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녹색기본소득 발상지이자 최초 시행국이 된다면?
[장석준 칼럼] 기본소득이 기후행동과 만날 때
한국이 녹색기본소득 발상지이자 최초 시행국이 된다면?
5월 1일 영국 의회는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제라도 기후 변화에 따른 지구 위 모든 생명의 멸종 위기를 막기 위해 비상 대응에 돌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날 채택된 결의안은 분명한 시간표를 제시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을 2010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 제로로 만들자고 한다. 

이 결의안을 제출한 이는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다. 하원은 그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단지 제1야당 대표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제스처만은 아니었다. 사회운동의 압박이 있었다. 의회가 코빈 대표의 결의안을 심의할 때, 의사당은 시위대에 에워싸여 있었다. '멸종 저항'이라는 이름의 기후 변화 대응 촉구 운동이었다. 

게다가 스웨덴에서 기후 위기 해결을 주장하며 매주 금요일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10대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영국을 방문해 이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최근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툰베리의 시위에 영감을 받아 기후 변화 대책을 요구하는 중고등학생 파업이 이어지는 중이다. 

물론 영국에서도 기후 변화가 정치권의 첫 번째 현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가장 뜨거운 쟁점은 뜨거워지는 지구가 아니라 브렉시트 협상이다. 하지만 한 세기쯤 뒤에, 만약 그때도 지구 위에 인류 문명의 생존자들이 있다면, 역사의 주요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어느 쪽일까? 나는 기후 변화에 맞서려는 노력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에 비하면 브렉시트는 역사학 전공자들이나 읽을 긴 각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주제가 되지 않을까. 

아쉽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기후 변화 대응 노력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정책 제안에 관한 한, 이제 이야기가 좀 다르다. 최근 순전히 한국산(産)인 흥미로운 기후 변화 대응 정책이 제출됐다. 강상구 정의당 교육연수원장이 낸 신간 <걷기만 하면 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상상, 녹색기본소득에 관하여>(루아크 펴냄)가 꺼내 놓는 대안이다.  

걸으면 지급되는 참여소득, '녹색기본소득' 

<걷기만 하면 돼>가 선보이는 대안은 부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녹색기본소득'이다. 즉, 모종의 기본소득이다. 다만 앞에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기본소득이 무엇인지는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다.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상당 수준의 현금을 지급한다는 구상이다. 단지 인간/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수당이다. 이 발상은 21세기 현실에 맞는 새로운 복지 제도로서, 더 나아가 다수 시민이 주로 임금 소득에 의존해 살아가는 질서를 바꿀 중요한 수단으로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지지를 모으고 있다. 요 몇 년 새 한국 사회도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녹색기본소득은 여기에 조건을 하나 단다. 뭔가를 해야만,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이다. 뭘 해야 하는가? 걸어야 한다. 오해의 소지가 없게 부연하면, 좁은 의미의 걷기만은 아니다.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다. 장애인의 경우는 장애인 콜택시 같은 전용 탈것까지 포함된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를 '안 해야만' 한다. 바로 자가용 승용차 사용이다. 

<걷기만 하면 돼>가 드는 예시에 따르면, 걷거나 전동휠체어를 타고 7.5분을 이동하면 1포인트를 얻는다. 자전거를 타고 9분 이동하면 또 1포인트를 받는다. 버스로 30분 이동하거나 지하철, 장애인 콜택시로 20분 이동할 때도 1포인트를 획득한다. 이렇게 쌓인 포인트가 한 달에 300이 넘으면 녹색기본소득을 지급받는다. 물론 '예시'이므로 기본 원칙 말고 다른 세부 사항은 토론을 통해 정해야 한다고 열어놓는다. 녹색기본소득의 액수도 마찬가지다. 

