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년…이제는 '가해자'의 길 걸으려나?"
[미얀마르포 3]버마 민중 '피 묻은 돈' 찾아나선 대우
"해방 60년…이제는 '가해자'의 길 걸으려나?"
최근 '대우 인터내셔널'이 동남아시아의 마지막 군사 독재국가인 미얀마 인근 해역에서 대량의 천연가스를 시추했다. 이를 계기로 미얀마 민주화운동 단체와 이들과 연대하는 국제 인권단체들은 시추한 천연가스를 운반하기 위한 수송관 건설 과정에서 군대에 의한 주민의 인권 유린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지난 6월 초 하버드 법대에서 JD(Juris Doctor) 학위 과정에 재학 중인 송지우(26)씨가 태국-미얀마 국경 근처로 미얀마 민주화 연대 활동을 위해 떠났다. 하버드 법대는 수년째 미얀마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고 이번 활동 역시 이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됐다.

이미 앞서 두 차례 현지 르포를 <프레시안>에 보냈던 송씨는 석 달간의 미얀마 현지 활동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글을 보내왔다. 이번 르포에서 그는 결국 '막대한 합의금'을 주민에게 주는 것으로 끝난 유노칼의 미얀마 천연가스 사업을 상기하면서 대우 인터내셔널 사업 역시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유노칼의 천연가스 사업 때문에 강제이주, 강제노동, 성폭력을 당하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미얀마 현지 주민의 삶은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우리가 겪었던 경험과 다르지 않다. 송씨는 이런 그들의 '현재의 불행'에 침묵하면서 '과거의 불행'에 대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되묻는다.

'5ㆍ18 광주항쟁' 25주년, 1987년 6월항쟁 18주년를 맞은 이 시점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국제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시안>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송씨의 글을 싣는다. 그는 이 글에서 군부독재가 개명한 '미얀마' 대신 민주화의 열망을 담아 민주화 세력이 널리 쓰는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또 취재에 응한 현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실명이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피했다. <편집자>

얼마 전 태국 신문에서 태국 국영석유회사가 대우 인터내셔널이 가스를 개발하고 있는 버마 서쪽 해안 A-1 광구의 지분을 사고 싶어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래가 성사되면 태국은 A-1 광구 가스의 일부를 버마와 태국을 잇는 '야다나-예타곤 가스 수송관'을 통해 이동시킬 것이란다.

야다나-예타곤 가스 수송관은 버마에서의 천연자원 개발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전 세계에 알린 건설사업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유노칼과 프랑스 토탈을 비롯한 몇몇 초국적기업은 버마 안다만 해안에서 가스를 개발해 버마 동부 카렌과 몬 족 지역을 지나 태국으로 가는 가스 수송관을 건설했다.

유노칼과 토탈의 가스 개발 소식이 알려지자 버마 민주화단체와 국제 인권ㆍ환경단체들은 '버마 군부와 거래하는 이상 심각한 인권ㆍ환경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기업들은 개발을 계속했고 우려했던 대로 인권침해와 환경파괴가 일어났다. '수송관 지역 보안과 안내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군대가 대거 진입하고, 수송관 기반 시설과 군 시설 짓기, 군용품 나르기 등의 강제노동과 함께 강간, 살인, 무분별한 벌목 등이 일어난 것이다.

***"땅을 뺏는다. 일을 시킨다.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다"**

지난 7월 말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난민촌을 방문했을 때, 가스 개발 지역에 친척이 있어 자주 갔다는 한 청년은 수송관이 들어서며 생긴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군인들이 땅을 뺏는다. 그러니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둘째, 군인들이 일을 시킨다. 그러니 원하는 직업을 구할 수 없다. 셋째, 일할 때 돈은커녕 음식이나 물도 주지 않고 사고가 나면 자기 돈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 땅을 가져갈 때도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난해진다."

만 스무 살 때 동생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는 이 청년은 "제3국으로 가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야다나 가스 개발이 군부와의 협력 아래 이처럼 인권 침해를 낳고 그 사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자 인권변호단체들은 기업들을 상대로 미국과 프랑스 법정에서 소송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유노칼을 상대로 진행된 소송의 카렌 족 원고들은 대부분 난민촌 청년이 말해준 '시나리오'대로 탄압을 겪다 못해 인근 국가의 난민촌으로 빠져 나온 이들이었다.

