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참가자가 남긴 거의 유일한 기록을 들추다
[장석준 칼럼] 동학농민혁명군은 농지 개혁을 바랐는가
동학혁명 참가자가 남긴 거의 유일한 기록을 들추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이 SBS에서 방영 중이다. 요즘은 1차 봉기가 전주화약으로 끝나고 아직 2차 봉기가 시작되기 전인 1894년 여름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특히 전주화약 장면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만큼 뜨겁고 강렬했다. 

농민군 대장 전봉준은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의 조건으로 당당히 폐정개혁안을 내밀었다. 드디어 화약을 맺고 호남 곳곳에 민중 자치 기관인 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한 뒤에는 다시 전라도관찰사 김학진에게 새로 정리한 폐정개혁안 12조를 제시했다. 혁명군으로 나선 민중의 간절한 바람을 아우른 이 개혁안의 마지막 조항은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이었다. 

얼마나 명쾌하고 대담한 요구인가! 갑오년 농민혁명군 역시 역사상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들의 공통 요구였던 토지 개혁을 바란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조항이 논란거리다. 동학농민혁명을 돋보이게 만드는 폐정개혁안 제12조가 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아니, 허구라고 단언하는 이들까지 있다. 

폐정개혁안 12조를 전한 오지영의 <동학사> 

학교 다닐 적에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일수록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여러 국사 교과서에 농지 개혁이 포함된 폐정개혁안 12조가 실려 있고, 각종 시험 문제로도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봉준이 정부에 이를 요구했다는 기사는 오직 한 문헌에만 나온다. 1940년에 발간된 오지영의 <동학사>다. 다른 문헌에는 전하지 않으며, 당대 자료도 없다. 

그러니 역사학자라면, 의문을 던질 만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있고 40년도 더 지난 뒤에 출간된 책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게다가 또 다른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 초판은 '소설(小說)'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폐정개혁안 12조가 완전히 허구라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결정적인 근거로 든다. <동학사>가 사료 가치가 전혀 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렵지 않게 반박될 수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역사가가 쓴 체계적 사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소설'이라 부르며 떠올리는 그런 픽션도 아니다. 굳이 말하면, 회고록에 가깝다. 한문 세대에 속했던 오지영은 자신의 회고에 '동학사'라는 제목을 붙이며 겸양의 의미로 '小說'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한 소박한 참여자의 회고' 정도의 뜻이겠다.  
    
검증을 하려면, 폐정개혁안의 본래 내용은 전혀 달랐다거나 그런 정리된 요구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면, 유일한 증언자인 오지영이 어떤 인물인지 뜯어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이름인 오지영, 그는 과연 믿을만한 증인인가? 

오지영(吳知泳)은 1868년생이다. 갑오년 봉기가 처음 시작된 전라북도 고부군 무장현이 고향이다. 전봉준처럼 그도 몰락 양반 집안 출신으로, 시대의 대안을 찾아 헤매다 스물 세 살 되던 1891년에 동학에 입교했다. <동학사>의 회고에 따르면, 갑오년 이전에 이미 관리들의 눈 밖에 나 고향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자 처가인 익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민혁명을 맞이했다(오지영의 초기 행적에 대해서는 노용필, <'동학사'와 집강소 연구>, 국학연구원, 2000.을 주로 참고했다). 

농민혁명 와중에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다. <동학사>에서는 자신이 해월 최시형이 끄는 동학 북접의 밀명을 받고 농민혁명을 이끄는 남접에 파견돼 남북접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역시 <동학사> 외에는 오지영이 최시형과 그토록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 SBS 드라마 녹두꽃 ⓒ SBS 제공


한편 1차 봉기 이후 익산 집강소에서 활동한 인물들 가운데 오지영이라는 이름이 끼어 있는 자료가 있다. 그렇다면 익산에 머물다가 1차 봉기에 호응해 참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동학사>의 회고를 다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이다. 그는 고부 봉기와 전주성 함락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익산에서 도소 및 집강소를 조직해 활동했고 남북접이 연합한 2차 봉기에 함께 했다.  

