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쿠데타 이전에, 이승만의 쿠데타가 있었다
[장석준 칼럼] 회오리 정치, 그 질긴 역사를 끝낼 때가 됐다
박정희 쿠데타 이전에, 이승만의 쿠데타가 있었다
회오리 정치의 시작, 국회 프락치 사건 

지난 3월, "해방 뒤 반민특위 때문에 국론이 분열됐다"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망언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웠다. 본인도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문특위"를 이야기하려 했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으니 이 망언 자체야 더 논할 가치도 없다. 다만, 덕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그리고 이 특위가 활동했던 제헌국회가 잠깐이나마 관심을 끌었으니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 발전에 기여한 바 적지 않다 하겠다. 

그런데 제헌국회의 반민특위 활동이 좌절된 역사를 잊지 않으려면, 꼭 함께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다. 무려 15명의 제헌국회의원이 구속 기소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당시 사법부 판결에 따르면,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초대 국회의원 여럿이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프락치(끄나풀)로 활동했다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런 공식 평결은 대한민국의 과거 어두운 역사 속 수많은 흑막 사건들처럼 철저히 재검토돼야 한다. 

게다가 국회 프락치 사건 재평가 작업은 결코 한국 현대사 전공자만의 관심사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실을 함께 따져봐야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이맘때 잇달아 일어난 또 다른 비극적 사건들, 즉 반민특위 해산과 김구 암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반민특위 망언 당사자가 원내대표로 있는 그 당이 현재 보이는 행태가 어떤 기나긴 역사를 이어받으며 이어가려는 발버둥인지 정확히 직시할 수 있다. 

국회의원의 10%가 탄압 대상이 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려면, 우선 제헌국회부터 알아야 한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1948년 5월의 첫 총선에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바라던 정치 세력들이 대거 불참했다. 정당이나 준정당으로 조직된 거대 정파로는 이승만 직계 세력과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만 참가했다. 그런데도 두 세력은 원내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무소속 의원들이었다. 

한데 소속이 없다고 정견까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중도 좌우파의 지도급 인사들이 선거 불참 방침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개인 자격으로 선거에 뛰어든 이들 정파의 신진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제헌헌법 심의 과정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한민당 의원들이 헌법안의 진보적인 내용들을 트집 잡을 때마다 번번이 젊은 무소속 의원들이 나서서 이에 맞섰다. 제헌국회에는 서로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 한 이승만과 한민당의 대결도 있었지만, 이승만-한민당 대 무소속 의원들의 보수-진보 대립도 있었던 것이다. 

'소장파'라고도 불린 진보개혁 성향 무소속 의원들은 제헌국회 의석(총 198석)의 거의 1/4에서 1/3을 차지했다. 정부나 한민당에 맞서는 결의안에 서명하는 최대 인원이 80명 선이었고, 일상적으로도 50인 가량이 마치 한 블록처럼 움직였다. 실제 원내 모임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김구 노선 지지자들이 동인회(同人會)를, 그보다 더 진보적인 의원들이 성인회(成仁會)를 결성했다. 그러다 1948년 말에 두 조직이 합쳐 동성회(同成會)가 됐다. 

비록 느슨한 의원 모임이기는 했지만 동성회는 제헌국회에 진보정당이 있었다면 해야 했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초대 국회에서 지방자치제 실시, 반민특위 설치, 농지 개혁 등이 통과된 것은 다 소장파 덕분이었다. 제1공화국 초기에 농지 분배 같은 개혁 조치가 추진돼 흔히 이승만의 치적인 것처럼 기억되곤 한다. 그러나 이들 조치는 결코 이승만 정부가 앞장서서 이뤄낸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원내 소장파 의원들이 정부와 한민당의 방해를 뚫고 개혁 법안을 관철시킨 결과다.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4월 농지개혁법 통과까지가 이들 소장파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봄은 길지 못했다. 4월 말에 소장파의 맹장으로 이름 난 이문원 의원이 돌연 체포됐다. 며칠 뒤, 한민당의 김준연 의원(해방 전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하다 극우파로 전향한 인물)이 <동아일보>에 "60여 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김일성을 따르고 있다"고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국회의원의 거의 1/3을 적으로 몬 것이다. 그러고 1주일이 지난 5월 17일에 역시 소장파인 이구수, 최태규 의원이 구속됐다. 

