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ㆍ장회익 교수에 묻는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당파(鐺把) <2>
2008.10.08 07:46:00
최재천ㆍ장회익 교수에 묻는다
통섭(統攝; Consilience)
  
  이 단어는 앞으로 틀림없이 저주받은 말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징그러운 저 에코파시즘의 대표 브랜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이 1840년 그의 책 <귀납적 과학의 철학>에서 처음 사용하고 이후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재생시킨 생명통합 개념의 일종이다.
  
  이것을 국내의 동물학자 최재천 씨가 원효 스님의 개념을 빌려 '통섭'이라고 번역했다 한다. 잘한 것 같지 않다. 원효의 통섭이 최 씨가 주장하는 다윈이나 떼이야르나 휴얼이나 윌슨의 바로 그 집체주의, 전체주의와 연속될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신문에서 최 씨의 '통섭'이란 말을 발견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도 여기저기서 최 씨가 통섭이 마치 생명의 시대, 지구 대혼돈과 생태학, 기후변화와 대 전염병 창궐시대, 그리고 문명사 변동시대에 압도적인 진리인 듯이 떠들어대므로 게으른 내가 억지로 관심을 가져본 것이다. 매우 부정적인 예감과 함께.
  
  처음에는 에드워드 윌슨을 에드먼드 윌슨으로 알고 책방에 가서 찾았더니 <핀란드 역으로>와 <악셀의 성> 두 권이 손에 잡혔다. 하나는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 따위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 얘기요, 다른 하나는 예이츠, 발레리, 엘리엇, 프루스트, 조이스, 렝보 등 상징주의 문학론이다.
  
  윌슨이라는 사람은 매우 잡식성인가 보다 했는데 최 씨 자신이 '통섭'이란 전 학문 체계의 전체적 통합이라서 약방에 감초같다는 식의 설명을 어딘가에서 읽고 또 그런가 보다 했다. 이는 지금도 매우 재미있는 사건으로 내게 기억된다.
  
  두 윌슨의 경향이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에드먼드가 제 스스로는 공산당도 아니고 투쟁한 적도 없으면서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따위들을 대단한 전체주의 혁명으로 치켜세우는, 사실상 센티멘탈한 저널리스트에 불과한 것과 에드워드가 이미 다 끝난 찰스 다윈을 엄청난 위인으로까지 숭배해서 말과 순서만 바꿀 뿐 그대로 흉내내되 현실 생명 세계의 대혼돈에 단 한 숟가락의 보약도 먹일 수 없는 순 우파 망상가로 일관한 점이다. 둘 다 썰렁한 빈방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예찬자인 에드먼드의 방이 그냥 썰렁한데 비해 다윈 예찬자인 에드워드의 방은 텅 빈 채로 괴이한 독기가 가득 서려있는 것이 다르다. 그 독기의 정체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선 이 글의 진행순서로는 좀 튀는 질문이지만 윌슨에게, 윌슨의 직계 제자라는 최재천 씨에게 한 번 묻자. 당신들이 확신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이 과연 과학적으로 옳은 것인가? 망상과 오류 투성이는 아닌가?
  
  당신은 지금 한국을 미국의 과학 식민지로 오판, 경멸하면서 엉터리 나팔을 계속 불고 있는 것 아닌가? 생명은 당신들 확신처럼 그렇고 그런 것인가? 혹시 관찰과 측정 방법에 큰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바로 그 관찰, 측정에 큰 오류가 있어서 측정 내용이 전혀 엉뚱해졌다는 에릭 프롬의 확신에 찬 주장에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생명은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죽여도 죽여도 안 죽고, 분명 죽어야 하는데도 내내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많아지는 요즘의 생태계를 윌슨 따위 거의 '먹물' 수준의 생물학, 동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신들의 위대한 멘토인 다윈은 생물 종의 진화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영국 생물학자 마이클 위팅은 <네이처> 지에 아득한 옛날 퇴화돼버린 뒤 진화가 끝난 곤충 겨드랑이에서 다시 날개가 돋아나는 현상을, 그것도 30종에 걸쳐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아는가? 안다면 설명해보라!
  
