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내가 김일성 참배하고 구속되겠다"
"차라리 내가 김일성 참배하고 구속되겠다"
박지원이 털어놓은 6.15 남북정상회담 막전막후
2008.06.11 18:05:00
"차라리 내가 김일성 참배하고 구속되겠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이었던 박지원 의원이 회담 성사와 6.15공동선언 체결 과정에서 있었던 남북간의 치열한 줄다리기를 공개했다.
  
  박지원 의원은 11일 '서울대 6.15 연석회의' 특강에 앞서 배포한 연설 원고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2000년 초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처음 제안받은 후 6.15선언이 이뤄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풀어놨다.
  
  박 의원은 이 연설에서 정 회장의 회담 제안,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싱가포르 회동, 북측의 현금지원 요구, 고(故)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요구를 거절하는 과정 등 그간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털어놨다.
  
  이같은 사실을 공개한 박 의원은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추진된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DJ와의 차별화를 위해 옹졸한 정치적 계산을 했으며 DJ에게 정치적 타격을 줘야겠다는 음모로 정치자금 관계를 조작했다는 믿음을 지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이어 "(특검 추진 당시) 노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이회창 후보 대선자금, 김영삼 전 대통령 안기부 자금에 대한 동시 특검을 통해 '물타기'로 문제를 풀자는 말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5년은 박지원 징역 5년"이라고 말한 박 의원은 "특검만 없었다면 6.15 합의사항이 착착 진행됐고 (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정상회담을 해서 그 성과를 이행하지도 못하고 묻혀버리는 지금의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2007년 10.4선언이 아니고 '2003년 10.4선언'이었다면 남북관계의 발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한없는 원망이 앞선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명박 정부도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된 전철을 되밟는 조짐이 시작되고 있다"라며 "이명박 정부는 6.15 및 10.4 선언을 사실상 부정하고 묵살했으며 불필요하게 북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박지원 의원의 이날 강연문 중 6.15선언 발표까지의 주요 내용이다.
  
▲ 2000년 6월 13일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순안공항에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정몽헌의 제안, 요시다 다케시와의 만남
  
  지금부터 제가 대통령 특사로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4·8합의서의 체결과정과 6·15남북정상회담 당시의 상세한 과정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한민국 '유일 당사자'로부터 생생한 육성 증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 재임 때인 2000년 초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정 회장은 저에게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고 현대가 협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식사를 하면서 여러 말씀을 나누다가 정 회장과의 대화를 보고 드렸더니, 대통령께서도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저는 정 회장에게 전화해서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임동원 국정원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만났습니다. 임 원장께서는 "우리 사이에 그러한 중대한 사안이 있으면 국정원장인 나에게 말해야지 어떻게 대통령께 직보할 수 있는가"라며 불만스러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 후 임 원장께서는 "현대의 이익치 회장을 만났고, 이 회장과 '현대의 대북 에이전트(Agent)인 요시다 다케시라는 사람을 통해 정상회담 추진이 가능하다'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히면서 저에게도 협력해서 추진하자고 했습니다.
  
  2000년 2월 초 국정원에서 요시다 다케시가 입국하니 저에게 만나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물론 그 사이 정 회장과 몇 차례 정상회담 관계로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요시다 씨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요시다 씨를 만나는 장소에는 정·이 회장과 통역이 동석했습니다. 현대측 인사들은 소개를 하고 난 후에 저와 요시다 씨, 통역만 남겨놓고 옆방으로 갔습니다.
  
  요시다씨의 부친은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북송 재일동포로 김일성 주석의 측근으로 북한에서 살다가 작고했고, 그런 인연으로 자신이 북한의 대일·대남 관계 사업을 하고 현대의 대북 Agent라고 설명하면서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온 몸에 짜릿한 흥분과 함께 민족에 대한 열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 사실을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그 후 일본 아사히신문 북한통 간부기자가 저를 방문해서 모 일본 정치인과 함께 추진하겠다며 정상회담 추진사실을 아는 척 했습니다. 제가 요시다 씨에게 확인하자 요시다 씨는 "염려말라"는 말을 했지만, 저는 "우리 민족의 중대사를 함부로 일본 관계자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한참 후 평양에서 "과거 안기부 모략꾼들이 끼어들어 대화가 공전되었다. 남북대화가 참다운 대화가 되려면 국정원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논평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국정원에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습니다.
  