국회는 구속 의원들의 석방 결의안을 놓고 찬반 격론을 벌였다. 바로 이 시점에 반민특위를 향한 공격이 거세졌다. 반민특위는 국회가 설치한 기구였고, 따라서 특위를 공격하자면 국회(정확히는 국회 내 소장파)가 반격에 나서지 못할 상황이 돼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세 의원 구속으로 그런 상황이 연출됐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6월 6일 종로경찰서의 친일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해 사실상 특위를 와해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6월 17일에 소장파의 지도자 격이던 김약수 국회부의장(조봉암처럼 해방 전에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을 비롯한 국회의원 6인이 국제연합(UN) 한국위원단에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평화통일을 위해 미소 양군이 즉각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소장파의 '당론'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이들에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정치 행위였다. 그러나 공안 당국은 이를 소장파가 남로당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증거라 옭아맸다. 

6월 21일에 노일환(총선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된 인물)을 비롯한 6인의 국회의원이 체포됐고, 6월 25일에는 김약수 부의장까지 체포됐다. 이미 구속된 3인과 함께 남로당 지침에 따라 국회에서 '프락치'로 활동하거나 아예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입당했다는 혐의였다. 현역 의원의 면책 특권 따위는 간단히 무시해버렸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수사에 검찰, 경찰뿐만 아니라 헌병까지 동원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국회의원 체포가 마치 신호탄이기라도 하듯 또 다른 커다란 사건이 뒤따랐다. 국회부의장이 체포되고 난 다음날인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가 암살당했다. 

구속자는 10인으로 그치지 않았다. 7월 30일에 국회 회기가 끝나자 소장파 의원 5인이 추가 구속됐다. 게다가 구속영장이 발부됐으나 집행되지는 않은 3인이 더 있었다.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국회의원 총 18명이 기소된 것이다. 이는 제헌국회 의석의 거의 10%에 달하는 수치였다. 또한 소장파의 중추라 할 만한 인사들이 망라돼 있었다. 이로써 그 맹렬하던 원내 진보개혁 블록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70년 전 이맘때의 대한민국 첫 '쿠데타' 


그럼 체포된 의원들은 수사 당국의 주장처럼 정말 남로당 지령을 받아 움직였는가?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가 진두지휘한 수사팀은 나름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놓은 것은 남북을 오가던 남로당 비밀요원의 몸에서 나왔다는 지령문(이른바 '증제 1호')이었다. 또한 검거된 남로당 활동가들을 재판에 출석시켜 의원들과 접촉한 사실을 증언하게 했다. 남로당 정치 방침이던 이른바 '7원칙'과 소장파 의정 활동이 겹치는 내용이 많으니 남로당 지령에 따랐음이 틀림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런 '증거'들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소장파 의원들의 행보와 '남로당 7원칙'이 비슷한 데가 있다고 하여 이게 남로당에게 조종 받은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후 남한에서 수십 년 동안 반복될 정적 탄압 방식의 원형일 뿐이다. 민주화 요구가 북한 주장과 겹친다 하여 '친북'이라 낙인찍히고 '간첩'이라 누명 쓴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그 원형을 본다. 

다음으로 남로당 활동가들과 접촉했다는 혐의는 어떠한가? 구속 의원들도 인정했듯이, 접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재판정에 나온 이들 남로당원은 구속 의원들의 막역한 친구였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에 뜻을 함께 하다 해방 이후 길이 달라진 옛 벗이었다. 더구나 남로당이 불법화된 것은 1949년 10월이니 그 전에 남로당 당원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실정법 위반이 될 수는 없었다. 증인들은 오히려 구속 의원들이 자신과 만났을 때에 남로당 노선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고 입당을 거부해 실망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주심 판사 사광욱은 이런 증언을 모두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증거라던 '증제 1호', 이것은 믿을 만했는가? 검찰 측이 제시한 이 '증거'가 실제 이북의 남로당 지도부와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 오간 지령문이 맞는지는 오직 이 문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남로당 여성 당원 정재한이라는 인물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인물은 한 번도 재판에 불려나오지 않았다. 나중에야 정재한이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9년 12월에 간첩 혐의로 처형됐음이 확인됐다. 

