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박사' 조경철, 누가 그를 쏘았나?
'아폴로 박사' 조경철, 누가 그를 쏘았나?
[이명현의 '사이홀릭']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
'아폴로 박사' 조경철, 누가 그를 쏘았나?
"인생은 별처럼 꿈꾸는 것이다."

고(故) 조경철 박사의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벽면 한 켠에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 글귀만 쳐다보고 있었다.

인생의 꿈을 다 꾸고 이제 막 별로 돌아가는, '서민의 친구'로도 '아폴로 박사'로도 불렸던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놓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때만 해도 회복 전망은 낙관적이었는데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조경철이 쓴 회고 에세이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서해문집 펴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장례식 기간 중에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청탁받았었는데 글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처음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글을 쓰지 못해서 마음의 빚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기회가 왔다.

▲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조경철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나는 나의 조국 한국과 나를 키워 준 미국을 사랑한다"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봐왔던 조경철 박사의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이미지와 '국가들'이 잘 겹쳐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의 부드럽고 익살스러운 문장 속에 각인되어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격동기 한국의 기록 자체였고 그는 그 격동의 역사의 한 복판에 있었으니, '조국 한국'과 '미국'이 낯설지 않은 그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평양에서 자라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한 청년이 김일성 암살 모의 사건에 연루된 것을 계기로 월남을 감행했다. 고생 끝에 서울에서 대학생이 되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통역 장교로 전투 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해서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았다.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은 인민군이 되었고 월남자 가족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워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이어갔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들의 짧은 만남도 이루어졌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이 청년은 성실한 근성과 의로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초특급으로 영주권을 발급해 준 한 국가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성공적인 미국 생활을 하던 중 '조국 한국'의 부름을 받아서 귀국했다.

이 이야기는 한국전쟁 전후의 격랑의 시대를 겪은 숱한 '누군가들'의 사연을 모두 합쳐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또 정확하게는 조경철 박사 자신이 몸으로 직접 겪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조국 한국'과 '미국'은 그가 사무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천문학의 격동의 현장에도 천문학자 조경철이 있었다.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은 그 시대를 기록한 그의 증언이기도 하다. 그는 연희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학 박사 과정에 막 입학했던 청년 조경철에게 어느 날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연희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고 이원철 박사의 편지였다. 이원철 박사는 1926년 미시간 대학에서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과학 계통 제1호 박사였다. 조경철의 운명을 바꾼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네가 연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물리학 공부를 버리고 정치학이라는 학문의 외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실망이 컸다. 내가 1948년에 대학에서 천문학 강의를 할 때 너의 공부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았기에, 너를 나의 후계자로 삼아 천문학자로 만들고 싶다. 여기에 미시간 대학원의 천문학과 입학 허가서를 동봉하며, 한국 국비 유학생으로 지명하니 곧 미시간 대학으로 떠나거라."

그야말로 그의 말마따나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충격'이었지만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그는 미련 없이 미시간 대학교로 짐을 써서 떠났고, 그의 운명은 180도 변했다. '별과 살아온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미시간 대학을 거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옮겨서 천문학 공부를 계속했던 조경철 박사는 당시에는 최첨단 연구 분야였던 식쌍성 관측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때 이미 '귀하신 몸'이 되어 있었다. 구소련의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내가 공부하던 초반기에 천문학은 그야말로 '파리 날리는 과'였는데 이 스푸트니크 발사 사건으로 우리 과가 일약 인기학과가 되어 지원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는 '귀하신 몸'을 영입하겠다고 사방에서 초청이 왔다. 1962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나 혼자였으니까 말이다."

하버드 대학의 천체물리연구소를 비롯한 많은 연구소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조경철 박사는 공무원 신분으로 은퇴할 때까지 신분이 보장되는 미국 해군천문대를 선택했다. 해군천문대는 '외국인' 조경철에게 공무원이 되는데 필요한 영주권을 일주일 만에 만들어 주었다. 구소련과의 우주 경쟁 속에서 미국의 대학들은 서둘러 교양 천문학 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했는데 조경철 박사의 강의가 인기를 끌어서 다섯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강행군을 하기도 했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고더드 우주비행센터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우주 개발에 직접 관련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제미니 6호와 7호의 랑데부 장면을 관제실에서 목격했고 화성 탐사선 마리너 4호가 직접 보내오는 화성 표면 사진을 통해서 화성의 분화구를 처음 목격하는 역사적인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해외 유치 과학자 제1호가 되어 미국 생활 15년 만에 귀국한 조경철 박사는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교수로, 그에게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을 안겨준 아폴로 11호 중계 해설가로, 국립천문대 설립위원회 위원장으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사무총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후에는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과를 개설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위에서 나열한 내용만으로도 조경철 박사에 대한 학술적 평가가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늘 천문학적 격동의 현장에 있었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천문학계의 '조경철' 평가는 일반인의 지지와 열광과는 달리 다소 냉소적인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가 더 치밀하게 후학을 양성하지 못했다든지 더 끈질기게 질 높은 논문을 생산해내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천문학계 주류의 '조경철' 저평가는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도 그랬던 모양이다.

