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는 왜 그들에게 의사 면허를 주었는가?
이토는 왜 그들에게 의사 면허를 주었는가?
[근대 의료의 풍경·85] 의사 면허 미스터리
이토는 왜 그들에게 의사 면허를 주었는가?
갑오·을미개혁기와 대한제국 시기, 조선/한국 정부가 새로운 근대적 법과 제도를 마련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했던 것은 일본의 법과 제도였다. 의료와 위생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초기에 시찰단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하여 자신들이 도입할 근대 문물과 제도를 그 현장에서 직접 관찰, 조사, 파악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사, 수집, 연구한 자료와 결과들을 토대로 <의제(醫制)>와 <학제(學制)> 등 자신들 나름의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거기에 반해 한국(조선) 정부는 주로 일본을 벤치마킹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서양의 근대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일본은 1874년 의사의 자격 등을 규정한 <의제>를 제정, 공포했다. 이때 <의제> 제정에 핵심적 역할을 한 나가요(長與專斎, 1838~1902년)는 1871~1872년 이와쿠라(岩倉具視)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에 파견되어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의 의료와 위생 실태 및 제도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메이지 정부는 초기의 탐색 과정을 거친 뒤, 전통 의료(한의학)를 배제하고 근대 서양 의료를 국가의 공식적 의료로 채택한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세웠다. 1874년의 <의제>는 그러한 메이지 정부의 방침을 처음으로 제도화한 것이었다.

<의제> 중에서 의사 자격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학 졸업 증서 및 내과·안과·산과 등 전문 과목 실습 증서를 확인하고 의사 면장(免狀, 면허장)을 교부하여 개업을 허용한다. 기왕에 개업하던 의사는 학술 시업(試業, 시험) 없이 경력과 치료 실적을 평가하여 가면장(假免狀)을 준다. 그리고 의제 발포 후 새로 개업을 신청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과목의 시업을 거쳐 면장을 받아야 한다. 해부학 대의(大意), 생리학 대의, 병리학 대의, 약제학 대의, 내·외과 대의, 병상 처방 및 수술. 또한 가면장을 받은 사람도 30세 이하인 경우는 3년 이내에 반드시 위의 시업을 치러 다시 면장을 받아야 한다." (<의제> 제37조)

이처럼 의사 자격에 관한 규정은 절충적이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즉 메이지 정부의 궁극적인 방침은 근대 서양 의료를 시술하는 의사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당분간은 기왕의 전통 의료 시술자의 기득권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 새로 의사가 되어 개업할 사람과 30세 이하의 전통 의료 시술자는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제학, 내·외과 등 근대 서양 의학 과목을 공부하여 시험에 합격해야만 하도록 했다. 요컨대 새로 전통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는 길은 시험이란 관문을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한 셈이었다.

▲ 1874년 <의제> 제정에 핵심적 역할을 한 나가요(長與專斎, 1838~1902년). "난학(蘭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 자신 나가사키 의학교에서 폼페(Johanne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8년) 등 네덜란드 의사들로부터 의학 교육을 받았다. ⓒ프레시안
이 당시 <의제>에 따라 정부(1875년 6월말까지는 문부성 의무국이 의사 자격 업무를 관장했고, 그 뒤 의무국이 폐지되고 내무성에 신설된 위생국이 담당했다)에 등록된 의사 수는 약 3만4000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황한의(皇漢醫) 즉 한의사는 2만8000여 명으로 80%가 넘었으며 난학(蘭學, 란가쿠)을 배운 의사는 5000명가량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이미 난학을 통해 근대 서양 의술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세대 뒤인 1900년 무렵에는 근대 서양 의학을 학습한 의사가 2만 명을 헤아려 수에서도 한의사를 능가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그 뒤로 가속화되었다.

행정적 훈령의 성격이 강했던 <의제>는 그 뒤 <의사 면허 규칙>과 <의술 개업 시험 규칙> 등으로 법제화되어 더욱 강한 규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1883년 10월 제정, 포고되어 1884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의사 면허 규칙>은 제1조에서 "의사는 의술 개업 시험을 치러 내무성으로부터 개업 면장을 받은 자를 이른다. 단 이 규칙 시행 이전에 교부받은 의술 개업증은 유효하다"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관립 및 부현립(府縣立) 의학교의 졸업 증서가 있거나(제3조) 외국의 대학 의학부 또는 의학교를 졸업한 사람(제4조) 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개업 면장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을 인정했다. 도쿄대학 의학부 졸업자들은 이미 1879년부터 가장 먼저 그러한 특권을 누렸다.

