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오 때의 '켈로부대'를 아십니까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1/13] 켈로부대 출신 이창건 박사
2006.01.14 10:42:00
육이오 때의 '켈로부대'를 아십니까
여러분, 한국전쟁 당시 맹활약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KLO부대, 이른바 "켈로부대"를 아십니까?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고 잊혀져 가고 있는 이름이지만, 켈로부대는 비정규 첩보조직으로서 연합군 전력의 적지 않은 부분을 담당했던 부대였습니다.

바로 그 켈로부대의 기획참모로 활약했던 이창건 전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이 자신의 경험담과 켈로부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한국전 비사를 책으로 내놓았는데요.

KLO,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우리나라 핵 공학 분야의 원로 중의 한 사람이며 현재 한국전력기술기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인 이창건 박사와 함께 합니다.

이창건 박사(75세)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원자력연구소 창설멤버로 34년간 원자력 연구소에 근무한 우리나라 핵공학 분야의 원로 중의 한 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KLO부대에 입대해 기획참모로 활약했던 이 박사는 최근 한국전쟁 당시 KLO 부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내놓아, 잊혀져 가고 있던 켈로 부대원들의 활약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이창건 박사는 현재 한국전력기술기준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박인규 : 이창건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이창건 박사 : 감사합니다. 불러주셔서.

박인규 : 제가 1980년대에 과학기자를 하면서 몇 번 뵌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원자력 분야의 원로 과학자라고만 기억했는데 켈로부대에 계셨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주변에서도 놀라신 분들이 많지 않던가요?

이창건 박사 : 이번에 책을 읽고서 "당신이 그런 사람이야", 그렇게 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50년이 넘었고, 어떻게 보면 늦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떻게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십니까?

이창건 박사 : 네. 저희 대원들이 국내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외국에 많이 갔는데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약 80명이 집단적으로 사는데 이 분들이 술만 먹으면 옛날얘기를 한대요. 그런데 옆에서 영화제작 기획사 사람이 그 얘기를 듣더니 옆으로 끌더니만 나와 계약을 하자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계약을 했답니다. 그 얘기를 저희 최규봉대장에게 보고해서 이건 누군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중간에 바빠서 못하다가 이번에 끝냈습니다.

박인규 : 그러면 시작하신지는 꽤 된 모양이죠?

이창건 박사 : 그때는 4년 전이죠.

박인규 : 그렇다면 영화제작사가 할리우드라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할리우드에서 켈로부대를 다룬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이네요?

이창건 박사 : 그렇죠.

박인규 : 우선, 잘 모르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켈로부대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KLO부대죠? 그래서 이 켈로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설명해주시죠?

이창건 박사 : 켈로라는 것은 첩보조직인데 우리가 삼국시리즈를 보면 관우도 나오고 장비도 나오는데 우리는 제갈공명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꾀를 가지고 적을 무너뜨리는 것, 또 징기스칸이 굉장히 용감했는데 그 뒤에 모든 정보수집과 분석 추천하는 사람이 아랍상인 드파로코자라는 분인데 그런 사람들의 일을 저희들이 한국전쟁 동안에 했죠.

박인규 : 켈로부대가 제가 알기로는 원래 1949년인가요?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연락처라는 이름으로, 말하자면 비정규군 조직이죠?

이창건 박사 : 그렇죠.

박인규 : 그래서 KLO인데 한국사람들은 통칭 켈로부대라고 해서, 저도 KLO가 정확한 말입니다만 알려진 켈로부대라고 하겠습니다. 이창건 박사님은 대학생이시다가 켈로부대에 말하자면 입대를 하신 건데 어떻게 해서 켈로부대에 들어가시게 됐습니까?

이창건 박사 : 6.25 때 저희들이 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먼저 철수했습니다. 도망가다가 노숙도 하고 굶기도 하다가 선배가 있어서 이런 곳에 와서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들의 머리만 가지면 할 수 있다, 그래서 근육이 아닌 머리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해서, 친구 세 명이 같이 응시해서 운 좋게 시험에 붙어서 그곳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기획참모라는 것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 겁니까?

