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못 가져간다"
[인터뷰] <대한민국 독도> 펴낸 호사카 유지 교수
2010.10.15 18:37:00
"일본은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못 가져간다"
독도에 관한 한국인의 생각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독도는 우리 땅',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새삼 설명이나 근거, 논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도 당연한 한국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이 밉고, 이런 일본을 믿어주는 일부 선진국이 야속하다. 하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단 한 마디 주장만으로 세계 여론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지난 10여 년간 독도 문제를 연구해온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독도의 실효 지배에 만족하면서 세계를 향한 일본의 여론전을 방치한다면 지난 2008년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주권국가로 표기되어 온 '한국'을 '미지정'으로 일시적으로 바꿔 버린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또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지금부터라도 세계 여론을 향해 독도 문제에 관한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2009년 전작 <우리 역사 독도>에 이어서 최근 후속작 <대한민국 독도>(책문 펴냄)를 펴낸 호사카 교수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앞으로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논리와 근거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그는 일부 한국인이 일본의 독도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우려하는 데 대해 이 문제는 지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사실상 독도 문제의 해결 방법에서 제외됐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선전전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일본 도쿄대학교 공학부 출신으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알고 나서, 1988년 한국으로 유학 온 호사카 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난 2003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지금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일본학)로 재직하며 2009년 5월, 같은 학교에서 창립한 독도종합연구소에서 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1일 호사카 교수를 세종대학교 내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해 <우리 역사 독도>를 낸 데 이어 이번에는 <대한민국 독도>를 펴냈다. <우리 역사 독도>가 고대부터 19세기 초까지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일 간의 대응을 다룬 책이라면 이번 책 <대한민국 독도>는 19세기 초부터 현재까지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이번 책의 발간으로 독도 영유권 논쟁에 관한 역사를 총정리 한 셈인데, 우선 그간의 노력에 경의와 함께 축하를 드리고 싶다.

독도 연구는 언제 시작했으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호사카 : 독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단순한 이유이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때 한국에서 제일 '뜨거운 이슈'가 바로 독도 문제였다. 지금은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당시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일본인인) 선생님은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 것이네, 일본 것이네 하고 쉽게 대답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양쪽 자료와 주장을 모두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도에 대한 논문을 주로 쓰다가 독도에 관한 역사적 자료나 법적인 자료 등을 망라한 책을 정리해서 한 번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주장을 압도적으로 능가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10년 이상 독도 연구에 매달려 왔는데, 10년 공부의 결론은 무엇인가?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인가, 일본인가 한국인가?

호사카 : 독도는 의심할 바 없는 한국의 영토다. 이것이 10여년에 걸친 내 연구의 결론이다. 단,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주는 많은 역사적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프레시안 : 독도 문제에 관해서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면 우리가 불리하다'든가 '이미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독도 문제를 놓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는가', 또는 '독도 문제에 관한 논쟁에 뛰어드는 것은 일본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므로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예컨대 시마네현의 독도 병합 100주년 기념행사로 한국이 시끄러웠던 2005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내 옆에 있는 여자가 내 부인인 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굳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여자가 내 부인이요'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독도 영유권에 관해 적극적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실효 지배를 강화하는 편이 낫다는 취지였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이런 생각과 대응 방법에 동의하는가?

호사카 : 그렇지 않다. 한국 사람에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새삼 무슨 근거와 논쟁이 필요하겠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한국 사람만의 생각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치밀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설득시켜야만 한다. 세계 여론에 대한 홍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누가 앞서 있는가를 냉정하게 말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이 한국에 앞서 있다. 지난 2008년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주권을 '미지정'이라고 표기한 적도 있었지만, 영국과 독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일본 측의 논리가 훨씬 더 잘 먹혀들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지난해 한양대학교에서 유럽 각국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사 25명을 대상으로 독도 문제에 관한 2시간짜리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수많은 질문 공세 때문에 강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 질문의 대부분은 일본 측 논리에 따른 것이었고 이를 일일이 반박하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일본의 홍보전은 치밀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논리와 근거가 부실하거나 박약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일본 측의 주장에 적극 대응한다면 한국이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독도 영유권에 관한 역사적 사례들을 하나씩 짚어보았으면 한다. 먼저 일본 최초의 근대정부라고 할 수 있는 메이지정부에서 1877년 발표한 '태정관 지령문'에 관해서 알아보자. 이 태정관 지령문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한국 측에 매우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

