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생 비혼 여성 총리, 선거제 덕분이다
[장석준 칼럼] 뉴질랜드 정권 교체, 17살에 정치 시작한 '재신더 아던' 돌풍
80년생 비혼 여성 총리, 선거제 덕분이다

뉴질랜드는 9월 23일에 총선을 실시했지만, 한 달 가까이 새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당이던 국민당이 이번 선거에서도 가장 많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의석이 과반수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120석 중 56석).

지난 19일 나는 뉴질랜드 상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정말 우연히도 새 정부가 결정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접했다. 양대 정당인 국민당, 노동당이 모두 과반에 미치지 못한 탓에 선거 이후 이목이 집중된 곳은 제3당인 9석의 '뉴질랜드 제일'당(이하 제일당)이었다. 이 당이 어느 쪽을 연립정부 파트너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는 판이었다.

그런데 마침 제일당 대표 윈스턴 피터스가 연정 파트너를 발표하는 기자 회견이 인터넷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피터스는 세계가 급변하고 있고 뉴질랜드는 당분간 경기 침체가 예상된다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런 때일수록 기존 자본주의에 변화를 꾀해야 하며 이번 총선에서 뉴질랜드 국민은 변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쯤 들으니 제일당의 결정을 알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노동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뉴질랜드 총선 결과는 거의 한 달만에 정권 교체로 결론 났다. 2008년 이후 9년 동안 이어진 국민당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고 제일당이 참여하며 녹색당이 내각 바깥에서 협력하는 중도좌파 성향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다들 이번 뉴질랜드 총선이 국민당의 낙승으로 싱겁게 끝나리라고 예상했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당이 제1야당 노동당을 큰 격차로 따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예상을 깨고 뉴질랜드 정치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 선거 이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뉴질랜드판 버니 샌더스 바람 혹은 제러미 코빈 열풍인 '재신더 마니아' 현상이 있다.

뉴질랜드에도 샌더스-코빈 바람이? '재신더 마니아' 현상

총선을 불과 몇 주 앞둔 8월 초까지도 노동당 대표는 앤드류 리틀이었다. 그러나 노동당 지지율이 좀처럼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리틀은 스스로 전격 사임했다. 그는 부대표 재신더 아던을 후임으로 지명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아던은 37세(1980년생)의 젊은 비혼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아던 자신도 처음에는 대표직을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9년에 여성 대표 헬렌 클라크를 내세워 10여 년만에 정권을 탈환한 경험이 있는 노동당은 아던 부대표에게 총선 돌파의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결국 아던이 만장일치로 후임 대표에 선출됐고, 부대표는 마오리(뉴질랜드 선주민)계 켈빈 데이비스 의원이 맡았다.

