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진보'라기보다 '왜곡된 진보' 아닌가?
<기고> 진정한 진보의 가치가 모독되지 않기 바라며
'유연한 진보'라기보다 '왜곡된 진보' 아닌가?
1. 무엇을 진보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진보와 보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 개념을 절대적으로 고정시키는 것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도외시하는 태도가 된다. 시대에 따라 그 정의와 내용도 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그 기준도 조절된다.
  
  봉건체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이행을 도모하는 것은 봉건체제의 강제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진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을 절대화하는 자세는 그 구조적 모순에 눈을 감고 만다는 점에서 진보가 아니다. 자연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근대적 개발에 저항하는 것은 근대적 개발론자들의 입장에서는 변화를 지체시키는 보수라고 평가될 수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생태계적 조화를 꿈꾸는 이들의 눈에는 진보다. 폐쇄된 지역을 개방해서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진보이지만, 그 교류가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기보다는 일방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그것은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우리사회에서는 그간 진보와 보수, 좌와 우에 대한 개념정의가 명확하게 논의되지 못한 채, 대체로 냉전형 이념구도 속에서 그 기준을 찾아 온 점을 지나칠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우리 안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고 논란이 되어 온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과 이념 규정에 따라 "판결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진보 또는 좌파는 과거 폭력적인 냉전 현실에서 일단 "내부의 적"으로 규정되어 왔다는 점에서 공정한 민주적 논의는 출발부터 불가능하거나 어렵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분명한 개념정의도 설정되지 않은 채 진보와 보수 사이에 소모적인 쟁점이 형성되거나 어느 일방의 승리를 법으로 전제한 불공정한 대치국면이 전개되는 등 사회 철학적 혼란이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진보진영의 정치적 위기와 관련해서 잇달아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이 혼란을 정리하고 향후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가치를 규명해나간다는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가 주변부적 세력 또는 배제되어야 할 세력의 위치에서 시대적 주도권을 일정 부분 장악하게 되면서 과거의 뭉뚱그려진 분류보다는 좀더 정교한 개념정리가 요구되고, 그에 따른 실체적 파악이 필요해진 것이다. 게다가 권력의 문제와 직결된 논의가 되면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누가 어떻게 감당해나갈 것인가의 차원으로 사안은 압축되어가고 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오늘날 빠르게 재결집하고 있는 보수세력 앞에서 과연 무엇을 진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런 논의의 토대 위에서 규정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와 행동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이는 보수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어떻게 힘을 모아나가면서 재집권 내지는 시대적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고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당연히 여러 논점들이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정치경제적 또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참되게 존중받지 못하고, 도구나 물건 또는 상품이나 비주체적 대상물 내지는 주변부적 존재로 전락하는 것에 분노하고 이를 막아내려는 열정적 이성과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된 가치와 운동에 곧 진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나 군사력, 또는 권력과 사상의 패권체제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인간이 서로 함께 더불어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이라면 그건 진보다. 자연의 생명력을 훼손하지 않고 이를 귀중히 여겨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공동체적 합의와 질서를 지켜내는 일이라면 그 역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적게 벌어도 그걸로 충분히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돈을 벌기 위해 바치는 시간보다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실현과 이웃을 위한 시간을 넉넉하게 만들어가는 제도와 정책, 삶의 사회적 습관을 창출할 수 있다면 이는 진보의 정의에 합당하다.
  
  이렇게 진보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해볼 때 이와 대치하는 자세는 본질적으로, 인간 존중의 가치가 희생된다 하더라도 이미 설정한 목표를 현실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희생이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현실적 조건으로 인한 제약 때문에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과, 이러한 진보적 가치와는 어울릴 수 없는 가치를 진보의 내용 속에 동일한 종류처럼 섞어버리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것은 진보의 가치를 왜곡하는 것이자 대중으로 하여금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져오는 일일 따름이다.
  
