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환자에게 손목쓰지 말라고? 밥해야 하는데?"
[제3의 대안, 의료생협·③] "사회적 편견을 깨는 여성주의 의료"
2011.04.01 09:46:00
"여성 환자에게 손목쓰지 말라고? 밥해야 하는데?"
돌이켜 보면 기자에게도 감기약 몇 알 삼키기가 버거운 어린 시절이 있었다. 성인용 알약이 너무 커서 쓰디쓴 약이 물에 녹아 작아질 때까지 몇 번이고 억지로 넘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성인약에 비해 어린이약 개발이 덜 활성화됐다는 이야기는 어른이 돼서야 들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의약품 연구는 주로 서구에서 이뤄져 왔지만, 백인에게 필요한 적정량과 동양인에게 필요한 적정량은 다르다고 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안전하다고 믿는 의약품은 임산부에게는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의약품 연구가 '특정 나이대에 속한 성인,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사례들이다.

의학이 '특정한 기준에 속한 사람들' 중심적으로만 이뤄지지 않도록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진료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살림의료생협 설립을 추진하는 유여원 씨를 만났다. <편집자>


[제3의 대안, 의료생협]

<1>"항생제를 10%만 쓰는 병원, 비결은?"
<2>'됐습니다. 다음 분'?…"우리 병원에선 상상도 못해요"
<3>"여성 환자에게 손목쓰지 말라고? 밥해야 하는데?"

사례 1. 산부인과나 항문외과에 가야 할 때, 자궁경부암이나 유방암 검진을 받아야 할 때 여성들은 여의사를 찾는다. 진료를 받기에도 덜 부담스럽고, 여의사는 왠지 자기 몸을 잘 이해해줄 것 같기 때문. 하지만 모든 여의사가 기대한 것처럼 만족할 만한 진료를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사례 2. 네 살 난 아이를 둔 A씨. 요즘 병원에서 항생제를 오남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항생제 처방은 어릴수록 신중해야 한다던데, 어린이에게 꼭 맞게 적정 진료를 하는 믿을 만한 병원 없을까.

여성주의적인 의료란?

서울 은평구에서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유여원 씨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여성주의 의료'에서 찾았다. 유 씨에 따르면 현대 의학은 과학이지만 '객관적'이지 않다. 남녀가 다 걸리는 질병에 대해서도 '건장한 성인 남성'의 신체나 삶을 중심으로 연구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의료의 철학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그 개인의 특성에 가장 맞는 진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어린이가 감당할 수 없는 특정한 약을 '어른 기준'에 맞춰 과다 투여해서는 안 된다. 노인, 여성, 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 씨는 여기에 덧붙여 "가난하거나 성정체성이 다르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료 과정에서 사회적 편견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응하는 것이 여성주의 의료"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의사는 환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약을 복용하는 동안 금연해야 한다는 정보를 안 줄 때가 있어요. 여성은 당연히 담배를 안 피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의료인 입장에서 당연히 주어져야 할 정보가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안 되죠. 성별이나 성정체성에 따른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도 있어요. 집 안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 환자에게 의사가 '손목 쓰지 마라니까 왜 손목 쓰셨어요?'라고 질타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은 집에서 밥해야 하는데, (의사가 그렇게 대응하면) 답이 없죠.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진료도 하고 돌봄도 이뤄졌으면 해요."


건강 공동체에 대한 구상이 여성주의 의료생협으로

여성주의적인 의료를 지향하는 살림의료생협은 처음에는 건강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운동을 했고, 여성단체인 언니네트워크에서 일했던 유여원 씨는 "여성주의자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러다 유 씨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적인 가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않되, 개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진공 상태에서 살지 않는 삶"에 대한 지향이 모였다. 이들은 그 실마리를 '건강 공동체'에서 찾았다. 아플 때 서로를 돌봐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기에 '여성주의 의사 모임'이 합류하면서 '건강 공동체'에 대한 구상은 '여성주의 병원'의 형태로 구체화했다.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여성주의자인 의사가 진료하고 여성주의자들이 환자로 오면 여성주의 병원인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의료생협을 알게 됐다. 유 씨는 "생협은 협동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측면에서 소유구조나 운영방식이 여성주의적이라고 느꼈다"며 "우리가 여성주의 병원을 만든다면 의료생협 형태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의료생협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조합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나의 욕구가 반영되는 병원'에 '내 건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의 주치의'가 생기는 셈이다.

2009년 여성주의 의료생협 준비모임이 시작됐다. 은평구에 사무실을 마련했고, 2년이 넘는 준비 끝에 조합원 140여 명을 모았다. 조합원의 절반은 은평구 주민이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거 조합원에 가입했다. 유 씨는 "우리는 은평이라는 지역과 여성주의 지역, 이렇게 두 가지 정체성이 공존하는 의료생협"이라고 말했다.

▲ '열린 회의'에 참여하는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조합원들. 이날 회의에서는 각자의 수면 습관을 체크하기도 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병원은 아플 때만 간다? 아프지 않기 위해 간다!"