구속 의원들의 유죄를 뒷받침할 증거는 이처럼 허술한 데 반해 이들의 조서가 가혹한 고문의 결과라는 증거는 너무도 뚜렷했다. 재판정에서 구속 의원들은 조서 속 진술이 모두 고문 수사 끝에 나온 거짓 자백이라 폭로했다. 역시 주심 판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왜 이 수사에 헌병대가 동원됐는지가 드러난다. 언론의 눈을 피해 현역 의원들을 마음껏 고문하기에는 경찰서보다는 헌병대 막사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판단해 미리 조율한 결과였다. 누가? 당시에 검찰과 경찰뿐만 아니라 군부를 한 손에 주무르며 헌법을 만든 그 기구를 손 볼 수 있는 권력의 중심이 어디였겠는가? 모든 사실은 이 사건의 기획 및 집행 총책임자로 대통령 이승만을 가리킨다. 

이승만과 그 주변 무리들(실제로 '88 구락부'라는 정부 내 비밀결사가 있어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 암살 등을 공모했으며 김준연도 그 일원이었다 한다)에게 국회 내 진보개혁 블록은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정적 제1호였다. 제주도 등지에서 학살 작전을 벌이고 총선에서 중도 좌우파 지도자들을 따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 내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소장파의 존재는 남한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와 민주화 요구가 얼마나 강렬하고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들 때문에 정부 수립 초기에 국회는 정부와 팽팽히 대립하며 사회 개혁의 살아 있는 무대가 되었다. 

이승만 무리는 이를 결코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대의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 가능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잇단 공세를 기획하고 실제 밀어붙였다. 1949년 5월, 6월에 걸쳐 현역 국회의원을 체포해 국회를 혼란에 빠뜨린 뒤에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다시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다수 의원을 체포해 원내 소장파를 초토화하면서 원외의 거두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이미 당시에도 김수선 의원은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을 '경찰 쿠데타'라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도 실은 공안 기관들이 총동원돼 국회를 짓밟은 친위 쿠데타였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김구 암살을 포함한 이들 사건을 한데 아울러 '6월 공세'라 이름 붙인다(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10. 혹은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 오월의봄, 2015.를 참고할 것). 

즉, 국회 프락치 사건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발발한 이승만 정권의 친위 쿠데타 제1호, 대한민국 역사상 첫 쿠데타였다. 

회오리 정치, 그 질긴 역사를 끝낼 때가 됐다 

미국은 국회의원들이 처음 잡혀갈 때부터 이미 조작 사건임을 잘 알았지만, 기껏해야 모른 척이나 할 뿐이었다. 오직 두 미국인만이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을 주시한 뒤에 일찌감치 이를 모략 사건이자 국회에 대한 쿠데타라 규정했다. 한 사람은 주한미국대사관 법률고문으로 제헌헌법 원안 마련에도 관여했던 독일 망명객 출신의 우파 사회민주주의자 에른스트 프랭켈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정치를 분석한 저작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이종삼, 박행웅 옮김, 한울, 2013)로 유명한 그레고리 헨더슨이었다(김정기,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2: 그레고리 헨더슨의 한국정치담론2 – 중간지대의 정치 합작』, 한울, 2008). 

헨더슨이 이 책에서 한국 정치에 딱 맞는 비유로 든 것이 회오리다. 잘 조직된 시민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한 거대 양당이 중앙에서 극렬한 대립 구도를 만들면 무정형의 시민사회 전체가 회오리처럼 이 대결에 빨려 들어가는 정치. 헨더슨이 말한 이 '회오리 정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회오리식 동원을 반복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한에서 이는 극우 지배 집단이다. 헨더슨은 시민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다원적 정치 세력들 사이의 경쟁과 협상, 합작이 회오리 정치를 대체하길 바랐다. 소장파가 활약하던 제헌국회에서 보았던 가능성이 다시 살아나길 바랐다. 

헨더슨의 '회오리 정치'론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그의 논의가 의지하는 구식 이론이나 한국 역사에 대한 일면적 이해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헨더슨의 진단은 결코 쉽게 논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얻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 현장 중에 국회 프락치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드디어 헨더슨이 진단한 회오리 정치의 숙명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이 운명의 쳇바퀴에 다시 갇힐 것인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제도 개혁안이 전자의 미래를 타진한다면, "좌파 독재 타도"를 외치며 광주를, 대구를, 부산을 누비는 과거 여당, 현 제1야당은 어떻게든 우리 모두를 후자의 궤도에 가두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70년 여정의 끈질긴 연장이다. 

이 양자택일 앞에서 우리의 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역사상 첫 쿠데타의 참담한 기억이 벌써 일흔 번째 해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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