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정부가 이 쉬운 ILO 협약 하나 비준 못하나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ILO 협약
촛불정부가 이 쉬운 ILO 협약 하나 비준 못하나
ILO 협약은 국제조약이다. 당연히 원문은 영어로 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필자도 영어로 된 국제조약이란 말에 겁부터 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ILO 결사의 자유 협약(87호, 98호 협약)을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정말 이게 전부야?" 2개 협약을 모두 합해 A4로 고작 2쪽 분량이었다. "설마… 이거 말고 부속조항들이 있겠지?" 아니란다. 알 만한 전문가들에게 다 물어봤지만 정말로 이게 전부라고 한다. "겨우 이런 걸 갖고 벌벌 떨었단 말이야?"

ILO 협약, 해설서 말고 원문 직접 보시라

가끔은 무식하게 덤비는 것이 도움 될 때가 있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직접 접해보면 알게 된다. 이를테면 ILO 기본협약 중 하나인 제87호 협약은 A4 용지로 1페이지 남짓인데, 그 중에서도 핵심 내용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이 7~8줄로 충분하다.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1948년, 155개국 비준) 핵심내용>

(제2조)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제3조) 1.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2. 공공기관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하여야 한다.
(제4조)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행정당국에 의하여 해산되거나 활동이 정지되어서는 안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는가? 노동법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가? 보통 국제조약 하면 생각나는 복잡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협약"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다. 잘 살펴보면 2.8 독립선언이나 3.1 독립선언의 문구를 닮았다. 누구나 차별 없이 결사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니 당연히 그러하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을 텐데, 모든 문장의 주어가 "노동자 및 사용자" 또는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ILO 협약은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사용자들에게도 제한 없이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걸 경총이 부담스러워한다? 사용자단체는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을 생각이 없단 말인가?

ⓒ청와대


쉬운 협약 어렵게 꼬아버린 경사노위

문재인 정부는 'ILO 기본협약 비준'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공약집 안에는 비준할 협약의 이름, 비준 국가 수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러면 국무회의 통해 기본협약 비준 관련 의사결정을 한 뒤 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보내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협약 비준과 관련한 논의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외주를 줘버렸다. 경사노위에 설치된 ‘노사관계 제도·관행개선위원회(노개위)’에서 몇 차례 논의를 하다가 노사 간 의견차가 너무 크다며 공익위원들이 지난해 10월에 자신들의 의견을 정리한 내용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단결권 보장에 관하여 향후 고용형태의 다양화와 법원의 판례 변화를 고려하여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한다.
2. 해고자 및 실업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제한하는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3. 노동조합 임원의 자격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현실을 고려하여 노동조합의 규약으로 정하되, 기업별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재직 중인 근로자로 한정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4. 현행 노동조합설립신고제도는 행정관청에 의한 자의적 운영이 가능하므로 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행정관청의 개입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5. 노조전임자에 대한 급여지급 금지 제도를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개정한다.
6. 공무원 및 교원의 단결권은 원칙적으로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보장한다.
… (중략) …
11. 간접고용근로자의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이건 당최… 한국말인지 외국어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삭제면 삭제지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없애는 방향으로 존속시킨다는, 완전히 모순된 얘기인데 말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시적 허용을 활용한 것일까? 많이 배운 교수님들이라 그런지 협약을 무슨 고전문학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우리나라 노사관계 현실", "우리나라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여"? 이거야말로 매번 북한과의 대치를 핑계 삼아 국민 기본권을 박탈하려던 독재정권이 애용하는 문구 아니던가. 정당한 기본권을 행사할 때마다 무조건 "특수한 현실" 운운하며 권리 행사를 가로막을 목적인 거다.

단결권을 그냥 보장하면 되지 "원칙적으로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보장하는 건 어떻게 한다는 걸까? 누가 번역 좀 해달라. 그런 문구는 모든 문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판례 변화를 고려하여".

