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이 '희대의 사기꾼'? 아니 '애국적 혁명가'!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김기협의 서평에 답한다
김옥균이 '희대의 사기꾼'? 아니 '애국적 혁명가'!
이 글은 지난 6월 24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45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상임편집위원의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서평에 대한 저자의 반론이다. (☞관련 기사 : 김옥균은 '애국적 혁명가'? 아니, '희대의 사기꾼'!)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박은숙 지음, 너머북스 펴냄)는 서세동점의 물결이 거세던 1851년에 태어나 쇄국-개항-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경험하고,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생을 마감한 김옥균의 44년 생애를, 시대와 권력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접근해보려 한 시도였다.

지방 수령의 양자로서 유학적 소양을 쌓던 성장기, 과거 시험 수석 합격자로서 정·관계 진출 및 관료로서의 활동, 개화와 자주 독립을 향한 열정과 갑신정변, 망명 시절의 고뇌와 조선을 향한 일편단심, 경계를 넘어선 인간관계 등을 다루었다.

이를 통해 격변의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해 나가는지, 야망의 인간이 새로운 시대와 어떻게 조응해 가는지, 시대와 인간의 상호 작용을 엿보려 했다. 김옥균은 전환기 조선의 길로 개화와 자주 독립의 노선을 제시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했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기획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운명을 건 모험적 혁명가로서의 길을 갔다.

한편으로 그는 주도면밀한 분석과 전략에 소홀하여 대사를 그르치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얍삽하게 시세(時勢)를 저울질하거나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시대적 과제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김옥균은 우리가 첫발을 내딛었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전통과 근대라는 이중의 부조리와 시대적 고민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지난 6월 24일 '프레시안 books' 45호에 실린 김기협의 서평은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평가의 또 다른 단면을 읽을 수 있었으며, 역사학은 물론 '누가' '언제' '왜' 등과 같은 근원적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역사학이 기록물(문헌 자료·금석문 등)의 '사실' 확인 없이 '감'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서평의 견해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박은숙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그는 김옥균을 '역사의 혁명가'라기보다는 "희대의 사기꾼"이나 "절세의 풍류객"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다. 갑신정변 와중에 김옥균이 일본공사관에 들른 것과 관련하여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변 자금과 관련하여서는 박영효 주택의 매도가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해 왔던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나 또한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대부분 '정황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

그간 김기협은 역사학계의 갑신정변과 김옥균 등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서평의 지적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이해하고, '정황'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해석을 토대로 생산적 담론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21세기 독자들의 갑신정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김기협이 제기한 '답답'한 문제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 공사가 갑신정변의 주체였는가?

김기협은 그간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역사학계의 '지독한 편파성'에 몹시 불편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것이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주장한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관에 들른 부분에 대한 것으로,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한다. 곧 갑신정변의 주체는 일본 공사였고, 김옥균 일당은 세부적인 지시를 받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훨씬 그럴싸한 설명이 저자에게는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하면서 저자의 아둔함을 나무란다. 그러면서도 "갑신정변이 일본공사관의 작품이라는 확인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이 견해는 갑신정변이란 개화당이 주체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기존의 연구 성과와 자료들의 기록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그간 숱하게 논의되어 왔던 갑신정변의 근대 변혁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개화당과 그 사상적 기반인 개화 사상의 틀을 일거에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여러 문제들이 지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황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는 왜 갑신정변이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이 주도했다는 그간의 숱한 연구 성과들과 당대의 기록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연구 성과는 차치하고, 당대의 자료들을 보자. 정변 당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와 <일성록>에는 "역당(逆黨) 김옥균 등이 난을 일으켜 어가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민태호·조영하·민영목…을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수적 유학자인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박영효·김옥균 등이 난을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고 임금을 경우궁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찌감치 정변에 책임이 없다고 발을 뺏고, 군대 동원도 고종의 요청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은 정변의 주체를 어떻게 보았을까?

10월에 조선에 유신당(維新黨)의 난이 일어났다. (…) 유신당의 우두머리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모의하여 정권을 잡은 자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청사고(淸史稿)>

심지어 원세개는 "10월의 변란은 주견(主見)이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협의했으면, "중립을 지켜 그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매천야록>).

