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인동초" 김대중을 만나다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김대중
노회찬, "인동초" 김대중을 만나다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2009년 8월 18일 오후 방송과 언론에 속보, 뉴스특보가 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향년 85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 35분께 심박동이 정지했다가 40분께 다시 돌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관련 뉴스


서거 소식을 알리는 기사의 제목을 보면, '한국 민주화의 상징'(오마이뉴스), '시대의 거목'(뷰스앤뉴스), '민주와 평화의 상징'(이뉴스투데이), '위대한 지도자'(뉴스한국), '햇볕정책·평화 전도사'(이데일리), '한국 정치계 큰 별'(노컷뉴스), '암살 ·사형선고 이겨낸 진정한 지도자'(아주경제)이라는 표현과 함께, '인동초'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끝내 쓰러진 인동초'(디지털데일리), '이 땅에 민주화 꽃피운 인동초'(헤럴드POP), '민주주의와 인권에 앞장선 인동초'(베타뉴스), '忍冬草 85년'(한국경제) 등.

8월 18일 당일 노회찬(진보신당 당대표)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추모사를 발표한다. 그리고 김대중의 서거 소식에 지레 겁을 먹은 이명박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 서울 시청광장과 청계광장을 봉쇄하고 나서자,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소식에 경찰이 12개 중대 800여 명의 병력을 풀어 서울시청광장과 청계광장을 봉쇄했군요.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민심이 두려우면 차라리 이 나라를 떠나십시오."
이틀 뒤인 8월 20일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신당 대표단은 국회광장에 마련된 공식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 분향 및 헌화를 한다.


▲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진보신당 이성화(사무총장) 이덕우(전 공동대표) 이용길(부대표) 조승수(원내대표) 노회찬(당대표)


숫자와 기록으로 본 '인동초' 김대중(DJ)의 정치역정


1987년 9월. 12월의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대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혹독했던 정치의 겨울 동안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한 덩굴풀 인동초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동트는 민주와 민중의 새벽을 앞장서 열어 갈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에게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이 뒤따라 다닌다.
"인동초." 김대중의 생애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엷은 잎 몇 개로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운다는 인동초. 별명대로 그의 일생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숱한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인간승리의 신화를 일궜다(「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 중앙일보, 2009년 8월 19일).
역대 독재정권 아래 가택연금을 당한 것이 6년 반, 여기에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5년 반, 국외로 쫓겨난 것도 3차례에 모두 3년이었다. 최소 15년 동안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며, 심지어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김대중 사이버기념관). 잇따른 낙선, 납치, 투옥, 그리고 죽음의 위협 등을 이겨내고 인고의 꽃을 피운 김대중의 삶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결국은 꽃을 피우는 인동초에 비유하게 된 것이다.

평생 열네 번의 선거에 출마해 일곱 번 당선 : 국회의원 선거는 10번 나와 6번 당선
1924년 1월 6일(호적상으로는 1926년 1월 6일) 김대중은 목포에서 뱃길로 34㎞ 떨어진 작은 섬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호인 후광(後廣)은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김대중은 부산 영도에 '흥국해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이후 3년 간 운영한다. 이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첫 등장한다. '흥국해운주식회사 사장 김대중씨가 부산 부평동시장에서 수표책을 분실한 것을 차재상이라는 사람이 습득, 시계, 양복, 금반지 및 백미 7가마 등 당시 시가 약 7백만원어치를 매입 착복'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1953.4.24.)에 실린 것이다.


▲ 동아일보 1953년 4월 24일자

사업 성공 등 승승장구하던 김대중에게 1954년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이후 10번 나와 6번 당선한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전남 2'와 '전남 3'은 현재의 전남 목포시 일대를, '강원 15'는 현재의 강원 인제군 일대를 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결과


1954년 3대 총선에서 목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5위로 낙선한다. 1958년 4대 총선의 경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후보가 중복추천을 통해 등록무효를 시켜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 1959년 재보선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후보가 제기한 색깔론에 의해 낙선한다. 당시 이른바 「아이롱.투표용지」가 출현해 말썽을 빚기도 한다. 즉 투표소에서 발부된 투표용지에 민주당 입후보자 김대중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투표용지가 배부되어 일부 투표소에서 말썽이 일어난 것이다(동아일보 1959년 6월 5일).
세 차례 실패 끝에 김대중은 1961년 5월 13일 실시된 5개 구의 민의원 보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된다. 하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벌어지는 바람에 의사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당선통보 후 실제임기는 약 12시간에 불과했다.


▲ 경향신문 1961년 5월 14일

1967년 7대 총선에 당선한 재선 국회의원 김대중은 5월 15일 국회 연설집 <분노의 메아리>(숭문각)를 출간한다. 동아일보는 "보라! 이것이 6대 국회 최대웅변가요, 이론가요, 투사로서 내일이 촉망되는 김대중 의원의 문제발언들이다!"라고 광고한다.





▲ <분노의 메아리> 책 표지 및 동아일보 1967년 5월 16일자 광고


1971년(4선)의 경우는 1972년 10월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당함으로써 자격이 박탈된다. 1992년(6선)의 경우 1992년 12월 19일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 국회의원을 사퇴한다. 1996년 15대 총선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의 경우 13번까지 당선, 전국구 14번인 김대중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다. 전국구 9번인 권노갑의 경우 1997년 12월 26일 뇌물수수로 의원직을 상실하는데, 의원직 승계 전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권노갑 의원직은 전국구 15번인 송현섭이 승계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 4번 출마 끝에 당선
10번 나와 6번 당선된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해 김대중은 평생 열네 번의 선거에 출마해 일곱 번 당선한다. 순탄치 않은 역정이었다. 다섯 차례의 대선에 출마해 모두 당선한 박정희나, 열두 차례의 선거에 출마해 열 번 당선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중앙일보, 2009년 8월 19일).

