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병원,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하다
국립병원,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하다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8] 광제원 ⑥
국립병원,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하다
광제원은 기본적으로 빈민 환자들을 국고(國庫)로 진료하는 병원이었다. 1만6414명을 진료했던 1900년도의 병원 수입(藥品放賣收入價)은 439원(元)62전(錢)2리(里)로, 그 해 병원 지출 8424원(병원 이전료 3200원은 별도 지출)의 5%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병원의 수지(收支) 상태였다.

한편, 일제(통감부)가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을 장악한 1910년의 경우, 대한의원(大韓醫院)의 세출 예산은 약 25만환(圜), 전주 청주 함흥 등지의 자혜의원(慈惠醫院) 세출 예산은 4만5000환이었고, 이들 국공립 병원의 세입 예산은 9만5000여 환이었다(<관보> 1909년 12월 27일자). 불과 몇해 사이에 병원의 수입-지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을 뿐만 아니라(세출은 1906년에 비해 23배가 되었다) 수지가 "근대화"되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병원의 수입은 지출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 1905년 1월부터 화폐 단위를 원(元)에서 환(圜)으로 바꾸었고 이때 구화(舊貨) 2원이 신화(新貨) 1환에 상당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원과 환의 가치는 거의 같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레시안

모든 점이 다른 100년 전과 오늘날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국가의 경제, 재정 상태가 매우 빈약하고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 격이었던 조건에서 정부와 의사들이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려 애썼던 점을 평가하면 족할 것이다.

또 당시는 전환기를 맞아 전통적인 의사 등용 방법이었던 과거(醫科) 제도가 폐지되었고 새로운 방식의 의학 교육은 이제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에 따라 의사의 공급은 그 이전보다 더 불안정했다. 광제원에서 근무했던 적지 않은 의사가 학력과 경력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주된 이유는 그 점이었을 것이다.

<병원(광제원) 관제>에 규정되었던 대로 "의학 졸업한 인원", 즉 의학교 졸업생들을 광제원 의사로 채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 적은 없었다. 광제원을 의학교 학생들의 실습 병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요컨대 대한제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만들었던 의학교와 광제원은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의학교 졸업생들은 가장 마땅한 일자리였을 광제원 의사 직을 얻지 못했으며, 그것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후배들의 의욕을 꺾었고 그럼으로써 의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광제원으로서는 당시 유일하게 정규 의학 교육 과정을 밟은 의사들의 역량을 활용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을 "임시 위원"으로 콜레라 방역 활동 등에 참여시켰을 뿐이었다. 제대로 활용하더라도 크게 모자랐을 의료 인력을 거의 방치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그것이 100년 전 국가 의료의 또 한 가지 모습이었다.

광제원의 주된 기능은 환자 진료였으며, 필요한 경우 방역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밖에 <관제>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광제원은 의무(醫務) 행정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기사가 한 예이다.

함흥거(居) 한국홍 박성학 이창익 3씨가 수만금을 구취(鳩聚)하야 인민의 질병을 광구(廣救)차(次) 약포를 설립하고 광제원에 청원하얏더니 사립병원으로 인허하고 해(該) 3씨난 임시위원으로 파송하얏더라 (<황성신문> 1903년 8월 12일자)

이 기사를 보면(비슷한 기사가 몇 가지 더 있다), 광제원은 위생국의 기능인 약국(약포)/병원의 인허 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 사립병원이 정부의 인허가를 얻는 절차가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제원이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04년부터였다.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이 2월 20일 전후 한성에 잠시 진주했을 때 광제원은 영어학교, 일어학교, 사범학교, 7개 소학교 등과 함께 일본군의 임시 거주처(병영)로 제공되었다. 역사상 병원이 군대 주둔지로 사용된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정당화될 일은 아닐 것이다. 설령 아군의 경우라도.

▲ 러일 전쟁의 개략도. 일본어판 위키피디아 "日露戰爭" 중에서(왼쪽). 1904년 2월 한성에 진주한 일본군. 한글판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중에서. 광제원을 비롯하여 한성에 일본군이 진주했던 것은 인천 해전 직후인 1904년 2월 20일 무렵이었다(오른쪽). ⓒwikipedia.org

그 뒤 1905년 10월 광제원의 종두지소(광제원으로 통합되기 이전의 한성종두사 건물, 제5회)는 일본인 경부(警部, 경감) 와타나베(渡邊勇次郞)의 관사가 되었다. 물론 광제원 측과 이에 대한 사전 협의는 없었다. 주로 한성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의 종두 접종 업무를 보았던 종두지소는 졸지에 접종 장소를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 침략의 선봉장 격인 일본인 고위 경찰에게.