<사진 4_1, 2>

지난 7월 태국에서 만난 한 남성 원고인은 "한 달 후에도 이 마을에서 보이면 죽이겠다"는 군인들의 협박에 가벼운 짐만 챙겨 군대가 지정해 준 새 마을로 이사했다. 마을 주민들은 농민이었지만 새 마을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도로 부근 땅에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 마을에는 대신 군인들이 부대를 설치하고 마을에 살던 사람들에게 '포터링(portering; 군인의 짐을 들고 함께 이동하는 일)'을 시켰다. "그 때 13, 14살이었던 아들도 포터링을 해야 했다. 너무 자주 불려가서 농사는커녕 제대로 먹고 잘 시간도 없었다." '존 도우 XI'이라는 가명 아래 소송을 제기한 이 남성은 식량이 그야말로 '딱' 떨어졌을 때 마침내 도망치기로 했고, 지금까지도 버마 인근 국가들을 불법거주자 신분으로 돌아다니며 "한 해 한 해 살아내고 있다." ( '존 도우'나 '제인 도우'는 미국 법원이 안전 등의 신변 문제 때문에 개인정보를 밝힐 수 없는 원고에게 흔히 부여하는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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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칼은 '개발 지역에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해도 개발과 직접 관련됐다고 하기 어렵다', '인권침해는 기업이 아닌 군부가 저질렀기 때문에 기업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등의 논변을 제시하며 소송을 기각시키려 했으나 법원은 이 논변들을 거부했다. 미국 연방법원은 원고들이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고 판결하면서 판결문에 야다나 수송관을 둘러싸고 일어난 강제노동을 '현대판 노예제'라고 규정했다. 유노칼은 결국 올 봄 원고들과 지역발전을 위해 쓰일 거액을 합의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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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보듯 뻔한" 인권 침해와 환경 파괴… 대우라고 다르지 않을 것"**

버마와 국제단체들이 유노칼과 토탈의 야다나 사업에 특히 분노했던 이유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버마에서의 천연자원 개발 사업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를 수반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며 밝혀진 사실이지만 야다나-예타곤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은 개발 착수 전에 기업 자체 자문단을 고용해 사업 전망을 타진했고 그들로부터 '아마 강제노동 등의 인권침해가 일어날 것이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 뒤 미국 지방법원은 "유노칼은 버마 군부가 그들의 사업을 위해 인권 침해를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었고, 저지를 것이라는 점을 알았거나 알았어야만 했다"고 판결했다.

대우의 가스 개발 소식이 알려졌을 때 버마 현지와 국제단체들이 곧바로 우려를 표하기 시작한 것도 이처럼 '불 보듯 뻔한' 버마의 구조적 상황 때문이었다. 유노칼에 대한 국제 캠페인에 동참했던 한 미국 활동가에게 대우가 인권침해나 환경파괴를 피하며 가스를 개발할 가능성에 대해 묻자 답답한 듯 "잘해보라 (let them try)"고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그리고 버마의 정치적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우가 유노칼이나 토탈 등 다른 초국적기업과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활동가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 6월 총회에서 회원국들이 버마와의 관계—해외직접투자를 포함한—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 점을 상기시켰다.

버마 내에서 인권침해나 환경파괴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법에 호소하기 어렵다는 점 또한 문제다. 버마에는 헌법이 따로 없고 군부가 정하는 법률과 명령만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마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ILO 회원국인 버마에는 강제노동을 금하는 '명령 1/99'라는 법이 있지만, 올해 초 인권환경단체 '어스라이츠 인터내셔널(EarthRights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노동이 가장 심한 국경 부근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은 그런 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버마 헌법발전기획(Constitutional Development Project)이라는, 버마 소수민족과 외국인에게 버마법을 알리는 버마-프랑스 협력단체의 휴그 마르삭(프로그램연구 연구원)씨는 "버마 사람들은 자기 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사법부가 군부에 종속돼 있는데…"라고 반문한다.