▲ 김대중 대통령선거 포스터 (왼쪽부터1987년 대선, 1992년 대선, 1997년 대선)

김대중의 대선 출마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김대중 전 대통령 대선 출마 결과


▲ 동아일보(1970.9.29.)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 7대 대선 후보를 뽑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막판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한다. 총재 유진산의 실질적인 지명을 받아 낙승을 자신하던 김영삼(YS)을 제치고 대의원들에 의해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이후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과 정치 인생 내내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대선 유세 (“여러분!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550만 서울 시민 여러분! 7월 1일에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불사조' 김대중
94만 표 차로 분패한 1971년 7대 대선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것은 김대중에겐 혹독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 등장 전후부터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의 기간은 김대중의 정치인생 중 최대의 암흑기이자 형극의 세월이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모두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투옥됐으며 10년간 55차례, 183일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기 DJ와 함께 등장하곤 하는 명칭이 '남산'과 '동교동'이었다. <남산의 부장들 1, 2> 저자인 김충식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김충식, 「끝내 제 몸마저 불태운 '主君정치'의 한계-'동교동' 영욕의 30년」, <신동아>, 2003년 1월호, 520호)

▲ (왼쪽) 1971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 (오른쪽) 1971년 8대 총선 지원유세 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깁스를 한 채 상경하여 유세를 하는 김대중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은 때때로 "나는 다섯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곤 했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체포돼 목포형무소에 갇혔는데, 총살직전에 기적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다.
두 번째는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 이어 5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 비례대표 2번으로 등록하고 전국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은 월11일부터 선거 전날인 5월 24일까지 무려 5300여㎞를 달리며 100곳이 넘는 지역을 찾아가 신민당 후보지원 연설을 한다. 5월 24일 후보지원 유세를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달린 광주-목포간 도로 무안지점에서 느닷없이 돌진한 14t짜리 대형트럭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한다.


당시 사고 처리 과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고 지점에서 10분 거리에 무안경찰서가 있는데도 경찰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이 하마터면 죽을 뻔한 대형 사고를 당했는데도 언론 보도는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전부였다. 중앙정보부가 보도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검사가 문제의 운전사를 살인혐의로 조사하자 즉시 다른 검사로 교체됐다. 교체된 검사는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고 끝냈다. 세 사람이나 죽었는데 운전사는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1973년 8월 8일 중앙정보부에 의한 일본 동경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돼 있다. 일본 NHK가 구성한 김대중 자서전에 따르면 일본의 그랜드팔레스호텔 복도에서 김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요원들에게 납치돼 처음에는 호텔방 욕실에서 토막살인될 뻔했다. 그들은 여의치 않자 김 전 대통령을 배로 옮겨 손발을 묶고 현해탄 한가운데에서 수장하려 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명섭, 「쇳덩이 매단 바다 위의 김대중 "이렇게 죽는구나" 떨고 있는데…」, 한겨레, 2015년 9월 14일). 구사일생으로 김대중이 동교동으로 귀가한 것은 8월 13일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로 실종된 지 5일 9시간 만이었다.


▲ 동아일보 1973년 8월 9일


▲ (왼쪽) 1973년 8월8일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은 오사카항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에 실려 이틀간 바다에 떠 있는 동안 ‘수장’될 뻔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 (오른쪽) 김대중의 구사일생 생환기는 동교동으로 몰려든 국내외 기자들에 의해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이 손목 발목 등 온몸의 생생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다섯 번째 고비는 1980년 7월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한 사형선고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하루 전날인 5월 17일 김대중은 정권전복을 꾀한 주목자로 지명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간다. 이어 군법회의와 대법원에서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국내외의 구명운동과 미국의 개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 1980년 11월 3일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사형 확정

이처럼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대중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는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대 의회활동 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1983년에는 국내에 있던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구성하고 양 김씨가 공동의장를 맡는다. 마침내 1985년 2월 8일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전두환 정권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2년여만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 1995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돼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어졌고,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를 선고받는다.)

1964년 5시간 19분 동안의 필리버스터
명연설가로서 김대중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4년 4월 6대 국회에서 김대중은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발언하는,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인 필리버스터(법적 표현은 무제한 토론)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는다. 이때 기록한 5시간 19분은 당시까지 최장시간 국회 연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다. 공화당은 170석 중 110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표결로는 동의안 처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결국 국회의 구속동의안은 부결된다. 당시 '동아방송'은 국회 단상 밑에 신문지로 감싸 숨겨둔 마이크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육성을 세상에 전달(김유리, 「김대중 5시간19분 필리버스터는 어떻게 끝났을까-의장이 일방적으로 본회의 불법 폐회… 최장 기록은 박한상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10시간」, <미디어오늘>, 2016년 2월 23일), 김대중은 단연 화제의 인물로 부상한다.

▲ 동아일보 1964년 4월 21일

국회 연설 세계최장기록은 1957년 미국의 스트롬 서몬드 공화당 상원의원이 민권법 통과를 막으려고 시도한 24시간 18분 동안의 연설이다. 한국에서는 1969년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에서 10시간 15분 동안 연설한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의정사상 최장기록 보유자로 되어 있다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로 더불어민주당의 은수미 의원(2월 24일)이 10시간 18분을, 이종걸 의원(3월 2일)이 12시간 31분의 최장 발언시간을 기록한다. 필리버스터 9일째까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소속 37명의 의원과 무소속 의원 1명 등 총 38명이 연단에 섰고, 누적 발언시간은 총 192시간 27분(8일 0시간 27분)으로 세계 최장기록이다.

1945년 해방 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었고 회담 결과로 마지막날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된다. 미국의 AP통신은 2000년 12월 25일 '2000년 세계 10대 뉴스'를 발표하였는데 이 남북정상회담은 5위를 차지한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남북공동선언문에 합의한 후 기념촬영 (사진: 김대중 평화센터)

2000년 10월 13일 오전 11시 노르웨이 노벨 평화상위원회는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발표한다.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金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된다"고 선정 이유를 밝힌다. 그는 또 "金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통해 전쟁과 적대로 50년간 이어졌던 남북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이제 한국에서도 냉전이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이 싹텄다"고 평가한다.
이날 청와대에서 수상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의 성원 덕분이다.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한다.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러한 노력을 성원해 준 세계의 민주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1987년부터 14번 연속 후보에 오른 김대중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아시아에선 일곱 번째 평화상 수상이며, 1996년 동티모르의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공동 수상해 수상자로선 여덟 번째다.

김대중과 노회찬, 월간 <다리>를 통한 두 사람의 만남

노회찬과 김대중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을 살펴봐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유추해보건대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대중이 어떤 인물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노회찬은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안재성, 「약전: 멈추지 않을 진보정치의 꿈, 노회찬」,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150-151쪽)고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고등학생 시절 노회찬은 백기완 선생의 흥사단 강연을 듣고, 판매금지 당한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선생을 댁으로 찾아뵙고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창간 이후 폐간, 복간, 휴간하다 끝내 없어진 월간잡지 <다리>를 통해 '김지하'를 알게 되었고,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그리고 '박현채'와 같은 진보학자들의 논문도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다리>라는 잡지에 다 있었다. 김대중 관련 글과 기사도 물론 있었다. 노회찬이 소장하고 있던, (가칭)'노회찬의 서재'에 있는 월간 <다리> 가운데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몇 개 고르면 이렇다.
- 강인섭의 「7대 국회의원들의 저서 붐」에서 김대중의 <내가 걷는 70년대> 책 소개 (1971년 1월호)
- 김대중의 <내가 걷는 70년대>(범우사) 책 광고(1971년 3월호, 4월호; 1972년 4월호)
- 김대중, 「정보정치는 항쟁을 낳는다」 (1971년 12월호)
-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악이다: 김대중 의원과 김동길 교수 대담」) (1972년 9월호)