이처럼 당대의 공적 기록과 사적 일기, 외국인의 기록들 또한 모두 갑신정변의 주체를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인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도 김기협은 당대의 기록들과 많은 선행 연구자들의 견해를 믿지 않고, 정변의 주체를 '일본 공사'로, 갑신정변은 일본 공사관의 작품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식민사학'을 벗어난 것일까? 식민사학이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식민사학의 논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무조건 반대로 해야만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일까? 그러면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부르주아 혁명, 애국적 혁명가로 바라보는 북한의 인식도 식민사학의 일환인가? 나로서는 그의 시각이 오히려 답답하다.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하시는 분의 말씀이라 더욱 곤혹스럽고 당황스럽다.

일본 공사가 정변을 '종용'했을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일본 공사가 곧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김옥균과 개화당원들이 일본 공사의 '종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들도 아니지만 말이다. 망명지 일본에서도 조선의 자주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버림을 받았던 김옥균이 공사의 '지시'를 받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갑신정변 3일 동안의 김옥균 등 주도 세력과 행동 대원들의 행적을 찬찬히 추적해 본 결과, 갑신정변의 주체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세력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갑신정변 연구>(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추안급국안 중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진술 기록>(아세아문화사 펴냄)).

다만 당시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 이후 위축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정변을 지원했을 것이고, 김옥균 등은 정변 성공을 위해 (결국 패착의 카드가 된) 일본의 군사 지원을 받아들였다고 본다. 동상이몽의 카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효 저택 매도,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인가?

나는 박영효 집 매도 자금의 정변 투입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그는 이를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박영효의 집을 일본에 판 것을 두고,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왜 팔았지? 집을 비워줬나? 공사관에서 어떤 용도로 썼나? 하고 묻고 있다. 이 또한 '그럴싸한' 추측이다. 어쨌든 하나하나 짚어보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박영효 가옥 매매는 당시 일본 서리공사 시마무라(嶋村久)와 조선정부 외아문독판 민영목 사이에 공문서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구한국외교문서 1권>, 106쪽). 양국 간 공식 문서로 처리된 사안이 '위장'용이었을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그것도 '역적'들의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으로 말이다.

왜 팔았을까? 그에 대한 직접적 설명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큰 목돈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가옥을 판매한 시점이나 박영효의 현실적 입장 등을 고려해 보면, 그의 위장설보다는 정변 자금설이 훨씬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집을 비워주었나? '비워주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지만, 집을 팔았으면 당연히 집을 비워 주는 게 상식이 아닐까? 김기협은 이러한 상식을 인정하지 않고 '위장'으로 해석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상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영효의 집을 매입한 일본 공사관은 3월 21일(양력 4월 16일) 그곳으로 이전했다. (개항 후 일본공사관은 淸水館(현 천연동)에 있었는데, 임오군란 때 민중의 공격으로 불에 타버렸다. 그 후 남부 진고개의 李鍾承 집(현 충무로2가)을 임시 공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883년 말 박영효의 저택을 매입하여 이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15만원을 투입하여 오구라(大倉組)에게 맡겨 공사관 건립 공사를 시작했으며, 9월 16일(양력 11월 3일) 완공했다(<경성부사 2권>, 573~575쪽). 이 건물을 지어놓고 일본인들은 "경성 최초의 양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으나, 한 달 후 갑신정변 때 민중들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당시 박영효의 집은 대지가 2177평에 달하였는데, 현 천도교중앙대교당 부지(1215평)의 2배 정도에 달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1884년경 박영효의 부인과 가족은 압구정 근방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윤치호를 비롯하여 개화당 동지들이 압구정으로 박영효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시국을 논하곤 했던 기록이 나온다.

양국 간 외교 문서와 일본 공사관의 이주, 공사관 건물 신축 등을 보면, 박영효 가옥의 매도는 위장이 아니라 실거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자객' 쇼시마를 그대로 드러내다!

김기협은 조동걸의 책을 인용하여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했던 것처럼 똑같이 무시했다고 나를 질책한다.