이창건 박사 : 저희가 들어가 보니까 이미 저희들보다 나이가 많으신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 분들의 심부름을 했는데 학교를 공대출신으로 다니다가 왔다고 해서, 이를 테면 이런 얘기입니다. 저희들이 북한으로 대원들을 보내고 그 사람들이 소련 군사공간을 점령해요. 그러면 그 코 큰 사람을 육지로 끌고 내려올 수 없다고요. 그러면 산에 올라가서 끌어 내리는데 산 꼭대기에 나무를 다 잘라내고 양쪽에 두 개만 남겨두고 줄을 매서 거기에 이 소련 사람을 묶어 놓는다고요. 그러면 비행기가 와서 데리고 간다고요. 데리고 가면서 너무 충격을 많이 받으면 안되니까 충격 흡수장치를 공대출신들에게 만들어내라, 그러면 나는 만들 수 없으니까 선배와 스승에게 가서 설계를 해주십시오, 그것을 받아서 회사에게 주어서 여러 개를 만들어서 제일 좋은 것, 그리고 우리 훈련캠프에서 여러 번 실험해서 좋으면 그것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또 북한에 보내는 쾌속정 설계, 그건 조선과 교수를 찾아가서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이순신 장군은 밑이 평평한 평조선을 많이 만드셨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런 심부름을 많이 했죠.

박인규 : 지금 말씀하신 중에, 말하자면 소련의 고문관 같은 요원 납치 같은 것을 실제로 하신 겁니까?

이창건 박사 : 저는 안 했지만 갔다 온 대원들이 여기 책에도 그 소련 고문관을 납치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박인규 : 켈로부대의 활약상이 주로 정보수집과 적의 후방에 들어가서 공작 같은 것을 하셨다고 하는데 켈로부대가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가장 큰 전과라고 할까요? 전공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창건 박사 : 몇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가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이 가까워 오니까 초조해서 10군단 단장에게 "저 동해안 화천 지방을 뺏어 주시오."왜냐하면 휴전이 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식량이다. 그러나 식량은 외국에서 사 올 수도 있고 빌려 올 수도 있는데, 물과 에너지는 사올수도 없고 빌려올 수도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곳에 수력발전이 큰 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뺏어달라, 그런데 그 비행기에 가서 찍어 보니까 그곳에 탱크와 대포가 많은 거예요. 중공군 대 부대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미군들이 안 가려고 해요. 그래서 폭격을 하면 얼마 지나서 다시 또 대포와 탱크가 생기고, 너무 자꾸 되풀이 되니까 그 사단장이 저희 대원들에게 그 실상을 알아봐달라..그래서 대원들 3조를 투입해서 알아 낸 것이 전부 가짜들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사진만 찍히게 했단 말이죠. 그래서 미군이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화천 발전소가 하나도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저희 수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박인규 : 책에 보니 팔미도, 당시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일을 최규봉 대장님이 하셨다고 하는데 굉장히 큰 성과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어떤 겁니까?

이창건 박사 : 인천은 간만의 차가 많아서 물이 빠지면 배가 못 들어 갑니다. 갯벌만 있으니까, 결국은 시간을 맞춰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 해에는 50년만에 처음으로 간만의 차가 10M 이상이 된다고 해요. 그러면 그만큼 물이 더 많이 빠지거든요.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배가 들어와야 하는데 UN군의 261척의 배가 그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려면 해로를 잘 알아야 해요. 그런데 그 시간이 새벽이란 말이죠. 그 새벽에 등대에 불을 켜서 팔미도 양쪽으로 261척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데 그때 웬만하면 일개 소대나 분대가 가면 되겠지만 한국군 대령, 해군의 연정소령, 최규봉 대장, 미국 소령, 대위, 중위 중량급을 보낸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겁니다.

박인규 : 그분들이 말하자면 현지에 들어가서 작전을 하신 겁니까?

이창건 박사 : 네.

박인규 : 최규봉 대장이 말하자면 켈로부대의 실질적인 지휘자로서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최규봉 대장은 생존해 계시죠?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이창건 박사 : 지금 전우회 회장으로 계시고 대원들 뒷바라지를 하시는데 그 분이 아주 머리가 뛰어나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감히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용인에 민속촌을 만든 분입니다.

박인규 : 그 분이 민속촌을 만드신 분입니까?

이창건 박사 : 네.

박인규 : 군인을 하시다가 민속촌을 생각하셨다는 것이 상당히 특이하네요?

이창건 박사 : 그러니까 머리가 뛰어나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추진력이 대단하고, 친화력이 좋습니다. 계산력이 좋고요.

박인규 : 켈로부대가 전부 합쳐서 대략 몇 분 정도가 활약을 하셨던 겁니까?