  다윈 과학은 이제 후계자들을 통해 그 어필 포인트를 바꾼 것 같다. 본디는 약육강식, 도태, 적응, 선택이었다.
  
  역시 에릭 프롬에 의하면 사실은 상부상조가 중심 흐름이고 약육강식의 경우에도 '청소'나 '여백에의 관여'의 양식 또는 '먹이사슬' 혹은 '치유수단'인 경우가 훨씬 많다. 자유의 진화론에 따르면 자연 선택이 아니라 단연코 자기 선택이다. 도태, 적응 따위는 애당초 다윈 당시에 토마스 헉슬리와 같은 과학자들에게까지도 극심한 혐오감을 일으켰는데 그 도태, 적응이 사실 자체보다도, 마치 무기물에서의 유기물 발생을 변증법적인 질적 비약으로 설명한 오파린처럼 하나의 외삽법(外揷法)으로 악평하는 세상에 대해 도대체 무슨 뱃심이나 목적의식으로 세상 질서를 바꾸겠다고 끝없이 설득 작업에 나서고 있는가?
  
  '생명과 평화'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마치 혼돈과 질서, 역동성과 균형, 즉 음양(陰陽)과 같은 것이다. 인간 개체와 우주 생명을 달리 보는 것은 서양이지 동양이 아니다. 배려가 있었던가? 동양 우주관, 생명관에서 우주 생명의 진리(眞理)와 인간의 윤리(倫理)는 같은 것이다.
  
  분명히 통섭은 마치 구약(舊約)의 신과 같은 절대적 억압과 복수와 저주의 공포와도 흡사한 통제, 간섭, 통합을 그 실질로 하는데도 그에 팽팽히 맞설 수 있는, 또 맞서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개체 생명의 영적이고 창의적인, 그리고 혼돈 그 나름의 질서로서의 개체 융합적 자기 조직화의 하등의 기능이나 능력, 또는 불교의 <화엄경>처럼 온 우주(통섭력도 함께)를 제 안에 품고 있는 먼지 한 톨(一微塵中 含十方)의 필연성을 대비시키지도, 또 그런 능력의 진화 등에 대해 한치의 관심도 흥미도 성의도 여정도 연민도 모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불행한 대혼돈(Big Chaos)의 시대에 무슨 대단한 예언자라도 되는 듯, 그것도 쉴 새 없이 사방을 향해서, 별 이득도 별 볼일도 없는데 끝없이 대운하에 집착하는 그 사람들과 똑같이 이리 야단법석인가?
  
  유전자는 신인가? 종(種), 전체, 조상, 그것 없이 인간도 생명도 살 길은 없는가? 도대체 목적이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땅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원효에게서 통섭이란 말을 가져왔다고 주장할 때부터 내게 생긴 의심이다.
  
  아마 어떤 형태로든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동양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참회하는 차원에서라도 원효를 다시 촘촘히 읽고 나서 악감(惡感)을 버리고 대답하기 바란다. 반드시 대답하기 바란다. 공부를 하라.
  
  그 악명높은 사회생물학이 분명 진리는 아니라도 어째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지, 내 판단으로는 향후 10여 년 안에 닥칠 것이 분명한 기후혼돈과 생태위기, 생물변종, 유전자 대변질 사태와 대병겁(大病劫), 악질만세(惡疾萬世)의 개벽 앞에서 틀림없이 전염병만큼이나 악질적인 더러운 독재자에게 에코파시즘의 생명과학 이론으로 즐겁게 제공될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데 만약 그렇지 않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 좀 공부해둬야겠다.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고 진솔한 자세로 대답해주기 바란다. 왜냐면 최재천 씨가 마치 통섭론이 이 생명의 시대에 한국의 구원의 조언인 듯 내내 발언해 온 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당신들은 약간은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유 있는 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당신들이 왜 위험한지를 웅변적으로 해부한 부산대학교의 훌륭한 젊은 생명철학자 박준건 교수의 지적을 열거하면서 내 의견을 요약한다.
  