의료생협 활동을 하다 보면 병원은 아플 때만 간다는 선입견이 깨진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이나 건강상담시스템을 도입해 일상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자는 취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합원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가 중요해진다. 의료생협에 유독 건강소모임이 많은 이유다. 살림의료생협에는 현재 밑반찬 만들기, 텃밭 가꾸기, 걷기, 춤, 등산 소모임 등이 있다.

"밑반찬 소모임이 기억에 남아요. 생협이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거든요. 생협은 다른 단체와는 달라요. 단체나 정당은 같은 정치성을 지향하거나 무엇이 옳다고 동의하기 위해 만드는 거지만, 생협은 조합원이 자기 삶에서 필요한 게 있는데 혼자 힘으로 해결이 안 되니 만들거든요.

건강도 마찬가지죠. 담배를 끊고 술도 줄이고 운동하는 건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이걸 하게끔 하는 건 의사가 아니고, 옆집 사는 친구죠. 친구가 '오늘 저녁에 나가서 나랑 자전거 좀 탈까'라고 권하고, 그 사람과 같이 나가야 운동하게 되죠. 건강하도록 지켜주는 사람은 나와 친한 사람입니다. 이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거죠. 조합원끼리 건강한 음식을 먹고, 담배를 끊고 같이 나가 걷는 게 제가 생각하는 건강한 모습이에요."

"나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병원"

그러다 보니 '공동체'에 대한 참여 경험이 생긴다. 생협은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유 씨는 "자신의 욕구가 받아들여지고 해결되는 경험이 이 사람이 보수적인 지향을 갖든 아니든 참여의 기쁨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준다"고 말했다.

▲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는 유여원 씨. ⓒ프레시안(김윤나영)
지역운동은 작지만 놀라운 변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장애우권인연구소에서 만든 노원구의 함께걸음의료생협이 그러한 경우다. 조합원과 이사 중에 장애인이 많다 보니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작은 운동회부터 큰 총회까지 생협이 장애인권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운동회에는 휠체어달리기 종목이 생겼고, 생협의 위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정해졌다.

"함께걸음의료생협을 만들 때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정된 돈으로) 면적은 좁을지언정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을 구했죠. 다른 비장애인 조합원들에게는 다른 욕구가 있는데,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변화시켜 나간 건 결국 장애인들이 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죠. 장애인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정말 멋진 운동이다 싶었습니다."

유 씨는 "함께걸음의료생협의 사례는 특정한 지향을 가지고 지역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며 "여성주의 지향을 가지고 의료생협을 만들어보겠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약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짜 좋은 공동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살림의료생협은 올해 하반기에 창립총회를 열고 2012년에 개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의사로는 가정의학과 2명, 치과 1명, 한의사 1명이 있다.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서울 및 경기에 거주하거나 직장이 있어야 한다. 조합비는 1구좌 1만원, 10구좌 이상의 출자를 권유하며 매달 조금씩 정기 출자도 가능하다. 비조합원도 50%까지 진료받을 수 있다. (☞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바로 가기)

여기에 한가지 더.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 남성도 환영이다.

지역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의 만남

은평구는 주민운동이 활발한 곳이다. 주민운동 사이에도 네트워크가 활발해서 새로운 운동이 뿌리내리기 좋은 여건이라고 한다. 18개 지역단체가 모여 은평지역사회네트워크(은지네)라는 단체를 꾸릴 정도다. 12일에는 조합원 67명이 모여 살림의료생협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유 씨는 "의료생협을 준비한다고 천명하는 자리인 발기인 대회에 이렇게 참여도가 높은 경우도 드물다"고 말했다. 지역의 지지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발기인 대회는 지역운동과 여성운동이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는 의미도 있었다.

지역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만나다 보니 의료생협의 이름을 가지고도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은평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과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두 후보에서 간발의 차이로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낙찰된 것이다.

유 씨는 "당시 분위기는 긴장감 있으면서도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따뜻했다"면서도 "(여성주의자와 지역활동가가) 서로 만나고 섞이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겠구나 싶었다"고 회고했다.

"지역활동가들은 낯선 사람이나 전에는 못 봤던 사람을 만났을 때 굉장히 유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비혼으로 지역운동을 한다면 흔치 않은 경우거든요. 대개는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서 내 아이가 좋은 먹을거리, 좋은 교육환경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역운동에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지역활동가들이 비혼인 저를) 넓은 품으로 받아 안았어요. 반대로 여성주의자들은 생태운동이나 빈민운동에도 잘 연대합니다. 감수성의 힘이죠."

유 씨는 "여성주의자들의 감수성과 지역활동가의 유연성이 만나면 진짜 멋진 공동체가 만들어지겠구나 싶었다"며 "협동조합운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여성주의 공동체나 여성주의 삶이 실제로 삶에서 구현되면 그게 아마 협동적인 삶일 겁니다. 협동조합 이론과 여성주의 이론은 닿아 있고 상생하는 운동이에요. 비난하고 요구하고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협동적인 방식으로 운동하는 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주는지 몰라요. 잘 안 지치죠. 제 운동이 바뀐다는 느낌이 아니라 확장된다는 느낌이에요.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 (협동조합이라는) 이 새로운 강줄기에서도 수혜를 입었구나 싶더라고요. 신나요. 너무너무 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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