  2000년 3월초 대통령께서 임 원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저에게 "특사로 싱가폴에 가서 북한 특사와 회담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대북관계 전문가도 아니고 담당부서인 통일부장관이 하는 게 옳다고 말씀드렸지만, 대통령께서는 "통일부장관은 노출의 가능성이 있고 북한에서 나의 측근을 원하니 박 장관이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간첩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저는 민족에 대한 열정과 그동안 정치협상을 해 왔던 경험을 살려 꼭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각오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국정원 간부 두 사람이 저를 돕기로 했습니다.
  
  저는 송호경 북한 특사가 외교관 출신으로 대남전문가이고 부총리급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지식과 북측 수행원 세 사람 명단, 그리고 국정원 간부의 보고서 2건 10여 페이지를 읽고 수행비서만 대동한 채 2000년 3월 9일 극비로 싱가폴행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싱가폴 공항에 도착하니 국정원 두 간부가 나왔고 우리 일행 넷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에서는 한국 사람을 피하기 위해 룸서비스로 식사를 해결하고 북측 인사들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북측에서 정몽헌 회장을 통해 우리가 투숙한 호텔의 Business room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약속장소에 가니 정몽헌, 이익치 회장과 요시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소개로 북측 특사와 처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현대측 인사들은 떠나고 회담이 시작됐습니다. 북측은 송호경, 권민 등 네 사람이었습니다. 참고로 북한의 대남 일꾼들은 대개 이름을 두 개 사용했습니다. 권민은 권호웅으로 현재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대표단장입니다.
  
  우리 측은 저와 국정원 두 간부였습니다. 송호경 특사는 온화한 인상에 차분한 말씨였고 퍽 친근감이 갔습니다. 저와 송 특사가 사실상 단독회담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물론 저는 배석한 국정원 두 사람에게 실무적 조언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송 특사의 발언이 국정원 두 간부가 사전에 저에게 보고한 내용과 거의 일치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회담에서는 상호간의 입장만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회담 후 국정원 두 간부가 "장관님은 어느 전문가보다도 능수능란하게 회담을 하셔서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하셨습니다"라고 칭찬의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조로 "당신들 간첩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당신들이 준 자료와 북측의 발언이 일치하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잠깐 국정원 대북담당자들에 대한 예찬론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제가 특사 예비회담, 정상회담 준비, 6·15남북정상회담, 8·15 언론사 사장단 방문, 또 다른 방문 등 북한 관련 업무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대북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국정원 관계자들을 신임하고 맡기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시대의 국정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온갖 지혜와 열정을 바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6·15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몇 차례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국정원 대북관계자들은 국보급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대통령께 '국정원의 대북문제 담당을 국장에서 차장급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건의를 임 원장과 함께 드려, 오늘의 국정원 3차장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제가 싱가폴에서 회담을 하고 있을 때 독일을 방문 중이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통일 독일의 현장에서 역사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셨습니다. 김 대통령께서는 베를린 선언을 통해 ①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회복 지원 ②한반도 냉전종식 및 남북간 평화정착을 위해 북한의 대외관계 지원 ③이산가족 문제해결 ④특사교환 등 당국간 대화라는 4개항을 천명 하셨습니다. 대통령 취임사에 이어 또다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송 특사에게 베를린 선언을 설명하고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송 특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싱가폴 접촉은 상부에 상세히 보고하겠으니 1차 회담이라 하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허심탄회한 송 특사의 발언에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북측의 현금지원 요구
  
  저는 귀국하여 대통령께 정상회담이 틀림없이 성공하리라는 확신과 함께 회담 내용을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국정원 두 간부는 국정원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북측에서 다시 상하이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3월 17일 상하이에서 만났습니다. 송 특사의 제안으로 상하이회담을 '1차 예비회담'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제가 2002년 9월 정기국회에서 싱가폴 회담을 숨긴 것은 북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차 회담에서 북측은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현금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정상회담 후 교류협력을 통해 상업차관과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가능하지만 우리의 예산절차상 불가능하다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정 회장을 제 방으로 불러 북측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나중에 <내일신문>에 보도된 사실이지만, 이때 정주영 회장께서는 유창순 전 상의회장을 만나 '개성공단을 현대에서 개발할 것이며 몇 천만 평을 평당 10만원~30만원만 받아도 현대는 엄청난 이익이 난다'는 사실과 '북측에서 그 대가로 15억불을 요구해서 정몽헌 회장이 박지원 장관과 상해에서 깎고 있다'는 말씀을 했다고 보도 되었습니다.
  