  환원주의다.
  
  윌슨은 과학의 최첨단이 환원주의이고 그것은 곧 자연을 자연적 구성요소들로 쪼개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환원주의는 개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유기체의 원리들을 더 일반적이고, 따라서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법칙들과 원리들로 전개시키는 심층적 과제를 담당한다. 그 강력한 형태가 전체적 통합인데, 이에 따르면 자연은 모든 다른 법칙과 원칙이 궁극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적 법칙들에 의해 유지된다.
  
  과연 환원주의는 올바른 과학인가? 그것은 과연 개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유기체의 원리들을 더 일반적, 근본적 차원의 법칙과 원리로 전개시키는 심층적 과제를 담당할 수 있는가? 더욱이 그 가장 강력한 형태가 전체적 통합이라고 했다. 이른바 통섭이다.
  
  예를 들자.
  
  2002년 한국사회의 가장 시끄러운 사태는 월드컵 응원 사태다. 나의 이 글 역시 그때부터 시작된 '촛불'에 직결된 것이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연인원 700만이 한 달 동안 전 세계 신문이 놀라 대서특필한 사태로서 이때 수많은 기성 지식인들이 '집단 히스테리다', '나치의 예감이 온다', '또 하나의 파시즘이다', '일회적이다', '일종의 문화혁명이다', '광장민주주의다' 따위 하나마나한 소리로 실질적 접근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환원주의나 변증법이 아니면 어떤 사태든 해명하지를 못하는 지식인들의 갇힌 체계 때문이었다.
  
  기억하라! 환원주의다. 오늘 또 다시 촛불에 대해 환원주의가 실효성이 없다면 촛불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윌슨의 과학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촛불의 해명은 우리사회 전체의 숙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원주의의 최고 형태를 통합, 즉 통섭으로 규정한 것이다.
  
  2002년 6월 바로 그때 <조선일보>에 한국과학문화연구소의 이인식 박사의 칼럼이 올라왔다.
  
  '환원주의 따위로는 어림없다. 한치도 접근 못한다. 그것은 '개체-융합'과 '자기조직화'의 진화원리, 우발성, 돌발성, 개체성, 창발성, 그리고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이라는 현대 자유의 진화론이 아니면 절대로 접근 못한다.'
  
  그대로 되었다. 어느 누구도 한치도 접근 못했다. 인식도 해명도 접근도 못하는데 통합이라고! 지식인들은 그냥 투덜투덜하다가 예외 없이 외면해버렸다. 직무유기다.
  
  지난 6년 동안 2002년 붉은악마 사태를 분석한 글이 국내·외 모든 대학을 다 합쳐 단 한편이다. 그것도 그저 소박한 내용이라는 것이고 최근 어떤 지방대학 교수의 작은 책이 나와 '문화혁명'이라고 68년 5월 혁명을 기준으로 한 감탄사 연발 단 하나다. 올해 촛불의 경우에도 말은 많지만 참다운 접근, 해명하는 글은 단 한 편도 못 보았다.
  
  나는 여러 차례 매우 수준 높은 지식인들, 원로 언론인, 여·야당의 정책 입안자나 청와대 보좌관, 시민사회단체 브레인들, 종교계 사람들을 만나 장시간 촛불문제를 얘기해 왔으나 정확히 말해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이해, 접근, 해명하는 사람을 못 봤다. 그들은 환원주의를 대학에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에까지 익힌 전문가들인데 말이다.
  
  좌파 야당 쪽이나 우파집권층, 보수언론의 베테랑 이론가들, 대재벌의 연구소 간부들이 2007년에 시작된 촛불의 물결을 '통합'하거나 통합하려는 꿈조차 꾸는 것을 못 봤다. 그 결론이 '촛불을 사 준 놈이 누구인지 조사하라' 정도이고 가차 없는 진압이었으며 또는 어찌해서든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개입하거나 '마르크스 촛불'이니 '레닌 직접민주주의' 따위로 아전인수했을 뿐, 통합이니 통섭이니 그 근처에도 가는 걸 못 봤다.
  