아던 대표의 나이가 37살이라고는 하지만, 당 경력은 벌써 20년째다. 17살에 노동당에 입당해서 줄곧 정치 일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당 활동을 통해 아던은 정통 사회민주주의자, 여성주의자, 공화주의자(영국 왕실로부터 뉴질랜드의 독립 추구)임을 분명히 했다. 부자 감세와 복지 축소에 반대했고, 동성 혼인과 낙태 비범죄화를 지지했다. 한편 신임 부대표 데이비스는 소수자 권리 옹호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이런 아던-데이비스 팀은 총선에서 노동당의 색깔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선택이 선거전에서 먹혀들었다. 아던이 대표를 맡자마자 노동당 지지율이 40% 이상으로 치솟았고, 후원금이 쇄도했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의 지지가 인상적이었다. 많은 여론조사에서 여성은 절반 이상이 노동당을 지지한 반면 국민당 지지는 20% 대에 그쳤다. 또한 18~24세 연령층에서는 노동당 지지율이 65%까지 오른 반면 국민당은 10% 초반에 머물렀다. 두 집단의 열성 지지에 힘입어 9월이 되자 드디어 노동당 지지율이 국민당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올해 6월 영국 조기 총선에서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보여준 지지율 급반전을 능가하는 예기치 못한 역전극이었다. 그래서 '재신더 마니아'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노동당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여성, 청년 등의 재신더 아던 지지 열풍을 일컫는 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샌더스(미국)와 코빈(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장-뤽 멜랑숑,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일으킨 바람과 다르지 않은 현상이었다. 아던과 노동당 스스로 이를 의식해서 샌더스, 코빈 노선에 공감과 연대를 표했고, 코빈은 "우리 모두를 대표해 승리를 거둬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재신더 마니아 현상의 상당 부분은, 이름 그대로, 재신더 아던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불과 한 달여 전에 대표가 됐음에도 아던은 유능하면서 신념 있는 정치가임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한 TV 대담에서 사회자가 아던이 젊은 여성이라는 점을 노려서 "총리가 된 뒤에 임신 하면 출산 휴가를 쓸 거냐"고 묻자 "남성 정치인이었어도 그렇게 묻겠냐"고 반문하며 "용납할 수 없는" 성차별 질문이라고 쏘아붙인 것은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른바 '심상정의 1분'의 아던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재신더 마니아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야를 좀 넓혀서 뉴질랜드 노동당의 최근 역사를 함께 봐야 한다. 뉴질랜드 노동당은 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중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정당이다. 영국 노동당에서 '제3의 길' 노선이 등장하기 훨씬 전인 1980년대에 이미 뉴질랜드 노동당은 집권당으로서 공공부문 사유화와 복지 축소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런 과거는 탈신자유주의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지금에 와서는 노동당에게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고 있다.

물론 그 후 숱한 일들이 있었다. '로저노믹스'라는 이름으로 시장지상주의 정책을 펼친 로저 더글러스 전 재무장관은 결국 노동당을 탈당해 노골적 신자유주의 정당인 ACT(‘소비자 및 납세자 연합’의 약칭)를 창당했다. 이 당은 이번 총선에서 고작 1석만을 얻었다. 한편 노동당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걸쳐 헬렌 클라크 전 총리 아래서 정통 사회민주주의로 복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국제적으로 '제3의 길' 전성기이던 무렵에 뉴질랜드 노동당은 오히려 이로부터 거리를 둔 것이다.

하지만 클라크의 노동당도 신자유주의와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더 이상의 복지 축소는 막았지만, 원상회복까지는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클라크 시대에는 노동당을 대표하는 얼굴들이 여전히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 집행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국민당이 장기 집권하는데도 노동당이 좀처럼 새로운 흐름의 대변자로 나서지 못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아던은 바로 이런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상징한다. 아던-데이비스 팀은 한 세대 전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더 나아가 이들은 뉴질랜드에 탈신자유주의 시대를 열 핵심 공약을 제시했다. 대학 등록금 폐지를 통한 무상 고등교육 실현, 아동 빈곤 철폐를 위한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내년부터 시간당 16.5뉴질랜드달러, 약 1만3000원으로 인상), 해외 투기 세력의 부동산 매입 금지와 공공주택 확대 등이 그것이다. 재신더 마니아 현상은 단지 아던 대표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이런 정책들을 향한 열렬한 지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변화의 열망에 힘을 실어준 연동형 비례대표제

한데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아니다. 지난주에 아던이 마침내 뉴질랜드의 새 총리가 됐지만,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있었다. 총선 결과가 선거전 후반에 실시된 여론조사와는 좀 달랐기 때문이다.

재신더 아던 바람이 확인되기는 했다. 3년 전(뉴질랜드 의원 임기는 3년이다)에 비해 의석이 가장 많이 늘어난 정당은 노동당이다. 득표율을 25.13%에서 36.80%로 늘려서 의석이 14석이나 증가했다. 반면 집권 국민당은 의석이 3석 줄었다. 그러나 여론조사와는 달리 득표율은 국민당이 앞섰다. 국민당은 44.45%를 득표해 제1당 자리를 지켰다. 여론조사 추이가 선거 결과로 그대로 이어지기에는 아던 바람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운 현상이었던 탓인 듯하다.