저자 강상구는 이 제안의 핵심이 무엇보다 기본소득과 기후행동의 결합에 있다고 강조한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자동차 사용은 줄어든다. 그럼 당연히 화석 에너지 사용도 줄고, 탄소 배출량도 줄어든다. 녹색기본소득은 이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게 만든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으니 자동차 사용을 자제하게 되고 결국 탄소 배출량도 감소한다. 즉, 녹색기본소득을 실시하면, 모든 시민이 탄소 배출 줄이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셈이 된다.   

기후 변화 대응만이 아니다. 다른 중요한 부수 효과들이 있다. 가령 도시의 변화다. 지금 우리 도시의 모든 길은 사람이 주인이 아니다. 자동차가 주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이 없고 골목이 없으며 동네도 없다. 반면 걷는 사람이 주인인 길이라면, 길이 곧 광장이 된다. 대로만이 아니라 골목이 살게 되고, 더불어 동네가 되살아나게 된다. 

이는 이반 일리치가 이미 40여 년 전에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주된 탈것으로 추천하면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에너지와 공정성에 대하여>, 신수열 옮김, 사월의책 펴냄). 자동차로부터 도시를 되찾기. 이것이 녹색기본소득이 여는 또 다른 가능성이다. 
   
강상구는 여기에 몇 가지 흥미로운 정책 제안을 덧붙이기도 한다. 가령 어린이에게도 녹색기본소득을 주지만, 바로 주지는 않고 적립한다. 그러다 만 19세가 되면 자기 계좌에서 언제든 돈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청년에게 매달 기본소득을 주지 말고 한 번에 목돈을 주자는 기본자산 구상에 가깝다. 더 나아가 저자는 만 18세 이하 인구를 위해 적립한 기금('녹색기본소득기금')을 생태사회 전환을 위한 재생 에너지 확대 등에 투자하자고 제안한다.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녹색기본소득 구상에 여러 개혁 정책이 딸려오는 모양새다. 
 
한데 이 제안은 실은 녹색'기본'소득보다는 녹색'참여'소득이라 하는 게 더 맞다. 수당을 받는 데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뭘 해야만(혹은 안 해야만), 수급 대상이 된다. 이런 발상을 기본소득과 구분해 흔히 '참여소득'이라 한다. <걷기만 하면 돼>의 제안은 자동차 사용을 최대한 줄이는 데 참여해야 수급 대상이 되므로 녹색'참여'소득이라 해야 정확하다. 

저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이 더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일단 '녹색기본소득'이라 이름 붙인다고 책 앞부분에 밝힌다. 말하자면 정치적 고려에 따른 작명인데, 내가 보기에는 영 무리한 선택만은 아니다. 이 책의 대안은 참여소득 제안 중에서는 가장 기본소득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는 인간/시민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행위 가운데 이런 존재 자체와 거의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숨쉬기일 것이다. 그럼 그 다음으로 들 만한 행위는? 숨쉬기 다음으로 인간 존재와 직결된 행위로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걷기가 아닐까. 인류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늘 루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걸었기 때문 아닌가. 그렇기에 녹색참여소득은 사실상 거의 '기본'소득으로 보인다.   

녹색기본소득이 매력적인 세 가지 이유 

<걷기만 하면 돼>를 읽어 내려갈수록 녹색기본소득은 참으로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온다. 책장을 덮으면 누구든 저자만큼이나 열렬한 녹색기본소득론자가 돼버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특히 다음 세 가지 미덕 때문에 그랬다.  

첫째, 녹색기본소득은 각기 다른 문제의 대안으로 나온 발상들을 서로 잇는다. 

기본소득이나 참여소득은 이미 잘 알려진 대안들이다. 기후 변화를 되돌리거나 늦추려면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도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걷기만 하면 돼>는 이 두 문제의식이 서로 만나게 한다. 그랬더니 녹색기본소득이라는 전에 없던 길이 열렸다. 

이것은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는 고전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다. 각기 다른 분야의 대안이라 생각되던 정책들을 연결하다 보면 미처 생각 못했던 제3의 정책을 착안할 수 있다. 하지만 '고전적'인 방식이라 하더라도 '흔한' 방식은 아니다. 대다수 정책 전문가들의 시야가 전공 분야의 정책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회란 수많은 영역들이 서로 얽혀 있는 어지러운 그물망과 같아서, 이른바 분야별 정책은 현실 변화의 예리한 무기가 되지 못한다. 