  전제하는데 나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유심히 그 물결을 관찰해왔다. 그렇다면 이인식 박사의 말이 옳은 것 아닌가! 환원주의로는 어림도 없다는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든 학문을 통합할 수 있다는 믿음, 물질보다 높고 큰 존재인 생명, 그보다 더 높고 큰 존재인 정신과 영을 더 낮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시켜 물리적 법칙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통섭'이다.
  
  그렇게 해서 한 번이나마 통섭이 되던가? 물질, 생명, 정신, 영 그것을 자기조직화하는 것은 신(神)인데, 그 신도 부정하는 유물론자가 무슨 능력으로 통섭한다는 것인가? 학문으로? 영이 이성인가? 영을 통제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영의 위(上位)에 있는가? 서구과학과 학문은 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예언자들이 신의 소리를 듣는 곳은 성경에서의 실례로 보면 하늘이고 허공이겠는데, 정신병력이 있거나 정신병 치유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신론 생물학자가 그것을 안다고? 그것도 통합을? 꿈도 야무지다.
  
  희망하는 것이야 누가 말리나? 그러나 그걸 가지고 한국사회, 동아시아에서 지배적 담론을 만들겠다는 헛꿈은 거두는 것이 좋다.
  
  신은 어디 있는가? 인간 내부에 있다. 진화생물학자가 그것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수천 년 전 한국의 고대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신은 뇌 속에 내려와 있다(神 降在爾腦)'고 돼 있다. 칼 융의 임상기록이나 분석심리학 역시 마찬가지 방향이다. 그런데 그 신 안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동학(東學)은 그 신 안에 있는 것은 무(無), 공(空), 허(虛)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울님'을 님이라 높여 부르면서도 그 '한울', 즉 '천(天)'을 단 한마디도 규정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동학을 두고 '아! 그 혹세무민의 반란군들!' 따위로 반응하는 자들이 알 리가 없겠다. 그러나 모르면 말을 안 하는 것이 좋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 역시 진화과학자다. 찰스 다윈만 진화과학자요, 윌슨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떼이야르의 진화법칙의 기초 원리는(물론 반대도 있다) 동학의 기초 원리다. 동학은 동양 최초의 창조적 진화론이요, 철저한 생명학이다. 전 세계의 모든 학문을 몽땅 종합하겠다면서 동아시아를 그렇게 몰라서 되겠는가?
  
  윌슨은 백인이니 그렇다 하자. 최재천 씨는 분명 한국인이요, 동양인인데 바야흐로 유럽과 미국 지식계에 동풍(東風, East Turning)이 부는 이때에 자기 고향의 종교와 학문을 모르다니? 그것도 생명사상을? 빈 마음을 부처로 아는 불교를 모르고 생명과학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어려우니 그렇다고 하자! 기철학(氣哲學)은 아는가? 화담 서경덕, 녹문 임성주, 해강 최한기는 아는가?
  
  기는 생명이다. 기의 주체는 신이다. 그러나 신의 주체는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 몸 안에 삼백육십다섯가지 경락(經絡)이 있고 기혈(氣穴)이 있고 그것도 심층과 표층이 있고 단전(丹田)이 있다. 그 생명은 정신과 영을 동반한다. 이제 미국에서 전신두뇌설(全身頭腦說)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영과 정신을 도리어 물질 차원으로 낮추어 물질법칙으로 설명한다? 물질을 영의 법칙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원효에게서 통섭을 빌려왔다고 했다. 원효의 참으로 유명한 말이 있다. 생명과학자라면 당연히 알아두어야 한다. <대승기신론소>의 첫 구절이다.
  
  '목숨을 들어 목숨의 진리에 돌아간다(歸命).'
  
  어디가 그 진리의 자리인가? 삼보(三寶)다. 부처, 부처의 진리, 그 진리를 따르는 스님들.
  
  그 삼보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無)다. 동아시아 생명사상에서는 한결같다. '생명의 기초는 무다'.
  