이 점에서 <동학사>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문헌은 분명 아니다. 우리에게는 농민혁명군에 참가한 이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거의 없다. 전봉준도, 손화중도, 김개남도 그런 글월을 남기지 못했다. 절명시나 창의문의 몇 단락, 적들이 남긴 취조 문서 정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유추해야 한다. 아니면 갑오년 사건 자체가 주제는 아닌 <백범일지> 같은 문헌에서 단편적 회고를 접하며 만족해야 하는 처지다. 

<동학사>는 이런 상황에서 농민혁명 참가자가 책으로 남긴 거의 유일한 회고다. 40여 년 뒤에 정리됐기에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적대자들의 기록에는 남을 수 없는 기억과 만나는 희귀한 통로일 수도 있다. 농민혁명군이 당장 실현할 과제로는 여기지 않았지만 궁극 목표로는 염두에 뒀던 바가 다른 기록이 아니라 한 참가자의 회고에만 전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동학사>의 증언에 회의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지만 또 다른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동학농민혁명, 천도교 혁신운동 그리고 고려혁명당 

흥미로운 것은 이후 오지영의 인생 역정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참담한 패배로 끝난 뒤에 그는 다른 동학 교인들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입에 풀칠할 길을 찾으며 한 세월을 보낸 듯하다. 한때는 고관대작에게 줄을 대 관직을 얻어 일한 적도 있었다(오지영의 후기 행적은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한울. 2009.를 주로 참고했다).  

그러다 다시 뜻을 펼칠 기회가 열렸다. 1904년 일본에 망명 갔던 손병희가 귀국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대대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오지영은 이에 호응해 익산에서 천도교 간부로 활약했다. 천도교가 문명개화 노선을 채택하자 그 역시 호남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국권을 상실한 뒤인 1911년에는 손병희의 인정을 받아 경성에서 천도교 중앙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천도교 역사에서 오지영이라는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그때 천도교 안에서는 혁신운동이 벌어졌다.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衆議)로", "차별에서 평등으로"를 내걸며 교단 제도 전반을 뜯어고치자는 운동이었다. 오지영은 이 운동에 앞장선 중견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풍운아가 있었다. 바로 최시형의 아들이며 손병희의 조카인 최동희(1890-1927)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최동희는 3.1운동 전부터 천도교의 대일 투쟁 노선을 두고 숙부 손병희와 대립했다. 그는 갑오년 봉기 같은 무장 투쟁을 부르짖으며 연해주 등지를 떠돌다 3.1운동으로 손병희가 투옥된 뒤에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천도교 혁신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교단을 철저히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다. 교주가 일방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뽑은 의정원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체제를 꿈꿨다. 천도교 안에 일종의 민주공화정을 세우려 한 것이다. 

중견 간부인 오지영은 이런 최동희의 구상을 열렬히 지지했다. 당시는 3.1운동의 여진 속에 사회운동이 급성장하던 시절이었기에 천도교 혁신운동 역시 교단 안팎에서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한때는 이런 분위기에 압도된 천도교 내 각 파벌이 혁신파의 요구를 상당히 수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손병희가 옥고 끝에 병사한 1922년에 보수파 연합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권동진, 오세창의 천도교 구파, 최린, 이돈화의 천도교 신파 모두 혁신파를 공박하며 옛 교단 질서를 복구했다. 

최동희, 오지영 등 혁신파는 결국 기존 교단에서 나와 천도교연합회라는 독자 조직을 결성했다. 천도교 내부 혁신에는 일단 실패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혁신파의 목표는 단지 교단 혁신만이 아니었다. 최동희는 천도교를 민주적 대중조직 형태로 재편한 뒤에 이를 항일 투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강령을 "왕실 전복, 귀족 박멸, 빈부귀천의 계급 타파, 국토 평균 분작"으로 재정리하고 동학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코민테른과 제휴하여 만주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려 했다.  