이창건 박사 : 처음에는 몇 분이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저희들이 들어가서 한창 활약할 때는 5천 명이라고 합니다. 5천 명이라는 사람이 본부에 있는 사람, 섬에 나가 있는 약 2천 명, 또 북한에 침투해 있는 대원들, 그리고 경주에서 훈련 받고 있는 사람들, 모두 합치니까 약 5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박인규 : 켈로부대원은 정확하게 소속이 한국군입니까? 미국군입니까? 대게는 한국분이시죠? 일하시던 분들은 어떻습니까?

이창건 박사 : 그것이 문제인데 우리는 UN군 산하에 있었어요. 그러면 한국군도 UN군 산하, 터키군도 UN군 산하, 미군들도 UN군 산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UN군이라고 볼 수 있죠. 국적이 없습니다. 국적은 UN국적이죠. 그러니까 후에 제대증 같은 것이 없어요.

박인규 : 한국군과는 별개로 지내셨다는 말씀이시죠?

이창건 박사 : 그렇죠. 그런데 해체당할 때 한국군으로 다 편향 이동을 시켰는데 나이 드신 분이나 저 같은 학생은 빠져서 학교로 다시 돌아갔죠. 그런데 그 때에 'KLO8240'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다가 해체될 때 '8250'이라는 이름으로 국방장관과 UN군 사령관과 협약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8240'이지 '8250'은 아니거든요. 그런 법적인 문제가 있어요.

박인규 : 해체된 것은 그러면 휴전 이후입니까?

이창건 박사 : 휴전이 1953년 7월인데 10월에 해체했습니다.

박인규 : 그러면 그 당시에 바로 군대에 가신 분들이 더 많습니까? 편향 이동되셔서.

이창건 박사 : 반 이상이죠. 그 사람들이 특전사 모체가 됐죠.

박인규 : 특전사의 모체가 되신 분들이 그 분들이시군요? 여자분들도 있었다는 말이 있던데요? 대원중에.

이창건 박사 : 네. 한 40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주로 그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전화 교환수, 간호원, 비서, 이렇게 해서 전화교환수들이 한 두달만 일을 하면 많은 정보를 가져 왔다고 합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첩보요원으로..?

이창건 박사 : 네. 그러니까 본래 전화 교환수로 있다가 오신 여자들을 거꾸로 집어 넣은 거죠.

박인규 :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켈로부대가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제가 책을 통해서도 알고 있는데요.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조금 민폐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도 끼쳤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창건 박사 : 민폐만이 아니고 관폐, 군폐까지 끼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훈련시킬 때 주먹으로한 대 때리면 상대방을 완전히, 그리고 총 쓰는 것을 많이 배우니까 밖에 나가서 주먹을 많이 휘둘렀고, 특히 내일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간다고 하면 그 전날 저녁에 파티를 해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술 마시고 가만 있겠습니까? 나가서 나쁜 짓을 했죠. 그러니까 잡히면 저희들이 빼오고 그런 것들을 많이 했죠.

박인규 : 워낙 적의 후방에 가서 작전을 하다 보니까, 휴전한 이후에도 북한에 남아 있는 분들이 꽤 계셨다고 하던데요. 어떻습니까? 그 분들은.

이창건 박사 : 참 가슴 아픈데 휴전직전에 2개 부대를 함경도와 평안도에 보냈어요. 그것은 몇 사람씩 보내니까 자꾸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소부대규모로 두 군데에 보냈거든.

박인규 : 소부대 규모는 대략 30명 됩니까?

이창건 박사 : 25명 정도입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전방으로 쭉 걸어 나오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그렇게 여러 사람이 다니니까 무전기 같은 것도 하기가 쉽고요. 그런데 그것이 휴전 며칠 전이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가슴 아픈 일이죠. 그래서 죄책감이 있어서.

박인규 : 그럼 그 분들은 귀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까?

이창건 박사 : 거의 못 나왔어요. 다만 우리들이 언제까지 어느 해안가로 오라고 하면 그 중에 몇 사람을 뽑아 냈습니다. 내가 북한에 가서 고생하실 우리 동지들에게 이야기 할 것은, 그때 저희들이 보낼 때 제가 '성사문'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성사문'이 이창건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성삼문의 '이 몸이 죽고 죽어~' 맨 마지막에 한강변에서 처형당할 때 그 지은 시가 너무 가슴에 와 닿아서 그 성삼문을 좋아해서 '성사문'이라고..

박인규 : 그 당시 켈로부대원들은 이창건 박사님의 본명은 모르고 그냥 성사문으로 알고 계셨던 건가요?

이창건 박사 : 간부들은 알지만 대원들에게는 '성사문'라고 썼었죠.

