의 운명을 내다보는 데는 미래에 대한 엄청난 발상 전환도 있다. 계화도 어민 염정우 씨의 말이 그렇다. '이 사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부터 진정한 분기점이 일어나는 거 아니냐. 통일이 되어도 북한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다. 새만금 사업 중단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정신적 터전이 될 수도 있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1조원이 들어간 사업이라도 중단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이 나라 민중의 새로운 저력이 될 거란 기대다. 아름다운 발상이다."

***'편지의 힘'을 새로 발견하다**

이 책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시인 백무산, 지율스님, 이른바 '도롱뇽 소송'의 2심 판사 등에게 보낸 네 편의 편지다.

그의 말대로 소설은 편지의 힘에 못 미친다. 편지는 무엇보다도 힘이 센 문학 행위다. "불특정 다수라는 제3자의 벽을 부수려는 소설의 꿈은 거꾸러지지 일쑤다.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수십 번 읽듯 수십 번 읽는 작가 자신 외의 독자를 만나기도 무방하다. 편지는 첫 출발부터 소설보다 힘이 세다. 오직 그(녀)가 독자다. 그의 마음을 쟁취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일대 일의 위대한 문학 행위가 편지다. 나는 완벽한 소설에의 꿈보다 완벽한 편지에의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편지들은 매번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지율스님의 마지막 단식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프레시안>에 긴급하게 기고한 편지('지율스님에게 드립니다')는 단식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도롱뇽 소송'의 2심 판사 역시 예상대로 '기존 질서의 구미에 맞는 판결'을 내놓았다. 그는 편지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편지는 어떤 소설보다도 더 편지를 엿본 제3자의 벽을 부수는 힘을 발휘했다. 지율스님의 단식에 지지를 보낸 (혹은 천편일률적인 개발 정책에 대해서 잠시 성찰하는 기회를 가진) 많은 시민들의 각성에 그의 '실패한 편지'가 미친 효과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완벽한 편지'를 쓰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소설'보다 힘이 센 문학 행위의 한 전범을 선취했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

다시 묻는다. 21세기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 책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은 통렬한 고백을 털어놓는다.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관계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해온 것은 문학이었다. 그 문학이 언제부터인지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문학은 이제 기껏해야 동호인들끼리의 취미활동으로 떨어져버린 게 아닌가, 나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문학이 자기 본연의 역할, 즉 가장 근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비타협적으로 얘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김곰치의 이 책 역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여는 소중한 시도다. 하지만 이 시도가 계속되기 위해서라도 그를 외롭게 하면 안 될 것이다. 새로운 문학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함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생명의 아우성이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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