천도교 혁신파의 이런 대담한 구상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다. 1925년 무렵 최동희는 길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조직 정의부와 접촉했다. 그는 정의부의 이념적 지주였던 양기탁과 만나 만주와 국내를 이으며 항일 투쟁을 지도할 정당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1926년 정의부와 천도교연합회에 형평사(백정의 신분해방운동) 일부 간부까지 가세해 새 당을 창당했다.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동시 실현을 내건 고려혁명당이었다. 

오지영은 바로 이 고려혁명당의 야심 찬 사업 중 하나로 만주에 조선인 자치촌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고려혁명당 창당 직후에 익산의 천도교연합회원 230여 명을 길림으로 이주시켜 농장을 건설했다. 이 농장에서는 모두가 공동 경작을 하고 수확물을 공동 관리했다. 그래서 "인내천 취지 아래 건설된 공산국"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혁신파의 구심인 최동희가 풍찬노숙 끝에 얻은 폐병으로 1927년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려혁명당 역시 1926년 말부터 오동진, 정이형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대거 체포돼 사실상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오지영 등은 항일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던 애초 구상이 실패한 상황에서 공동농장을 어렵게 꾸려가야 했다. 그러다 결국 농장을 정리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과정에서 천도교 신파의 최린 등에게 도움을 받은 오지영과 동지들은 1940년에 추진된 천도교 교단 재통합 과정에 참여했다. 통합의 주 당사자는 구파와 신파였지만, 혁신파의 남은 이들 역시 이에 합류했다. 통합을 주도한 신파는 당시 노골적인 친일 노선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신파에 사실상 흡수된 구파와 혁신파 잔존 세력 역시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걷기에 이른다. 적극적 친일 행위자 명단에서 오지영의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러했다. 

<동학사>는 바로 이 시점에 세상에 나왔다. 모처럼 교단을 재통합하는 과정에서 오지영은 천도교, 아니 동학의 역사를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가 가장 떠들썩하게 승리의 나팔을 울리던 그 때에 그는 갑오년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 활자로 남겼다. 

토지 혁명이라는 이상의 '증거'가 되다  

이것이 <동학사> 저자가 남긴 삶의 궤적이다. 그는 과연 믿을만한 증인인가, 아닌가? 여전히 뭐라 단정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농민혁명군 폐정개혁안에 토지 혁명의 이상이 담겨 있었는지 여부도 판정하기 난감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발상을 전환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껏 오지영이 폐정개혁안 제12조의 신뢰할만한 '증인'으로 자격을 갖췄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를 '증인'이 아니라 '증거'로 바라보면, 어떨까? 단지 폐정개혁안이 토지 개혁 요구를 담고 있었는지 목격한 이가 아니라 갑오년 그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토지 혁명의 열망을 이후 평생에 걸쳐 시도하고 또 시도한 인물로 바라본다면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천도교 혁신운동과 고려혁명당 창당, 만주 공동농장으로 이어진 그와 동지들의 끈질긴 시도야말로 농민혁명군이 가슴에 품고 있던 단단한 씨앗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 오지영의 여정은 <동학사> 집필로 끝이 아니었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2월 19일에 서울에서 좌파 정당과 대중조직을 총망라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이 결성됐다. 이날 창립대회장에서는 임시정부를 떠나 민전에 합류한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만큼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인물이 또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구의 오지영이었다. 오지영은 천도교 혁신 세력 대표로 민전에 참여했다. 

이날 오지영은 갑오년 농민혁명군의 함성이 해방 공간의 노동자, 농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다들 그래서 감격하고 환호했다. 물론 우리는 이후 역사가 어떤 비극의 터널을 뚫고 나아가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오지영 옹을 환영했던 그 세대 사회운동은 짓밟히고 말았고, 오지영 자신은 1949년-1950년 초 즈음에 고단했던 삶을 마쳤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오늘날 부동산 계급 사회 타파를 바라며 '제2의 토지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의 가슴에서 갑오년으로부터 이어오는 그 열망은 새롭게 꿈틀대고 있다. 그들에게 '폐정개혁안 제12조'란 더는 진위를 물을 필요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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