박인규 : 그런 또 가슴 아픈 일이 있었군요.

이창건 박사 : 네.

박인규 : 앞에서는 주로 배후, 공작, 이런 말씀을 들어봤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정보에 관해서 여쭤볼까 합니다. 책의 말미에 보니까 6.25에 관해서 몇 가지 이랬더라면의 10가지 정도를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중에 첫 번째가 최귀봉 대장께서 6.25가 나기 전에 상당히 일찍 전부터 북한이 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고 아마 남침을 할 것이다라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해 주시죠?

이창건 박사 : 아무리 한국정부가 미국정부기관에 보도를 했다고 해도 우리에게 탱크도 안 주고,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국제언론에 호소하겠다, 그래서 북한에 들어오는 탱크와 대포를 기차로 가져오는데 그것을 남쪽까지 끌고 오려고 했어요.

박인규 : 북한이 가지고 있는 탱크를 이쪽으로 탈취해 오겠다? 이쪽으로.

이창건 박사 : 그것이 아니고, 원산에서 배에서 내려서 기차에 싫어서 38선까지 가져오는데 그 20량의 화물차를 남쪽까지 끌어 오려고 했어요.

박인규 : 기차 전체를?

이창건 박사 : 네. 그래서 기관사도 매수했고, 철도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는 사람도 매수해서 준비하다가 그만 들켰어요.

박인규 : 왜 안됐습니까?

이창건 박사 : 우리 대원들이 아지트에서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찰에서 북의 간첩인 줄 알고 덮쳤던 모양이예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이 사람들이 경찰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해서 모두 말했던 거예요. 그래서 신문에 났죠. 그렇게 해서 밝혀졌죠.

박인규 : 그러면 이쪽에서 밝혀진 건가요? 남한에서?

이창건 박사 : 그렇죠. 그러니까 정부부대의 생명은 입은 무겁게 하라. 눈과 귀는 예리하게 열어 놓되, 입만은 무겁게 하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박인규 : 아직 직접적인 동지가 아니면 믿지 마라?

이창건 박사 : 네.

박인규 : 그때 만약에 그 전차를 가져왔더라면 전쟁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창건 박사 : 적어도 무력진압은 됐었을 것이고 또 탱크는 못 준다고 해도 대포는 많이 줘서 이북에서 내려오는 몇 백대의 탱크는 부수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박인규 : 당시에 우리나라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으니까.

이창건 박사 : 네. 없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이쪽, 한미쪽에서의 정보 실수라면..책을 보니 중국군 쪽에서 당시는 중공군이죠. 연합군이 맥아더 사령부가 아마 인천상륙작전을 할 것이다라는 것을 8월에 알았다는 얘기도 있었던데요. 어떤 얘기입니까?

이창건 박사 : 몇 년 전에 중국에서 나온 작가의 글을 일본에서 번역해서 마침 읽었습니다. 그 예측한 사람이 작전주임인데 이 사람이 6가지를 들어서 꼭 인천에 상륙할 것이다. 첫째는 부산을 중심으로 13개 사단이 좁은 지역에 있어서 나가지도 않고 후퇴도 하지 않는데 그 진영을 구축해서 호랑이 굴에 인민군을 끌어 넣어서 잡으려고 할 것이다. 두번째는 미국의 최정예부대가 1사단과 7사단인데, 지금 일본에서 맹렬히 무언가 연습하고 있다. 세 번째는 지중해와 대서양 서안에 있는 많은 배가 지금 한국을 향하고 있다. 또 한반도는 남북으로는 길고, 동서로 짧은데 너무 길어지면 뒤가 빈다. 뒤가 어디냐? 서울 경기 지방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원래 영웅심이 많아서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이 언론에 많이 부각되도록 만드는데 김일성이 도망갈 때 미리 낙하산을 순천과 춘천에 띄웠는데 조금 늦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늘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의 성격을 봐서는 그렇다. 그래서 지금 낙동강까지 밀어놨는데 이것은 전투적으로는 이겼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위험하다. 따라서 어디냐? 인천이다. 왜냐? 수도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그 일들이 바로 3주전이랍니다.그래서 중국의 모택동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연락했답니다.

박인규 : 그런 분석 결과를.

이창건 박사 : 네. 중국사람들 대단해요.

박인규 : 그런데 말하자면 김일성이나 스탈린이 그것을 묵살한 건가요?

