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발견?
아메리카의 발견?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3> 유럽의 해외팽창 ①
아메리카의 발견?
아메리카의 정복과 유럽의 해외팽창

1) 아메리카와 아시아 항로의 개척

동방무역과 인도항로
▲ 콜럼버스의 상륙

15세기말은 서양인에게 매우 뜻 깊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이 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럽인들은 유럽을 벗어나 넓은 외부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모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선 것은 물론 아시아의 특산품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이나 자기, 인도의 면직물, 또 인도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나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여러 향신료, 보석 등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동방물산을 직접 수입함으로써 큰 이익을 내기 위해서였다.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리고 중동 지역 전체와 동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동방무역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서 다른 나라들은 여기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이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귀퉁이에 있는 포르투갈은 작지만 매우 독특한 나라였다. 이미 중세 말부터 제노바와 어울려 지중해 무역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일에도 종사한 해양 국가로서 동방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 했고 1450년 대에는 엔리케 왕자의 주도하에 아프리카 중부의 카메룬 지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그들의 생각보다는 너무 큰 대륙이었고 당시에는 항해기술도 아직 부족했으므로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새로운 항로 개척은 포르투갈의 이런 해양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 포르투갈 리스본(Lisbon)항구에 세워진 발견의 탑(Parao dos Descobrimentos).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항해왕자 엔리케

아시아와 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다 가마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콜럼버스도 제노바 출신으로 일찍부터 포르투갈에서 활동했다.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기 전에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후원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스페인도 1492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여 이른바 '재정복사업'을 끝냈다. 그래서 사기가 충천해 있던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의 모험적인 계획을 통해 해외진출을 꾀했다.
▲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

그리하여 1487년에 바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에, 뒤를 이어 다 가마가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콜럼버스는 1492년에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다.
▲ 바톨로뮤 디아즈와 그의 항해로

▲ 바스코 다가마와 그의 항해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그 후 유럽 및 세계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식민지화로 식민주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길게 보면 18세기 후반 이후 확립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은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인도 항로 가운데 서양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 항로의 발견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아메리카의 '발견'은 왜 중요할까?

2) 아메리카의 '발견' - '만남' - '정복'

아메리카 '발견'은 창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일

19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500주년이 된 해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인디언들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시위가 예상 되었으나 큰 일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반면 서기 2,000년의 브라질 '발견' 500 주년은 브라질 내 반대 여론 때문에 기념행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의 1992년 행사는 100년 전인 1892년의 행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왜 콜럼버스라는 인물의 업적을 다 같이 찬양하고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하지 않을까. 그가 한 일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 '콜럼버스의 날'에 반대하는 포스터들

사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은 콜럼버스 당시부터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을 '신세계'라고 불렀다.

또 유럽인들은 이 발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혜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비서인 프란시스코 고마라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창세기 이후 일어난 가장 좋은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가 예수의 탄생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의 발견'이다.

아베 레이날이라는 프랑스인은 1770년에 '신세계의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간 것만큼 인류에게 관심거리는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아메리카의 발견은, 또 동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은 인류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8세기까지는 '발견'이 유럽인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20세기에 와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발견'은 지금까지도 많은 서양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발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쓸 때 그 단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와 아메리카 '발견'의 의미

17세기 초부터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식민자들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특별히 콜럼버스를 칭송하지는 않았다. 이런 태도는 1770년대의 독립전쟁 이후 갑자기 바뀐다. 새로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낡은 전통이나 악습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새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창설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땅에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땅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의미가 크게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견'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아메리카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주인 없는 땅'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것을 먼저 선점한 유럽인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주장해야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단에 의해 취득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가 반드시 '발견'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발견'은 콜럼버스의 업적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아메리카 역사의 해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의 경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미국사를 미화하는 여러 역사적 신화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발견인가, 만남인가, 정복인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발견'이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것은 '발견'이라는 말이 아메리카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침입하기 전인 15세기 말 당시 아메리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 땅덩어리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에 대해 유럽인들은 그가 인도를 발견했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던 인도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메리카인의 존재와 그 문화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발견' 대신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이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발견'보다는 낫지만 적절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난다'는 것은 중립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모르던 사람을 만났다가 별 일 없이 헤어질 때는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또 그 만남이 좋은 것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만남은 그렇게 오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그것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한 세기 반 동안에 아메리카 인구의 약 90%가 줄어들었다. 또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이 되어 강제노동과 노예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사회들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고 그 파괴적 영향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만남'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덕적 판단을 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요즈음 '발견'에서 조금 나아가 '만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자신들의 죄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뻔뻔스런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이에는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 저지른 일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비롯해 중남미에서 수많은 토착 정치체들을 정복하고 파괴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명백히 침략과 정복과 학살이지 발견이나 만남은 아니다.
▲ 아스텍 제국의 신전 의식 (상상화)

▲ 스페인 정복 전야의 아스텍 제국 (살구색 지역이 예속국가, 벽돌색은 동맹국가)

▲ 정복 직전의 잉카제국

그러니 식민주의로부터 피해를 받은 비서양지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 들여 '발견'이나 '만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분명히 침략이나 정복 행위로서 다른 어떤 말로도 대치할 수 없다.
inky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