  참으로 생명을 안다고 하는 자는 그 앎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따위 소리는 안 한다. 부끄러운 짓이다. 그 본질이 비어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학문도 모든 생명도 모든 영과 신과 물질들도 모두 다 '달이 천 갈래 강물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비치는 것(月印千江)'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를 화엄(華嚴)이라고 한다.
  
  그것은 통합이 아니다. 그 따위 물리법칙으로 영을 환원시켜 통합한다? 통합? 정신이 있는가?
  
  '통섭'이라는 개념은 본디 원효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봐서도 그것에 대치하는 그것을 소화하거나 분화(分化)하여 연기(緣起)에 귀속시키는 대응기능을 전제 안 하면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박준건 교수는 '통일자적이고 지배자적인 개념이며, 지식의 대통합을 꾀하는 윌슨의 시도가 가지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반영한다'고 한다.
  
  이 논평이 맞다면 사태는 단순하지 않다. 최재천 씨는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그냥 학자는 아닌 것 같다. 환경연합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발 플럼우드의 주장처럼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일체 존재를 거룩한 우주공동체로 드높이 모시는 문화와 생활양식의 대변혁 없이는 오늘의 지구 생명 대혼돈을 극복할 길은 없다. 지금 거꾸로 가자는 것인가? 다윈은 물론이지만 윌슨 따위가 설 자리는 이 시대 이 세계엔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그래도 해본다고? 무엇을? 에코파시즘을?
  
  최재천 씨 당신은 그럼 그 위기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가? 날더러 모략중상의 천재라고? 상대가 훌륭할 경우에도 시인이 병법을 동원하는 경우는 없다. 안심하라.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사회생물학은 미학에까지도 진화론을 도입한다. '예술적 충동은 결코 인간에게만 한정돼 있는 것은 아니며…인간 이외의 영장류 32 개체가 사육 상태에서 스케치하고 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관찰'.
  
  그런 것은 동양 세계에서는 그저 상식이다. 동물만 아니라 나무나 버섯이나 꽃이나 풀도 그린다. 중요한 것은 기(氣), 더 정확하게는 신기(神氣)를 밝히는 것이다. 미학에 진화론을 도입하는 것을 대단한 업적이라 생각하는 듯 한데 웃음이 난다. 유치해서다.
  
  현대 미학의 방향은 신기요 영성적 생명운동의 감동인데 그 목표는 숭고(崇高)와 심오(深奧)다. 생명의 시대면 당연하다. 동물이 그림 그리는 정도로 미학 운운하는 것 자체부터가 유치하다. 나는 미학전공자다. 나와 생명과 아름다운에 관해 논쟁할 자신이 있는가?
  
  사회생물학에 따르면 기만과 위선은 도덕적 인간이 최소로 억제시켜야 할 절대 악도 아니고 사회진화가 더욱 진전됨에 따라 소멸될 동물적 특성의 흔적도 아니며, 사회생활의 복잡한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쓰이는 매우 인간적인 책략인 것이다.
  
  물론 학문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품위나 격조를 말하기 전에 묻겠는데 이따위 속물성을 변명하는 주제에 무슨 '통섭' 타령인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운영이 요구하는 도덕은 도리어 삶을 위해서 지켜왔다. 도덕은 있어도 없어도 좋은 사치품이 아니다. 삶의 필수품이다. 이런 것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강요하겠다고? 그것도 대학 강단에서? 무슨 염치로?
  
  '무엇이 생명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사회생물학은 서슴지 않고 '유전자'라고 대답한다. 개체란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자손대대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전자뿐이라는 주장이다.
  
  다윈이 무너진 이유가 이따위 엉터리 관점 때문이었다. 개체가 왜 덧없는 것인가? 개체가 덧없다면 자손대대로 영원히 남는다는 유전자 역시 덧없는 것이다. 아니라는 대답을 해보라.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영원주의, 사실 인간 발생 이전으로 진화의 역사가 소급되고 앞으로 생명의 시간이 더 연장된다면 그래도 자손대대로 영원할 것인가? 무슨 만화 같은 소리인가?
  
