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시위, 한국에선...
[청소년의 목소리에 권리를] '청소년인데도' 아니라, '청소년이라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시위, 한국에선...
'청소년의 사회 참여', '참정권', '선거 연령 하향', '청소년도 시민이다'.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 왔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린 이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아직도 현실의 유쾌한 전복을 꿈꾸는 청소년이다.

지난 3월 15일과 5월 24일, 기후 변화를 위기로 인식하고 제대로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광화문에 울려 퍼졌다. 이 두 번의 집회는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등교 거부 1인 시위에서 촉발되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청소년 기후 파업(Climate Strike)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청소년기후소송단'으로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 청소년기후소송단의 최종적인 목표는 기후 변화라는 범지구적인 문제에 무책임하게 두 손 놓고 있는 정부와 기업들에 소송을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후 소송을 수단으로 두고 있지만, 청소년기후소송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부가 기후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여 실질적인 기후 변화 대책을 만들고 또 개선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를 움직이려면, 기후 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청소년기후소송단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기후 변화 이슈를 알리는 일도 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권이나 정치적 활동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곧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 그래서 우리의 목소리는 종종 묻혀버리곤 한다.

3월과 5월, 청소년기후소송단이 주최한 시위는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딱 그때뿐이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낸다'는 흐뭇한 풍경으로 소비될 뿐, 정작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청소년을 동등한 시민으로 지지하고 함께 서 주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환경 운동을 두고 학창 시절에 해 보는 하나의 좋은 경험이나 활동으로 치부해 버리는 어른들도 많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과소평가되는 경험은 불쾌한 무력감을 자아냈다.

학교도 별반 다를 바는 없다. 학교 일과가 끝나도 야간자율학습과 학원 수업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청소년기후소송단 활동에 아무리 애정이 있어도 시험 기간에는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시험공부에 쏟게 된다. 학생들의 사회 참여를 장려하고, 참여권을 보장해야 할 공교육이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 때가 있다.

전 세계 청소년들이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School Strike for Climate)에 참가하기 위해 금요일마다 학교를 빠지고 거리로 나오고 있지만, 경쟁적인 한국의 교육 환경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청소년기후소송단 멤버들만 해도, 시위 참가를 결석 사유로 인정받지 못해서 담임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허락을 구하거나 가족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현장체험학습서를 내야 했던 경험이 흔하다.

기후 변화는 모두의 문제다


우리가 청소년기후소송단에 함께하게 된 개인적인 계기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를 가로지르는 정서는 절박함이었다.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가 너무나 분명함에도 안일한 태도로 한참 뒤떨어진 대책을 고수하는 우리나라에 충격 받았고, 변화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각자의 목소리를 사회에 알릴 창구가 없었다. 기존 환경 단체들 대부분의 활동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아무리 그 문제에 관심이 있더라도 청소년이 거기에 선뜻 끼기에는 쉽지 않다. 이는 청소년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청소년기후소송단이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우리 모두의 삶에 갈수록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기에 기후 변화에 대응함으로써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구여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처럼 들리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이 기본적인 권리조차 부정당한다.

청소년기후소송단은 '청소년인데도'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라서' 활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로 인해 이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때까지, 우리는 계속 행동할 작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를 증명해 왔고, 이런 청소년들의 사회적 행동이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료 시민으로서 의사 결정에 함께할 권리를 보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너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다.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지쳐간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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