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vs 전라도…1971년 4월 27일 갈라졌다!
경상도 vs 전라도…1971년 4월 27일 갈라졌다!
[김대중 평전 '새벽'·12] 거대한 축제
2011.10.10 10:32:00
경상도 vs 전라도…1971년 4월 27일 갈라졌다!
거대한 축제

1971년 4월 18일은 정치 인생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유세가 있었다. 일찍 일어나 마당을 거닐었다. 선거는 열흘 정도만 남겨두고 있었다. 유세장에서 열광하던 청중들이 떠올랐다. 김대중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문득 마당 한켠을 보니 꽃들이 피어 있었다. 어느 새 봄이었다. 꽃들과 눈인사를 했다. 김대중의 동교동 집은 아침저녁으로 터질듯 붐볐다. 인기가 치솟자 찾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달라진 위상에 스스로 놀랄 때가 많았다. 권력은 태어날 때가 가장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후보 박정희에 결정타를 날려야 했다. 이 땅에 진정한 봄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장충단 유세가 중요했다.

오후 2시쯤 신민당 당사를 나왔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무개차에 올랐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거대한 인파가 차를 에워쌌다. 군중 사이를 헤쳐 나가는 광경이 흡사 선박이 바다를 가르는 듯했다. 그 넓은 장충단 공원이 터질듯 했다. 연단에 올라서니 눈 가는 곳은 모두 사람이었다. 100만 인파였다. 그날 생애 최고의 연설을 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울 시민 여러분! 오늘 여기 장충단 공원의 백만이 넘는, 대한민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유례가 없을 이 대관중이 모인 것을 보고, 서울 시민의 함성을 보고 이제야말로 정권 교체는, 우리의 승리는 결정이 났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 앞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공화당은 지난 개헌 때 이미 박정희 씨를 남북 통일이 될 때까지 대통령을 시키려 했으나, 그 당시는 아직 자기 공화당 내부나 야당이나 국민이나 거기까지는 할 수 없어서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 음모를 처음 폭로했다. 1967년 목포 선거에서 '3선 개헌'을 예고했을 때 박정희는 이를 강력 부인했지만 결국 개헌을 강행했다. 이번에도 김대중의 눈은 박정희의 속내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 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고,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하면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분이 총궐기하는 의미에서 박수갈채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기어이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선거에서 나와 더불어 승리할 것입니다. 7월 1일은 청와대에서 새로운 취임식을 올리는 날입니다. 550만 서울 시민 여러분! 7월 1일에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이날 김대중은 "내가 정권을 잡으면"을 16번이나 외쳤다. 거대한 축제였다. 장충단 공원 일대는 환호의 도가니였다. 청중들의 함성은 남산을 허물듯했다. 모든 눈은 김대중 한 사람을 향했다. 김대중은 늠름했다. 비로소 야권에서는 승리를 점치기 시작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유세가 끝나고 무개차에 오르자 다시 시민들이 에워쌌다.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청중들은 이내 시위대로 변했다. "김대중" "정권 교체" "3선 반대"를 외쳤다. 흡사 4·19 혁명 전야를 방불케 했다. 이날 박정희는 대구 수성천변에서 유세를 했다. 장충단 공원 유세 상황을 보며 여권 수뇌부는 경악했다.

박정희는 선거 이틀을 앞두고 장충단공원 유세로 맞불을 놨다. 청중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청중 숫자와 유세장 열기는 김대중의 유세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박정희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바로 눈물이었다.

"이번 출마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울먹이며 표를 구걸했다. 도대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독재자의 눈물, 그 속에는 독(毒)이 들어있었다. 선거가 끝난 후 일본 주요 언론들은 '박정희의 승인이 동정표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눈물을 믿은 국민들은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유세장의 약속처럼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더 이상 표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선거 자체를 강탈해버렸다.

판세가 극도로 혼미했다. 불안해진 정부 여당은 김대중을 용공 분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빨간색' 낙인은 김대중이 아닌 박정희에게 찍어야 했다.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또 둘째 형의 월북과 거물 간첩 남파 사건 등으로 행적 곳곳이 불온했다. 이는 미국 정부 기관과 국내 여러 자료 등에서 밝혀진 사실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김대중은 '가진 자'로 분류되어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할 뻔했다. 그런데도 정작 붉은 물은 김대중에게 뒤집어씌웠다.

선거를 한 달쯤 남긴 3월 하순부터 간첩단 사건이 잇달았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가 경쟁하듯 발표했다. 투표 4일을 앞두고는 지하당 간첩단 13명을 검거했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외무장관 최규하가 직접 김대중을 겨냥했다.

"김대중 후보의 언론·체육인 등의 남북 교류, 4대국 안전 보장안 등 공약을 북한이 지지를 표명했다."