  유전자가 생명의 주체가 아니다. 과학을 헛했다. 내가 보기엔, 생명의 가장 생생한 주체는 뇌가 아니고 회음(會陰)이다. 왜 그런지는 이제부터 열심히 연구해보라. 생명(生命), 생식(生殖), 배설(排泄), 생산(生産), 운동(運動), 우주 움직임의 표현인 춤과 깊은 신령(神靈)의 샘물이 바로 회음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유전자는 물론이고 현대 자유의 진화론, 자기조직화 진화론에서 강조하는 전 우주 진화사의 '개체-융합'의 동력, 불교의 '대화엄'의 기본 동력이 다 거기 있다. 이제 생물학은 도리어 회음의 정신기능, 영적기능을 연구해야지 허리 꼬부라진 옛 늙은이처럼 고리타분하게 유전자라니! 유전자가 값어치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뜻이다.
  
  생물학적 프랙탈 원리, 불교의 '한 톨 먼지 안에도 우주가 있다(一微塵中 含十方)'는 말을 회음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
  
  우주는 넓이만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의 길이도 의미한다.
  
  개체성과 개인을 중요시하는 촛불과 같은 신세대가 이 말, 즉 윌슨이 의미한 '개체 생명은 별 것 아니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자만이 영원하다'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할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것이다.
  
  우리의 족보(族譜)는 필요한 것이지만 숭배대상은 결코 아니다. 한심한 학문 다 봤다. 이것으로 만 가지 학문을 통섭해? 감히? 학문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그 장엄한 <화엄경>으로도 감히 통섭 못하는 만학(萬學)을?
  
  하나의 유령이 지금 배회하고 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유령이! 그 유령은 또 다시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의 주인은 유전자라는 소리다.
  
  공산당 선언 맨 앞 구절이다. 공산당은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본주의자들을 겁주고 있다. 사회생물학이 유령으로 비유된 까닭은 이들이 필경 생명계를 장악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범행할 것이라는 풍자를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계는 생명의 시대다. 유전자 조작은 이들 같은 공산당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성업(聖業), 영원의 획득 작업이 될 터이다.
  
  사회생물학은 우파 이데올로기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 계급주의, 인종차별, 남녀불평등, 제국주의 등 온갖 정치적 불합리와 보수 중의 극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냥 접수하는 정도도 아니고 미친 듯이 신봉하는 '유전자 결정론'의 전 인류의 삶에 대한 절대지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자인 스펜서는 사회적 적자생존론을 부끄러움 없이 주장했다. 앞으로 이 같은 이론에 심취한 싸가지없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올 것이며 에코파시즘같은 걸 마치 상식으로 여기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부케티츠(Wuketis)'에 의하면 그러나, 진화 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결단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인간은 열린 존재다. 이것이 문화창조력이다. 촛불을 설명 못 한다면 이미 과학도 아니다. 윌슨류는 과학 이전에 한 조잡한 실험실의 꿈일 뿐이다. 그런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문화를 설명하겠는가? 못한다. 촛불은 '오만 년 후천개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이 아니고 영을 동반한 생명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약속했다. 다음과 같다.
  
  오만 년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사상(東學思想)의 중심은 부적 안에 있다. 부적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강령주문(降靈呪文)과 본주문(本呪文)이다.
  
  강령주문은 '至氣今至 願爲大降'이고 본주문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이다. 그런데 바로 앞주문의 '願爲大降'은 '나에게 크게 내리시기를 원합니다'이니, 그 대상은 바로 앞에 있는 '至氣'이다. 이 至氣가 무엇일까? '지극한 기운'인데 이것은 극에 달한, 즉 진화의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 이른 '혼돈한 근원의 우주 에너지'를 말한다.
  
  이 기운의 기능이 바로 '無事不涉 無事不命', 즉 '간섭하지 않는 게 없고 명령하지 않는 게 없다'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의 문맥 안에서 해석하라면 어떤 경우 '통섭(統攝)'이 될 수도 있다. 어찌 생각하는가? 유쾌한가?
  