일본에서는 <의제>든 <의사 면허 규칙>이든 의사와 한의사를 별개로 취급하지 않고 동일한 의사 자격을 부여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의사와 한의사에게 각각 "의사 면허증"과 "한의사 면허증"을 부여하는 것과는 발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 일본의 <의사 면허 규칙>. 1883년 10월 제정, 포고되어 1884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 <규칙>에 의해 1884년부터는 의술 개업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새로 의술 개업 면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관립 및 부현립(府縣立) 의학교 졸업자들에게는 시험 없이 면장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인정했다. 도쿄대학 졸업자들은 이미 1879년에 그러한 특권을 얻었다. ⓒ프레시안

▲ 일본의 <의술 개업 시험 규칙>. 1883년 10월 제정, 포고되어 1884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도쿄대학교 의학부, 그리고 그 밖의 관립 및 부현립(府縣立) 의학교 출신들을 제외하고는 내무성이 주관하는 의술 개업 시험에 합격해야만 개업할 자격을 인정받았다. 시험 과목은 전기가 물리학, 화학, 해부학, 생리학 등 네 과목이었고, 후기가 외과학, 내과학, 약물학, 안과학, 산과학, 임상실험 등 여섯 과목이었다. 일본 정부는 의술 개업 시험을 통해 전통 의료를 도태시키고 근대 서양 의료를 국가 의료로 확립했다. ⓒ프레시안

이제 한국(조선)의 의료인 자격 인정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에서는 1880년대 후반부터 소정의 우두(牛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졸업장과 함께 면허장 격인 "본관차첩(本官差帖)"을 주었다(제17회). 그리고 1890년대 후반에는 종두의 양성소 졸업자들에게 내부대신이 "종두의술개업 윤허장(種痘醫術開業允許狀)"을 발급했다(제47회). 이것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초기의 의료인 자격 인정 제도 또는 면허 제도이다.

한편, 의사에게 "의술개업면허장"을 준다는 사실을 처음 법으로 규정한 것은 1899년 7월에 제정된 <의학교 규칙>이었다. <의학교 규칙>은 제6관 제9조에 "(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부여한 후에 내부대신이 의술개업면허장을 부여한다"라고 명기했다. 일본에서 그러했듯이 정규 의학교 졸업자에게 특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수업 연한과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한국 내에서 의학교의 위상을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와 비슷하게 상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학교 규칙>(학부령 제9호)이 특례로 의술개업면허에 대해 규정한 것과는 달리, 반년 뒤인 1900년 1월 2일 제정, 반포된 <의사 규칙(醫士規則)>(내부령 제27호)은 의사 자격을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또한 <의사 규칙>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양)의사와 한의사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의사 규칙>의 제1조에는 한의학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 있다. 여기서 의사(醫士)를 "의학을 관숙(慣熟)하야 천지운기(天地運氣)와 맥후진찰(脉候診察)과 내외경(內外景)과 대소방(大小方)과 약품온량(溫涼)과 침구보사(針灸補瀉)를 통달하야 대증투제(對症投劑)하는 자"로 규정했는데 이 가운데 "온량(溫涼)"과 "침구보사(針灸補瀉)"라는 단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점 때문에 그 동안 <의사 규칙>은 대체로 한의사에 관한 법으로 생각되어 왔다.

1910년까지 한국에는 의사 자격에 관련된 법령은 <의학교 규칙>과 <의사 규칙> 외에는 없었다. <의사 규칙>이 한의사만을 규정한 것이라면 (양)의사에 관한 일반적인 법령은 없었던 셈이 된다. 만약 <의사 규칙>에서 정의한 "의사"가 "한의사"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양의사"의 법률적 명칭은 무엇이었는가? 1900년대 기록에서 "의사(醫士 또는 醫師)"라는 호칭은 양의사와 한의사를 구분하지 않고 통용되었다.

또한 <의사 규칙> 제7조의 "무론(毋論) 내외국인하고 인허장이 무(毋)한 자는 행술업(行術業)을 득(得)지 물(勿)할 사" 즉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인허장이 없는 자는 의술 개업을 행하지 못한다"라는 규정은 <의사 규칙>의 의사가 한의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의사와 (양)의사를 통칭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의사 규칙>은 한의사와 양의사를 망라하여 규정한 법이었다.