"나의 정위치는 대학교 교수직이다. 대학 교수 사회는 동업자끼리 서로 시기와 반발이 가장 심한 곳이다. 그저 '죽었소' 하고 가만히 있으면 별 탈이 없지만, 한 동료 교수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으면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매스컴 활동은 내가 자초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자신의 무능력은 생각도 않고 매스컴의 인기를 얻은 동료 교수를 혹평하며 끌어내리기에 바쁘다. 기회만 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도 그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과학자가 직접 쓴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유독 드물다. 천문학자가 쓴 것은 아마도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이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소중하고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그가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진짜 마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껄끄러웠던 역사를 솔직하게 역사 앞에 밝히고 자신의 치부를 과감하게 드러내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조경철 박사에 대한 학계 내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을 것 같다. 예컨대 연세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물러날 때 있었던 소문만 무성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서 직접 접할 수 없었던 것은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당사자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내용을 발설하기 어려웠겠지만 내내 아쉬운 마음을 감추기도 힘들다. 그냥 한 방 날리고 자신의 허물도 까발려버렸더라면, 그런 집착을 오랫동안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그에게도 '탤런트 교수'라는 학계의 시샘어린 놀림은 참기 힘들게 아팠던 모양이다. '제대로 교수 활동을 할 리 없다'는 논리로 정상적인 교수 활동에 따르는 혜택에서 번번이 제외 당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시작한 것이 '저술 활동'이라고 적고 있다. 혹평하는 자들로부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럭저럭 노력하다 보니, 논문은 약 60편, 잡지에 기고한 것은 2000개가 넘었고, 책 저술도 2007년 현재로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최대인 170권에 달했다."

그는 "나의 여생의 목표는 200권이 넘는 책을 씀으로써 이 사회에 봉사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고, 실제로 177권의 책을 남겼다.

나도 이렇게 쓰였을 그의 책들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천문학자의 꿈을 키웠던 '조경철 키드'의 한사람이다. 아마추어 천문가였던 나는 어릴 때부터 공식적인 모임에서나 사적으로 조경철 박사를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은 세계 천문의 해 행사와 관련해서 또 외계 지적 생명체 탐색(SETI)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조경철 박사를 만나는 횟수가 부쩍 늘었었다.

이 때 전설적인 과학 잡지 <학생과학>의 발행인이며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 초대 회장이었던 메트로신문사 남궁호 회장과 조경철 박사의 만남도 주선했었다. 청년 남궁호가 한국에서 과학 잡지를 발간할 생각으로 미국에 있던 조경철 박사를 찾아갔었던 이야기며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를 창립하던 때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두 사람은 즐거운 추억에 잠겼었다. 국제 우주 대회에 참가했던 SETI 과학자 두 분과 조경철 박사의 만남도 주선했었다. 1993년에 있었던 SETI 학회에서 만났었던 세 사람은 재회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늘 받기만 하던 다 자란 '조경철 키드'의 작은 선물이었다.

▲ 지난해 3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조경철 박사의 빈소. ⓒ연합뉴스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 조경철 박사가 SETI 연구의 선구자인 프랭크 드레이크 박사와 함께 1993년에 찍은 사진을 빌렸는데 미처 돌려드리기 전에 조경철 박사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만났을 때, 당신의 박사 학위 논문 원본을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에서 빌려갔는데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하시며 정황을 알아보고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아직 수소문도 못했다. 부지런히 서둘러서 약속을 지켜야겠다.

강원도 화천에 조경철 박사를 기념하는 천문대가 완공되면 그 때 그 사진과 박사 학위 논문을 돌려드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세계 천문의 해를 기념해서 원고지에 육필로 써주신 천문 에세이를 내가 직접 입력해서 웹진에 게재했었다. 세계 천문의 해 기념 에세이집을 출간해서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에세이는 천문학 관련해서는 조경철 박사님의 유고작이 된 글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을 덮으려니 '별처럼 꿈꾸는 인생'을 살고 간 그가 사뭇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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