당시 월간 <다리>는 <사상계>가 폐간된 직후인 1970년 9월 창간되었으며 월 2만 부가 나갈 정도로 인기있는 잡지였다. <다리>의 실질적 사주는 김상현으로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였다. 편집인 겸 주간인 윤형두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용 간행물을 제작하고 있던 범우사 사장이었으며, 발행인 윤재식은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였다.
김상현과의 첫 만남에 대한 노회찬의 기억은 이러했다. "궁금한 점이 많아서 책을 훑어보니 '김상현'이라는 이름이 있어 전화했더니 오라고 했다. 광화문 당주동 월간 <다리>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김상현 씨가 나를 보고 고등학생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고, 그다음에 찾아오라고 했다. 크게 실망했다. 이후 김상현 씨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내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을 못하더라" (「<'自由人' 인터뷰>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2011년 8월 18일)

청주교도소 수감 생활, 독서와 화단의 꽃 가꾸기


▲ 1981년 청주교도소 겨울, 수인번호 9번

1981년 1월 31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군교도소를 떠나 청주교도소로 이감된다. 기결수로 머리를 짧게 깎고 수인번호 9번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은 김대중은 0.96평 규모의 독방에서 생활한다. 면회는 월 1회, 운동은 1일 30분 허용된 가운데 김대중은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를 하며 짬짬이 운동시간에 화단의 꽃을 가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때로 나는 화단의 꽃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훗날 역시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식물에게도 말을 걸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더 오래 시들지 않고 자태 또한 예뻐진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가꾼 꽃들이 그랬다. 늦가을이 돼서도 다른 화단의 꽃보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오래 피어 있곤 했었다"며 청주교도소 생활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1982년 12월 23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김대중은 23개월 동안 청주교도소에 머문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김대중 사형선고'의 배경이 된 5.18광주민중항쟁은 노회찬에게 큰 충격을 던진다.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노회찬은 "노동자들의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을 준비하게 된다.


▲ 수인번호 336

한편 7년 동안의 수배 생활 끝에 1989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노회찬은 치안본부 홍제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수인번호: 272번) 이감된다. 그 뒤 안양교도소(수인번호: 5009번)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 뒤 1990년 늦가을부터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청주교도소 수인번호는 336번이다. 


당시 노회찬에 대해 사회학자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노회찬재단 모아냄, <그리운사람 노회찬>, 2019).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따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아,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는 자유를 위해 방문을 잠그는 구속을 자처한 것이니까요. 마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문을 잠그는 무문관 수행자들처럼. 자유란 그런 점에서 능력이라고, 능력만큼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무엇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김대중이 화단의 꽃을 가꾼 것처럼, 노회찬은 청주교도소에서 해바라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노회찬, 「해바라기처럼」, <신동아> 1994년 10월호 칼럼).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자그마한 화단에 해바라기 씨앗을 심은 것은 1991년 어느 봄날 청주에서였다. 지난 수개월 동안 벼르던 일을 해내서인지 꽃씨를 심은 그날은 물을 뿌린 흔적 밖에 없는 화단을 내다보기 위해 몇 번이나 철창가로 다가갔는지 모른다. … 하루하루 자라는 어린 싹을 보며 깊은 숲 속에서 심호흡을 하는 여유를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어린 해바라기가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엔 너무나 험난한 환경이었다. 비록 화단의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높은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후미진 곳인지라 변변한 나무나 화초가 심어져 있지도 않았다.
… 이듬해(1992년) 봄이 오자 보통 해바라기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의 씨앗을 화단에 다시 심었다. 그해 4월 청주에서 만기 출소한 나는 화단에 심은 해바라기의 뒷 소식을 듣지 못했다. 대신 몇 개의 씨앗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친지와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골집 앞마당에도 심었다. … 해바라기를 키우며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해바라기 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태양의 위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환한 대낮의 해바라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두워진 후에 해바라기 얼굴은 빛이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곳,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이면 해는 이미 중천을 향하고 있어도 해바라기의 얼굴은 그날 새벽 어둠을 뚫고 밝은 빛이 처음 새어 나오던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바라기가 보여준 것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광명천지를 향한 희구였던 것이다. … 진보정당운동은 권세를 쫓아 어둠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광명천지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해바라기 정치를 추구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보정당운동의 오늘은 청주교도소 화단의 해바라기처럼 불우한 조건에 놓여 있다. … 그러나 해바라기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해바라기는 어떤 땅에서도 다 잘 자란다. 그 자태는 숱한 잡종교배 끝에 만들어낸 화려한 꽃에 비할 수 없지만 그 열매는 어떤 화초보다도 크고 풍성하다. 무엇보다도 일관되게 광명천지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자세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비판적 지지'라는 진보정치의 족쇄


▲ 1987년 대통령선거 후보 포스터



김대중과 진보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 속에서 애증의 관계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김대중은 진보정치가 실체조차 없던 시절부터 일정하게 진보정치의 영역을 대변해 온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서슬 시퍼런 군사독재 시절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였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은 1987년 대선 이후 진보정치의 발목을 잡아온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기도 했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김 전 대통령이 앞장선 민주화가 6월 항쟁으로 꽃이 폈고, 이와 함께 진보정치도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 전 대통령이 진보정당이 서는 밑거름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레디앙>, 2009년 8월 20일)
"동전의 양면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그 자신이 진보정치인은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기초를 위해 싸워왔다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몫이다. 한 시대가 마감된 만큼, 이제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레디앙>, 2009년 8월 20일)이라고 말한다.

비판적 지지론은 한편으론 '최악을 막기 위한 연대'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자기 정치 정체성을 배반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비판적 지지가 공개적으로 몸을 드러낸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노회찬과 인민노련은 진보진영의 독자후보를 통해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꿈을 꾼다.
"인민노련은 공개적인 민중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1987년 백기완 선생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합법적 진보 정당을 만드는 노선을 채택했던 것이지죠." (정운영, <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81쪽)

1987년 13대 대선 당시 진보진영의 후보전술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이 그것이다. 그 차이가 표면화된 것은 10월 13일 재야의 대표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범국민적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 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민통련의 결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민통련의 발표로 인해, 후보 단일화 문제를 둘러싼 공방의 내용은 한층 축소되어 '두 김 씨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누가 좀 더 대통령에 적합한 사람인가',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밀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10월 18일 노회찬과 인민노련은 「10월 13일자 민통련의 김대중 지지선언은 명백한 정치적 과오이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 주요 내용은 "민통련이 군사파쇼세력의 재집권음모를 저지시키기 위해 부르조아 야당과 단결하고 민주진영의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데에만 몰두하여 민족민주운동과 대중의 자발적 진출을 결합시켜야 할 보다 주요한 임무를 잊거나 방기하고 있다"는 것, "김대중과 김영삼의 차이는 실로 사소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등 자유주의 부르조아당과 민족민주운동과의 차이는 근본적"이라는 것, "김대중의 상대적 진보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설사 그가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독자성, 그 독자성을 기초로 한 역량의 강화를 유보해 가면서까지 그를 지지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 등이었다.
11월에 들어서 인민노련은 「백기완 선생 대통령후보 청년 추대운동의 진로에 대한 인노련의 제안」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 당시 인민노련은 약칭으로 '인노련'으로 불렸는데, 양승조 등이 이끌던 과거의 '인노련'과 혼동을 주는 바람에 점차 '인민노련'으로 불리게 된다.)

