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릉과 무속인이 어우러지는 그곳, 감포
문무왕릉과 무속인이 어우러지는 그곳, 감포
[김유경의 '문화산책'] 경주 풍경 ③ 경주에도 바다가?
2010.10.28 08:36:00
문무왕릉과 무속인이 어우러지는 그곳, 감포
경주는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만, 토함산 넘어 동쪽으로 트인 지점에서 동해바다와 접한다. 이곳 양북면 봉길리 해안에서 200미터 바다로 들어간 곳에 집채만한 자연석 화강암 바위가 모여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다. 3만 7000여평(12만 4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묘역의 바위는 얼핏 보기에 3미터 남짓(개인적 눈대중임) 물위로 솟아있다.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황갈색 도는 바위는 오랜 세월 물살에 깎여 거칠어 보이며 썰물 때면 주변을 두른 듯한 작은 바위들도 드러난다.

바닷물이 쉴새없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대왕암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흘러나와 생생한 분위기를 전한다. 미륵사 탑 하부건축에 쓰인 사방을 통하게 한 통로기법을 적용시킨 것 같다고 한다. 백제 미륵사 건축기법은 문무대왕을 기리는 감은사 금당 바닥구조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이룬 삼국통일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 감포 봉길리 해안에서 200미터 바다로 들어간 곳에 있는 문무왕 수중릉. ⓒ이순희(문무왕릉 2)

4개 바위가 둘러싼 한가운데 물에 잠긴 채 길게 놓인 돌이 있는데 681년 고질 끝에 화장후 산골로 뿌려진 문무왕의 골수가 그 안에 있었던 듯 느껴진다.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67년 이후이며 아직 수중발굴조사가 되지 않았다. 접근불가 지역이어서 위에서 찍은 항공사진으로만 그 내부구조와 바위의 결과 바닷물결이 보인다.

▲ 문무왕 수중릉의 안쪽. 4개의 바위 한가운데 길게 놓인 돌이 있다. ⓒ신라문화진흥원

▲ 문무왕릉 있는 동해바다의 일출. ⓒ이순희(문무왕릉 45)
사진가 이순희 씨가 촬영에 힘든 몸을 이끌고 감포 문무왕릉을 찾는 것은 1400년전 문무대왕의 애타는 신라 사랑을 생각해서라기보다, 젊은 시절 이곳을 찾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대구에서 바다를 보러 가려면 거대한 감은사탑과 문무대왕릉을 같이 보는 감포가 손꼽혔다. 학기가 끝나는 날 밤 늦게까지 떠들고 놀다가 누군가 "감포 가자!" 그러면 모두들 흔쾌히 "오늘도 감포 가는 거야?" 하고 차 한대에 6, 7명이 타고 쉬지 않고 달려 이곳으로 왔다.

깜깜한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문무왕이 정말 용이 됐을까? 대왕암과 감은사, 이견대가 삼각형을 이루고 신문왕이 만파식적 피리를 신탁받은 데가 감은사라지, 백제의 뛰어난 건축기술이 신라의 탑과 절에 적용되었지."

그런 지식들을 떠올리며 바다에서 동이 틀 때를 기다렸다. 해가 떠오르고 새벽이 되면서 젊은이답게 새로운 날에 대한 예지를 다져보곤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피곤이 몰려와 모두 모래밭에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문무왕 김법민이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한 의지에서는 무열왕대부터의 신라사 몇 장면이 읽혀진다.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 김춘추는 '661년 6월에 익산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나와 다섯 보 너비나 되었다' 는 기록 직후 죽었다. 대관사에서 벌어진 백제 저항군과의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전 선덕여왕때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침공이 빈번해 의자왕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았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는 대야성(지금의 합천)에서 백제군에게 죽은 일이 있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문무왕은 무열왕의 관 옆에서 즉위하고 삼국을 통일하고는 당나라 군사도 쫓아낸 뒤 무기는 절에 감추어 두었다. 문무왕이 사후에도 호국용으로 화신하기 위해 바다 속에 안장된 것은 그가 이룬 격동의 역사와 걸맞아 보인다. 화장후 동해에 산골한 신라임금은 681년의 문무왕 말고도 742년의 34대 효성왕, 785년의 37대 선덕왕이 있는데 이들에게는 문무왕같은 장엄한 장례가 따르지 않았다.