광제원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침탈은 1906년 2월 사사키가 의장(醫長)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사사키는 한약소와 종두소에 근무하던 한국인 의사 5명에게 시험을 치러서 낙방했다 하여 축출했다. 이때 쫓겨난 5명 가운데 이재봉, 이수일, 김석규, 송영진 등 4명은 조치에 고분고분히 따랐다고 하여 몇 달 뒤에 두 달치 봉급을 지급받았고, 부당한 조치에 저항했던 한우는 그마저도 받을 수 없었다.

그 뒤 사사키는 아예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대신 내과, 외과 등 근대식 진료과를 설치하고는 일본인 의사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미 광제원의 주인은 사사키였던 셈이다. <황성신문> 1906년 9월 5일자에 따르면, 그 무렵 광제원에 근무하는 "본국 관원"은 15명, 일본인 의사는 무려 16명이었다.

"본국 관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은 원장 민원식(閔元植), 그리고 의사 최형원(崔衡源, 1885년 의과 합격, 양약소 소장 역임), 김성배(종두의 양성소 1기, 종두소 소장 역임), 피병준(1885년 의과 합격, 종두의 양성소 2기), 이규선(한약소 소장 역임), 박형래, 이응원(이상 종두의 양성소 2기), 유일한(종두의 양성소 3기) 정도이다. (최형원과 김성배는 얼마 뒤에 면직되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잡급직이었을 것이다.

광제원 시절의 일본인 의사로 확인되는 사람으로는 외과 및 이비인후과 의사 우치다(內田徒志), 부인과 의사 스츠기(鈴木謙之助), 안과 의사 가네이(金井豊七), 그리고 약제사 이타가키(板垣懋)이다. 일본인 의사들이 대거 광제원 자리를 차지한 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수준 높은 근대 의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결코 친일적이지 않았던 <황성신문> 기사에도 다음과 같이 그러한 기대와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광제원에셔 외과에 명고한 의사 내전(內田)씨가 검진 후에 시용(施用) 최신 묘법하야 봉침(針縫) 치료한즉 어언(於焉) 회생에 중상 9처를 한(限) 10일 치료라 하니 빈사 인을 회생하고 해원 의사의 고명박식을 세인이 칭송한다더라 (1906년 6월 26일자)

광제원에셔 내외국 의사가 병인 치료에 열심하야 내과 외과 이과비과안인후과 등으로 분과하야 공동 시료하난대 일본 간호부 3인이 환자 치료에 역진 간호함으로 귀부인도 내원 치료하니 내외 치료상에 우극 편의한지라 (…) 문명국에셔난 의학사의 정명(精明)으로 간호학을 교육하야 간호부의 명예가 우극탄미하니 (1906년 8월 2일자)

광제원에셔 또 부인과를 특설하고 일본에 고명한 부인의 영목겸지조(鈴木謙之助)씨를 초빙하야 부인에 대한 산전산후와 수태법과 혈붕(血崩) 혈괴(血塊) 등 각증에 기효여신(其效如神)하니 원근간 부인은 여우(如右)한 병증이 유(有)하거든 광제원 해(該)의의게 왕진하면 신기한 공효만 볼 뿐 아니라 각색 치료과가 진비(盡備)하얏스니 무론모병(無論某病)하고 일일 내료(來療)하면 무불득중(無不得中)이라더라 (1906년 8월 11일자)

39세 이희보가 20년 전붓터 이통(耳痛)으로 농인(聾人)되야 평생 한탄하더니 신문에셔 광제원 의사가 고명하다난 언(言)를 보고 해원에 취(就)하야 치료하니 불과 1주일에 세어(細語)를 청문케 하니 여차(如此) 고명 의사는 초견(初見)하얏다고 감은한다더라 (1906년 12월 6일자)

광제원 의사 일본인 금정(金井)씨가 안생과(眼眚科)에 신효하야 12년 된 폐안(廢眼)을 치료 유효케 하야 현성완인(現成完人)하얏고 일반 맹인에게 통기(通寄)하야 속래(續來) 치료하라한즉 맹인이 고사하기를 폐안을 복명(復明)할지라도 영업은 무로(無路)한즉 불가라 함으로 해(該) 맹인의 우치함을 문자(聞者) 개탄한다더라 (1907년 3월 6일자)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데 내세운 명분은 한국(인)의 문명개화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 개화 가운데에 한국인들에게 가장 어필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의료였다. <황성신문> 보도는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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