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왜 '민족주의'를 미워하는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⑥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08.08.26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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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낸 책에서 내가 내놓은 큰 명제의 하나는 한국 사회가 하이퍼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날 필요성이었다. 서언에서 내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역사 서술은 안에서 보는 시각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 어느 책을 펼쳐보아도 민족의 역사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그리는 데 노력이 치우쳐 있다. 이것이 지나쳐 우리 민족과 관계를 맺었던 외부 세력을 모두 나쁜 놈 아니면 바보로 그리는 국수주의적 성향도 널리 나타난다.
  
  한 개인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각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자신을 일방적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하려고만 드는 자기중심적 인간은 사회에 잘 적응하기 힘들다. 하나의 사회도 자기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는 현실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밖에서 본 한국사> 9~10쪽)

  
  책이 나온 후 독자의 반응 중에 뜻밖의 것이 있었다. 내 주장이 뉴라이트와 통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임지현(한양대) 등의 '국사 해체' 주장은 면밀히 검토하고 있었으나, 뉴라이트 역사관에는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독자들의 지적도 있고, 마침 뉴라이트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기도 해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얼마간 살펴본 끝에 지금 내놓고 있는 '따져보기'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내 역사관이 뉴라이트와 겹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독자에게는 민족주의에 관한 태도에 가장 큰 오해의 빌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들과 내 관점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여기 있으며, 그들 주장의 가장 큰 위험도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가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것인가?"
  
  뉴라이트의 민족 관계 논설은 두 개 층위에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족'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보다 익숙한 민족주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라고 박지향(서울대)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정한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13쪽). 그리고 바로 이어서 '민족 지상주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민족 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그것으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민족 지상주의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논리와 관련된 여러 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민족 지상주의는 민족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고 지고의 가치로 부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같은 책 13~14쪽)
  
  박지향은 '민족주의'와 '민족 지상주의'라는 두 말을 나란히 쓰고 있다. 민족주의가 곧 민족 지상주의라는 뜻일까?
  
  '민족주의' 언저리에는 여러 말들이 뒤섞여 쓰이고 있다. 민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두 가지 방향으로 쓰인다. 근대 유럽에서 나타나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역사적 현상으로서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도 쓰이고, 민족을 중시하는 모든 사고와 정서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도 쓰인다. 민족주의 문제에 민감한 일본 지식층에서는 영어 'nationalism'으로 표현되는 범위를 '국가주의', '국민주의' 등으로 구분해 보려는 노력이 있다. 그밖에도 '국수주의', '애국주의' 등이 민족주의와 부분적으로 겹쳐 쓰이는 말들이다.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민족심'이란 말을 쓴다. 다민족 통합 국가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정치적 느낌을 띠는 '주의'란 표현을 피한 것으로 이해되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주의'란 말을 남용하는 풍조도 반성해 볼 만한 일이다. 우리가 '민족주의'란 말을 쓸 때, 사실 별다른 정치적 의미 없이, '민족심'이나 '민족 정서' 같은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뜻으로 쓸 때가 많다.
  
  이런 넓은 뜻의 민족주의에는 배타성이나 폭력성이 꼭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내 가정을 사랑한다 해서 가정 이외의 사회 조직 원리를 모두 배격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도시를 아낀다 해서 다른 도시에 꼭 불을 질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박지향의 글에 쓰인 '민족주의'는 '민족 지상주의'와 나란히 쓰인 것으로 보아, 그리고 "본래"라는 부사를 쓴 것으로 보아 민족 지상주의보다 넓은 의미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라 하는 것은 참으로 독단적이고 난폭한 규정이다.
  
  "있던 민족을 없었다고 우기면 없어지는가?"
  
  이번에는 '민족'의 의미를 어떻게 부정하는지 보자.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에 이렇게 썼다.
  
  "(…) 그 민족이란 것이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만큼 확실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민족이란 20세기에 들어 구래의 조선인이 일제의 식민지 억압을 받으면서 발견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 20쪽)
  
  그는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에 수록된 글에서도 말한다.
  
  "그렇게 인간들이 상이한 부류로 나뉘고 갈등하였던 사회에서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민 모두를 민족 내지 동포와 같은 큰 범주로 통합할 하등의 정치적 필연은 없었다. 그러니까 1920년대에 성립한 민족주의 역사학이 한국인을 두고 유사 이래 혈연-지연-문화-운명-역사의 공동체로서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선언하였을 때, 그 위대한 선언은 본질적으로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명제였다."(<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91~92쪽)
  
  박지향도 같은 책에서 이에 호응한다.
  