나는 일본 자객의 참여를 무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료에 등장하는 참여자 이름까지 밝혔다. 책 104쪽을 보자.

민영익이 밖으로 나오자 김옥균의 핵심 참모인 유혁로(柳赫魯)가 이끄는 일본인 자객 쇼시마(小心和)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먼저 찔렀고, 그 옆에 있던 행동대원 윤경순과 이은종도 민영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실제 갑신정변에 참여한 일본인 자객은 한 사람 보인다. 그것도 우정국연회장에서 민영익을 공격할 때만 보이고, 그 이후 일본인 자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변 도중에 죽지도 않았다. 각종 연대기 자료는 물론, 갑신정변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행동대원들의 행적과 진술을 꼼꼼히 검토한 결과다.

또 그는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부산에서 조선어 배우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한 직접적 자료가 있는지를 되묻고 싶다. 서울을 무대로 한 정변 과정에서 일본 청년의 '대거 참여'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갑신정변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울과 각지에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으며, 백성들은 "왜놈 죽여라, 역적놈 잡아라"고 외치면서 길거리를 휩쓸었고, 일본인과 개화당 관련자들을 살해하려 했다. 이때 맞아죽거나 칼에 찔려 죽은 일본인들이 38명에 달했으며, 수원에서 상경하던 군인 이소바야시(磯林眞三) 등도 있었다. 혹 백성들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들에 대한 설이 잘못 전해진 것 아닐까 짐작해본다.

김홍집 vs. 김옥균

나의 김홍집 '처신' 발언에 '화'가 났다고 한 것을 보면, 김기협은 김홍집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 우선 그는 정변 때 인사에서 김홍집의 한성판윤 임명을 두고 '배려가 아니라 재앙'이라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정변이 실패한다면….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인사를 단행할 단계에서 김옥균은 정변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꼴 보기 싫은 놈'에게 악의적으로 '감투'를 씌운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본 김옥균은 적어도 그렇게 옹졸한 인간 유형은 아니다.

그리고 김기협은 윤치호의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윤치호와 김홍집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윤치호는 거의 매일 개화당 세력과 정사를 의논하고 어울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개화당원으로 취급했지만, 김홍집은 연배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개화당 세력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는 김홍집을 직접 연구한 바 없지만 그의 이력을 대략 들여다보면,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귀국할 때 중국인이 지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친(親)중국·결(結)일본·연(聯)미국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유교 질서'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여 만인소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갑오개혁 때는 일제의 무력으로 탄생한 군국기무처 총재가 되어 각종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왕권 축소와 신분제 폐지 등 '유교 질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가 주도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을 지키려는 고종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주장했던 변법적 개혁 노선과 거의 흡사했다.

나는 일제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점은 안타깝지만, 김홍집 내각의 개혁에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다만 김홍집의 일련의 행적은 김기협의 말처럼 '신하의 본분을 지키는 자세'나 '유교 질서 속에 죽음을 맞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김홍집이 왜 '고종의 살해 명령'을 받았는지,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살해되었는지, 그 배경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홍집의 행적 속에서 '유교 질서'를 지키려 한 것도, '신하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시세(時勢)'에 영합한 기회주의적 처신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하여 김홍집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세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고, 김옥균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유교 질서를 버린 김옥균 vs. 유교적 전통 위의 개혁 추구

김기협이 말하는 '유교 질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대략 당대를 지배하던 성리학적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매우 강조하는 '유교 질서'에 관련된 언급을 보자.

저자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하는 100년 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니 개화파의 정책과 노선이 유교 질서를 해치는 측면에서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고, 김홍집이 유교 질서에 목숨 바친 의리를 김옥균에 대한 개인적 의리보다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충효를 실현하려 했던 김옥균의 유학자적 면모에 주목했다. 갑신정변 또한 유교적 질서를 벗어나 단절된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전통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 개혁이었음을 밝혔다.