반면에 녹색기본소득의 미덕은 정책들의 유기적 결합에 있다. 기본소득과 기후행동뿐만 아니라, 위에도 소개했듯이 또 다른 여러 정책 목표와 발상들을 결합시킨다. 기본소득과 기본자산의 융합을 시도하고, 재생가능에너지 투자 확대와 연결시킨다. 또한 골목과 동네가 활성화되고 숲과 공원이 늘어난 새 도시를 만드는 과제와도 연결시킨다. 그래서 분야별 정책을 넘어 종합적인 체제 대안으로 발전해간다.   

둘째, 녹색기본소득은 대중의 작은 실천이 체제 변화와 이어지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기후 변화라는 거의 우주적인 차원의 문제와 씨름한다. 미세먼지나 플라스틱 쓰레기 증가도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덜 쓰자는 캠페인은 너무 무력해 보인다. 특히 환경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다는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에게 이런 캠페인은 지금 진짜 해야 할 일을 가리려는 선전술에 불과하다. 그런다고 재앙을 되돌릴 수는 없다. 멸망을 막으려면 이 체제를 무너뜨려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따져 보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체제를 바꾸려면, 결국 대중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지금 당장 혁명가가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대중이 좀 더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실천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문제 해결의 주체임을 느끼고 이를 통해 더 적극적인 실천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작지만 체제 차원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어떤 실천, 그런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녹색기본소득은 바로 그런 고리를 찾아냈다. 다름 아닌 걷기다. 걷고 자전거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누구나 기후 변화를 늦추는 전 인류적 행동의 주인공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주인공이 됨으로써 시민 배당까지 받는다. 이것은 분명 작은 실천이지만, 또한 거대한 문명적 전환의 실마리가 되는 실천일 수도 있다. 

문턱이 높지 않은 행위에 함께 함으로써 어렵지 않게 보편적 주체에 합류하는 것, 이것은 인류 역사 속 모든 고등 종교와 이념이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숙제다. 녹색기본소득은 이 숙제를 환기하며 이에 과감히 도전한다. 
 
셋째, 녹색기본소득은 가장 바람직한 변혁 정책이 지향해야 할 바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공학이 아니라, 진화의 물꼬를 여는 역할이다.  

20세기는 사회 공학의 시대였다. 하지만 20세기의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그런 공학으로는 사회 현실을 근본부터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몇 가지 제도를 없애거나 새로 만든다고 다른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사회로 나아가려면, 대중이 자신의 행동 양식을 스스로 바꾸고 새로운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이것은 진화의 과정이다. 제도 변화란 이런 새로운 방향의 진화 과정을 열고 촉진하며 다시 제도화하는 계기들이어야 한다.  

녹색기본소득은 이런 제도 변화의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단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면, 어떤 공학으로도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새 문화가 자라날 것이다. 사람들은 점차 집과 일터의 거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소비 생활의 주된 패턴 역시 더 이상 대형 마트 이용에만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법규나 계도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 전과 다른 자생적 질서가 구축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 삶보다는 훨씬 더, 지구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질서일 것이다.    

대한민국, 녹색기본소득의 발상지이자 최초 시행 국가가 되길

아무튼 녹색기본소득 방안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대안이다. 이런 대안이 한국 사회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이 반갑다. 또한 진보정당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기왕이면 대한민국이 녹색기본소득 구상의 발상지이자 첫 번째 시행 국가까지 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선은 더 많은 이들이 <걷기만 하면 돼>를 읽어야 한다. 녹색기본소득 제안에 빠져들어야 한다. 지루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150여 쪽을 읽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우리 시대의 위기가 더는 막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다시 걷기 시작할 수만 있다면 결코 돌이키지 못할 종말이란 없음을 예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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