  "민족 혹은 민족주의가 고래의 개념과 이념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 있는 실정에서 민족이란 신분적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옳은 지적이다." (같은 책, 393쪽)
  
  한국인이 단군 할아버지 이래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해 왔다는 선언이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명제라는 데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은 어디에 있는가? 같은 언어를 쓰고 하나의 국가에 속해 있으면서 주변의 중국인, 일본인, 여진족과 대비되는 정체성을 스스로 의식하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말하는 "구래의 조선인"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면 무엇이었단 말인가?
  
  비교적 상식적인 견해를 안병직은 보여준다.
  
  "천 년 이상 지속된 동일 언어와 동일 문화와 통일국가의 경험을 지닌 우리는 비록 근대 이전이라 해도 서유럽의 근대 민족에 비견할 만한 사실상의 민족이 성립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248쪽)
  
  그러나 이영훈은 집요하다.
  
  "정약용 선생은 양반 관료를 군자지족(君子之族), 하층 상민을 소인지족(小人之族)으로 나누어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에 따라 족의 차별이 엄연한데, 모두가 하나의 동족이었다는 공동체 의식은 아무래도 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책 250쪽, '족' 한 글자 나왔다고 민족을 쪼개려 들다니, 농담이라도 너무 썰렁한 농담이다.)
  
  민족이 "신분적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란 박지향의 규정에는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1906년 핀란드의 여성 참정권 도입 전까지는 유럽에 민족이란 것이 없었단 말인가? 프랑스에는 1944년 여성 참정권을 시행하고서야 민족이 생겼단 말인가?
  
▲ 이번 올림픽은 대한민국 영웅의 모습에 개성의 스펙트럼을 크게 넓혔다. 이용대의 뇌쇄적 윙크, '우생순' 아줌마들의 무한도전 정신, 우커송 구장의 연속 드라마 등등이 연이어 우리를 감동시켰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손잡고 함께 자라난 성과인 이 풍성한 스펙트럼을 하나의 퍼레이드에 쓸어담는 것이 아깝다. 개인 일정대로 귀국하면서 다양한 환영회를 자발적으로 열게 하는 것이 촛불의 나라 대한민국에 어울릴 텐데. ⓒ서울방송(왼쪽)·뉴시스(오른쪽)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국사 해체' 주장"
  
  내가 임지현의 '국사 해체' 주장을 유심히 살펴온 것은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 권력에 조종된 민족주의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적대적 공범 관계'를 통해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규율하는 문제를(<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24~28쪽) 나도 심각하게 생각한다. 왜곡된 민족주의에 민주적 가치가 억눌리는 현상에서 그의 문제의식이 출발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임지현의 주장에 꼭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대안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시달린 끝에 그는 이렇게 입장을 정리한다.
  
  "(…) 잘 기획된 대안이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헤게모니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대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유일한 대안이다."(같은 책 32~33 쪽)
  
  "또 다른 헤게모니"에 대한 그의 우려는 자신이 기획한 바로 그 책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서론 격인 그의 글 바로 뒤에 실린 것이 위에도 인용한 이영훈의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이기 때문이다. 민족사를 넘어서려면 문명사를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임지현이 대안 없이 비워놓은 자리를 기껏 차지하고 들어앉는 것이 문명사의 명찰을 단 자본주의화 역사라니, 답답한 일이다.
  
  임지현의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 그의 '해체' 집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해소하는 데는 국사의 '재구성'이 더 온당한 길이 아닐까? 앞서 한 차례 옮겨놓았던 글을 다시 내놓겠다.
  
  "인간의 문명이 도그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그마를 순화시켜나가는 과정이 바로 문명의 발달 과정이며, 순화된 도그마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한 문명 상태라고 생각한다. 일체의 도그마를 배제한다는 것은 무리한 욕심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 15쪽)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민족주의의 위협을 해소하려는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대안 없는' 노력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모두에게 위협을 주는 "또 다른 헤게모니"에게 틈을 주는 것이 안타깝다.
  
  "민족주의에 웬 색깔?"
  
  뉴라이트가 민족주의를 적대하는 태도는 이영훈의 글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굳이 소리를 높여 민족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아직은 다른 어떤 이념도, 예컨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의 위력이 너무 거세기 때문입니다. 그 민족주의의 거대한 동원력이 정치적으로 악용된다면 그 후환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이야기> 45쪽)
  
  민족주의의 위력이 거세다는 점, 정치적으로 악용되면 후환이 클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이영훈은 위 인용 내용에 이어 이렇게 말한다. "민족주의는 1945년 이전 구제국주의 시대의 어두운 정신사에 속한 것입니다."
  
