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안에 우리는 존재하는가"
"소비 안에 우리는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소비 안에 우리는 존재하는가"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인간에게 소비의 의미

현대는 소비사회다. 일상은 소비의 연속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행위는 대부분 소비로 환원된다. 누구를 만나도 만남 자체가 소비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등의 일에도 일련의 소비가 수반된다. 물론 현대인만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교환을 위해 인간은 언제나 소비를 해왔다. 오늘날의 소비에 다른 점이 있다면 상품화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과잉생산된 것을 소모하기 위해 소비가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소비가 모든 것이 된 것이다.

소비에 관한 국내 저작이 드문 상황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를 발견했다. 이 책에는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소비가 무슨 상관인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무인도에 살아도 당장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는 '사치'를 부리고자 하며, 그러한 사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비축과 저장을 함으로써 서서히 우리는 동물적 필요에서 벗어났고 또 욕구와의 일대일 대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즉, 당장의 필요 이상의 것을 비축하고 소비하는 사치는, 그 말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인간을 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주요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여분의 소유와 그것의 소비인 '사치'를 포틀라치, 예술, 일상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논증을 찾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기저에 흐르는 하나의 목소리는 들린다. 당장의 필요를 넘어선 소비를 할 때 문화를 누리지만, 정작 현대의 소비문화는 우리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표 하에 현대 소비사회의 정경들을 따라가 보자.

포틀라치, 타인을 위한 소비인가?
▲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 ⓒ프레시안

저자는 소비의 한 차원으로 타인에게 귀속되는 소비, 그 중에서도 특히 권력의지로 행사되는 소비인 포틀라치를 논의한다. 포틀라치는 인디언 부족의 관습으로 통상 소비의 한계를 넘는 낭비적 증여를 뜻한다. 한 부족은 낯선 부족에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도를 넘는 선물을 전달했다. 이러한 증여는 증여하는 자의 권위를 보여주고 증여받는 자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는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지의 실행으로서의 증여는 통치를 위해 필요한 기제였다.

저자는 이러한 포틀라치가 원시 부족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통용된다고 본다. 내 의지를 실현하는데 상대의 권력이 필요한 경우 뇌물은 그 권력을 내 의지 아래 종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심심할 만하면 터지는 뇌물수수 사건은 동물에는 없는 인간 사회의 소비의 한 단면이지만, 이런 소비는 부당한 방식으로 부와 권력의 집중을 가져와 사회를 병들게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럼 좋은 포틀라치도 있는가? 저자는 진정한 증여는 권력의지의 실행이 아닌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한 가족, 한 개인, 한 부족은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부 주위에 앉을 수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공동체를 위한 증여는 크든 작든 기부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의 생각처럼 이런 증여적 소비는 부가 일부 집단에 축적되는 병폐를 막아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부가 집중되는 사회일수록 이러한 기부는 더욱 요청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오늘날, 저자가 포틀라치의 다른 측면인 공동체를 위한 소비에 주목한 것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예술,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가?

저자는 소비를 예술과 관련해서도 논의한다. 주로 부르디외의 논의에 기대어 예술의 소비를 계급을 나누는 '구별짓기'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예술과 문화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의 것이라는 인식과 달리 철저히 계층에 따라 나뉘어 소비된다는 것이다. 계층에 따라 '소비'되는 예술의 목록이 다르고, 특히 일부 회화와 음악은 어린 시절 형성된 교육이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다고도 언급한다. 문화자본은 경제자본과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계층적 차이를 드러낼뿐더러 계층 구분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위 '고급 예술'이라 분류되는 것들은 평균적 봉급 생활자가 누리기 힘들다. 오페라 한 편을 볼 만한 자리에서 한 가족이 보면 한 달 생활비가 휘청댈 것이다. 물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도 있다. 미술 관람은 공연 관람보다 비용이 덜 든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미술이 더 멀다. 저자는 이를 "원칙적으로 미술관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이것은 순수한 가능성일 뿐, 실제로 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중 일부"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예술에서의 구별짓기는 아무리 학교가 평준화되어도 평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예술에서의 감식력이라는 저자의 언급과도 연결된다. "인위적으로 동네를 배치해도 (…) 사회적 신분 이동은 잘 일어나지 않는데, 신분 상승은 문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문화는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서만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술을 즐겨야 하는가? 나아가 예술을 신분 상승을 위해 가까이하자는 것인가? 물론 저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원하면'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문화의 기회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소비'에서의 기회 평등을 보장할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진정 사회적 평등을 이루고 싶다면 문화를 저변에 보급하는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경제적 소비에서조차 불평등이 심각한 현실에서 예술 '소비'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가 인간 삶의 기초 조건이라면 둘의 관계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차원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예술 교육 확대를 통해 예술 '소비'-감상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에서 형평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은 주목할 만한다.

일상에서의 소비, 욕망을 실현하는가?