이창건 박사 : 소련에서 나온 자료는, 알았다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에 왜 자꾸 간섭이냐? 무기도 없는데 도와주라고 했는데도 도와주지도 않고, 왜 자꾸 말로만 챙기느냐, 이렇게 불만을 했답니다.

박인규 : 지금 켈로부대 활동하신 분 중에 생존에 계신 분이 몇 분 정도 계시는지 집계가 됩니까?

이창건 박사 : 대략 200여 명인데 이번에 책에 나온 사람은 175명이예요. 그런데 이 책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우선은 연락이 닿지 않는 분, 아파서 누워 계신 분, 특히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 사람들도 그렇지만, 아들 딸들이 '우리 아버지는 빼 달라고' 자꾸 말을 해서 이번에는 뺐습니다.

박인규 : 이제는 말하자면 화해의 시대로 가는 거군요?(웃음)

이창건 박사 : 네. (웃음)

박인규 : 그 책을 보니 맨 앞에는 최규봉 대장님의 활약상, 또 맨 뒤에는 이창건 박사님께서 활동하신 사항들이 있는데 중간에는 짧게나마 대원들의 활약상을 쓰셨는데 어떻습니까? 책을 보고 대원분들이 좋아하시던가요?

이창건 박사 :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출판사가 그 사진들이 너무 어두워서 곤란하다 해서 "일생에 한 번 나오는 사진인데 이 사진은 꼭 넣어 주시오. 내 사진은 빼더라도 우리 대원들 사진은 꼭 넣어 주시오" 해서 우겨서 그렇게 어두운 사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박인규 : 켈로부대는 한국군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은, 훈장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신이 한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는 것이 훈장, 이런 것인데요. 훈장 같은 것을 받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이창건 박사 : 지난 수요일에 최규봉 대장이 인천상륙작전에 공로가 컸다고 해서 인천시에서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최대장께서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에게 빛을 주어서 지구에 보낸 사람이 태양인데, 그것이 맥아더 장군이니까 맥아더 장군에게 추서를 해 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인규 : 6.25 때 말하자면 북한군에 맞서서 아주 최전방에서 싸우신 분이기 때문에 사실 그렇다면 요즘의 어떤 남북화해에 대해서 생각이 다르실 수도 있으시겠습니다?

이창건 박사 : 화해는 해야 하는데 나는 내 동창생이라든가, 친척에게 원조금이 간다면 내 수입의 반이라도 보낼 용의가 있는데 이것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니까 그것이 거꾸로 무기가 되어서 우리를 치려고 하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박인규 : 어떤 6.25의 남침으로부터 한국을 구해 낸 것이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맥아더 장군이라든지 미국이기 때문에 아마 이창건 박사님께서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고마움은 약간, 그 세대에는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좀 더 자주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도 있거든요?

이창건 박사 : 자주적인 것도 좋죠. 그러나 자주를 할 만한 능력이 있어서 자주하겠다고 하면 좋겠는데..능력도 없이 괜한 이상적인 생각만으로는..

박인규 : 자기 힘을 키우자?

이창건 박사 : 네.

박인규 : 켈로부대 활동을 하시고 그 이후로는 원자력 공학자로 대략 50년을 살아오셨는데 켈로부대 활동이 학자로서의 삶에 어떤 영향이랄까? 기여한 바가 있습니까? 어떠십니까?

이창건 박사 : 예를 들면 술 자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때 배운 주먹으로..

박인규 : 아직도 유효하십니까?

이창건 박사 : 아직은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북한의 대원들이 밤에 무전으로 무엇을 보내오면 풀어야 합니다. 해독을 해서 다시 답장을 만들고 그러는 동안에 밤새도록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면서 책을 50권 정도의 세계명작을 읽었어요. 그것이 상당히 피가 되고, 살이 됐는데..그것이 도움이 되어서 영어를 좀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회 나와서 코리아타임즈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영어가 좀 늘었죠. 그것이 도움이 됐던 것입니다.

박인규 : 어쨌든 전쟁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든 남북이 화해가 되어야 할 텐데요. 그래도 전쟁 때에 활약하신 켈로부대, 켈로부대원들이 어떻게 평가되고,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해 주시죠?

이창건 박사 : 우선 켈로부대가 한 3년동안 고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에 나오니까 기피자다. 그러나 기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고요. 또 저희들은 똑같은 동료들인데 군대 경력이 빠졌기 때문에 진급이 3년 늦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보상을 받는데 저희 대원들에게 보상을 해서 그 사람들이 자기 가정에서 집안 어른으로서 떳떳해졌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박인규 :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 역할을 한 노력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창건 박사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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