결국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비판이 없는 무조건적 지지로, '후보 단일화'는 김영삼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으며, '독자적인 민중 후보 추대론' 역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의 자유주의 정파들을 반군부독재 투쟁으로 견인하는 데는 무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과 6공화국의 출범이었다.

1987년 대선 이후 진보진영 내의 합법정당 건설에 관한 논의는 주요 쟁점을 둘러싸고 상호 치열한 논쟁과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게 된다. 비판적 지지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재등장한다. 핵심은 "우리 시대의 진보는 DJ와 DJP를 지지하여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내는 데 역량을 총집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논리에 따르면 독자후보전술에 바탕한 정치세력화의 실천은 '이적 행위'에 다름 아니게 된다. 이것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대중 씨에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그건 여당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의 망국적이라는 그 지역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나,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 된 그 자체만으로 지역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수도권에 사는 호남 출신 사람들이 '나 전라도 출신이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끔 숨통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엄청난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하자―행여 진보진영도 독자후보를 내겠다고 발버둥치지 마라. 97년 대선은 진정한 그리고 건설적인 3김 청산의 절호의 기회이다. 왜 그렇게 성급한가? 왜 이 몇 달을 못 참는가? 진보진영은 공정선거를 이루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라." (강준만, 「'김대중 당선 불가론'의 허와 실」, <인물과 사상 2>, 1997, 244-245쪽).

손호철의 지적처럼, '진보정당'과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갈등의 정도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누구를 위한 비판적 지지인가?」, <이론과 실천>, 2002년 8월호, 195쪽).
"그렇다. '진보정당'과 '비판적 지지'라는 두 단어는 87년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해 온 모든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열띤 논쟁에 혈압을 올리게 하는가 하면, 피를 나눈 한 때의 동지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한 시대의 표상어들이다. 그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이 문제를 될 수 있으면 피해가려고 노력해 왔다."

비판적 지지론이 '민주대연합론', '진보정당 사표론' 등으로 바뀌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설명한다?(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2014, 비아북, 114-116쪽).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한 가지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한국사회가 독자적인 길을 주저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 그리고 한국의 경우 애초에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권 내부에도 적었다. 외부의 여러 부정적인 공세도 있었지만 진보정당운동 내부의 패착도 크다.
노동운동이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결단을 하지 못했던 것이 진보정당의 성장을 지체시켰다. 스스로 독자세력화해 정치력을 행사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노동운동세력이 관념적, 이상적으로 오랫동안 낡은 노선에 매몰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이 사민주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민주의는 개량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활동가와 간부가 꽤 있다. 그럼 노동자들의 인식을 사회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 전혀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대로 둔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민주의의 복지나 연대를 굉장히 등한시하고, 오히려 '우리 노조', '우리 회사'를 중시한다. 탈계급, 보수화를 용인하고 방치하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사민주의 국가들의 노동운동보다 더 보수화되고 있다. 이것이 대중성을 잃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노동세력이 정당운동 자체에 굉장히 냉소적이다. 정당운동은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의 출세를 위한 운동이라고 본다. 그래서 선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조합원들이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을 찍는 상황을 방치해버린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결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인 정치문제를 위해서는 단결을 하지 않는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분리된 토양 위에 이런 문제까지 겹치면서 완전 무장해제되어 있다."

노회찬, 제도적 대안으로서 '대통령 결선투표제'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제안

"결선투표제 도입을 통해 국민 과반 지지 대통령을 만들자"
노회찬은 특히 대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등장해온 비판적 지지론의 정치적 파장과 후유증을 해소하고 민주정치의 정상화와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서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을 제안한다. 노회찬은 대통령 결선투표제가 ①민주화 이후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의 후보단일화 협상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며, ②한국의 선거 및 정치과정의 정상화·활성화와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회찬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에 결선투표제 도입을 단순 가정한 결과를 <표>로 요약해 제시하면서 2012년 7월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다.

▲ 출처: 노회찬의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치권의 과제와 공직선거법 개정안」(노회찬·한국정치연구회.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입법공청회 자료집>, 2012.7.9, 24쪽)을 기초로 해서 재구성.

2016년 7월 4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결선투표제 도입을 통해 국민 과반 지지 대통령을 만들자", "국민의 지지가 국회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에 놓인 많은 과제가 있지만, 또 다시 개헌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자는 개헌 주장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의 의지가 정치권력에 정확히 반영되는 제도, 즉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권력구조가 지붕이라면, 선거제도는 기둥입니다. 그런데,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지붕만 바꾸는 것을 진정한 개헌이라고 우리는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제를 유지한다면 결선투표제를 통해 국민 과반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나와야 합니다. 또 어떤 권력구조이든 국민의 지지가 국회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돼야 합니다. 승자독식과 지역패권정치를 연명시켜온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이나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을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2016년 12월 29일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재차 대표 발의한다. 현행법의 대통령당선인의 결정방식인 상대다수투표제는 다수의 후보자 가운데 최고득표자를 뽑는 방식으로 지지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경우라도 당선될 수 있어 민주적 정당성의 결여와 이에 따른 정치적 안정성의 부재 등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개표결과 유효투표 과반을 넘긴 후보자가 없을 때 1위와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를 해 다수 득표자를 대통령 당선인으로 결정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헌법 개정 사항이 아니라 공직선거법 개정 사항임을 강조한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제도적 발판
1999년 8·15광복절 기념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 나라의 발전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지역당 구도를 벗어나 전국정당화를 위한 선거제도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한 바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자 집권당 총재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국회의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추진한다. 관련 보도를 살펴보면, '독일식'에서 '일본식', '일본식'에서 '유럽식'으로 춤을 추다가 결국은 자민련의 당리당략에 따라 '일본식'에 가까운 안이 최종안으로 결정된다(참여연대, <월간 참여사회>, 2001년 9월호).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에 큰 지각변동을 불러올 판결을 내린다.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이하 선거법)'에 따라 1인1표 투표에 의해 구성되던 비례대표 의석배분 조항이 위헌이라는 것이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한 한 표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분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직접선거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며, 지역구 선거에서 여러 정당과 무소속이 경쟁하고 있는 실정에서 정당에만 한정해 배분한 것은 '평등선거의 원칙'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헌재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뽑을 경우 정당명부에 투표하는 1인 2표제를 도입하거나 비례대표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 결정이 나오기까지 노회찬과 민주노동당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국회를 통과한 제도는 원했던 '독일식'이 아니라 '일본식'에 가까운 것으로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제도 개혁의 원천기술 보유자'로서 노회찬은 1인2표제, 결선투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연령 낮추기 등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로 상징되는 민주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거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선거제도야말로 진보정당이 제 역할을 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면서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제도적 발판(조현연,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꿈」,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007)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둔 2월 8일 노회찬은 '선대본일기'(난중일기)에 이렇게 쓴다. 선거제도를 포함해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다루는 국회 정개특위 활동시한을 하루 남기고 개혁의 실종을 질타한 것이다.

