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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진국의 야한 영화사, AV는 빠진 이유?

[최원호의 美美하우스] <일본 섹스 시네마>

최원호 알라딘 MD 2013.03.22 18:57:00

아래는 이 책에 수록된 영화 제목들 중 일부다.

<자매 돈부리(한국에서는 자매덮밥이라고 일컬어지는 서브 장르의 원형이랄까)>, <로리타 바이브레이터 고문>, <전원 관능 로망 - 젖짜기 배덕의 외양간>, <아름다운 수수께끼 - 거대남근전설>, <털이 자라난 권총>, <선생님, 절 흥분시키지 마세요>….

위에 언급된 제목들과 <일본 섹스 시네마>(재스퍼 샤프 지음, 최승호·마루·박설영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라는 제목을 보고 기대하셨을 몇몇 분들에게 우선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자 한다. <일본 섹스 시네마>는 AV(エーブイ, Adult Video)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장르는 소위 핑크 영화와 로망 포르노다. 책 서문에 핑크 영화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만, 배급과 제작 등에 얽힌 조건을 언급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여기서는 그보다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왜 AV를 다루지 않는가? AV는 '시네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뭘까. 이노우에 세쓰코가 <15조원의 육체 산업>(임경화 옮김, 씨네21북스 펴냄)에서 굴지의 AV메이커인 소프트 온 디맨드(SOD)의 초기작들을 판별할 때 사용한 단어가 적절할 것이다. AV는 '예능'이다. 극 형식의 내러티브에 의존하지 않는 섹스 버라이어티인 셈이다.

반면에 핑크 영화는 (형식 파괴를 포함한) 극영화 형식을 가진다. 물론 핑크 영화의 제작 목적 역시 원론적으로는 AV와 같다. 관객들에게 섹스 신을 보여주는 것뿐이었고 그 외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 외는 아무래도 좋다'는 사실을 절호의 찬스로 받아들인 야심가와 예술가들이 있었고, 그들은 섹스 신을 일정 시간 이상 보여주어야 한다는 제작 조건을 내러티브 속에 흡수시켜 섹스를 둘러싼 각종 정황들을 비추어 냈다.

▲ <일본 섹스 시네마>(재스퍼 샤프 지음, 최승호·마루·박설영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커뮤니케이션북스
<일본 섹스 시네마>는 이들 섹스 '시네마'를 둘러싼 정황들을 재구성한다. 여기에는 일본 현대사와 당대 예술계의 조류, 놀라운 재능들과 그들을 핑크 영화로 이끈 주류 영화계의 시스템, 영화론, 미학, 버블 경제와 붕괴, 검열 기준의 및 사회 통념의 변화, 영상 기술의 발전 등이 서로 얽혀 있다.

저자인 재스퍼 샤프는 이 다양한 변인들을 종횡무진 잡아내고 조합함으로써 그저 핑크 영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둘러싼 복잡한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 적군파의 몰락을 다룬 부분에서 두 페이지에 걸쳐 커다랗게 실린 <천사의 황홀>의 초현실적인 스틸 컷처럼 적절하게 배치된 인상 깊은 이미지들, 그리고 일본 핑크 영화에 출연한 서양 배우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크레디트에 나온 가명의 철자를 바꿔가며 IMDB에 일일이 쳐 넣어 보는 등의 저자의 눈물겨운 노력과 유머 센스까지 더하면 <일본 섹스 시네마>는 차라리 감상 가능한 한 편의 오디세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이상 성애 영화의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상반신을 드러낸 한 무리의 10대들이 높은 산중의 외딴 호숫가 근처에서 전투복 차림의 군인들을 꽁꽁 묶어 놓고 신이 나서 뛰어다닌다. 유니폼을 입은 직장 여성이 붐비는 통근 열차 안에서 자신의 스커트 아래를 더듬거리는 수염을 기른 남자의 손길에 쾌락의 신음소리를 낸다. 변태적인 사회 부적응자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버려진 컨테이너로 유혹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후 시체를 산성 물질이 담긴 욕조에 넣어 뒤처리를 한다. 나가노의 시골 외양간에서 한 농부가 양팔과 두 다리로 엎드려 있는 발가벗은 여자의 젖을 짜려 하고, 도쿄 중심부 한 건물의 옥상에서는 한 젊은 여성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미국 대통령의 손가락을 본떠 만든 고무 모형을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서 재빠르게 놀리며 황홀감에 몸을 비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전쟁 장면이 흘러 나오는 TV가 놓여 있다.

