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유족 "세월호 시작도 안 했다"
[세월호, 어디로 가나 ①]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 전재영 씨
2016.01.05 06:09:21
대구지하철참사 유족 "세월호 시작도 안 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안전 관련 제도 개선을 위해 설치된 행정기관이다. 하지만 그 역할 수행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내‧외부에서의 '특위 흔들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대로는 특위 활동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레시안>은 특위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참사 뒤,행정기관의 모습은 세월호나 대구지하철이나 다를 게 없었다. 
 
2003년 2월 18일. 그날은 13년이 지났지만 전재영 씨에게 여전히 잊히지 않는 '날'이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컴퓨터학원을 운영하는 김 씨는 업무상 늦게 잠자리에 들고 그만큼 늦게 일어난다. 그날도 그런 일상 중의 하루였다.
 
아내는 한 달에 한 번 대구 영남대학교병원을 간다. 7살 딸이 말이 서툴었다. 구미에 있는 병원에서 언어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영남대병원이 언어 관련 치료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쪽으로 옮겼다. 마침 '그날'은 언어치료를 받는 날이었다. 그사이 딸아이의 언어실력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마지막으로 치료받는 '날'이었다.
 
잠결에 아내가 나가는 소리를 들은 전 씨는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잠이 덜 깬 목소리여서 그랬을까. 아내는 "더 쉬라"면서 현관문을 닫았다. 그것이 아내와 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전 씨다.

"그때 내가 데려다 줬더라면…." 
 
화마 속에 떠나보낸 아내와 딸
 
전 씨가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뉴스를 보는 일이다. '그날'은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떴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부상자가 몇 명 안 됐다. 작은 화재라고 뉴스는 설명했다.
 
화재가 발생한 곳도 아내가 가는 방향인 대구역에서 영남대병원 방향이 아니었다. 반대편이었다. 그냥 '불이 났구나' 싶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나 봐야 얼마나 피해가 있겠나.'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학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사고는 무척 커졌다. 반대편 방향 전동차에도 불이 났다는 보도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그때만 해도 전 씨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화재시간이 아내와 아이가 병원 가는 시간과 대충 비슷하겠다 싶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내에게 확인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났으니 치료를 마치고 대구 어머니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대구 집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학원 강사가 사색이 된 전 씨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보세요. 뭐가 됐든 대구로 가보세요. 어서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대구 집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전 씨가 대구 중앙로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무척 많은 사람이 역 주변에 모여 있었다. 침착하게 살펴보니 지하철 한쪽 벽면에 부상자 명단과 사망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명단에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밑줄 긋듯 내려갔다. 두 곳 모두에 이름은 없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여기에만 안 들어가길 바랐다. 그러면서 '이 친구가 어디 갔을까, 다른 곳에서 사고를 당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이 안 됐다. 아내가 갈만한 곳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아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하루가 지났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현실이 그랬다.
 
'아내와 딸은 죽었다.'

▲대구지하철참사 전동차 내부 모습. ⓒ연합뉴스


대구지하철참사란?

전 씨의 아내와 딸은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께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일어난 화재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 집계를 보면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다쳤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였다.
 
방화에 의한 인재였다. 당시 인화물질이 담긴 플라스틱통을 든 채 전동차 1079호에 타고 있던 김모 씨(56)가 중앙로역에 전동차가 서자 인화물질에 라이터를 켜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시작된 불이 전체 차량으로 빠르게 번졌고 잠시 후 반대쪽 선로에 진입한 전동차 1080호에도 불이 옮겨갔다. 이때 1080호 출입문 상당수가 닫혀 있으면서 사망자 중 192명 중 190명이 1080호에서 나왔다. 당시 2개 편성 12량(6량×2편성)의 전동차가 모두 불타고 뼈대만 남았다.
 
대구지하철참사는 세계 지하철 역사상 최악의 사고 중 두번째로 꼽힌다. 세계 지하철 역사상 최악의 사고 세번째 또한 공교롭게도 대구에서 일어났다.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1호선 제1~2구간 공사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다친 사고다.
대구시, 참사 다음 날 저녁 사고 현장 물청소…이후 황당한 대응 이어져 
 
사고 다음 날, 전 씨 등 피해자 가족들이 참사 현장을 들어가려 했다. 뭐가 어떻게 된 지는 알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대구시는 불가입장을 밝혔다. 대구지하철참사가 발생했을 당시, 대구시는 곧바로 사고대책수습본부를 꾸리고 참사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대구시청은 전 씨와 같은 희생자‧실종자 가족을 위한 공간도 마련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참사 현장을 물청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직 참사 원인도 규명되지 않았을 때였다. 참사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물청소를 했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구시장은 항의하는 유가족에게 '당신들이 청소에 동의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물청소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나중에야 진위가 밝혀지자 대구시장은 마지못해 사과했다.
 
실제 대구시장은 2월 24일 '붕괴 위험 등 안전문제가 걸려 군에 병력지원 요청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청소는 지하철공사에서 결정했다', '국립과학연구소와 경찰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고현장 훼손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자 3월 5일에는 '물청소는 결코 한 적이 없다', 인터넷에 공개된 물청소 사진에 대해서는 '지하상가에서 통로 청소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구시장의 이러한 발언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경찰 수사본부가 2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중앙로역 지하층에서 모두 3차례에 걸쳐 지하철공사가 물청소를 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대구시장은 3월 27일 검찰 조사에서 '현장정리에 대해 관계기관과의 사전협의는 없었으며, 사고현장을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 '감식이 끝났으니 현장정리를 해도 좋다는 말을 지하철공사 관계자들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로 또다시 진술을 바꿨다.
 