  특검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지만 정몽헌 회장이 부친 정주영 회장에게 북측에서 10~15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자기가 5억 달러로 깎았다고 자랑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하이회담은 '정부지원은 없다'는 저의 강경한 태도로 사실상 결렬되었습니다. 베이징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3월 22일에 다시 만났지만, 또 결렬되었습니다. 사실상 포기상태였습니다. 베이징에서 4월 8일에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4·8합의 후에 안 사실이지만 현대 정 회장과 국정원 관계자가 그 사이 베이징에서 접촉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밝힙니다만 싱가폴 회담에서 송 특사는 김정일 위원장을 '위대한 장군님'이라고 하였으며 저에게도 그렇게 불러 달라는 은근한 요구를 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위대한 장군님'은 우리 국군을 생각하면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고, '노동당 총서기'라고 하면 노동당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국방위원장'이면 공식 명칭이고 만약 회담이 결렬되면 국민들에게 우리나라 국방장관 정도로 설명하려고 '국방위원장'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전에 우리 정부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어떻게 호칭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국방위원장이라고 굳힌 것은 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합의 과정에서 대통령께 전화로 보고를 드렸고 임 원장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가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베이징 3차회담에서는 4·8합의문을 놓고 상봉과 회담의 구분, 일정, 칭호를 갖고 싸웠습니다. 저는 상봉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하고, 회담은 북한의 헌법상 국가원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정이 없으면 의전상 진행이 되겠는가? 외교관례대로 합의문 초안은 사전에 작성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송 특사는 상봉과 회담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위대한 장군님의 일정은 자기도 사전에 알 수 없고, 합의문은 회담을 한 결과로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사전에 만드느냐고 주장했습니다. 정말로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저는 '이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합의문에 서명을 했습니다. 저는 귀국해서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이 합의서를 보고했지만 그 누구도 다른 말씀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송 특사는 합의 결과를 발표하는 시기에 대해서도 "이미 중국 공안에서 알고 우리 호텔에 출입이 시작되었고, 4월 10일 평양에서 외국인 인사 등이 참석하는 대형집회가 있으니 그때 발표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 사전행사였습니다.
  
  저는 처음엔 우리나라 4·13총선을 의식해서 연기를 주장했지만 이것도 제가 수용하고 결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상봉과 회담, 일정, 합의문, 발표시기 등은 양보했지만 정부의 현금지원은 결단코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본국에 보고를 하고 베이징의 일본식당에서 폭탄주를 마시면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저는 이날 밤 송 특사로부터 타이타닉주 제조법을 전수 받았으며 지금도 때때로 즐깁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4·8합의서가 탄생했습니다.
  
  저는 4월 9일 귀국해서 대통령께 보고를 했고, 4월 10일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Top News로 보도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 6.15공동선언 탄생의 주역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박지원 의원 ⓒ연합뉴스

  "제가 술을 마셔야 국태민안합니다"
  
  4월 10일 합의내용을 발표한 후에 6월 13일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까지 총선용이었다는 정치적 공격과 함께 저는 많은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것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전문가들을 불러 밤늦게까지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정상회담에 대한 조언을 들으셨습니다.
  
  전문가들은 상봉과 회담, 일정, 합의문 등을 거론하며 합의 당사자인 저 박지원의 무모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참배였습니다. 사실 회담 과정에서 송호경 특사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물으려다가 먼저 묻는 건 손해라고 생각해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거의 매일 밤 10시경 저를 청와대내 대통령 거처인 관저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저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관저로 가서 대통령의 추궁성 질문에 충분히 답변드려야 했습니다. "절대 성공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했지만 이때마다 저는 민족을 위해 저를 버려야 한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참배문제를 분명히 합의하지 않았다고 불호령을 내리셨고, 저는 "전세아파트를 계약할 때도 불리한 사항은 따로 요구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계약합니다"라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저를 믿어 주셨고 그러면서 당신의 각오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언론인들과 술을 많이 마셔서 도저히 관저에 갈 수 없었습니다. 기자들과 너무 과음을 해서 못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지만 밤 11시인데도 들어오라고 야단을 치셔서 말 그대로 크게 혼날 각오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자정까지 한 시간 동안을 묻고 답변하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같은 말씀의 반복이었지만 대통령의 심정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자정이 되자 일어서시면서 "자네 술 좀 마시지 마" 하셨습니다. 순간 저는 치기가 발동했습니다. "대통령님, 제가 술을 마셔야 국태민안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저를 돌아보시지도 않고 안방으로 향하셨습니다.
  