경사노위는 대체 이런 짓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연봉 억대를 오르내리는 교수님들에게 별도로 회의수당 지급하며 국민 혈세까지 투입해서 한다는 일이, 저토록 쉽고 간명한 ILO 협약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도록 복잡하게 배배 꼬는 짓이란 말인가?

단서와 예외조항이 거의 없는 ILO 협약 내용

여기서 <인사이드 경제>는 경사노위 공익위원들이 배배 꼬아놓은 내용을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ILO 협약' 수준으로 다시 번역을 해보겠다. 이상한 문구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말 짧고 간명한 문장, 모든 노동자와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뀌게 된다.

■ 특수고용 노동자의 단결권을 보장한다.
■ 해고자·실업자 노조 가입 제한하는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을 삭제한다.
■ 노동조합 임원의 자격은 노동조합 규약으로 정한다.
■ 현행 노동조합 설립신고제도는 폐지하고 행정관청 개입을 금지한다.
■ 노조전임자 급여지급은 노사간 자율적 교섭과 단체협약으로 정한다.
■ 공무원·교원의 단결권을 보장한다.
■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우선 글자 수가 확 줄었다. 앞에서 인용한 공익위원 의견은 468자인 반면, 위에 정리한 내용은 불과 207자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드니 읽는 사람들의 부담도 감소한다. 이렇게 해도 되겠는지 여론조사를 하더라도 부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깔끔한 문장 아닌가.

그런데 왜 경사노위는 이렇게 쉬운 길을 놓아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는 걸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ILO 협약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단서’와 ‘예외’ 조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공익위원 의견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저 쉬운 문장들에 온갖 단서와 예외를 달아 누더기를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한국의 노동법이 그렇다. 노동자에게 권리를 보장하면 되는데 꼭 이상한 방식으로 단서와 예외 조항을 삽입한다. "권리를 보장하되, ……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권리를 보장한다. 단, ……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것은 과연 법 조항일까, 누더기일까.

단서와 예외조항을 일반화시켜 버리는 자본가들

온갖 단서와 예외조항들이 삽입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자본가들은 단서와 예외 조항이라는 아주 작은 틈만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단서와 예외를 일반화시켜 버린다.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 핵심이 아니고 단서·예외조항이 몸통이 된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레미콘·학습지 등 일부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산재보험 가입을 의무화 했을 때, 산재보험 가입을 원하지 않는다는 개인 동의서를 받으면 예외로 한다는 조항을 두었다. 그러자 모든 사용자들이 보험 가입 거부 동의서를 계약서에 첨부해서 받아버렸다.

그 결과 산재보험 가입을 의무로 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산재보험 가입율은 한자리수로 떨어져 버렸다. 산재보험 가입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예외조항이 일반화되도록 사용자들은 온갖 권력을 다 동원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탄력근로제 관련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의 합의서 내용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임금보전을 강화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합의문구 뒤에는 어김없이 단서와 예외조항이 삽입되어 있다.

"…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 휴식 시간을 의무화 함을 원칙으로 하되 불가피한 경우 근로자 대표와의 서면합의가 있는 경우에는 이에 따른다."
"… 최소 2주 전에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노동자에게 통보해야 한다. 다만 서면 합의 시 사용자가 예측하지 못한 천재지변, 기계고장, 업무량 급증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 정해진 단위기간 내 1주 평균 근로시간을 유지하면서 근로자 대표와의 협의를 거쳐 주별 근로시간을 변경 할 수 있다."
"…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해 이를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고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과태료를 부과한다. 다만 근로자 대표와의 서면합의로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한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한국의 노동자들 중 10%만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 즉 유령이 아닌 명실상부한 '근로자대표'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10% 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령과 같은 근로자대표 제도가 운영되는 곳이 90%, 즉 미조직 사업장을 일반적인 경우로 상정해야 함에도 10%의 조직된 사업장을 모델로 합의해 버린 것이다.

특히 그놈의 유령 '근로자대표와 합의'만 거치면 사용자들은 면죄부를 받게 된다. 저 조항들이 실제 입법으로까지 이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단서와 예외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 건강권과 임금보전은 그저 글자로만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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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