<의사 규칙> 제2조는 의사 자격을 인정하는 요건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의사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에 졸업 증서가 유(有)하야 내부(內部) 시험을 경(經)하야 인가를 득(得)한 외에 의업을 행치 물(勿)할 사. 단 현금 간에는 종권(從權)하야 기(其) 의술 우열을 위생국에셔 시험하야 내부대신이 인허장을 급여할 사"

▲ <황성신문> 1900년 1월 18일자. 내부령 제27호로 제정된 <의사 규칙>과 <약제사 규칙>이 게재되어 있다. <의사 규칙>은 제1조에서 의사의 자격, 제2조에서 의사 자격을 인정하는 요건과 과정을 규정했으며, 제7조에서는 이 법이 외국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명기했다. 이로 볼 때 <의사 규칙>은 한의사뿐만 아니라 "양의사"도 망라하여 규율한 법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어떤 방법으로 의사 인허증을 부여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프레시안

우선 이 규정은 기존 의사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이지 초기의 일본과는 차이가 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일본도 1884년부터는 기득권 인정 조항을 없앴다.) 그리고 당장 시행할 것은 아니었지만 의사 자격을 얻는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했다. 즉 의과대학/약학과 졸업 증서가 있는 사람이 국가(내부)에서 부과하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약학과 졸업자에게도 의사 자격을 인정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의사가 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를 보아서 "졸업증서가 유(有)하야"는 "졸업증서가 유(有)하거나"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여건이 뒤떨어지는 한국이 일본의 법과 제도를 참조하면서 일본보다 더 까다로운 의사 자격 규정을 두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의과대학/약학과가 아직 없는 실정에서 내부 위생국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내부대신 명의의 "인허장"을 주었다. 시험과목이 법에 명기되어 있는 일본과는 달리 <의사 규칙>에는 과목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실제로 어떤 시험을 보았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시험 과목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면 당시 한국 정부의 의료 정책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허장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지만, <의사 규칙>의 내용과 표현을 살펴보면 "의사 인허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술개업인허장"이라는 명칭은 <의사 규칙>이 제정, 시행된 지 8년 이상이 지난 1908년 6월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위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아(제84회) <의사 규칙>에 의해 발급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 규칙>은 1900년부터 실제로 시행되었다. 내부 위생국에서는 의사와 약제사들을 소집하여 시험을 보게 하고 인허장을 수여했다.)

또한 <의사 규칙>에는 외국인 의사와 외국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에 관한 별도의 규정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의사 자격을 어떻게 부여했을까? 이들도 (형식적이나마) 내국인과 마찬가지로 내부 위생국의 시험을 치렀던 것일까?

<의학교 규칙>과 <의사 규칙>을 종합해 보면, 당시 한국에서 의사 자격을 인정받거나 의술개업을 하기 위해서는 의학교를 졸업하든지 내부 위생국 시험에 합격하든지 해야만 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학교 출신들은 크게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더라도, 한국에서 배출된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사라는 점에서 자부심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자부심이 손상되고 의사로서의 자격조차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에비슨이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서 청탁을 했을 때, 의학교 출신들의 자부심이 훼손되고 의사 자격이 위협받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에비슨은 자신들이 열심히 가르쳐서 이제 의사로 인정할 만한 역량을 갖추게 된 학생들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의 절대적 권력과 권위로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줄 것만을 기대했을 것이다. 에비슨은 당시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병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학교로서의 설비는 아주 보잘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1회 졸업생을 내게 된 만큼 우리는 이것을 의학 전문 학교라고 말하게 되었다." (<에비슨 전집 1>, 348쪽, 청년의사, 2010년)

하지만 노련하고 교활한 이토 히로부미는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에비슨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 주어 영국과 미국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의료 부문에서 거둔 성과를 짓밟아 한국 침략과 지배의 구실을 마련했고, 게다가 한국인 의사 사회의 질서를 자기 식으로 개조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통감부가 한국 정부(내부 위생국)에 지시하여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수여하도록 한 "의술개업인허장"이 바로 이토가 부린 술책의 핵심적인 고리 역할을 했다.

이때 "의술개업인허장"을 발급한 법률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살펴본 <의학교 규칙>과 <의사 규칙>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그 밖의 법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의술개업인허장"의 발급은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른 초법률적 또는 법률외적 조치였다. 그것은 한국에 근대적 법·제도를 실시한다는 일제의 침략 명분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조치였다.

일제는 이미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의사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온전하게 인정받았던 의학교 출신들에게 새삼스레 "의술개업인허장"이라는 새로운 진입 관문을 부과했다. 의학교 출신들은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이 집단적·조직적 대응 방법으로 선택했던 것이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의 결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 한 가운데가 에비슨이며 그 오른쪽이 허스트(Jesse W Hirst)이다(<Korea Mission Field> 제35권 제7호, 1939년 7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졸업생 7명이 서 있다. 이들이 받은 "의술개업인허장"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술책이 담겨 있지만 에비슨이나 졸업생들의 잘못으로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졸업생들은 민족사적으로 보아 일제 농간의 피해자였다. 이들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사실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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