  제가 술을 마셨다는 게 잘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술을 즐겨 하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 마셔야 할 때는 몸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때의 후유증으로 병원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전에 마침내 문제가 터졌습니다. 북측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를 요구했고, 임동원 원장께서 특사로 평양을 다녀오는 등 노력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평양에서는 KBS 등 사전 준비 팀을 추방하느니 야단이 났습니다.
  
  평양 방문 일자도 하루가 연기되었습니다. 특검에서도 밝혀졌지만 일자가 연기된 것은 송금 지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언론이 항공사진을 이용해 순안공항에서 평양까지의 이동경로를 예측보도한 것 등의 보안문제와 순안공항의 수리미비가 이유였습니다.
  
  "한광옥 실장과 참배하고 구속되겠다"
  
  평양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할 수 없고, 올 필요도 없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가 오면 더욱 강해지십니다. 저에게 꾸중 한마디 않으시고 6월 13일 우리의 평양 착륙을 거부하겠다는 북측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출발하자'고 결정하셨습니다.
  
  서울공항에서 환송식이 열리고 공식수행원들은 전용기 앞에서 대통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임 원장께서 황급히 서울공항 청사로 들어갔습니다. 대통령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임 원장의 미소가 보였습니다. 대통령께 뭐라고 귓속보고를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임 원장께서 저에게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문제는 평양에 와서 논의하자는 북측의 통보를 받았다'고 알려줬습니다. 우선은 안심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모두들 흥분했지만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저는 북한 상공에 있었지만 북한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태운 전용기가 드디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출발전에 남북정상회담 예비 협상테이블에 저를 수행했던 국정원 두 간부에게 "북측에서 왜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문서로만 배포하라는데 어쩌면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영접이 있지 않는가 분석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수행원들은 비행기 뒤쪽 문으로 먼저 내립니다. 뒷문으로 내리면서 선발대로 가 있는 외교부 의전장이 비행기로 올라 오길래 '김위원장이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보니 북한의 환영인파와 의장대가 도열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간부들이 기내영접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이 터졌습니다. 바라보니 김정일 위원장이 특유의 인민복 복장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드디어 대통령 내외분이 보였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평양의 하늘과 북녘 산천의 모습을 한참 보셨습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가득 고이셨으리라 짐작됩니다. 대통령께서 전용기 트랩을 내려오시고 나서 두 분이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셨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두 분이 함께 걸어가시고 함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저도 환영인파에게 걸어가서 악수를 하려고 했지만 제지를 당했습니다.
  
  두 분은 조선인민군의 분열을 받았습니다. 조선인민군 명예의장대 대장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명예의장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정렬했습니다"라며 우리 대통령께 경례하고 신고를 했습니다.
  
  처음 겪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인민군이 우리 대통령께 분열과 신고를 하다니. 아! 이제야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저는 온몸을 감싸는 짜릿한 감격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예상치 못한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김 위원장이 대통령 차에 동승을 했습니다.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많은 인파와 함성이 계속됐습니다. 그 함성 소리 때문에 저도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차속에서 무슨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추측성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지금도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했습니다. 두 분은 다시 한 번 악수를 하셨고 거침없는 김 위원장의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그 때 본 김정일 위원장은 제가 평생을 알고 있던 김정일이 아니었습니다. 뿔도 없고 바보도, 탕아도 아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수고하신 박지원 장관 선생이 어디 계시느냐"며 저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한편, 저는 이것이 상봉이고 정상회담은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계속 말했습니다. "대통령님, 겁도 없이 여기를 오셨습니다. 우리 간부들이 공항에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연로하신 대통령께서 오시기에 제가 나갔습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제가 이리로 오겠습니다. 수령님께서도 여기서 회담을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간부들이 반대한다면 새총으로 빨간 불을 쏘아버리고 제가 이리로 와서 회담을 하겠습니다."
  
