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다시 몽양 여운형인가?
왜 지금 다시 몽양 여운형인가?
[기고] 복지국가실천을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왜 지금 다시 몽양 여운형인가?
오는 19일은 몽양 여운형 선생 65주기 되는 날이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독립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12차례의 테러를 당한 끝에 순국하신 몽양 선생을 위한 추도식이 오전 11시 우이동 묘역에서, 그리고 추모학술대회 가 오후 2시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다.

한일군사협정 체결이다, 일본 핵무장 준비다,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임박이다, 남북방 삼각동맹으로 신냉전이 도래한다는 등 우리 삶의 터전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미-소의 냉전으로 치닫던 해방공간에서 온몸으로 분단과 민족상잔전쟁을 막으려고 애쓰시다 순국하신 몽양 선생이 다시 시작되려는 분단고정과 전쟁위협을 맞아 오늘 살아계신다면 어떤 자세로 나서실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65주기를 맞는다.

익으로부터는 '빨갱이'로, 좌익으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매도당했던 몽양 선생은 2008년 2월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에 대한민국장(독립운동 서훈 1급)으로 추서되 었다.

우리 공동체가 다시 갈림길에 서게 된 2012년, 뜻있는 많은 시민들께서 몽양 선생을 추모하시면서 65주기 추모행사에 참여해주실 것을 요청드린다.

아랫글은 지난 5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필자 주>

1. 몽양 여운형은 누구인가?

선생은 양반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봉건유제를 과감히 혁파했다. 신주를 땅에 묻고 단발을 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토지를 그들에게 나눠줬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서 중국으로 나가기 전에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운동기지를 방문,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세웠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에 영향을 받고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했다. 독립청원의 주체가 필요했으므로 터키의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을 본받아 신한청년당을 조직,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했다. 신한청년당은 한국 근대정당의 효시가 되었다. 김규식의 독립청원서 제출 파견을 알리기 위해 장덕수를 유학생들이 모여 있던 일본 도쿄에 파견, 2.8독립선언서를 발표토록 했다. 장덕수, 최근우 등 청년들은 다시 국내로 2.8선언서를 가지고 입국하여 손병희 등 지도자들에게 소식을 전해 3.1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활약했다.

▲ 몽양 여운형(1886년 5월 25일1947년 7월 19일) ,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상과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자료사진
몽양 선생 자신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집결해있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달려가서 독립청원 소식을 전하고 많은 운동가들이 상해로 집결하도록 권했다. 상해가 모든 국제적 정보와 홍보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양이 상해로 돌아오는 도중에 국내의 3.1운동이 분출하고 있었다. 상해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전 세계에 그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다수 인사들이 조선왕실을 '우대'한다는 복벽론(復辟論)을 찬성하자 몽양은 임시정부 활동에서 멀어지고 1920년대 초 국제적으로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던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중국의 국민혁명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몽양 선생은 국내에 있을 때부터 농구, 야구, 축구 등 스포츠에도 열광했다. 독립운동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대학의 축구팀을 인솔하고 동남아를 순회하기도 했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송환된 것도 상해 야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복역 후 몽양 선생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았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1위로 들어오는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해버린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고 몽양은 사장직을 물러났다. 그 뒤 다시 예비검속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다는 확신에 따라 '건국동맹'이라는 전국적인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고향인 양주 봉안에 머물면서 젊은이들을 만나고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양주의 용문산에는 농민조직이 만들어졌고 징병을 피했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국내의 독립운동 조직이 활동을 정지하고 있을 무렵 몽양의 건국동맹은 가장 활발하게 임박한 민족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몽양의 지도노선의 유연성, 친화성, 개방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건국동맹은 계급운동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이었기 때문에 농민 노동자 지식인 자산가 등 광범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8.15 민족해방이 오자 몽양의 건국동맹은 신속히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도 정무총감 엔도를 보내 자신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받기 위해 몽양에게 질서유지를 위한 치안유지권을 맡겼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송진우에게 여러 차례 참여를 권유했지만 송은 임정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건준은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였다. 9월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인공을 비롯한 상해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서 부역했던 경찰, 군 관료와 친일 기업인 지주 등을 기용해서 군정 기구를 구성했다. 건준과 임정 측은 해체를 요구당했고 친일세력은 미군정의 비호를 받았다.

몽양 선생는 한민당계 인사들과 친일파들의 모략으로 미 군정과 처음부터 순탄치 못한 관계를 가졌다. 암살당하기 하루 전인 1947년 7월 18일 '보이스 오브 코리아' 발행인 김용중에게 건네준 자필 영문 서한에서 "(미 군사령관) 하지장군은 악수를 나눈 뒤 내게 첫 질문을 던졌소. '왜놈(Jap)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 대답은 '아무것도 없소' 였소. 나는 그의 질문과 불친절한 태도에 기가 막혔소." 한민당계와 친일 인사들은 몽양에 대해 미 군정에 모함과 비난을 집중했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건준과 인공이 점차 공산당의 장악 아래 들어갔다는 점이다. 당초 몽양은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부를 표방할 경우 미군정을 비롯한 다른 많은 정파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몽양 세력을 무시하고 조직장악 수단으로 인공을 선포했다. 몽양은 조선인민당을 새로 조직했다. 그것은 조선공산당과도, 한국민주당과도 다른 정당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당도 공산당의 침투로 그들의 주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은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다. 해방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국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 김구 등 우파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당장 독립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강대국 세 나라가 합의한 것을 받아들이고 일정한 신탁통치를 거친 뒤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면 그것이 현실적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이 몽양의 생각이었고 좌익의 판단이었다. 3상회의의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소공위가 진행될 수 없었고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로 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으로 갈린 정국 때문에 중단되었던 미·소공위가 다시 열렸고 미·소공위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했던 몽양이 미소공위의 가장 적합한 협의대상 인물이었다.