  어두운 정신사? 어디서 본 멋진 인용문 하나가 떠오른다.
  
  "레토릭 특유의 본성은 '타자'가 갖는 응답의 자유를 매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토릭은 폭력 중에서도 가장 부정한 것이다. 레토릭의 폭력은 타성적 존재에 작용하지 않는다. 그 폭력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뒤흔든다. 그래도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이기 때문에 매수할 수 없을 것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524~525쪽의 조관자 인용.)
  
  너무 현란해서 무슨 뜻인지 모를 이야기지만, 레토릭의 부정한 폭력성 지적은 마음에 와 닿는다.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민족'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려는 이영훈과 박지향의 태도를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영훈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의 분열까지 획책한다. 독자들에게 지루하겠지만, 그의 의도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조금 길게 인용하겠다.
  
  "문화적 또는 우파 민족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계급적 또는 좌파 민족주의보다 훨씬 넓습니다. 계급노선에 기초한 좌파 민족주의는 이미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붕괴한 마당에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아직 한국의 현실 정치와 남북관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문화적 민족주의라는 우군이 있기 때문이지요. 실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정치적 성향은 대단히 불안정하고 기회주의적입니다. 우파인 이상 그들의 현실 인식은 대개 보수적입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민족문제와 관련된 이슈가 제기되면 쉽게 좌파 민족주의에 동조하지요." (<대한민국 이야기> 53쪽)

  
  내 주변에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라고 이름붙일 만한 사람은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 좌파 민족주의자일지 머릿속에 상상도 되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의 바탕이 된 것도 그냥 민족주의지, 어느 쪽 민족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를 통째로 빨갱이로 몰아붙일 수가 없어서, 쪼개서 따로따로 욕해야 하게 된 것이 그래도 좋은 세상이 온 덕분이다 싶어 기쁘다.
  
  다시 주목할 것은 민족주의를 기회주의적 성향으로 몰아붙이는 이영훈의 '레토릭'이다. 현실 인식에 보수적이라 해서 뉴라이트처럼 민족주의를 등질 필요가 꼭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기회주의라고 매도할 것은 또 뭔가. '기회주의'란 말이 보통사람들에겐 매우 모욕스러운 말이라서 나는 이승만에게 그 말을 쓰면서도(<밖에서 본 한국사> 290, 292쪽)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이영훈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뉴라이트의 정면 돌파 전략에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찾자."
  
  한국의 뉴라이트가 민족주의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단한 불운이다. 뉴라이트가 신봉하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쉽게 말하면 극우파 이념이다. 촛불 사태를 둘러싸고 뉴라이트계 단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민족주의는 극우파의 밥이다. 민족주의가 박지향의 규정처럼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선동과 조작에 의해 그런 성향을 나타내기 쉬운 것은 사실이고, 그런 선동과 조작에 나서는 것이 늘 극우파였다.
  
  엄청난 전략적 가치를 가진 민족주의란 무기를 뉴라이트가 채용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행운은 새옹지마와도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반일'을 내세우면서도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외세 의존적인 방향으로 짜놓았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 가치를 억누르는 데 민족주의를 활용했지만, 외세 의존적인 틀을 바꾸지 못했다. 그런 경험을 배경으로 민주화를 진전시킨 한국 사회에는 '관제 민족주의'를 세울 여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남북 간의 화해가 한국 사회에 임박한 최대의 과제로 떠올라 있다는 사실이 뉴라이트의 선택을 압박한다. 뉴라이트가 적대해 온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길을 열어준 긴장 완화를 (이영훈이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다수 국민이 반기고 있다. 이미 자연스럽게 열려 있는 이 길에는 더 이상 선동과 조작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뉴라이트의 선택은 '정면 돌파'가 되었다. 민족주의를 무기로 이용할 여지가 없는 바에야 적군이 이용하지도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정면 돌파 전략이다. 자원 공급 감소라는 현실 변화 앞에서 계급 간 화해 노력을 포기하고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촛불 사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정면 돌파 전략에 뉴라이트 계열이 앞장서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민족주의 가치와 민주주의 가치를 모두 배척하는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 노선은 이명박 정부의 행태에서 알뜰하게 확인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큰 위협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가치와 민주주의 가치가 더 투철하게 화합할 계기가 된다면 전화위복의 의미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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