호사카 : '태정관'은 메이지정부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쉽게 말하면 일본 내각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태정관이 1877년 동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 일도(外 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며,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문서로 정리했다. 그것이 '태정관 지령문'이다. (여기에서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외 일도는 독도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던 것이다.) 즉,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도 태정관이 독도를 '일본 영토 외'로 인정한 공식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태정관 지령문의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호사카 : 태정관은 1885년에 폐지되었지만 태정관이 발한 법령 등은 1889년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 등에 의해 법적 효력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이지헌법에는 위헌이 아닌 한 태정관이 내린 법령은 모두 유효하다는 취지의 명문 규정이 들어있다. 또 1946년 시행된 일본국헌법에는 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으나 메이지헌법에서 명령 사항으로 돼있던 것들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명령의 효력이 있다고 해석되고 있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06년 9월 <연합뉴스>와 나는 '태정관 지령문' 복사본을 일본 정부와 자민당, 민주당, 공명당, 사민당, 공산당 등에 보내면서 메이지정부가 '독도는 일본 영토 바깥에 있다'고 결정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공산당만이 호의적인 답을 보내왔다.

공산당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전제 하에 "다케시마가 일본에 편입되었던 1905년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내왔다. 자민당에서는 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자민당 측 담당자는 "그 문서는 독도가 일본 바깥에 있다고 했을 뿐, 조선 땅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 정부는 두 달 이상 회답을 미루다가 2006년 11월 초순 쯤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 중이며 현 시점에서는 답변할 수 없다'는 궁색한 답변을 보내왔다.

2009년 1월에는 일본 국회에서 아소 타로 당시 총리에게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이에 대해 아소 총리는 "이 문제는 영토 문제이므로 답변할 수 없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그만큼 '태정관 지령문'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현재 일본은 '태정관 지령문'이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이 문서의 자유 열람을 사실상 금지시키고 있다.

프레시안 :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에 독도를 편입시켰다. 일본은 당시 조선 정부가 이에 항의를 하지 않았으며 이는 시마네현 편입을 국제법상 묵인한 것이므로 이 조치가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호사카 : 일본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이름도 없고(無名) 주인도 없으며(無主地) 사람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규정하고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인근 오키섬의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1903년부터 독도로 이주해 2년간 강치잡이를 하면서 독도를 경영했기 때문에 '무주지 선점(先占)'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독도를 원래 울릉도의 일본 이름이었던 다케시마로 명명한 뒤에(당시까지 독도의 일본이름은 마츠시마였다) 시마네현에 편입한다고 결정했고, 2월 22일 편입 조치가 취해졌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태정관 지령문을 통해 알고 있으면서 마치 지도 상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섬인 양 무영, 무주지, 무인도라고 하면서 '무주지 선점' 원칙을 내세워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은 다음과 같이 반박해 왔다.

첫째, 대한제국이 1900년의 칙령 41호로 독도를 석도(石島)라는 이름으로 울도군(울릉도) 관할로 명기했으므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었다. 둘째,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로 이주한 게 아니라 1년에 두세 차례 2주 정도 머물렀을 뿐으로 이를 실효 지배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셋째, 1906년 3월 울도 군수 심흥택이 독도가 일본 땅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본 군(울도군) 소속 독도'라고 하면서 독도가 울릉도 소속임을 명백히 기록에 남겼다. 넷째, 독도는 카이로 선언에 언급된 것처럼 '탐욕과 폭력으로 약취된 땅'이므로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 다섯째, 1905년 당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 한국이 일본의 조치에 항의할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그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일본에 항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렇게 말한다.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하고 조약을 맺을 때 일본이 개입한다는 뜻이고, 한국이 일본하고 대화를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항상 일본과 대한제국은 대화할 수 있었다. 독도 문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항의할 시간이 적어도 4년간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한국은 절대 일본에 항의할 수 없었다. 고종은 일본에 직접 항의를 못했기 때문에 밀사와 밀서를 통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고발했다.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일본의 야욕을 우회적으로 규탄한 것이 그렇다. 일본이 아무리 대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못 했다는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논리적 깊이가 약하다. 그런 내용도 이번 책에 담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본이 주장하는 "1905년에 시마네현이 독도를 강제 편입한 부분에서 대한제국이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우리 것이다"라는 논리가 현재 국제 사회에 통용돼 있는 것인가?