좌우합작의 성공은 이승만 등 우파인사들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으로서는 몽양이 미 군정과 남북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 몽양의 제거는 좌우 양측이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었다. 몽양에 대한 테러기도가 빈번해졌다.

공산당은 우선 3당 합당(인민당, 신민당, 공산당)으로 남로당을 만들어 몽양의 좌우합작의 세력기반을 붕괴시키려 했다. 그에 대응해 근로인민당을 창당했지만, 그것마저 다시 공산당 측이 장악했다.

아놀드 미 군정장관이 몽양에게 민정장관을 제의하여 그 임명장을 받으려고 만나러 가는 길에 그는 암살당했다.

몽양이 세상을 떠나자 좌우합작운동, 통일정부 수립운동은 막을 내리고 분단으로, 동족상잔 전쟁으로 가는 광란과 광기만 지배하게 되었다.

몽양이 세상을 떠난 뒤, 백범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북행을 통해 분단을 막아보려 했지만 백범마저 1949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몽양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을 때 백범 김구가 함께 했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두 분의 합작은 좌우의 합작이었을 뿐 아니라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정치인의 합작으로서 남북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몽양 여운형은 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몽양 여운형이 세상을 뜬 뒤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그는 좌익의 대명사가 되었고 북진통일 이외에는 모두 용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평화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가 되어버렸다. 백범 김구마저 암살당하고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몽양 여운형의 이름은 지워졌다. 민주화로 다시 평화통일운동이 되살아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몽양은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독립운동 서훈 2급)에 머물렀다가 2008년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으로 승급되었다.

3. 몽양의 사상은?

몽양 여운형은 그의 시대에 우리 민족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사상-사조와 만났다. 양반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봉건적 사상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중국으로 망명,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사상이면 어떤 것이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었다. 기독교, 민주주의, 공산주의도 독립운동에서는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해방공간에서도 그는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모든 정파가 건국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봤다. 몽양은 진보적 민주주의자, 특히 통일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역동적 중도노선'을 지키려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 '기회주의자'라고 매도당했다.

4. 몽양은 복지국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당시에는 복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복지에 대한 몽양의 개념은 '개로공영(皆勞共榮)'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개로공영하자" <모두 노력하여 함께 번영하자>(조선인민당, <인민당의 노선>, 신문화연구소출판부, 1946)

건국과업의 경제부분에 대한 몽양의 견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드러나고 있다.

"...일체의 제국주의적 봉건잔재의 숙청은 우리 민족의 경제생활의 면에서도 철저히 수행되어야 할 것이니, 이것은 일제 시설인 산업운수기관 등의 몰수와 토지문제의 평민적 해결에 의하여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탕공작은 어디까지나 신국가의 부강과 민족생활의 향상을 위한 경제정책의 방향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니, 산업의 특수한 부분이나 기관을 국영-공영으로 하는 이외에는 광범한 사영(私營)을 용인하여 이윤의 자극과 개인의 창의에 의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상당한 기간을 허여하는 것은 현하(오늘날) 조선사회의 발전단계로 보아 필요한 정책인 것이며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토지에서 유리되는 지주에게 생계의 개척과 근로의 기회를 열어주는 국가적 시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소시민의 다대한(많은) 부분이 그 중소재산을 토지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실정과 토지개혁의 건설적 의의를 연결하여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중요한 의의를 가져야 되는 것이며 다양한 시책이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정책과 아울러 근로인민 대중을 위하여 조직된 광범하고 전체적인 노동입법의 제 정책은신 국가건설의 기본문제로서 절대적 중요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국가의 모든 성원에게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여 실업을 절멸하고, 8시간 노동제와 노동 제 보험, 단체계약권의 확립을 위시한 노동조합 활동의 국가적 보장 등 근로인민의 행복과 자유를 위한 일체의 조치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건국사업에 대한 사견", <독립신문> 18∼22쪽, 1946.10)

이 복지분야에 대한 연구는 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5. 몽양 여운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몽양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나, 국내로 압송되어 합법-비합법 항쟁을 벌일 때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통일독립 정부 수립투쟁을 벌일 때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했다.

1945년 이후 몽양이 비명에 세상을 떠나던 시기는 미-소의 냉전이 첨예하게 진행되었던 시기로서 분단이 거의 절망적으로 다가오던 때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정파들이 미-소 점령군 분할점령 정책에 부응하여 남북 각 지역에서 새로 형성되는 주도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다. 분단을 위해, 점령군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남북의 기득권 체제는 70년 가까이 유지-강화되어 왔다.

냉전시대가 지나고 온전히 국가패권 시대에 들어섰지만 아직 한반도의 분단은 여전히 이념대결 양상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력권 대결로 다시 강화되는 듯 한 한반도 주변 동북아 정세는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한 세기 패권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장기적인 변화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을 무릅쓰면서 강화되는 냉전분단과 맞서 싸웠던 몽양의 처지에 비긴다면, 오늘의 우리 처지는 행복하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더욱이 비록 분단이 되어 있기는 해도 해방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서 우리의 역량은 우리 내부의 역량 축적과 합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주변 나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요구를 반영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남쪽의 처지에서 남북의 공존공영의 원칙을 굳게 견지하면서 연미화중통로섭일(聯美和中通露攝日)의 대외정책을 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복지국가정책을 실천해가야 할 것이다. 세월이 가도 헌신적이고 정직한 리더십은 변함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 리더십을 몽양에게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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