신라 역사에는 박혁거세 임금이 특별히 금으로 된 자(金尺)를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비롯해 진평왕이 특별한 옥 허리띠를 지닌 것, 신문왕에게 용이 옥 허리띠와 만파식적 피리를 신탁한 것, 원성왕대의 호국용 이야기 등 흥미로운 고대사적 기록이 많고 경주땅에는 실제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전해진다. 물로 뭍으로 이들을 찾아가 보는 과정이 여간 흥미진진하지 않다.

해변에 다가가 보는 수중능은 파도소리를 따라 부동의 자세로 서있는 바위들이 평범치 않아 보였다. 비바람이 굉장해 파도가 일렁이고 어두컴컴한 때면 대왕암 주변은 가히 무섭도록 장엄할 것 같다. 그런 날 이 장소에 와본 누군가가 있을까? 어민들은 익숙하게 본 광경일지도 모른다. 바다에 이런 왕릉을 조성한 신라의 창의적 정신이 경주를 깊이있게 해준다.

▲ 문무왕릉 앞 바다 가까이의 한 여성. 일반인들도 여기 와서 절실한 치성을 드린다. ⓒ이순희(문무왕릉 62)

가을날 평일 오전 해변에는 낚시하는 사람 몇에 무속인들이 여기저기서 치성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여성도 거의 바닷물에 닿을 듯 하는 자리에서 치성드리는 것이 보였다. 여기의 동해용왕은 막강했던 문무왕의 후신이라는 구체적 상황이 있어 더 친근해 보였다. 대왕암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고 어촌계가 지정한 사람만 접근이 되는데 그래서 여기 미역이 아주 많다고 이곳에 와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모래밭 뒤 언덕엔 텐트가 줄지어 20여 군데 설치돼 있었다. 무속인들이 거기다 제물을 차려놓고 징을 치며 용왕제 지내는 광경이 보였다. 정월 대보름이면 특히 많이 찾아오는데 평일인 오늘도 줄잡아 50여 명은 와 있으리라고 했다.

제천서온 한 법사는 "용왕님께 어젯밤 11시 자시에 첫 제를 올리고 오늘 아침 세 번째 제를 올리는 겁니다. 하늘에는 칠성, 바다에는 용왕님이 있죠. 여기 오면 정신무장이 됩니다. 새 제자가 생겼다고 알려드리려고요." 했다.

차려놓은 제물 중에 삼지창칼, 오색깃발 등 무구 옆에 방금 지어 김이 오르는 밥이 솥째 올라있었다. 모래밭에서 물 세 대접과 쌀 한 대접만 제물로 놓고 절실한 얼굴로 징을 치며 기도하는 대전의 무속인도 있었다. 징은 필수도구였다. 따라 온 가족이 설명했다.

▲ 모래밭에서 용왕기도 드리는 무속인. 제물로 정한수와 쌀을 차렸다. ⓒ이순희(문무왕릉 71)
"징은 신을 불러 들이는 겁니다. 제 처가 무속인인데 텐트 속에서 치성드리면 신령님이 텐트를 날려버려요. 내가 멀쩡하다가 대감줄이 내려 지금 무당이 될락 말락 하는데 신의 제자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힘드는 일이니 그것 막아달라고 용왕님한테 대신 빌어주는 거예요.

여기도 오고 인왕산에도 가고, 닷새만 기도하려 했는데 열흘이나 하라하고 마지막 날에는 소머리를 바치라고 용왕님이 그러시네요. 신을 모시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우리 집에 사람들이 점 보러 많이 오게 해달라고도 빌죠. 동해용왕님이 제일 힘이 세요. 기도와서 말 많이 하면 안돼요."


모래를 헤치고 앉혀놓은 종이컵에 소원성취 촛불을 켜놓은 것도 있었다. 이들은 치성이 끝나면 대왕암 정면에 서서 사방을 돌아가며 절을 하고 음식을 고시레했다.

모래밭에 떨어져 있는 과일과 떡, 쌀 등이 그런 음식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또 누군가 거둬가는 듯 어떤 것들은 금방 보이지 않았다.

무속인들의 용왕기도는 이곳만이 아니라 동해, 서해, 남해 해안 어디서든지 이루어진다. 길 위에 줄지어 선 가게들은 횟집 식당에 건어물 파는 곳인데 대부분 초, 쌀, 북어, 색헝겊, 방생물고기 같은 치성용 물품도 취급하고 있었다. 간판에는 그런 내용이 안 써있고 컵라면, 커피, 건어물, 과자 같은 이름만 있다. '화려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불꽃놀이 화약팝니다'고도 했다.