(꿈틀거리는 수염이 스커트 아래를 더듬는 장면을 상상하긴 했다만) 이 꼴라주는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되 잔뜩 기대하게 만든다. 가짜 산타클로스가 시시해 보이더라도 그가 선물만 준다면 어쨌든 메리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말이다. 이 도입부에는 <일본 섹스 시네마>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언뜻 보인다. 바로 100페이지에 달하는 친절한 색인과 작가별 필모그래피까지 제공하는 수많은 핑크 영화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적색거성처럼 빛나는 걸작들의 목록이다.

▲ 와카마쓰 코지의 <천사의 황홀>(1972). ⓒ커뮤니케이션북스 제공

재스퍼 샤프는 영화를 평가하면서 최대한 평가를 자제하고 있는데(아무래도 리뷰는 이 책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와중에도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 있다. <감각의 제국>? 물론이다. 다다미 쇼트를 재현하고 인물의 포즈와 동선과 연기 스타일까지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리게 하는 <변태 가족: 형의 새 각시>는 어떤가? 이 영화는 나중에 <쉘 위 댄스>를 만든 수오 마사유키의 데뷔작이다. 히치콕의 <이창>과 비슷한 콘셉트를 통해 (역시 히치콕을 사랑했던 불란서 영화인들 중 한 명인) 초기 고다르의 강렬한 영향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는 <간다천 음란전쟁>은 <큐어>와 <도쿄 소나타>로 유명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데뷔작이다. 저예산이라는 한계를 적극적인 조명 트릭을 통해 돌파하는 과정에서 표현주의 영화의 미덕을 소환해 버린 사이키델릭 사이코 스릴러 <태아가 밀렵될 때>는 어떤가.

이미 너무 유명한 영화들인가? 이 정도의 유명작(?)은 다 뗀 핑크 팬들을 위해서는 그 수십 배의 영화가 준비되어 있다.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하다는 면에서는 더없이 영화화하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영화화된 에도가와 란포의 <다락방의 산보자>는 어떨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편소설을 조합해 유명 호러영화 <링>의 업적을 선취한 1983년작 <오이란>도 있다. 아니면 스틸 컷만 봐도 매력적인, 영화 잡지 <키네마 준보>가 그 해의 영화 4위로 뽑은 강렬한 드라마 <빨간 머리의 여자>도….

나는 아직 20세기말의 핑크 사천왕(네 명이라서)과 21세기 초의 칠복신(거의 일곱 명이라서)의 필모그래피는 꺼내지도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점찍은 영화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릴 것이다. <일본 섹스 시네마>는 다른 어느 책에서도 만나기 힘든 보석 같은 영화들을 품고 있는 초대형 선물 상자다. (각주 : 이런 걸로 각주를 쓰기는 좀 뭐하지만, 기회가 기회이니만큼 개인적으로도 꼭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제제 다카히사의 <가물치>다. 나는 이 영화가 극동아시아의 세기말 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선물상자 안의 보석들은 다채로운 방식으로 조립이 가능하다. 우선 일반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방식인 '역사로 조립하기'를 위한 풍부한 배경 지식이 각 시대별로 상세히 첨부되어 있다. 그 자체로 드라마나 다름없는 60년대, 즉 전공투와 적군파의 시대는 그 정점이다. 앞서 언급한 <태아가 밀렵될 때>가 포함된 당시의 대표적인 핑크 영화들은 섹스와 폭력을 둘러싼 내러티브의 억압기제를 사회의 권력체계로 치환시키며, 한 발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고 강한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특히 실제로 중동에서 일본 적군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전직 핑크 영화 감독' 아다치 마사오의 기구한 인생은 저급한 대중 매체로 알려졌던 핑크 영화가 '따라서 보다 대중적인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시대의 상징처럼 보인다. 짧다면 짧은 불꽃이었다.