호사카 : 현재까지는 그랬지만 세세하게 반박을 하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세세한 반박을 실제로 안 해왔다. 일본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논리적 대응 자체도 안이했다는 걸로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독도 영유권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라는 측면에서 일본과의 평화 조약인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은 한국에게 매우 불리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조약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점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더러 미국은 독도(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사카 : 맞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문제'라는 웹사이트에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라는 팸플릿을 올려 이 점을 크게 홍보하고 있다. 10가지 포인트 중 제7항을 보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기초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다케시마(독도)를 포함시키도록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고 해서 이 요구를 거부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비장의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이른바 '러스크 서한'이다. 이 문서는 1951년 8월 10일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가 한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암(岩)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無人)인 이 바위섬은 우리들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 지청의 관할에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독도가 일본 관할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로 미국이 일본과의 평화 조약 작성 과정에서 일본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 러스크 서한은 독도 문제의 진정한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이에 대해 명료한 반박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은 "독도가 역사적으로는 한국 것일지 몰라도 국제 조약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본 것이 맞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 확고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세계의 논리는 계속 일본 편으로 갈 것이다. 논리라는 것이 무서워서 무력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완벽히 극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더 이 책을 쓴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초안 작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연합국을 대표해 평화 조약 초안을 작성하는데 1차부터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시되었다. 하지만, 6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갑자기 정반대로 일본 영토로 기재됐다가 7차에서는 다른 연합국의 반발로 다시 한국 영토로, 8~9차에서는 다시 일본 영토가 되는 등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은 미국에게만 평화 조약 초안 작성을 맡길 수 없다고 하여 독자적인 영국 초안을 작성해 1951년 4월에 그 초안을 공개했는데 이 영국 초안에는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1년 6월 14일 '2차 영미 합동 초안'이 마련되는데 한국 영토 조항은 이것으로 최종 확정된다.

그 내용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權原),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으로 독도는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도가 한국 영토 초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영미 양국은 '너무 명료하게 해버리면 일본인에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이라고 연합국 회의에서 설명했다.

즉,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다는 말은 영국이나 미국 측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연합국은 압도적으로 독도는 한국 영토로 주장했고 미국만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의견이 세계의 대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줄곧 한국 영토로 인정받았던 독도가 대일 평화 조약 6차 초안부터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미국 정부의 일본 정치고문관이었던 '윌리엄 제이 시볼드'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지일파로 일본 여성과 결혼도 했다. 그 후 제이 시볼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기재되도록 미국 정부에 대해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일본 편에 선 제이 시볼드로 인해 독도 영유권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한편, 평화 조약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은 초안 작성 과정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초 한국 영토로 명기되었던 독도가 최종안에서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한국 정부는 당시 주미 한국 대사였던 양유찬 대사를 통해 1951년 7월 19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평화 조약 초안에 명시해 달라고 미국 국무성에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대사관에서 독도의 위치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 고문이었던 덜레스 대사가 "독도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위치를 물었을 때 한국 대사관의 서기관은 "울릉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애매하게 답했다.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은 다케시마가 독도의 일본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이나 연합국 입장에서는 독도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것도 알 길이 없었다. 한국 대사관의 서투른 조치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섬에 대해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평화 조약에 관한 연합국 극동위원회 회의가 열린 1951년 8월 7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덜레스 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지리학자뿐만 아니라 한국 대사관에서도 독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섬에 대한 한국 주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고려하기 어렵다"고 밝혔고, 사흘 뒤인 8월 10일 러스크 서한이 한국 정부에 전달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독도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반면,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취지의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이것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이 그토록 맹신하는 '러스크 서한'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이 서한의 내용은 미국 한 나라만의 의견으로 국제적 합의나 공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국들의 토론은 1951년 6월 1일자로 끝났고, 그 결과 '2차 영미 합동 초안'은 6월 14일 작성됐다. 독도를 한국 영토 조항에 포함시켜달라는 한국의 요구가 제기된 7월 19일 이후 연합국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는 흔적은 없다. 결국 '러스크 서한'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일 뿐, 연합국 모두가 합의한 사항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미국은 이 서한을 한국 정부에만 비밀리에 전달했다. 즉, 당시에는 국제 사회가 미국 정부의 이러한 입장을 알지도 못했으며,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예컨대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 순방한 밴 플리트 대사는 귀국 보고서에서 "이 섬(독도)에 대한 합중국의 입장은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직 공표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또 이보다 앞서 1953년 7월 22일 작성된 미국 국무부 문서(버매스터 각서)에는 "이 입장(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미국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전달된 적이 없다"면서 만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이 분쟁에 돌입했을 때 "합중국은 최대한 이 분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본이 미국 정부에 대해 중재를 요청할 경우 "이를 거절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결론적으로 '러스크 서한'은 독도가 일본 땅임을 다른 연합국과 합의한 문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 조약상 국제적으로 공인된 문서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한편, 당시 미국은 독도 문제가 영토 분쟁으로 비화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하지만 국내에서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경우 우리에게 매우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이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제안했으나 한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선전전을 펼치고 있는데….