  2. 노무현 대통령의 경직된 자세
  
  바로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노무현 정권은 진보의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왜곡시킨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오늘날 진보진영의 정치적 위기 논쟁은 이러한 사정을 도외시 하고는 의미 있게 진전되지 않는다. 대중들은 노무현 정권이 진보적 성향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에, 진보진영은 노무현 정권이 껍데기만 진보로 포장하고 실제적으로는 진보에 반하는 가치를 강도 높게 밀고나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진보적 가치를 붕괴시키고 있는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곤혹스럽게 여기는 바는, 노무현 정권 수립을 통해서 이 나라의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는 세력의 주도권이 보다 확고하게 다져지기보다는 도리어 해체국면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이른바 민주화 세력 집권 3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만하면 진보와 개혁의 실험기회는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는 논리도 있지만, 일제시대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반동적 역사의 모순을 청산하기에는 여전히 진보세력의 주도권 장악의 시간은 부족하고 현재보다 더 심도 깊은 정치사회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위치는 그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진보세력의 역사적 주도권을 공고히 굳히면서,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힘을 모아나가야 할 것인지를 자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하는 것에 있었다.
  
  이는 전환기적 작업이 된다는 점에서 과정상 인식의 혼선과 모순된 가치의 공존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그 작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환경적 제약과 관련된 논의가 될지언정 지향해야 할 가치 자체에 대한 기형적 변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진보적 가치의 내용을 왜곡해가면서까지 그 실현을 이루지 못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실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논리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진보의 가치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의 진행방향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17일 청와대 브리핑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라는 글은 최장집 교수를 필두로 하여 조희연, 손호철 교수 등이 잇달아 전개한 노무현 정권 비판논리에 대한 대응으로 알려져 있다. 세 지식인의 논점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그 대안 모색에 있었기에,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이 "실패 규정" 부분에 대한 반론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반론의 총괄적 전제는,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진보진영의 논리가 현실의 변화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교조적인 기준에 놓여 있기 때문에 부당하고, 보다 유연한 시각을 가질 때에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를 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가 되고 있다.
  
  <한겨레신문>은 19일자 사설을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진보진영의 백화제방을 기다린다"라고 하면서, 적극 수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신문의 사설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 논쟁은 총론에 머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한 각론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면,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따져보자"는 노 대통령의 요구는 수용돼야 한다. 일자리·부동산 등 민생 현안, 비정규직 등 노동정책, 한-미 자유무역협정, 북핵과 한-미 동맹, 그리고 주한미군 재배치 등 각종 현안은 물론, 인사나 정치 스타일까지 논쟁은 포괄해야 한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의 이 사설은 진보진영의 논쟁이 그동안 구체적인 각론으로 확대되지 않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 제기로 비로소 그 현실적 계기를 갖게 된 것처럼 오해하도록 논지를 펴고 있다. 이미 진보진영은 각 분야에서 줄기차게 문제제기를 해 왔고 그 논의의 공개적 토론을 가로막거나 제약해 온 것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정권이었다.
  
  물론 <한겨레신문>의 사설은 이 기회를 통해서 총론과 각론이 치밀한 사회적 논쟁이 보다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기는 하나, 오래 전부터 총론과 각론에 걸쳐 치열한 문제제기를 해 온 진보진영의 분석과 진단, 경고와 질책, 그리고 충고와 제안을 외면해 온 노무현 정권의 자세가 노무현 정권 실패의 중요한 단면이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거론하고 있지 않다. 이를 굳이 지적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문제가 거기서부터 상당부분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은 귀를 닫고 입만 열어버린 권력이 어떤 현실에 직면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반론을 편 대상으로 알려진 최장집 교수를 비롯하여 조희연, 손호철 교수 등의 논지는 각기 취할 바가 있다.
  
  최장집 교수의 경우, 정당체제의 낙후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가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 주장은, 한나라당의 정권 교체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보진영이 정당체제의 실패를 딛고 서지 못하면 대중들의 선택은 한나라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경고다. 오늘날 열린 우리당의 분열사태와 민주노동당의 현실적 어려움은 그의 정당론의 주장에 무게를 싣게 한다.
  