더욱이 가스 개발 인근 지역인 아라칸과 친 주는 버마 내에서도 소수민족 문제가 심각한 곳이다. 아라칸 주에는 아라칸 족 외에도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자 족이 거주하는데, 이들은 시민권을 부여 받지 못한 채 이동과 거주를 제한 받고 종교적 탄압을 받아가며 살고 있다. (지난 7월 아라칸 주를 방문했을 때에도, 버스로 이동하는 중 신분증 검사가 잦아 걱정했더니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아라칸 족 남성이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무슬림'들이 아라칸 주를 빠져나가나 감시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강제노동과 결부돼 간접적으로도 제한되기도 한다. 예컨대 카렌 족의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지만, 군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사는 카렌인들은 교회를 가지 않으려 한다. 군인들이 교회로 들이닥쳐 신자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때문이다. 대우 가스개발의 수송관 경로로 거론되고 있는 친 주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있고, 이들 또한 불교 행사 준비에 강제로 동원되는 등의 탄압을 겪어야 한다.

대우의 가스 개발은 아직 탐사시추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버마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버마와 국제단체들은 '가스 개발을 더 지켜보는 것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미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인권 침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가령 이달 초 아라칸 언론단체 '나린자라 뉴스(Narinjara News)'는 아라칸 주에 군 부대가 진입해 대우 가스 수송관 경로로 거론되는 지역 주민에게 "올해 우기(8월)가 가기 전에 이사하라" 명령하고, 숲에 길을 내고 다리를 짓거나 도로 보수 공사를 하는 등의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사람도 강간과 강제징용을 겪지 않았는가?"**

얼마 전 한 버마 활동가가 "한국 사람들이 대우 가스 개발의 인권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 같으냐"고 물어 왔다. 그가 야다나 수송관 부근에서 강제노동 중 구타 당한 사람들의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예를 들어 이런 사진에 한국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한국 사람들도 일제 시대 때 정신대나 강제징용 같은 탄압을 겪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이 과거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고 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 활동가는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를 것 같다. 그 나라들은 가해자였던 경험밖에 없지만 한국은 피해자였으니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활동가의 희망 어린 말에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일본이 정신대 여성에 합당한 배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나 중등 교과서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강하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해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의 행보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어떠한가? 동남아에 진출한 중소기업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소수 인권단체와 언론매체를 제외하고는, 해외 한국기업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타지에 과감히 진출해 국부를 늘린다'는 정도가 아닌가. (가령 <서울신문>이 2005년 4월 14일자에 실은 '해외자원개발, 국익차원 체계적 지원 나서야'란 기사처럼 말이다.)

버마에서 천연가스 개발 사업을 벌이며, 한국 또한 '가해자'의 길을 걸으려 한다. 일본의 식민 만행과 초국적 기업의 버마 천연자원개발은 비록 그 정치·역사적 맥락은 달라도,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자국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을 범죄를 타국에서 저지르고 묵인한다는 점에서는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 과거에 대해 일본에 책임을 묻는 우리의 태도는 어느 정도나 당당할 수 있는가? 최근 일본 중등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보며, 60년 후 한국의 역사 교과서를 상상해 본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중ㆍ고등학생에게 "21세기 초 한국 기업은 버마 군부와 결탁, 버마에서 강제노동과 강간, 살인, 생태계 교란을 통해 이익을 창출했다"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박스 시작>

***인터뷰 : 유노칼 소송 원고 '제인 도우II' 가족**

지난 7월 말 버마 인근 국가에서 유노칼 소송 원고인들이었던 '제인 도우 II'와 남편 '존 도우 V', 그리고 그들의 종손녀인 '제인 도우 III'(이상 모두 가명)을 만났다.

야다나 수송관 지역에 살던 다른 민간인들이 그러했듯이 제인 도우 II 가족은 갑작스러운 군인의 명령에 따라 몇 세대 째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다. 새 마을로 이사 간 후 예전의 농경지로 갈 때마다 군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 있다 해도 농사 지을 시간이 없었다. 가스 수송관 건설을 준비하는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강제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인 도우 II에 따르면, "새로 온 마을에는 40가구 밖에 없었는데, 매일 열 사람 씩 군사 캠프 짓기나 철도 근처 길을 닦는 일을 하러 가야 했다. 한번 가면 1주일에서 열흘 씩 일하다 와야 했다. 그러니 가족마다 3, 4일에 한번 씩은 누군가를 보내야 했다."