▲ 와카마쓰 코지의 <태아가 밀렵될 때>(1966). ⓒ커뮤니케이션북스 제공

정치적 이슈는 이후 1989년, '평화를 이루다'라는 뜻의 헤이세이 시대에 핑크 영화와 다시 접속한다. 격동의 현대사와 연관된 히로히토 천황이 서거하면서 지나온 역사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기말에 작가주의 핑크 영화를 만든 사천왕들의 작품들이 이때 등장하는데, 이 영화들은 앞선 전공투 시기의 핑크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지점들을 여럿 제공한다. 실력 혁명이 불가능해지고 버블 경제의 잔재가 마취제처럼 남아 있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또는 비명을 질러도 누구도 듣지 못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핑크 영화는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지는 사회적 계급과 점점 소통이 어려워지는 개인의 고독에 더욱 초점을 맞추면서 문제제기의 정서 자체가 달라졌다. 특히 호러-스릴러의 장르 문법을 빌어와 그로테스크한 우화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제제 다카히사의 영화들은 전공투 시대의 그로테스크 핑크 영화들과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 비슷한 소재를 사용함에도 일체의 정치경제적 확신을 박탈당한 90년대의 그로테스크는 공황 상태에 빠져 더욱 절망적인 형태를 보이며, 이는 정치사회적인 징후로 읽을 수 있다.(궁금하신 분들은 아쉬운 대로 다카하시 도시오가 쓴 <호러국가 일본>(김재원·정수윤·최혜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그 징후를 엿보시길.)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일본 섹스 시네마>는 이런 방식으로 핑크 영화들끼리, 또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 작품들과의 링크를 다수 제공한다. 링크의 개수는 독자가 조합하기에 따라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 링크들이 당장에 무슨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장르 내에서 '차이와 반복'을 발견하는 일은 늘 재미있는 일이며, 실용적으로 보더라도 최소한 언젠가 훌륭한 서플먼트로 써먹을 수는 있을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 과정과 핑크 영화의 역사를 겹쳐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1980년대에 핑크 영화가 AV에 밀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VHS의 보급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에로물을 혼자 집에서 감상 가능하다는 사실은 더욱 노골적이고 내밀한 영상을 좀 더 스스럼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고, 성적 욕구 해소라는 측면에서도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자위행위를 할 수 있다는 대단한 장점이 있었다.

핑크 영화는 욕망 해소라는 본래의 용도에서 AV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때 놀랍게도 핑크 영화는 AV와의 차이를 두는 전략 포인트로 '작가주의'를 선택했다. 이 결과로 사천왕이 탄생하면서 90년대 '핑크 누벨바그'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단순한 섹스 영상을 소비하는 층을 다수 뺏긴 뒤 '독립 영화 비슷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핑크 영화는 지지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때 핑크 영화라는 분류 안에 묶여 있던 '에로 영상물'들이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두고 양분된 것이다.

보다 사적인 장소에서 선호되는 영상물일수록 내러티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어떤 소통-관계가 없이도 필요한 욕구를 소비할 수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또는 AV가 기존의 '영화'들이 제공하는 '타인의 섹스를 구경하는' 대리만족에서 점점 벗어나 (가상의) 감상자 본인을 직접 조준한다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모니터 속의 배우가 나를 주시하며 관계를 가질 때, 또는 나 혼자 누군가의 섹스를 엿보고 있을 때, 극적 당위성 또는 형식으로써의 내러티브는 불필요하다. 감상자는 간접적으로 AV의 당사자 혹은 관계자가 됨으로써 어떤 당위나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섹스 중에 카메라(즉, 감상자)와 자주 눈을 마주치고 때로는 데이트도 하고 같이 밥도 먹는 AV 파트너(배우), 또는 섹스를 안전하게 관음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써의 AV 파트너(카메라, 연출)은 감상자에게 단 하나의 조건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감상자가 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상자가 고립될수록 강화되는 AV감상의 위력을 생각해 볼 때, 사건과 인물 간의 관계망을 설정하는 극 형식의 내러티브는 어쩌면 AV에 있어 불필요한 특징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질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고립의 특성은 강화되는 가상현실의 징후일 수도, 아니면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재탐구한 미래의 어떤 서사 양식을 향한 예고일 수도 있겠다. 아마 미래는 이미 당도해 있을 것이다. 뭐가 뭔지 몰라서 그렇지. (각주: AV 관람의 고립성과 내러티브의 관계, 그리고 그 위 문단에서 언급한 전공투 시대와 헤이세이 시대의 그로테스크 핑크 영화의 차이에 대한 언급은 책에서 촉발된 연상의 사례로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책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잠깐, 아직이다. <일본 섹스 시네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무궁무진하다. 70~80년대 하드코어 섹스 영화가 붐을 일으킨 데 대한 사회병리학적 분석,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둘러싼 법정 대립, 핑크 영화의 주연(영화배우)와 AV 여배우(아이돌) 사이의 간격과 그 의미, 독립 자유 영화 프로덕션의 가능성 등등. 여기에 유현목 감독이 일본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차용한 일화나 야쿠자에게서 빌린 영화 대금을 갚지 못해 잠적한 뒤 지금은 종적을 찾을 수 없는 한때의 명감독 소네 주세이의 슬픈 후일담 등을 합하면 이 책의 무궁무진함은 배가된다.

<일본 섹스 시네마>는 독자들이 뛰놀고 씨 뿌릴 수 있는 비옥하고 넓은 땅을 제공한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오디세이가 아니라 트로이에서 이타카에 다다르는 광대하고도 환상적인 영토, 영화 팬들을 모험으로 이끄는 위대하고도 기이한 땅이라고 말이다. 한 권에 5만 8000원 짜리 책을 과감하게 구입할 수 있는 '용자'들은 어서 이곳으로 달려와 모험을 펼치기 바란다. 아무리 과소평가하더라도 본전 생각은 안 날 거라고 내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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