그런 일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사고 발생 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대구시장이 시민회관 강당에 유가족들을 모아놓고 참사 관련 수습 과정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대구시장은 참사 피해자로 인정되는 경우는 DNA가 검출되거나 그 전동차를 탔다는 증거(목격담)가 있을 경우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브리핑을 듣던 전 씨는 의아했다. 바로 앞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도 브리핑을 했었다. 지하철차량이 워낙 고온이어서 사망자 DNA가 검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특히 어르신, 여자, 어린이가 그렇다고 덧붙였다. 참사 당시 지하철 내부 온도는 1500도였던 걸로 조사됐다.
 
전 씨 부인의 경우, 목격담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고 당일 그렇게 수소문해도 아내 행방을 알수 없었던 전 씨였다. 딸은 일곱 살 어린아이였다. 둘 다 국과수가 말한 DNA가 검출 안 될 수 있다는 대상자들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아내가 지하철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단순 가출로 실종된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바보가 되겠다 싶었다. 실제 이후 DNA 감식이 안 된 이는 3명, 연고자 없는 이는 3명으로 드러났다. 

▲ 대구지하철참사로 가족을 잃은 한 유족이 차량 정비소에 안치돼 있는 불에 탄 전동차를 보고 나온 뒤 실신해 주저앉아 있다. ⓒ연합뉴스

 
이어지는 거짓말, 여론조작…"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이후에도 대구시와 지하철공사의 거짓말은 이어졌다. 현장을 잘 보존한다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참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난 2월 25일 대구지하철 안심차량기지 야적장에서 14점의 유해‧유골 및 다수의 유류품이 발견됐다. 이는 대구지하철공사 측이 사고 직후인 지난 19~20일 중앙로역 지하 3층 승강장과 선로 등에서 수거한 20톤 분량(마대자루 300여 개)의 쓰레기 가운데 일부였다. 앞서 22일에는 중앙로역 쓰레기통에서 유품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다.
 
유족들은 대구시장과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을 참사현장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물청소 등을 이 둘이 지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검찰 대질심문에서도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 심지어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은 물청소하는 곳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계속 그렇게 잡아뗐지만 얼마 못 갔다. 새롭게 공개된 물청소 사진에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 찍혀 있었다. 물청소 장소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했던 그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 사진을 내밀자 미처 생각이 안 났는데 갔던 거 같다고 말을 바꿨다.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대책위와의 면담 자리에서였다.

평소 점잖은 전 씨도 이 말을 듣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욱해서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유족들에게 제지당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초기 대구시는 사망자를 72명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 숫자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유가족들이 물으니 국과수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국과수에 확인하니 자기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시에 따지자 경찰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말을 돌렸다. 다시 경찰에 확인하니 경찰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재차 따지니 결국, 얼버무렸다. 이런 일이 하루가 멀고 반복됐다.
 
나중에 192명이 죽었다는 게 공식화됐다. 192명이나 죽었는데 사망자가 고작 72명이라고 발표하는 대구시의 의도가 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대구시가 어떻게 해서든 이 참사를 축소하려 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쪽으로 여론을 돌리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대구시장과 유가족대표가 만나 물청소한 이유, 유품 쓰레기 처리 등에 관해 질의‧응답하는 자리였다. 그때 순간 격해진 유가족 한 분이 대구시장에게 다가갔는데 이를 다른 유가족이 말렸다. 이 장면을 대구 지역 언론에서 사진으로 찍었다. 다음날 언론에서는 유가족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기사를 내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폭도다. 우리나라에 이런 폭도가 있을 수 있느냐. 처벌해야 한다'
 
여론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재영 씨. ⓒ프레시안(허환주)

 
"세월호 참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현재 전 씨는 대구지하철화재참사희생자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운영하던 컴퓨터학원은 참사가 발생하고 얼마 가지 않아 접었다.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는 한 달에 10~15명씩 아이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할 여력도 안 됐다. 그간 모은 돈과 보상금으로 살고 있다.
 
'그날'을 겪으면서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다. 무엇보다 국가와 공무원이 보여준 행동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참사가 일어난 뒤, 대구시에서 한 말을 모두 그대로 믿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했던 말들이 안 지켜지고, 자꾸 번복됐다. 거짓말도 이어졌다. 무리하게 사고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전 씨는 고스란히 목격했다. 전 씨가 생각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 차이가 큰 충격으로 돌아왔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아내와 딸을 정부로부터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느낀 배신감은 지금도 남아있다. 난 과거에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참사가 나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이 '수구꼴통'이라고 칭했다. 그런 내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사무국장을 하고 있다."
 
전 씨는 요즘도 가끔 혼자 생각한단다.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의 수습이라는 게 그 사고의 수습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정부와 지자체가 면피하기 위한 수습을 하는 건 아닌가."
 
적어도 대구지하철참사는 단지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생색내기식 수습이었다고 전 씨는 생각한다.
 
"이런 '수습'은 지금도 반복되는 듯하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 여전히 정부는 참사를 축소하기 급급하다. 그리고 거짓말과 말 바꾸기로 일관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라인지 모르겠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 같다는 점이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둬야 하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 씨는 "반복되는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아직 대구지하철참사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계속)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인터뷰 다음편 바로가기 ☞ : "세월호 농성장서 치킨 먹는 일베, 불쌍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허환주 기자 kakiru@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