국회 정개특위에서 '개혁'이 실종된 지는 오래되었다. 정치관계법 개정전망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이제 정치제도 개혁은 민주노동당만의 외로운 외침이 되고 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영국식 돈 안 드는 선거제도' 도입이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부터 출발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실패했다. 개혁대상을 개혁주체로 삼았고 개혁주체들은 개혁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총선승리'이다. 자신과 자신의 당이 승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개혁'이다. … 지금 그들에게 '개혁'은 한나라당이 한 석이라도 덜 얻는 것이다. 골치 아픈 민주노동당이 한 석이라도 덜 얻는 것도 '개혁'이다. 시민단체들의 정치개혁 역시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이다. 총선과정에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해야 시민운동의 발언권도 강화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정치제도개혁안이 휴지조각이 되는 동안 물갈이로 낙천운동으로 달려가고 있다. 남은 것은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뿐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미약하고 노동운동은 바쁘다. … 자신의 성장이 곧 정치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정치개혁에는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힘과 힘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외롭더라도 민주노동당이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 내일로 국회 정개특위 활동시한이 마감된다.

2016년 20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노회찬의 노력은 계속된다.

어떤 권력구조이든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야 합니다. 승자독식과 지역 패권 정치를 연명시켜온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이나 콘크리트 슬래브 지붕으로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2016년 7월 4일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

"지지율 10%의 정당은 결정권 10%를, 51%의 정당은 51% 결정권을 가져야 대의기구인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협치와 선거제도 개혁」, <시사인> 인터뷰, 2017년 7월 11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국민의 사표를 방지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다양한 국민의 요구와 지향이 정치에도 정확히 반영되는 가장 선진적인 정치제도입니다. (2017년 2월 9일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회찬

1997년 김대중은 DJP연합과 내각제 개헌 합의를 통해 97년 대선을 승리로 이끈다. 단일화 합의문의 핵심내용은 이러했다. ①대통령 후보는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하고 집권 후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로 한다. ②차기정부의 관료구성 등은 동등하게 균분하고 양당 동수로 공동정부 협의기구를 구성한다. ③공동정부 출범과 함께 개헌추진위를 발족하고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개헌안을 발의, 99년 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 ④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하고 수상이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순수내각제로 한다. 독일식 불신임제를 채택한다. ⑤내각제 개헌 후 초대 대통령과 수상의 선택은 자민련이 우선권을 갖는다.

▲ (왼쪽) 1997년 11월 3일 DJP연합의 탄생 순간-후보단일화 합의문에 서명. 왼쪽부터 김용환, 김대중, 김종필, 한광옥 ▲ (중간) 15대 대선에서 DJP(또는 DJT)연합을 한 김종필, 김대중, 박태준(왼쪽부터). ▲ (오른쪽) 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15대 대통령 취임식 (출처: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인 1998년 2월 7일 서강대 다산관. 노회찬은 학술단체협의회가 <김대중 정권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 종합토론자로 참석한다. 토론회장은 '이상 열기'로 가득 찼다. 주최 쪽이 준비한 자료집은 토론회 시작 전에 모두 동났고, 5시간 가까운 토론 내내 자리를 뜨는 참석자도 드물었다. 전에 없던 풍경이다. 논쟁도 격렬했다. 노회찬(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은 "새 정권과 구제금융 시대, 나아가 21세기를 맞는 운동단체들의 방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평했다. 그의 말대로, 진보진영은 어둡고 깊은 고민의 터널 한 가운데 서 있다. 우리 사회 전체에 휘몰아치는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탓이다(한겨레, 1998년 2월 25일).

2001년 민주노동당은 5월부터 권영길 대표 등 지도부가 전국을 돌며 '민생살리기 대장정'에 나선다. 9월 22일부터 서울 명동 시국연설회에서 노회찬(서울시지부장)은 이렇게 대회사를 한다(<진보정치> 60호, 2001.9.28.~10.4).

국민의 정부 3년 6개월 동안 우리는 국민을 죽이는 정부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김대중정부는 이미 실패한 정부이며 김대중정부의 실패는 이승만정권 때부터 대물림된 50년간의 보수정치의 실패입니다. 따라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식으로는 절대 안 바뀝니다. 이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정치에 나서야 합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이재용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김대중 선장이 이끄는 배가 빵구가 나서 침몰 직전인데 구명보트를 달라는 노동자들에게 스티로폴만 던져줬습니다. 이제 물갈이가 아니라 보수정치판의 판갈이가 필요합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 함께 희망의 정치를 만들어가겠습니다."고 발언한다.

2002년 2월 6일 청와대 앞. 민주노동당은 각종 게이트에 청와대가 연루되어 있는 것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한다. 정현준-이용호-진승현-최규선-윤태식으로 이어지는 권력층의 '게이트'의 양산은 대통령의 아들들의 비리, 이른바 '3홍 게이트'로 김대중 정부 시절 일어난 각종 게이트의 대미를 장식한다.


▲ ‘서민들의 분노’로 박을 타 진짜 몸통 ‘청와대’를 꺼내는 퍼포먼스를 하는 노회찬, 박순보 민주노동당 부대표 (<진보정치> 75호. 2002.2.8.~2.14.)

2003년 7월 3일 민주노동당은 여의도 국회 앞 한양빌딩 4층으로 당사를 이전한다(2006년 12월 17일 문래동 종도빌딩으로 당사 다시 이전). 열린우리당이 영등포시장 공판장으로 옮겨가고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표체제 출범과 함께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사만 놓고 보면 민주노동당이 제일 버젓했던 상황에서, 노회찬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당사 쇼'를 한다"고 평가절하한다. 한양빌딩과 10년을 함께 한 한 시민은 "김대중 대통령도 이 건물에서 탄생했고, 민주노동당도 여기 와서 성공하지 않았냐"며 민주노동당이 명당자리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당의 미래를 낙관(<진보정치> 197호, 2004.10.25.~10.31)하기도 한다.