  송호경 특사로부터 평양에 도착한 그날 즉, 6월 13일 밤 10시에 인민회의장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저는 대통령의 방으로 가서 보고를 했습니다. 임동원 원장은 임춘길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만난다고 했습니다. 임춘길 부부장은 후에 임동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졌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참배문제는 꼭 해결하라" "박장관은 할 수 있다"라시며 지시 겸 격려를 하셨습니다. 북측에서 제공한 차로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송 특사는 북한을 방문하는 모든 인사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했다는 관례와 함께 "이를 거부하면 회담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국민정서도 있고 사전 요구가 없었다며 거절했습니다. 송 특사는 남측 국민정서만 있고 북측 인민정서는 없느냐고 따졌습니다. "좋다. 그러면 내가 참배하고 내일 대통령께 장관 사표를 제출하고 베이징을 경유 귀국해서 구속당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송 특사는 막무가내 였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제안이다. 대통령 해외순방시 비서실장은 수행을 하지 않는데 이번 평양 방문에는 이례적으로 한광옥 비서실장이 수행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대신하고 한 실장과 나는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둘이서 참배하고 돌아가서 구속당하겠다"고 했습니다. 역시 요지부동이었습니다.
  
▲ 2000년 6월 13일 만찬장에서 회담 성사의 주역인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순간에도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문제로 샅바싸움을 하고 있었다. ⓒ연합뉴스

  저는 계속 설득했습니다. "두 분 정상의 역사적 상봉은 이루어졌다. 이제 회담을 앞두고 이 문제로 깨진다면 우리 민족의 불행이고 국제적 망신"이라고 했습니다. 자정이 되자 송특 사는 "장관선생의 열정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백화원초대소로 돌아오니 대통령께서는 임 원장과 담소하시면서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희망적인 보고를 했으며 대통령께서는 기다려보시자며 마지막까지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임 원장께 임춘길 부부장과의 면담 내용을 물으니 참배문제는 저와 송 특사가 논의한다는 이야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송 특사로부터 다음날 아침 즉, 6월 14일 오전 8시에 같은 장소에서 아침식사를 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송 특사는 저에게 "상부에 보고한 박장관선생의 열정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참배는 안 하셔도 된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낭보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배문제는 해결되었고 저는 대통령께 낭보를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6월 14일 아침이었습니다. 14일 밤 만찬석상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임동원 원장에게 이 말을 했고 이 장면이 TV에 잡혀서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장이 괴수 김정일과 귀속말을 하고 있다'라는 귀속말 사건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 "연자, 미자가 좋다"
  
  북측에서 사전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정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마침내 합의문 작성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를 수행했던 국정원 간부가 실무작업을 했고 임동원 원장과 김용순 비서간에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임 원장께서 만찬장에서 최종 작성된 합의문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날 밤 만찬장에서 대통령께서 서명하셨고 김 위원장도 수표했습니다. 6월 14일 밤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꺾어진 날짜를 좋아한다는 사실대로 김 위원장이 날짜를 15일로 고쳤고, 이렇게 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은 탄생합니다.
  
  6.15공동선언에 서명한 대통령께서 김위원장의 손을 잡고 나가셔서 이 사실을 발표하자 만찬장은 우레와 같은 우리 민족의 박수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사진기자들이 없어서 역사적인 순간을 찍지 못했습니다. 당시 공보수석이었던 박준영 현 전남지사가 북측을 설득해 카메라 기자들이 입장하고 대통령께 말씀드려 다시 연출함으로써 두 정상이 손잡고 찍은 역사적 사진이 탄생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만찬장에서 국방위원들을 불러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게 하고 술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희호 여사님께서 Head Table에 계시지 않자 "김 대통령께서 흩어진 가족 문제를 제일 강조하시면서 평양에서 흩어진 가족이 되시면 되겠느냐"며 자리를 옮기시게 하는 배려도 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걸 성사시켰기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6·15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 회담이 된 후에 우리는 백화원초대소에서 갖고 간 우리 소주와 북한의 맥주로 통일의 의미를 담은 소폭주를 만들어 통음을 했습니다.
  
  저는 임 원장 방으로 갔습니다. 임 원장은 마침 특별수행원이었던 문정인 교수와 담소 중이었습니다. 저는 임 원장에게 엄숙하고 정중하게 "정말 수고하셨다"고 넙죽 절을 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를 보고 문 교수께서는 의아해 하셨지만 지금쯤은 문 교수께서도 저의 열정을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후일 문 교수께서는 "김대중 대통령 인사 중 비밀특사로 박지원 장관을 선택한 것이 제일 잘한 인사였다"고 말씀하셨다는 전언에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김위원장은 6월 15일 환송오찬을 마련했습니다. Head Table에 대통령 내외와 김정일 위원장, 우리 측 주요인사와 북측 인사 등이 앉았습니다.
  