저자는 포틀라치나 예술과 같은 소비 이외에, 일상에서의 소비도 분석한다. 그 대상은 주로 광고, 유행, 육체 등이다. 온종일 머리를 휘젓는 광고, 사물의 유통기한을 단축시키는 유행, 젊음과 날씬함을 정상성의 표준으로 삼는 몸은 일상적 소비의 주요한 준거점들이다. 문제는 이런 소비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 주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보드리야르에 따라 현대의 소비를 '기호의 소비'로 특징짓고 그것의 구조를 분석한다. 기호란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지는데, 기표는 문자나 음성 등의 방식으로 주어지고 기의는 그 기표에 부여되는 의미를 말한다. 같은 기표도 보는 이에게 의미가 다르면 다른 기호가 된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라고 동일하게 표시한다 해도(기표) 누군가에게 메트로폴리탄적 자유를 다른 누군가에게 불공정무역의 산물(기의)을 의미한다면 그 둘은 스타벅스를 다른 기호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품의 가치는 주로 기의가 결정한다. 소위 명품은 그 상품에 고급스럽고 희소하다는 의미가 불어넣어졌기 때문에 가치가 높아진다. 기호의 소비란 상품 자체보다는 상품에 들러붙은 의미, 특히 나는 남과 다르다는 차별화된 의미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난 당신과 달라'는 모든 상품이 생존하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기본 명제이다. 이러한 차이 중 계층적 차이가 특히 중시되는데 이는 "현재의 나보다 좀더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차이의 강조가 매우 동질적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다르다'는 광고 문구는 수많은 대중을 향한 것이다. 이에 대중이 각자의 개성을 살리려고 같은 상품을 소비한다면 어떻게 될까? 개성을 위해 소비할수록 더 동질화되는 대량생산 사회의 소비의 역설에 처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대 소비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개성에는 그러니까 집단이 있을 뿐 개별성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개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개의 모델 속에 나누어 배치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사회에서 개성적 소비가 가능한가?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적 언급을 하지 않는데, DIY·리폼·UCC 등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보았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판자를 조립하여 나만의 책상을 만들고, 청바지를 내 마음에 들게 리폼하고, 문화 콘텐츠를 차용하여 패러디하는 등의 활동은 개성을 찾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을 반영한다. 이미 틀 지워진 것 안에서의 손질이 개성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남지만, 우리가 직접 만들어 쓸 수 없다면 이런 정도의 개입도 실천적 의미는 있지 않을까?

소외 없는 소비의 가능성

이 책의 출발점은 인간은 본능의 실현 이외의 것을 소유하고 또 소비하려는 존재이고 그러한 '사치'는 인간이 문화적 존재로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 여정은 우리의 '사치'가 도리어 우리를 소외시켜 온 경로들 즉, 부당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며 자신의 욕망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는 소비사회를 사는 우리 자신의 씁쓸한 모습을 반영한다.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소비 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혹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정신없이 쇼핑하고 뛰어다니는 일상들, 사람들은 그것들을 역동적인 활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 자신의 열정의 근원이라 생각했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었고, 자신이 설정했던 목표는 끊임없이 배반당했으며, 마침내 야망 없이 무기력한 일상만 남았다"고 토로한다.

그러면 소비사회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치를 문화적 조건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사치'를 부려야 제대로 부리는 것인가? 어떤 변화가 있어야 공동체와 나누고 예술을 향유하며 개성을 찾는 식으로 소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소비사회 분석에 치중하다 보니 이러한 물음에 대한 총괄적 대안까지 마련해 주지는 못한다. 소비할수록 욕망에서 멀어지는 소비사회의 대중이 자신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하는 문제는 독자에게 남겨진다.

더 근본적으로는 소비를 생태와 연관해 논의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도대체 인간의 사치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인간이 생산한 것을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소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소비를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인간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당장의 필요를 넘어선 소유와 그것의 소비' 자체가 문제거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사치'는 인간에게는 문화의 조건이지만 도를 넘으면 생태계 전체로 봐서는 자연을 '착취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이 한 권의 책 속에 소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 담아낼 부담을 질 필요는 없다. 포괄적 의미에서 윤리적 소비의 문제 즉, 어떻게 하면 나와 공동체 그리고 생태계가 상생하는 소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책이 남겨 준 생산적 물음으로 가져가야 할 것 같다.
박정자는 누구인가?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신문기자, 고교 교사, 준 공무원 등을 거쳐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가 되었고 2008년 8월에 퇴임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빈센트의 구두> 등의 저서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상황 V>, <여성은 해방되었는가>, <성은 억압되었는가>,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30년 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등의 역서가 있다. 지은이는 소비에 관한 주요한 이론가들인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마르셀 모스, 소스타인 베블런, 앙리 르페브르, 장 보드리야르 등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을 그려내는 만만찮은 작업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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