※ 한나라당의 '천막당사 쇼'는 2004년 6월 1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새 당사와 함께 문을 연 '초심의 공간'이란 이름의, 한나라당 '천막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천막기념관 앞에는 "한나라당은 84일의 고통과 반성의 시간을 잊지 않고… 이곳은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라는 거창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국민들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공간으로…"라는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다. (…) 

'기념사진을 찍으세요.' 이 말은 곳곳에 걸린 '고통과 눈물'과 '참회의 천막생활'을 기억하고 기념해야할 사람들을 한나라당이 아닌 일반인들로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념할 것'을 권하며 과거를 반성해야 할 의무와 자신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일반인들에게 안겨놓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이선민 기자, 「천막기념관서 사진 찍으라고?!-[기자수첩] 한나라당이 천막 당사에서 얻은 교훈은?」, <미디어오늘>, 2004년 6월 23일)


"대한민국은 법치국가?" : '검찰개혁'과 김대중과 노회찬


김대중,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
검사는 검찰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이며, 검찰은 검사들로 이루어진 국가조직이다. 법률은 사법정의의 실현을 위해 검사에게 범죄 수사와 기소, 재판과 형의 집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아울러 '공익의 대표자'로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고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검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공익의 대표자이자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할 수 있을까? 2005년 12월 총 750명의 네티즌이 참가한 <오마이뉴스>의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삼성 장학생'이라는 답변이 332건(35%)으로 1위를 차지했다. 또 '인권침해'라는 답변은 203건(22%), '상명하복(검사동일체)'은 151건(16%), '폭탄주'는 123건(13%)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대체로 높은 응답률을 보인 반면, '비리정치인'(85건, 9%)·'정의'(29건, 3%)·'강철중'(15건, 2%) 등 긍정적 이미지는 낮은 응답률을 보여 검찰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신을 실감케 했다. 네티즌들이 '검찰'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삼성 장학생'을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조사 당시 검찰이 '삼성X파일'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영향 때문이었다.
2011년 9월 27일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은 <검찰의 신뢰저하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다. 검찰 신뢰도에 대한 용역보고서가 공개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일반인(1000명)과 검찰 공무원(부장검사, 평검사, 일반직 1403명), 전문가 집단(20명)을 조사한 이 보고서는 법무부가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10년 3월 완성한 것이다. 보고서의 핵심은 "검찰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등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경향신문, 2011년 9월 29일).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까지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정부는 처음으로 검찰개혁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최고 사정기관은 중앙정보부였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보안사였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이들이 밀려난 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법절차를 통한 사정이 보편화됐고, 사법처리 대상을 선별할 수 있는 기소권을 법률로 보장받고 있는 검찰이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며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었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역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개탄스러웠다.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었다. 나라가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2>, 삼인출판사, 2010)

※ 대통령 퇴임 후 노무현도 비슷한 말을 남긴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을,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겨쳐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돌베개, 2010)



▲<김대중 자서전>과 노무현 전 대통령 평전인 <운명이다>


노회찬, 삼성X파일사건과 20대 국회 최초로 공수처 설치법 발의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장. 노회찬은 검찰수사를 촉구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한다. 당시 법무부장관이 '건국 이래 최대의 정, 경, 검, 언 유착사건'이라 말했음에도, 뇌물을 준 사람, 뇌물을 받은 사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은 대신, 이를 보도한 기자 두 사람(이상호 <문화방송> 기자와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과 노회찬이 황교안(중앙지검 2차장)이 진두지휘한 X파일 사건 수사팀에 의해 기소된다. 이로 인해 노회찬은 결국 2013년 2월 14일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다.

검찰개혁과 관련, 노회찬은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2012년 1월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박창규, 「노회찬의 정치의제와 법안, 무엇을 남겼나?」, 노회찬재단, <제2회 노회찬포럼>, 2019년 6월 11일).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100년 전의 과거사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조사하고 판정을 하는 게 세상살이의 도리다. 이른바 삼성X파일이라고 불리는 280여개의 테이프는 서울중앙지검에 임시 보관 중이다. 17대 국회가 법안만 제시하고 말았지만, 이 테이프를 공개하고 조사를 할지 말지는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에 속한다. … 20년이 넘는 민주화의 역사를 지나왔지만 거대권력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는 한국 사회의 여전한 고질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고위 공직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정치검찰에 맡길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수사할 검찰 밖의 독립적인 기구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는 사실도 재확인 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2016년 7월 21일 노회찬은 "지금이 검찰개혁 적기"라고 하면서, 20대 국회 최초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안(수사권, 기소권, 공소유지권을 갖는 공수처 설치)을 발의한다. 이어 8월 24일에는 검찰의 독립성·공정성 확보 및 '제2의 우병우' 탄생 방지 차원에서 검-청-검 회전문 인사 금지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노회찬은 검찰개혁 정책보고서 용역을 의뢰하는 등 다양한 검찰개혁 방안을 모색한다. 핵심과제는 '정치검찰에 의한 수사권, 기소권 오·남용의 근절', '검찰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맞춰져 있었다.
노회찬은 공수처법을 발의하며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일을 해야 할 검찰이 그 내부에서 '부정부패 범죄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광경을 국민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하였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한 심정이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특검법'및 '특별감찰관법'은 사상초유의 검찰비리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지난 10여 년간 무성한 논의만 한 채 결론내리지 못했던 공수처법 제정안을 20대 국회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자"고 강조한다. 하지만 2018년 말 법제사법위원회의 공수처 설치법 논의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의 강한 반발과 이후 국회 파행으로 좌절되고 만다. 공수처 등 검찰 개혁 법안들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17대 대선, '제7공화국 건설운동'과 노회찬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심, '제7공화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당내 경선 레이스에 참가한다. 이에 대해 심상정 후보는 '서민의 요구를 헌법개정 틀로 형식화할 우려가 크다', '왜 한국 진보정당의 비전이 다음 8공화국에 의해 대체되어야 할 7공화국이어야 하는가', '당 강령을 재구성한 수준이다' 등의 비판을 제기한다.

노회찬은 당시 핵심 화두였던 신자유주의를 기준으로 6공화국과 7공화국을 구분한다. 즉 "7공화국 건설운동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6공화국 정권을 끝장내고,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반신자유주의 7공화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전제로, 비판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노회찬 대선예비후보, 「권영길, 심상정 후보의 '제7공화국' 비판에 대한 반론 - 진보적 상상으로 가득한 제7공화국 11테제」, <진보정치> 336호, 2007.8.20.~8.26).