이렇게 1년 정도 생활하다 보니 더 이상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게 됐고, 제인 도우 II 가족은 다른 원고들처럼 당장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국경 지역으로 도망쳤다. 기독교인인 제인 도우 Ⅱ는 그러나 국경 지역에서라도 성탄절을 기념하고 싶었다. '군인들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사람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제인 도우 II는 제인 도우 Ⅲ과 함께 "기르던 돼지 두 마리를 가져오려" 마을로 돌아갔다. "그저 내 돼지를 가지러 잠깐 돌아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했던 것이다.

돼지를 끌고 돌아오던 밤 두 여성은 밀림을 지나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군인들은 칼을 들이대며 제인 도우 Ⅲ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잠시 후 제인 도우 Ⅱ는 종손녀가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꼼짝 말고 있으라'는 군인들의 말이 두려워 종손녀를 찾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날 밤 군인들은 제인 도우 Ⅲ에게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그를 강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돼지 한 마리를 뺏은 후 두 여성을 돌려보냈다.

당시 17살이던 제인 도우 Ⅲ은 강간의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뜬금없이 웃거나 주변에 있는 동식물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제인 도우 Ⅱ가 "구하러 가지 못해 미안했다"며 그를 쳐다봤을 때에도 제인 도우 Ⅲ은 벽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만지작거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유노칼 소송의 원고 측 변호인단에 의하면 소송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제인 도우 Ⅲ의 증언을 '실성한 여자의 주절거림' 정도로 깍아 내리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간 사건을 둘러싼 제인 도우 Ⅲ의 기억은 "100번 물으면 100번 모두" 일관되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신빙성을 인정받았다. 이 날 인터뷰 중에도 제인 도우 Ⅲ은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는 질문에 잠시 차분해지며 순서대로 사건을 짚어갔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버마는 사회 규범이 보수적인 곳이다. 군인에게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인 도우 Ⅱ는 가족에게조차 간밤의 일을 말하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지역에는 국제난민단체와 야다나 개발을 조사하는 외국인들이 들어왔고 조금씩 제인 도우 Ⅲ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강간 사건이 일어난 지 수 년이 지나고 국제여론이 군부와 유노칼을 비판하고 있는 지금도, 두 여성은 "(강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한다.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짐작해 보면 조금 공감이 가리라.)

부인과 종손녀가 겪은 일을 듣고 존 도우 Ⅴ는 "너무 화가 났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제인 도우 Ⅱ 가족은 평화롭던 마을에 왜 갑자기 군인들이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강간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야 야다나 개발사업을 조사하는 외국인들로부터 '그 지역에 외국 기업들이 가스 수송관을 짓고 있고 그래서 군인들이 보안을 제공하러 들어간 것이다'고 들었다. 도대체 "왜 이 모든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알게 된 후 존 도우 V는 가족들과 함께 유노칼 소송에 원고인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 3>

그러나 유노칼 소송이 '역사적'이라고 불리는 초국적 기업의 합의금 제시로 종결되어 가고 있는 지금, 존 도우 V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야다나 수송관은 소송기간 중에 완성되어 버젓이 운영되고 있고 강제이주 당했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옛 터전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불법 거주자 신분으로라도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 버마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우울하다. "사람들이 계속 우리가 살던 곳에서 빠져나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수송관 지역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극소수 사람이 외국기업에 취직은 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또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며 수송관 근처 보초를 서야 한다. (태국-버마 국경 난민촌에서 만난 한 남성의 표현에 따르면, '군인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인 도우 Ⅱ의 가족은 무엇보다, 현 군부정권 아래서는 "완전한 정의를 받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유노칼 소송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야다나와 같은 사업과 그에 따라오는 '고통'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에 존 도우 V는 "만약 다른 외국 투자자들이 들어온다면 사람들 삶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만 생각하면 똑같은 고통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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