아무튼 우리의 정치 상식대로라면, 재신더 마니아 현상으로 나타난 변화의 열망은 '실패'로 끝났다고 할 만한 결과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결합된 뉴질랜드의 정치 제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선 노동당에게는 녹색당이라는 강력한 우군이 있다. 뉴질랜드 녹색당은 노동당이 신자유주의에 기울던 시기에 급성장한 또 다른 주요 좌파정당이다. 지난 선거에서 10% 넘게 득표했던 녹색당은 이번에는 재신더 마니아 현상에 지지층을 상당히 빼앗겼지만 그래도 6.27%를 얻었다. 노동당의 46석에 녹색당 8석을 더하면 54석으로 국민당의 56석과 비등하다.

그래서 노동당은 집권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노동당과 국민당의 눈은 동시에 제3당 제일당을 향했다. 제일당은 성격이 좀 모호한 정당이다. 창당 이후 줄곧 당을 이끌고 있는 윈스턴 피터스부터가 그렇다. 백인-마오리 혼혈인 피터스는 비주류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지만, 국민당에서 정치 이력을 시작한 보수 정치인이다. 제일당 역시 시장지상주의 경제 정책에는 반대하지만, 여성, 성소수자 문제 등에서는 완고한 입장을 보인다. 연립정부 파트너도 어느 때는 국민당이었다가 어느 때는 노동당으로 변한다.

그런데 이 당이 이번에는 결국 노동당을 집권 파트너로 선택했다. 나름 명분도 확실하다. 선거에서 확인된 민심이 "변화"라는 것이다. 제일당의 이 판단 덕분에 재신더 마니아들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좌파 바람이 불고 중도 세력이 이 바람을 인정함으로써 정치 지형이 변화하고 권력의 성격이 바뀌었다.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정당이 패배자가 되다니,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이다. 국민당을 1위 정당으로 만들어준 민심을 2, 3, 4위 정당이 담합해서 왜곡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승자독식 선거제도에 찌들어온 한국식 민심 해석법에서만 통하는 사고방식이다.

뉴질랜드 정치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정당이 제시한 정책 방향이 대중의 선택에 따라 어떻게 국가 정책으로 조합되느냐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이번 선거에서 확인된 것은 절반 이상의 국민이 노동당과 녹색당이 주장하고 제일당이 인정하는 정책 방향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뉴질랜드 국민은 실제로 그런 정책을 집행할 사명과 책임을 진 정부를 갖게 됐다.

물론 뉴질랜드 정치제도의 여러 구성 요소 중 내각책임제는 한국 정치 풍토에 그대로 도입하기에 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아던 총리를 낳은 정치제도에는 내각책임제라는 요소만 있는 게 아니다. 뉴질랜드가 내각책임제라도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소선거구제였다면, 상황 전개와 결말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는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듯이 뉴질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식 소선거구제를 실시하다가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예외적 국가다. 우리처럼 지역구에서도 의원을 뽑고 비례대표 명부를 통해서도 의원을 뽑지만, 우리와 달리 전체 의석은 정당투표 득표율로 결정한다. 덕분에 국민당-노동당이 오랫동안 독점하던 정치 지형이 지금과 같은 다당 구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구도를 바탕으로 뉴질랜드는 이제 영연방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인 탈신자유주의 기조를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가 됐다.

촛불이 반드시 남겨야 할 성과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지금 한국도 다당 구도다. 다당 구도를 통해 촛불 항쟁이 승리했고, 부패 무능 비민주 세력의 영향력은 역사상 가장 볼 품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다당 구도다. 다당 구도와 어울리지 않는 낡은 정치 제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승자독식형 선거제도가 문제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선출에서 소선거구제가 유지되는 한, 특정 지역에 거점을 둔 구악 세력이 부활하고 반격할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이런 까닭에 촛불이 반드시 남겨야 할 성과는 선거제도 개혁이다. 대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만한 게 없다. 지역구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정치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역동적 다당 정치를 열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1993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이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길의 연장선에서 2017년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것이 또한 촛불 이후 우리의 모습이길!


▲ 재신더 아던 뉴질랜드 노동당 대표, 신임 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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