  동학은 동양 초유의 진화론, 창조적 진화론이다. 그럼에도 유불도(濡佛道)와 기독교를 고대 한국의 선도풍류(仙道風流) 즉, 근원적인 영적 생명사상 위에서 종합한 것이다.
  
  동학은 현대를 오만 년 만에 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예언하고 그 개벽의 대혼란을 새로운 우주로 넘기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요구한다. 그 후천의 혼돈한 우주 기운이 곧 '지기(至氣)'인데 그 지기가 일종의 통섭력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 문자로 '혼돈에 빠져들어 가면서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자체의 질서(混元之一氣)'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하나 묻자. 윌슨의 통섭력은 이 혼돈의 시대에 우주적 혼돈 생명의 근본적인 에너지인가? 유전자가 혼돈적 에너지인가? 뇌기능이고 유전자 공학 영역 아닌가? 혼돈과 관계없다면 영성, 지성의 원동력과 함께 에로스, 카오스, 프랙탈, 퍼지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동역학과는 멀다. 그래도 통섭인가?
  
  동학의 '지기'는 바로 위에 말한 전체 에너지다. 이것이 우리 희망에 따라 우리 몸 안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같다고 생각하는가? 유전자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전 우주의 시커먼 역동적인 힘이다. 이 원초적인 힘, 우주 근원의 혼돈적 '신기(神氣)'인데, 신령이 이미 그 안에 있는데 그 안에 유전자의 근원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있다. 다 있다. 모두 다 있어 없는 것 없다. 극에 달해서 그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 이것만 보면, 이 첫 번째 강령주문만 보면 윌슨의 통섭론이 요구하는 전체주의적, 집체주의적 전 우주 생명적 권력의 최고 영역일 수 있다. 그러면 동학이야말로 윌슨이다.
  
  최재천 씨 같은 소심한 사회생물학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혼혼탁탁하고 무한파괴적이고 동시에 무궁건설적이고도 말세적인 '에코파시즘'의 기본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즐거우신가? 고소하신가?
  
  유전자 따위로 우주적 전체주의가 가능하기나 한가? 짱구돌리기로 깨작깨작하지 말라! 그까짓 것 가지고는 블랙홀하나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런데도 도리어 그와 정반대인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번째 본주문의 맨 앞 글자 '모심' 이후는 바로 그 무시무시한 극단, 즉 말세의 혼돈적 질서인 대규모 에너지를 모시고 살리고 그로부터 우주와 생명의 이치를 크게 깨우쳐 스스로 신이요 부처와 같은 진화하고 신령하면서 동시에 텅 비어있는 성스러운 무극(無極) 무궁(無窮), 대화엄(大華嚴),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 만물해방(萬物解放), 대개벽(大開闢), 만사지(萬事知)에 도달한다는 것. 그 때 인간과 생명과 온 사물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개체개체가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제 스타일로 바로 그 극에 달한 오메가포인트의 통섭의 혼돈적 질서 그 자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내용이 전혀 다르더라도 '無事不涉 無事不命'이 '統攝'과 비슷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나 물어보자. 당신들 목적이 통섭에 의해 고통에 빠진 인간과 생명과 정신과 영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함이어서 사회생물학을 붙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제니까, 또 어쩌다 돈 들여서 배운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이 조그만 '미국과학 식민지'에 와서 한 번 휘젓고 싶어서인가?
  
  대답하는 것이 의무다. 아니면 아예 이제부터 입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 세상은 사정이 없다.
  
  장회익 씨의 '온 생명'에 관해서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자기 자신이 방정스럽게 날더러 한 말 '어림없다'를 되돌려주는 정도 이외엔 없다. 그만큼 볼품이 없다. 떼이야르나 통섭에 관해 말해버린 에코파시즘 위험에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말려들었을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심지어 그 책을 쓰기 위해 번지수가 맞지도 않은 주역이며 뭐며 동양 사상을 그야말로 주간지 기자 용어로 '도둑질'해 온 사냥 과정까지도 주역 등을 다루는 데에 수십 년 주역 전문가도 내내 조심하는 괘사 해석을 제멋대로 기독교식으로 천박하게 해석해 제치는 것이나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도대체 생물학을 물리학 다루듯 했으니 대운하를 토목 공사하듯 해치우려 했던 어떤 사람과 닮아도 보통 닮은 게 아니다.
  