  조희연 교수의 경우, 정당으로만 현실이 풀리는 것은 아니며 보다 중요한 진보적 사회 운동적 기반과 결합된 정치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이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사회 운동적 기반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주장에는 일치된 공동의 기반이 가능하다. 정당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집권세력이 역사를 지체시키는 보수적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적 사회운동의 생명력은 존중되고 이와 힘 있게 결합하는 노력은 진보진영의 시대적 주도권 확보에 관건이 된다.
  
  손호철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바로 이 진보진영의 사회운동이 제기하는 내용물에 우선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노무현 정권과 집권 여당은 그간 사회 운동적 요구 속에 절박하게 엄존하고 있는 이 시대의 고난과 절망을 권력의 집행과 정당의 체제 속에 희망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고 진보적 가치의 실현보다는 그 실현에 제동을 거는 정책과 자세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들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이 제기하는 비판은 정당성을 가진다. 각론의 검증에서 그 보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한-미 FTA의 경우, 민주적 논의는 실종되었고 신자유주의 체제의 내부적 심화로 인한 양극화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예 묵살하고 있는 형편이다. 노무현 정권은 유연한 자세로 이러한 논의를 받아들이면서 고민하기보다는, 경직된 자세로 문제제기를 거부하고 있다.
  
  3. 유연한 진보와 교조적 진보?
  
  그렇다면 청와대 브리핑에 노무현 대통령이 쓴 글은 어떤 인식을 보이고 있는가? 그는 자신을 "유연한 진보"로 규정하고, 그를 비판하는 진보진영을 "교조적"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이들이 교조적인 이유는 현실의 여러 제약을 염두에 두고 판단하지도 않고 현실적 효율성의 문제에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의 서두는 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학자는 말하는 사람이고, 집권한 정치인은 실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논리구조의 제약은 있겠지만,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현실의 중요한 변수를 외면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온갖 가정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는 사람은 상황의 제약을 단 하나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이 주장에는 학자에게는 권력이 없지만, 집권한 정치인에게는 권력이 있다는 사실이 빠져 있고, 집권한 정치인은 현실의 상황적 제약을 학자들보다 더 포괄적이고 치밀하게 주목하고 있다는 논지가 담겨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집권한 정치인에게는 권력이 주어진 만큼 현실의 제약을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학자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을 전제하지 않고 있으며, 학자들의 견해는 현실의 복잡한 조건들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는 식의 편견을 내보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자는 말하기만 하고 현실의 제약을 뚫고 나가기 위해 실천은 하지 않는 존재처럼 규정하고 있다. 상황의 제약을 고민하는 실천은 대통령만 하는가?
  
  바로 이러한 인식의 편향으로 해서, 진보진영이 그간 그에게 가했던 비판이 온당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게 된다. 가령,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이 평택 기지 건설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평택 주민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던 현실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가 서울을 떠납니다.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일부는 평택기지 건설을 반대해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고, 이를 지원했습니다. 주한미군 나가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타당한 일이고 가능한 일입니까? 국제정치의 현실도 현실이지만, 국내 사정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가 진보진영만 사는 나라입니까? 진보진영이라고 다 미군철수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용산 기지의 이전이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이라고 본 것도 옳지 않고, 평택 미군기지의 건설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 변화의 산물이라는 점도 빼놓고 말하고 있으며 기지이전과 관련한 부담의 문제를 진보진영이 어떻게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입 다물고 있다. 평택기지 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이 오로지 미군철수로만 집약되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진상에 대한 왜곡이다. 평택기지 건설과 관련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분명 있지만, 평택미군기지 건설에 중요하게 제기되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오랜 세월 애써서 가꾸어 온 옥토농지를 그토록 망가뜨려가면서 군사시설을 세워야겠는가 하는 것이며, 그에 더하여 평택 미군기지가 동북아 미군 사령부의 전략적 유연성을 추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사안을 미군철수로만 제한시켜, 진보진영의 문제제기를 미군철수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대중들과 분리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나라가 진보진영만 사는 나라입니까?"라고 질타한다. 그 질타는 사안의 진정한 쟁점을 외면한 채 전개하는 상상의 논법일 뿐이다.
  