호사카 :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는 방안은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에서 사실상 포기됐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기본 조약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양국 간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 해결 방법을 합의한 '분쟁 처리에 관한 교환 공문 의정서'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우선 독도라는 명칭이 도중에서 삭제되었을 뿐더러, 어떤 분쟁이 일어나도 양국 간의 외교 노력,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으로 해결하기로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중재에 의한 해결도 제안했으나 이는 한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재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분쟁 당사자가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조정은 분쟁 당사자의 재량에 달려 있으므로 구속력이 없는 것이다. 결국 조정이라는 해결책에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해결책이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분쟁 처리에 관한 교환 공문 의정서' 체결을 통해 일본은 사실상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독도 문제의 해결책에서 제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 내용은 이번 책 <대한민국 독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에서는 이 조약 체결로 독도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표적 신문인 <아사히신문>은 1965년 6월 22일자 '다케시마(독도) 문제, 마감에 쫓겨 양보'라는 부제 하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그만큼 제한 시간이 우선시되어 그것에 맞추기 위해 일본 측이 상당히 무리를 한 면이 많다. 다케시마(독도)는 그 예다. 일본 측은 그동안 '여러 현안 일괄 해결'이라는 기본적 입장에 서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주장했지만, 한국 측이 전면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3국 알선, 조정으로 태도를 바꿔 더욱 그것을 완화하여 '그 전 단계로 외교 교섭을 둔다'는 데까지 양보했다. (…) 이것으로는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실제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는 일본의 요구는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은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한국이 이길 수 있을까' 하고 불필요한 걱정을 하고 있다. 마치 일본 정부가 아직도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 후에 일본이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제안을 하면 한일 기본 조약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 학자나 시민들이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주장하고 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만일 한국 정부가 한일 기본 조약 체결 과정을 면밀히 분석했다면 국제사법재판소 행에 대한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프레시안 : 한일 기본 조약 체결로 일본이 사실상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독도 문제 해결을 포기했고, 나아가 독도 자체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호사카 : 1965년 한일 수교 이전까지 일본은 매년 '한국이 독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의 항의를 보냈으나 한일 기본 조약 체결 이후 몇 년간은 항의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야당의 공세에 밀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200해리 영해 시대가 시작돼 독도의 경제적 가치가 커지면서 다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프레시안 :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어떻게 풀려나갈 것으로 보는가?

호사카 : 외교통상부를 비롯해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공신력 있는 사이트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구체적 논거들을 계속 올려야 한다.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 현재 독도 문제에 관한 양국의 공식 인터넷 웹사이트를 비교해보면 일본 측의 근거와 논리가 한국 측에 비해 훨씬 치밀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은 자국에 불리한 사항 중 태정관 지령문과 시마네현 편입(일제 침략 행위) 등 2개항에 대해서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반면 한국은 '러스크 서한'이라든가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문제' '밴 플리트 귀국보고서' 등 무려 7개 항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외부인의 눈에 한국이 밀리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 측 논리보다 일본 측 논리를 받아들이는 세계인들이 훨씬 많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결국, 한국 측 논리가 일본 측 논리보다 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 주장이 확실히 국가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목표는 독도를 기점으로 하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 민주당 정부에서는 독도 문제가 크게 문제 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이 약하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 더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선다면 독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더 증폭될 수도 있다. 또, 민주당 정권 아래에서도 역시 독도 문제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비해 최소한의 문서 작업 등을 해나가야 한다. 논거를 정리하고 확보하는 것이다. 왜 이런 기초 작업들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감정적으로 대항한 측면이 있다. 전략적인 고려를 해야 할 때이다.

일부에서는 홍보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쪽의 무기를 그쪽에 보여주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다 내놓을 필요도 없지만, 일본 측 논리를 반박할 정도의 논리는 내야 한다. 세계 국가들은 자료를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우리만 독도가 우리 땅으로 알고 지켜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세계에 독도가 한국 것이라고 알아줘야 한다. 아주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보면 '독도는 일본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많은 나라들이 알고 있다.

프레시안 : 호사카 교수는 지금은 한국으로 귀화했지만 원래는 일본인이었다. 독도 연구와 같은 작업에 대해 일본에서 비판은 없는가?

호사카 : 내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일본 사이트에 넣어보면 비판 글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 안에서 또 평가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 논거가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적 접근을 해 나가야 한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호사카 : 지난해 <우리 역사 독도>와 올해 <대한민국 독도> 발간으로 독도에 대한 큰 이론(grand theory)은 일단 마무리됐다고 본다. 앞으로는 1998년 한일 신어업 협정 등 독도와 관련된 구체적 사항들을 더 면밀히 추적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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