▲ 바닷가 천막 안 무속인이 차린 제물상. 한가운데 금방 지은 밥이 솥째로 놓여있다. ⓒ이순희(문무왕릉 21)

▲ 봉길리 해안 언덕의 텐트. 무속인들이 주로 용왕기도 할 때 사용한다. ⓒ이순희(문무왕릉 53)

오징어가 멋있게 그려진 간판 뒤에는 '무당뉴스' 신문보급함도 있었다. 무속인들은 여기서 민박도 하며 평일 하루 3만원 비용으로 텐트를 빌린다. 주말에는 더 비싸고 정월 대보름 등 무속인이 대거 몰리는 시기엔 대여료가 8만원으로 올라간다는데, 끊임없이 무속인처럼 보이는 일행들이 오갔다. 이들의 자동차는 그랜저같은 고급 차량부터 고물 승합차까지 다양했다.

길가 빈 공간에는 쓰레기가 넘치는 자루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곳을 청결하게 유지하려는 자생적인 규칙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당국에서는 무속을 막을 방도는 없지만 대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변 초입서부터 가득 들어서있던 천막을 상당수 철거해 대왕암과 해변의 자연스런 모습이 가려지지 않도록 해놓았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라는 팻말도 모래밭에 박아놓았는데 이 자리는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이고 무속인들은 이 자리를 선호한다.

▲ 문무왕릉이 잘 보이는 산자락의 이견정 ⓒ이순희(이견대 9)

한 사람은 "여기 무속인들이 와서 징을 쳐서 시끄럽고 돼지머리에 과일에 지저분하다. 당국에 신고를 해도 계속 그런다." 고 불평했다.

그렇지만 횟집에서 음식을 먹는 일반인이나 해수욕객, 젊은이의 불꽃놀이나 치성드리는 무속 행위가 서로 어떻게 다르다고 할지는 모르겠다. 해변엔 관광객이나 낚시꾼, 여행객, 로맨틱한 산책, 그런 것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무속인이든 일반인이든 그들이 올리는 제는 특별한 광경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2000년에는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본격적인 동해안 별신굿이 대대적으로 열려 우리 문화의 자산으로 소개되었다. 여기는 용왕님의 존재가 어떤 형식으로든 실존하고 있다. 학계의 한 사람은 "이곳의 무속인 행렬이나 동해에 관련된 무속예술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 이견정에서 바라본 문무왕릉 ⓒ이순희(이견대 7)
▲ 이견정 대들보에 그려진 황용. 감포에서 본 유일한 용이었다. ⓒ이순희

수중능이 보이는 산 중턱의 이견대에서는 해변 모래밭과 부서지는 파도가 더 넓게 보이고 대왕암은 눈 아래로 조그맣게 보였다. 이견대 정자 대들보에는 떠도는 여의주를 콧수염으로 가볍게 말아쥐는 황용, 청용의 단청그림이 있었다. 문무대왕의 기상을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민화적 해학이 살짝 느껴지고 너무 엄숙하지 않은 것도 지나가는 이의 마음에 가뿐히 와 안겼다. 감포에서 본 용은 이것이 유일했다.

▲ 건어물집의 멋진 간판 가까이 '무당뉴스' 보급함이 있어 무속인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알린다. ⓒ이순희(문무왕릉 73)
하지만 이견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기서 수중릉을 더 잘 볼 수있는 망원경 시설같은게 있으면 현대적으로 변용된 이견대 구실을 할 수 있지 않으려나 싶었다. 해변에 망원경이 있었는데 자꾸 고장나 철거했다고 했다.

그래도 경주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와서 멀리 떨어진 자연상태의 바위와 무속인들, 횟집 말고 아무것도 더 볼수 없다는 건 갑갑했다. 해변 안내판에 수중릉을 소개하는 내용도 사실적인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서 별 느낌이 안왔다. 무속인들은 '무당뉴스'도 발행하는데 국가지정 사적지인 문무왕릉은 항공사진 한 장 파는 것도 없어 사람들은 맨손으로 돌아간다.

삼국통일의 승자가 된 왕에게 바치는 아들 신문왕의 헌사는 거대한 탑이 있는 감은사 건축으로 이어졌다. 감은사에서는 다시 기림사와 용연으로 이어지면서 무열왕 이래 4대째에 이르는 효소왕까지 등장하는 만파식적 이야기를 확인했다.

뭍에는 문무왕대에 조성된 건축물의 유적이 많아서 며칠을 두고 그 자취를 따라다녔다. 그런 유적들은 경주의 수많은 유적지 역사 속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면서 확인된 것일 뿐 처음부터 계획하고 다녀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중 생각하기에 문무왕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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