  이 대목은 어떻게 읽힐까? "이라크 파병, FTA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실은 인정합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것이, 지식을 가지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무슨 뜻인지 해독이 잘 되지 않는다. 무슨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일까? 그간 이라크 파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한-미 FTA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논쟁들은 사실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그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매도"라고 규정하고, 특정 지식인을 가리켜 "매도에 앞장서고 있는"이라는 식으로 적대적 감정을 담은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 "저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일부 정치언론이 말하는 그런 좌파도 아닙니다. 저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무슨 사상과 교리의 틀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저는 이제 우리의 진보가 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진보진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선, 유럽의 진보진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유럽 전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대대적인 반전운동은 그의 눈에 어떤 진보세력의 대응으로 보이고 있는 것일까? 어떤 진보주의자가 인간을 철저하게 시장의 상품으로 격하시키고 경쟁의 논리 속에서 생존의 벼랑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하고 채택하고 있는가? 그러는 순간, 그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자본권력에 투항하고 만 자라는 점을 노무현 대통령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투항, 내지는 진보적 가치에 대한 몰이해를 "유연한 진보"라는 말 한마디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노무현 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진보적 성과는 물론 적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투명성의 문제나 권위주의로부터의 탈각이나 권력기관의 전횡 감소 등은 노무현 정권의 노력이 이루어낸 독자적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해도 그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과가 노무현 정권의 독자적인 성과라고 인정한다 해도 진보진영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반론의 근거는 될 수없다. 최장집 교수가 일찍이, 현 정권이 정치경제적 사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양극화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절박성이 드러나면서 옳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사회 운동적 요구를 배제하고 적대하면서 이 요구의 흐름을 차단해버린 것에서 조희연 교수의 비판은 핵심을 짚고 있다. 그에 더하여 신자유주의가 자본권력의 강화전략이라는 점에서 서민생활의 고단함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이 손호철 교수의 비판이 갖는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미 FTA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대체 누가 개방을 반대한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판하고 있을까? 개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교역구조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일방적 지배의 폐해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4. 어찌하면 될까?
  
  노무현 정권은 초기부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진보진영의 비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민주적 공론의 장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용납하지 않았고 독선적 정치운용에 빠지고 마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과, 정권 전체에 불행이다. 그 불행은 지금 집권여당의 분열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러한 논쟁은 어찌 보면 소모적인 느낌조차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사회가 무엇을 귀중하게 여기고 지켜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세력의 결집이 필요한지를 꾸준히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은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겠지만, 진보의 가치는 계속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진보의 가치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누구든 교조적일 때 실패한다. 그와 함께, 진보의 가치와 대치되는 것을 진보의 가치에 섞어버리는 것 또한 실패를 가져온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제도와 정책,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서로 아름답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고뇌하는 이들을 '교조'라는 이름 아래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대한민국의 진보가 달라져야 하는 바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곧 진보의 가치를 왜곡하는 일에 나서라는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달라져야 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그 진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자신은 유연하고 남들은 교조라고 하는 생각도 이에 포함된다.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은, 그 진보의 가치가 무엇을 정작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논의다.
  
  진보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바는, 진보진영 스스로가 자기 안에서 권력창출의 전략을 실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과 깊고 깊게 결합된 진보진영의 전열정비만이 그러한 역사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위기로 인해 진보진영의 미래전망이 불투명하다고 시대의 주도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다름 아닌 우리 안에서 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이 굳게 신뢰하고 함께 하는 그런 진보세력으로 다시 일어서는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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