이승만 정권 때만 해도 선거판에 지역감정에 의한 편 가르기는 없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와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나라가 갈라졌다. 경상도 우대 정책이 서로에게 미움을 심었다. 그리고 선거 막판에 '호남 고립'이란 추악한 카드를 빼들었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이렇게 선동했다.

"신라 천 년 만에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다시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 쌀 속에 뉘가 섞이면 밥이 안 되는 법이다. 경상도 표에 전라도 지지표가 섞이면 조가 섞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상도 지역에 '전라도 사람들이여 단결하라'는 선전물이 뿌려졌다. 후보 김대중의 벽보 밑에 '호남 후보에 몰표를 주자'는 격문을 붙였다. 경상도 도민들의 지역 감정에 불을 질렀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지역 감정은 언론에서 더 조장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그 대립의 뿌리가 삼국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적대감이 '숙명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투였다.

투표의 날이 밝았다. 김대중은 아내와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를 했다. 내외신 보도진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김대중 부부의 표를 포함 모두 2700표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이유는 선거관리위원장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찍은 김대중의 표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부정 선거와 맞서 싸워야 했던 김대중에게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투표용지가 분실되고 중복·대리 투표가 적발되었다. 그러하니 그냥 묻혀 간 부정행위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개표는 29일 정오를 지나 완료되었다.

'박정희 634만 2828표, 김대중 539만 5900표.'

94만여 표 차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경상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 경상도에서만 150여만 표(경북 94만, 경남 56만 표) 차이로 참패했다. 그것은 지역 감정 조장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이때부터 한국은 지역 감정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패자인 김대중은 승자보다 더 '당당히'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극히 담담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국민의 평화적 정권 교체에 대한 애절하고도 열화와 같은 열망이 불법 부정으로 짓밟히고 이제 다시는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는 바라볼 수 없는 시점에 3·15 부정선거를 무색케 할 불법 부정 선거의 결과를 묵인할 수 없다."

'지극히 담담하다'고 했지만 김대중은 너무 아쉬웠다. 유세장의 열기와 정권교체를 원했던 유권자들의 간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김대중은 잘 싸웠다. 후회 없이 싸웠다. 정치가로서 하늘이 준 도량과 자신이 갈고 닦은 식견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우리 현대사는 용기 있고 정직한 정치인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그런데 만일 김대중이 1971년 선거에서 이겼다면 어찌 됐을까. 과연 정부 여당이, 아니 박정희가 승복했을까. 순순히 정권을 내놓았을까. 거의 완벽한 병영 국가를 구축한 박 정권이 민심에 순순히 투항했을지는 미지수다. 역사에 가정법은 있을 수 없지만 곧바로 영구 집권 수순에 돌입했던 박정희의 행적을 돌아 볼 때 김대중의 승리가 선거 혁명으로 이어졌을지는 불투명했다.

어쩌면 이런 논의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이미 박정희는 김대중의 승리를 훔쳐갔기 때문이다. 김대중에게 독재 국가에서 정권 교체가 가능한지 물었던 미국 상원외교위원장 풀브라이트의 의구심은 진행형이었던 셈이다.

이희호는 선거가 끝난 후 망명 중인 남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요즘 생각하면 1971년에 당신이 당선 못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나 봐요. 만일에 당선되셨다면 당신 생명도 주위에 몹쓸 사람들 때문에 위험이 따랐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의 말처럼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각하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면 적게 잡아도 100만 표 정도는 이긴 선거였다. 그 같은 사실은 이후 여러 사람들이 증언했다.

누구는 그때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젊고 힘이 있었으니 나라를 멋지게 개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지고도 온갖 박해를 받으며 새 시대를 열었고 우리 역사를 새롭게 썼기 때문이다. 그는 지면서도 늘 이겼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선거가 끝나고 <동아일보>엔 이런 칼럼이 실렸다.

여하간 김대중 후보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잘 싸웠다. 그는 정치가로서 하늘이 준 그 도량과 그 식견과 그 수완과 그 웅변과 그 정직한 자세를 마음껏 발휘했다. 그는 지금 혜성처럼 광망(光芒)을 우리 민족에게 비쳐주고 있으며, 혼탁에 빠진 이 나라 정계에 큰 청신제가 될 것을 부탁해 마지 않는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싸움이란 이기고 지는 수도 있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면, 이번 김대중 후보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김 후보는 지금 전후의 착잡한 만감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나, 하늘은 오히려 그에게 더욱 큰 대임(大任)과 대망을 안겨주기 위해 이러한 시련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김대중은 역사와 민족이 안겨준 대임을 안고 살아갔다. 한 번도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현대사의 한 복판에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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