  역시 개인의 낱생명은 개똥도 아니고 거대한 온생명의 그 어마어마한 중추신경계에 의해 조정되고 통제되는 불쌍한 낱 생명이 그저 불쌍하고 불쌍할 뿐이다.
  
  학문으로서의 체계, 격조 그런 건 있지도 않지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기다. 팬이 많다. 혹시 누가 아는가? 팬들은 그 책에서 '에코 파시즘' 아닌 '에코 피스'를 찾을런지?
  
  한 구절만 보자. 대강 요약한다. '낱생명도 유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온생명이요 온생명의 중추 신경계다.'
  
  마치 자기가 중추 신경계 자체인 듯 자기가 다른 것을 화안히 보고 있는 듯 말한다.
  
  '유용하긴 하지만?'
  
  낱생명이?
  
  유용(有用)? 쓸모가 있다고?
  
  쯧쯧쯧-
  
  문제는 자기 자신도 낱생명인데 함부로 유용, 무용한다는 것이니 과연 생명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삶을 '유용' '무용' 운운하는 자는 도대체 누군가? 제가 신인가? 하기야 전편을 통해서 온생명 쪽에서 낱생명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거룩하다. 도무지 학문이나 과학 이전에 신학 짝퉁 같아서 웃음이 난다. 노코멘트가 나을 것이다.
  
  박이문(朴異汶) 선생이라고 계신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유럽 철학, 과학, 문학을 수십 년 공부하고 가르친 유럽통이시다.
  
  장회익 씨의 큰 생명에 대한 장광설을 내내 듣다 듣다 못해 끝내 한마디,
  
  '당신이 그걸 봤어?'
  
  장회익 씨의 입이 그 때 조그맣게 얌전하게 오므라드는 걸 보고
  
  '아하, 역시 임자는 유럽이로구나!'
  
  나에게 방자하게 '어림없다'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장희익 씨는 분명 '우리의 전통 학문이 말해주는 삶의 지혜와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온생명'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새 문화 속에 수용하는 것인가가 문제'라고 걱정한다. 초심이겠다. 이 걱정의 의미만은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그는 근본을 모른다. '온생명'의 고향인 서양은 우주의 조리(條理)와 인간의 윤리(倫理) 사이에 거대한 차별이 있어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미셸 세르'처럼 '생명 계약'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상에서는 우주의 조리와 인간의 윤리는 일치한다. '매개(중추신경계 따위)'나 '계약'은 필요 없다. 장회익 씨는 이 근본적 차이를 모른다.
  
  하긴 세상이 다 그렇다. 한때 최재천 씨가 나를 자기가 기획하는 생명 공부 모임에 초청해 말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잠깐 사회생물학 비판을 한 일이 있다. 그는 그 '잠깐'도 못 견디고 그 뒤로부터 내가 나온다는 자리에는 어디든 안 나온다고 공언했단다.
  
  왜? 왜 그렇게 신경질인가? 무슨 목적의식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부덕(不德)하게 사는 사람은 아니다. 아무나 비판하고 욕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 촛불과 관련해서 연속적으로 쓰거나 말하는 이 경우는 전과 너무나 다르다. 오래오래 깊이깊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창을 당파창을 날카롭게 세워 깊이 찔러야 한다. 세워야 한다.
  
  개벽의 때가 가깝다.
  
  일단 오류는 가차 없이 비판해야만 만인이 다 사는 길이라는 개벽의 때에 다 자기를 개혁해서 오롯한 모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새 세상으로 나아갈 자격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개벽은 분명 무자비하고 참혹한 혁명이 아닌 것이다. 또 이따위 엉터리 생명 장사꾼들이 제압되지 않으면 개벽은 혁명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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