7공화국이란 용어를 쓴 이유는 '단절의 정치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과거 정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권을 표현하는 단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노선에 근거한 6공화국, 신자유주의 체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사회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지는 7공화국, '단절의 정치언어'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슬로건이다.
'7공화국 11테제'에는 노회찬이 만들어갈 새세상에 대한 비전과 공약이 가득하며, 당강령에 기초해 2007년도에 걸맞는 진보적 상상을 담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 11테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9월 9일 민주노동당 1차 경선 결과, 권영길 후보 49.37%, 심상정 후보 26.08%, 노회찬 후보 24.53% 득표로 노회찬은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하고 낙선하고 만다. 경선 패배로 노회찬의 '7공화국 건설운동'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평등과 통일을 양대 가치로 하고 있는 '7공화국 11테제'는 반신자유주의 테제와 교육·의료·주택· 일자리 국가완전 보장 테제 외에, △통일테제 △탈동맹 평화테제 △차별철폐테제 △기간산업 사회화테제 △동일노동동일임금테제 △식량주권테제 △성평등테제 △녹색국가테제 △국민주권테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석준(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이 강렬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의 7공화국 비전 속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꽤 많다. 국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4대 기본권으로 교육, 의료, 주거, 일자리를 꼽은 점(교육공개념, 의료공개념, 주택공개념, 일자리공개념)이 특히 그렇다(「[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노회찬이 남긴 꿈, 제7공화국」, 한겨레, 2019년 7월 19일).


▲ 7월 17일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선포하고 있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와 ‘노회찬’을 연호하는 많은 지지자들


DJ 서거, 그 이후

"무엇보다도 제가 DJ를 높이 평가하는 건 '공부하는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서거 다음날인 2009년 8월 19일 트위터 네티즌과 가진 오프라인 번개모임에서 노회찬(진보신당 당대표)이 한 말이다. 양광모(휴먼네트워크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트위터 번개는 참석자들이 노회찬에게 궁금한 점들을 자유롭게 질문하고, 노회찬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김영국, 「노회찬 "DJ는 '공부하는 대통령', 해방 후 가장 앞선 정치인"」, <오마이뉴스>, 2009년 8월 20일).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한 번도 표를 던진 적이 없고,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도 많이 했었다."며 진보 정치인으로 정치노선이 달라서 불편했던 과거를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DJ는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인들을 놓고 보자면 가장 앞선 반열에 충분히 설 만큼의 큰 정치인이었고, 수십년에 한 번씩 나타날까 말까 한 정치인이다."고 평가한다. 특히 DJ에 대한 세간의 평가 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열정'과 '탁월한 언어구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대개 보면 평소에도 공부를 안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더 안 한다. 그래서 마음을 안 비우고 머리를 비운다거나, 어떤 분들은 공부한 사람들을 데려다 쓰면 되지 하는 일이 많다."고 기존 정치인의 세태를 꼬집기도 한다. 노회찬은 'DJ가 말을 잘한다'는 의미에 대해 "휘황찬란하게 얘기한다기보다는 필요한 얘기를 필요한 장소에서 정확하게 전달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언어구사 능력을 지녔다. 남이 써준 내용을 뜻도 모르고 읽는다든지 그런 게 없다."고 설명한다.
노회찬은 "진정한 정권 교체는 사실상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또 87년 이후에 민주주의가 진전이 되었다고는 하나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 급속한 민주주의 진전이 있었다."고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면서, 특히 "남북관계를 개선시킨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 어떤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못했을 일을 해낸 것이다. DJ의 오랜 경륜이 잘 반영된 곳이 바로 남북관계였다."고 말해 이 분야에서 DJ의 독보적 업적을 인정한다.

ⓒ김영국

한편 노회찬은 "해방 이후에 들어선 정부 중에서 가장 나은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였는데, 그 가장 나았던 정부 아래에서도 사회 양극화는 막지 못했고 더 심화되어 왔던 한계도 있었다."며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더 나은 정부가 들어섰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훨씬 십수년 전으로 후퇴하는 정부가 들어서서 우리가 이 고생이다."며 이명박 정부를 겨냥하기도 한다.
노회찬은 "이전 정부보다 조금 더 나은 정부가 들어서서 민주주의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고, 남북관계도 6.15 정신을 계승해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나았던 정부 하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서민의 민생문제까지도 일정한 진전을 이루는 정부를 우리는 반드시 세워야 된다."고 호소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룬 업적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역설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도식

1년 뒤인 2010년 8월 17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이렇게 쓴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식이 국립현충원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영정만 모셔졌을 뿐 꽃 한송이 향 한자루 없는 단촐한 식장이 추모의 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2013년 8월 18일 노회찬은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은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4주기 되는 날입니다.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 미국 등 열강의 견제 속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큰 정치인이 더욱 생각나는 나날입니다."라고 말한다.

2014년 7월 8일 7.30 재보궐 선거 동작을 출마 기자회견을 한 노회찬은 이틀 뒤인 7월 10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다.


ⓒ노회찬재단


2015년 8월 1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6주기를 맞아 '평화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를 주제로 추모 토크쇼가 열린다. 토크쇼 참석자들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통일 대박론'을 천명했던 박근혜 대통령 정부 아래서 남북관계는 오히려 대결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노회찬은 남북관계 악화의 근본 원인으로 새누리당이 늘 남북관계에 앞서 국내정치에서의 이해타산을 따지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어 "과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의) 남북관계 개선노력에 대해 '퍼주기 했다'고 폄하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도모했던 것처럼, 지금도 '어떻게 하면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느냐'의 판단기준보다는 '어떻게 하면 국내 정치에서 지지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하는 판단의 결과로 늘 강경대응이 채택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 왼쪽부터 황방열(사회, <오마이뉴스> 기자), 박지원(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노회찬(전 정의당 국회의원), 문정인(연세대 정외과 교수)

민주주의 위기를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 2부에서 특히 참석자들은 한국사회가 겪는 민주주의의 후퇴상황 속에서도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는 야권의 현실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노회찬은 "'정권교체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늘 4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렇다'고 답변하지만,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답변한 사람들에게 '야당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일부만 '그렇다'고 답변한다. 이는 정권교체는 필요하지만 지금의 야당으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선거에서의 야권연대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 차이가 있을 때는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는 것보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큰일에서는 힘을 합하는 '협력적 경쟁관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어 "새누리당의 의석을 단 한 석이라도 줄이기 위해 내년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기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기도 한다.


