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 원 세대'가 우는 진짜 이유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9> '1000유로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88만 원 세대'가 우는 진짜 이유
한국의 민주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이번 대선은 우리 사회가 그 동안 겪어 온 '국가'와 '시장'의 실패의 구체적인 현상을 세심하게 되짚어 보는 장(場)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장에서 이전의 실패를 극복하는 처방이 좌와 우의 입장으로 나뉘어 제시되고, 각 처방의 실현을 활발히 모색하는 토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로 국민은 그 내용의 타당성을 포함해 각 입장의 담당자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역량을 판단하고 투표해 차기 정권의 주인을 선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한국 국민 모두가 보고 있듯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상황은 한 마디로 '영 아니다.' '이거 민주화가 꼭 앞으로만 진행되는 건 아닌가보다,' 이런 생각까지 든다.

모 보수 언론의 주필은 이번 대선을 '좌와 우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규정했지만, 우리가 보고 있듯이 이미 정책과 이성이 마비된 선거판이다. 여기에서는 좌와 우의 대립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좌우의 대립은 적어도 적극적이고 투명한 정책 대결이 이루어지는 링이 갖추어진 다음, 양측 선수 간의 선의의 경쟁이 보장될 때 이뤄진다.

지난 임기 동안 편 경제ㆍ사회 정책이 유권자를 사로잡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여론 조사의 고공 행진을 누려온 보수 야당의 후보는 지금 몸을 사리고 있다. 그는 마치 축구 경기에서 승리를 지키기 위해 막판에 뒤로 볼을 돌리듯이 선거에 임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사생결단으로 그 후보의 도덕성을 걸로 넘어지면서 종료 전까지 위험한 태클에 몰입을 하고 있다.

정말 재미없는 경기다. 두 팀 모두 축구팬을 잃기 딱 십상이다. 국민은 말끔한 대표팀 경기를 기대했지만, 정작 경기장에서는 수준 낮은 격투기가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그 자체로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이요, 위기라고 진단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삶의 불안' 외면한 대선 후보들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그 연장에 서 있는 대통합민주신당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행여 남은 약 열흘간의 시간 동안 구사일생으로 단일화에 성공해, 우여곡절 끝에 통합신당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치적 성공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여당 및 범여권의 정치적 고전은 비단 조ㆍ중ㆍ동의 편파적인 여론몰이에 '노망든 국민들'이 생각없이 현혹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들은 구체적으로 현 정부의 사회 정책과 분배 정책의 미흡함에 심각한 고통을 겪어 왔고, 그것을 대선의 장에서 표심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구체적인 데이터 분석이 이루어져야하겠지만,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진행된 엄청난 부의 이동(shift)과 집중(concentration) 현상은 소수의 웃는 자와 다수의 우는 자를 만들어 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절대 빈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엄청나게 확산된 상대적 빈곤감 역시 무시 못 하게 크다.

부동산이든, 신용불량자든, 주식 대박이든 주식 쪽박이든, 그런저런 정책의 터널 끝에서 결국 한국 자본주의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안착했는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사회적 안정성을 심하게 파괴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큰 손에게 더 큰 거금을 쥐어주면서 국민 대다수에게는 엄청난 '삶의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살펴봐도, 이번 대선은 좌우의 대결이 아니다. 현 정부가 지나친 좌파 경제 정책을 쓴 나머지 투자를 위축시키고, 지나친 사회적 평등에 치중을 하면서 경기를 후퇴시켜 그 결과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고 기업이 고임금에 시달리게 돼 사회적 활력이 상실됐나? 이런 전형적인 우파의 좌파 비판 담론과 우리 사회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오히려 이 정부는 파격적인 부의 이동 속에서, 시장의 패배로 절대적,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하는 국민의 마음을 적극적인 좌파 경제 정책을 통해 어루만지지 못 했다. 야박한 시장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사회가 그 상처를 보듬어준다고 하는 보상 심리를 느끼지 못 한 이들이 지금처럼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의 '88만 원 세대'는 유럽의 '1000유로 세대'와 질적으로 다른다. 88만 원 세대는 100만 원 상당의 임금 말고는 아무런 사회 안전망이 없다. ⓒ프레시안

'88만 원 세대'가 절망하는 진짜 이유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단어는 바로 '88만 원 세대'이다. 이 말을 유행시킨 저자는 한국의 88만원 세대를 유럽의 '1000유로 세대'에 비견하면서, 극도로 불안한 주변부 노동시장을 전전해야 하는 젊은 층의 상황을 지적하고, 그들로 하여금 세계화 시대에 심화되는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에 천착해, 과감한 체제 도전을 주문한 것으로 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이 말을 유행시킨 <88만 원 세대>를 읽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의 '1000유로 세대'와 한국의 '88만 원 세대' 간에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1000유로가 한화로 환산해서 약 128만 원쯤 된다고 계산하면, 그 차이는 비단 돈 40만 원 차이가 아니다.

독일에서 이를테면 파견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1000유로를 받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는 기본적인 실업, 의료, 퇴직 보험 등 한국에서 이른바 4대 보험이라고 이야기되는 보험 체계 안에 들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인생에서 집을 사는 일은 먼 일이겠지만, 그는 결코 집 장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주거 생활은 월임대가 보편화돼 있고, 주택 임대자는 함부로 쫓겨날 위험도 없고, 집값이 한 달세 2배가 되는 식의 투기 바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1000유로를 받으면서 예컨대 400유로를 집값으로 낸다면 600유로를 가지고 혼자서 한 달 생활하는 건 풍족하다.

만일 그가 여섯 살배기 아들과 네 살배기 딸이 있어서 이들을 유치원에 보낸다고 해도, 유치원 교육비로 내야 하는 돈은 매우 적다. 월 소득에 따라 유치원 교육비를 차등해서 받고, 대개 1200유로 미만의 소득자에게는 무상으로 유치원 교육이 제공된다. 그의 자녀들은 돈 한 푼 안내고 부잣집 아이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는다.

우리의 88만 원 세대는 비단 절대액에 있어서 그가 저임금 근로자라는 점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를 감싸는 사회적 안전망, 다시 말해 그로 하여금 사회적 시민권을 지닌 시민으로 당당히 사회 안에 통합되어 들어오도록 만드는 평등 구현 기제가 한국 사회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 88만 원을 받아도, 그가 집값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자녀 교육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실업, 의료, 퇴직 보험의 혜택을 모두 제공받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물가에서 한 달 생활 하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서민들을 좌절시키는 건 그들이 태어나서 현재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두터운 사회적 안전망과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 기제의 결여이지 단순히 그들의 소득이 적어서가 아니다.

차기 정부가 좌파를 표방하든 우파를 표방하든, 일단 우리의 헐벗은 88만 원 세대를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하는 보드라운 외투를 입고 있는 유럽의 1000유로 세대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과제야말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재구조화하는 핵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이 문제가 아무런 부각조차 안 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우려스럽고 또 불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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