  Head Table 저의 좌우에는 조명록 차수와 김용순 비서가 앉았습니다. 조명록, 김용순, 강석주, 장성택 등 북한 실세들이 오찬인데도 4~50도의 술을 계속 권하며 공격했지만 저는 사양치 않고 마셨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과거에는 독주를 마셨지만 의사의 권고로 와인만 마신다"고 했습니다. 제가 김위원장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습니다. 김 위원장도 저에게 와인을 가득 채워 줘서 둘이서 건배를 했습니다.
  
  마침 우리 측 특별수행원이었던 최학래 신문협회장, 박권상 방송협회장, 차범석, 강만길, 고은 선생 등과 구본무 LG회장, 손길승 SK회장, 윤종용 삼성부회장 등이 Head Table로 와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게 되어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제가 이때 "모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합창하자"고 제안했고, 모두 함께 합창을 했습니다. 감격스러운 그 모습은 지금도 TV로, 사진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창조되고 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한국의 젊은 가수들은 이상한 노래만 부르냐"고 해서 저도 당시 제일 유명한 HOT등 요즘 가수 노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가 김 위원장에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미자, 연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이미자, 김연자, 은방울 자매'라고 했습니다. 제가 다시 남자가수는 누구냐고 물으니 '조용필, 나훈아'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미국식으로 Frist Name을 많이 불렀습니다. 친근해진 정몽헌 회장께는 몽헌 선생, 저에게는 장관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김 위원장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헤어졌는데 다음날 아침에 만나서 "어젯밤 남쪽 TV를 보니 대통령님께서 저랑 만나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말했고, "아침 6시에 국방위원회를 소집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송 특사와 제가 자정까지 회담했는데 아침 일찍 결정사항을 알려주는 등 김 위원장이 밤 늦게까지 일한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습니다. 만찬장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께 제가 물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낮에 잠깐씩 오수를 즐기신다고 했습니다. 후일 김 위원장께 제가 직접 물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위대한 수령님께 새벽 4시~5시 사이에 하루 보고를 했다"며 자기는 밤 2시에 보고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환송 오찬장에서 이헌재 재경부장관이 "김 위원장이 좋아하는 남측 가수들보다 박지원 장관이 노래를 더 잘 한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김 위원장이 저에게 노래를 청했습니다. 마침 우리 대통령께서도 한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노래반주도 없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저는 "가곡보다는 유행가가 좋겠다. 우리가 50년만에 만나서 이제 곧 헤어지니 아쉽다. 내 곁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노래하겠다"고 말하고 '내곁에 있어주'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 노래가 끝나자 김위원장은 앵콜을 외치며 박수를 쳤고 모두들 앵콜을 원했습니다.
  
  저는 다시 나갔습니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한번하고 낙선했는데 평양에 와서 재창을 받았습니다. 김 위원장께서 꼭 서울 답방을 하셔서 제가 재선하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위원장이 마이크를 달라고 하더니 "꼭 서울에 가서 장관선생 3선, 4선하도록 돕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내 곁에 있어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헤어진다"면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불렀습니다. 김 위원장은 저에게 "장관선생은 인민예술가십니다"라고 했습니다.
  
  2000년 8월 15일 제가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과 북측 인사에게 "김 위원장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인민예술가 증명을 주지 않느냐"고 농담을 했더니, "우리 공화국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증명입니다"라며 "장관선생은 인민예술가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저와 대화하면서 "남쪽 출판물을 읽는데 왜 그렇게 외래어가 많냐.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책을 북한에서는 출판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외래어도 국어처럼 많이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 위원장도 제 노래에 '앵콜'이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남북문제는 남쪽의 눈높이로만 바라보아도, 북측의 눈높이로만 바라보아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민족의 눈높이, 사랑의 눈높이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영특하고 위트가 있습니다. 국제정세를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위원장을 만난 고이즈미 일본 총리, 페레손 스웨덴 총리도 또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똑같은 판단을 했습니다.
  
  저는 제가 경험했던 대북특사 등 북한과 관련된 일들, 김정일 위원장과의 일화 등 모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표하겠습니다. 이제 역사적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정도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도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든지 또 초청하시면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갖고 달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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