▲ 왼쪽부터 문정인(사회, 김대중도서관 관장), 홍익표(더불어민주당 의원), 정동영(국민의당 의원), 노회찬(정의당 의원)

2016년 6월 9일 오후 6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16주년 기념식이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김대중평화센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한반도평화포럼, 김대중기념사업회,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공동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한다. 기념식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린다. 총 4세션으로 진행되는 학술회의 2세션인 '20대 국회, 남북관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노회찬은 토론자로 참석, 현안 돌파를 2가지로 압축해 '개성공단, 북핵문제'에 대한 색채를 명확히 한다. 8월 18일에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뒤 참배한다.


2017년 10월 9일 정의당 20차 상무위 모두발언을 통해 노회찬은 MB국정원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추진 관련해, "이명박(MB) 정부의 국가정보원이 일부 보수단체를 앞세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단체 간부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평화상을 취소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MB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보수단체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하하는 논평을 내도록 사주한 정황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정원'이 아니라 국가에 엄청난 걱정을 안겨주는 '걱정원'이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두 달 뒤인 12월 7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다.

마무리: '(평양)냉면', '음식'과 '어머니'

2019년 1월 23일 서울시가 현재 진행중인 세운새정비촉진지구 정비 사업을 재검토하고 2019년 말까지 관련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힌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 일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오래된 가게(노포, 老鋪)인 을지면옥, 양미옥 등을 생활유산(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랜 시설, 업소, 기술, 이야기 등 유무형 자산)으로 보존하기로 한다. 살아계셨다면 김대중과 노회찬 두 분 모두 꽤나 반가워했으리라 본다. '양미옥'은 김대중이 들렀던 식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지면옥'은 노회찬이 '을밀대', '부원면옥' 등과 함께 자주 찾았던 평양냉면 집이다.
참고로 한겨레 이인우 기자의 <서울 백년 가게-골목 구석구석에 숨은 장안 최고의 가게 이야기>(꼼지락, 2019)는 서울에 존재하는 역사가 오래된 가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성공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울에서 백년을 한결같이 사랑받은 가게 24곳을 소개하고 있는데, 을밀대도 '하루 천 그릇이 팔리는 냉면집'으로 책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대중과 노회찬, 둘 다 '먹성'이 좋기로 소문난 분들이다.
대식가이면서, 동시에 미식가 성향도 가지고 있던 김대중은 김치찌개를 즐겨 '김치대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밤에는 야식으로 라면을 즐겼는데, 주치의 의견에 따라 라면을 자제하고 견과류 등으로 바꿨다고 한다. 청와대 주방장 출신의 조리명장 문문술은 냉면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이렇게 기억한다.
"대통령께서 워낙 한식을 좋아하셔서 해외순방 때 함께 동행할 때가 있었어요. 어느날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냉면을 찾으시는 겁니다. 냉면 육수라는 것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난감했죠. 어떻게든 만들어 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단 기내에 있던 스테이크를 삶았어요. 스테이크 삶은 물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육수를 만들었더니 기대보다는 괜찮은 육수가 완성되더군요. 기대하지도 않았던 냉면 상을 받은 대통령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한국경제매거진> 60호, 2010년 5월 1일).

▲ 일러스트: 김경래

"동네 뒷골목에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방랑식객이었고, 음식만들기도 잘한 용문객잔의 주방장"인 노회찬은 여러 음식 중에서도 특히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한그릇에 사리를 다섯 번이나 추가하는 바람에 지배인이 특별방문록을 들고올 정도였다. 을밀대는 그런 그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한 냉면집. 거리 집회로, 정당 살림살이로 목이 쉬고 땀에 절은 몸으로 노회찬을 따라나섰다가 이 을밀대에서 솔솔 풍기는 육수맛과 쫄깃한 냉면발에 휘감겨 잠시 시름을 덜은 이가 얼마나 많았을까. 겨자맛처럼 코끝이 찡해져 온다(이인우, 「음식天國 노회찬-<1>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창간호).


고교 동창으로 오랜 절친인 장석은 이렇게 말한다. "회찬이는 젊은 시절부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에 누구보다 익숙했지만, 음식이야말로 한 나라, 한 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이란 걸 잘 알았죠. 음악에서 음식까지, 노동현장에서 의회까지 그의 세계가 넓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이인우는 "노회찬이라는 사람의 인간미人間味 속에 음식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나, 주변의 지인들에게나 다같이 축복이었다."는 말을 덧붙인다(이인우, 「음식天國 노회찬-<1>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창간호).

"음식은 정이고 맥이라고 생각해요. 맥은 통할 수 있는 길이에요."
'한국 음식'이라는 방대한 소재를 27권의 책과 7년에 걸친 연재를 통해 풀어낸 <식객>의 허영만 화백이 한 말이다. <식객>은 일반적인 요리 만화라기보다는 우리 밥상의 맛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한국 음식 문화 인문학에 더욱 가깝다.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는 음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허영만은 '선생님은 생애 마지막 식사로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에, "나는 원래 함흥냉면만 먹고 평양냉면을 싫어했었어. 그런데 내가 요새 평양냉면에 빠졌어요.…마지막 식사로 뭘 먹겠냐고 물으면 평양냉면이야. 이렇게 입맛이 변해요." (「'식객' 허영만 화백: "내 생애 마지막 식사는 평양냉면"」, <미쉐린 가이드>, 2017년 5월 11일)

한편 어머니에 대해 허영만은 <식객 1>에서 '생명의 근원이고 영원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최초의 맛으로 기억한다.…남루하고 고단한 삶이어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함부로 좌절할 수 없듯 그 시절의 행복한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맛은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훌륭한 맛이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 쌀과 어머니는 닮아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고 영원한 그리움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다."고 말한다. (허영만, <식객 1>, 감영사, 2003, 77쪽)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김대중은 정리된 자서전 원고를 읽으며 직접 고치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로 구술해 반영하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출생에서 정치 입문까지'를 엮은 <김대중 자서전 1권>(삼인, 2010)에서 김대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다." (한겨레 2010년 7월 30일)

'본인에게 어머니란 어떤 의미입니까?'는 물음에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경향신문, 2011년 1월 17일).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존경의 대상이죠. 다만 제가 걷는 길은 밖에서 보기에 손해를 보는 길, 위험해 보이는 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도 처음에는 걱정하시며 만류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제 결심이 굳다는 걸 아시고는 격려해주셨죠. 정치적, 이념적 격려라기보다 '힘들더라도 옳다고 하면 그 길을 가라. 막지는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30일 단식농성(7.13.~8.11.)을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8일 노회찬(진보신당 상임고문)은 한 인터뷰에서 '노회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自由人' 인터뷰 8>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2011년 8월 30일)
'나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자유가 무의미하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선물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만큼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라 생각한다.

2018년 7월 27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국회장으로 엄수된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영결식 제단에는 그가 보물처럼 아꼈던 어머니의 손편지와 그에 대한 기사를 모은 스크랩북이 영정과 함께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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