김옥균이 유교의 공리공론을 경계하고 모순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유교의 부정과 파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김옥균·박영효 등이 유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려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옥균은 중국과 조선의 옛 전통을 예로 들어 개혁의 합당함을 설득하려 하였으며, 박영효는 "유교를 다시 치성(熾盛)하게 하여 문덕(文德)을 닦으면, 국세(國勢)가 또한 이로 인하여 다시 성(盛)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문벌 양반 출신들로서, 태어날 때부터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예의와 법도를 익히고, 유교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 그들과 유교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71~73쪽)

일반적으로 갑신정변은 전통적 사회 제도와 조직, 사상까지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개혁안들은 전반적으로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 한 것이었으며, 기존의 봉건적 지배 질서를 파괴·전복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제도와 틀을 유지하면서 근대적 제도와 운영 방식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도입하려 하였다. 그들은 개량적 개혁의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118쪽)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김옥균 등에 대해 갖고 있는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지독한 편견과 달리, 김옥균의 유학자로서의 면모에 주목하고, 유교적 전통의 토대 위에서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 한 갑신정변의 성격을 강조했다. 그런데 평자는 왜 나의 견해를 전통과의 단절론에 연결시키면서 식민사학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오직 권력만을 좇았던가?

갑신정변의 개혁안인 정령(政令)은 '마구 써 갈긴 것'에 불과한가? 아니다. 자신들의 구상을 조율한 것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당시 정령은 국왕의 명령인 '전교(傳敎)'의 형태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개화당 세력과 이재원 등의 종친, 신기선 등의 관료들이 모여 박영교 등이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다듬었다. 그의 말처럼 '마구 휘갈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혁 구상을 형식과 절차에 따라 재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망명 시 동지들 간에 신분을 경계로 차별한 것은 이규완의 지적대로 '계급 사상의 폐단'을 바로잡는 행태가 아니었으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세칭 '아랫것들'이 '감히' 대감들에게 차별적 대우에 항의하고, 대감들 또한 '아랫것들'의 문제제기에 수긍하고 사과할 줄 아는 평등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참고로 개혁안의 '인민평등권' 주장은 인권의 측면보다는 부국강병 달성을 위한 국가 경영자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병역·조세·교육의 평등을 우선 시행하려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기협은 "민영익의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 김옥균에게는 최대의 동기였다"고 한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 무엇의 동기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갑신정변의 최대 동기를 민영익에 대한 질투심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나는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라면 김옥균의 민영익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민영익과 민 씨 일파의 김옥균에 대한 질투심이 작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정치 마당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민영익과 민 씨 일파는, 고종의 지원을 받아 나날이 영향력을 확대시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해 오는 김옥균과 개화당 일파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에 치도사업(治道事業)과 신식 군대 양성 등 개화당의 정책을 사사건건 중단시켰고, 특히 김옥균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러한 정황은 "민영익·윤태준 등 민 씨 일파가 고종과 소원해졌다"고 한 원세개의 보고문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김옥균의 일생이 수미일관 권력으로 설명된다 했다. 상당 부분 공감한다. 시대불문하고 정치 무대에 선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권력을 향해 움직인다. 자신 또는 당(黨)의 정책구상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권력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어떤 정책을 폈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인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지 등의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옥균은 개인의 부귀영화보다는 조선의 부국강병, 개화와 자주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정황'에 기초한 '식민사관' 비판과 그 위험성

김옥균의 사상과 개혁 구상의 핵심은 '개화'와 '자주 독립'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를 지배한 화두였다. 또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된 당대의 시대적 과제이자 조선이 나아가야 할 지표이기도 했다.

김옥균이 추구했던 개화와 자주 독립은 오랫동안 "반(反) 유교, 전통과의 단절, 친일"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기협의 지적대로 "식민사학이 오랜 기간에 걸쳐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하고, 김옥균을 근대성의 선전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사학이나 김기협이나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시각은 "반(反) 유교, 전통과의 단절, 친일"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평가는 상반된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옥균은 유교의 공리공론을 비판하고 실사구시를 강조했지만, 결코 유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최후 순간에도 <자치통감>을 읽을 정도로 유학자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갑신정변 또한 기존의 제도와 틀을 유지하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제도와 운영 방식을 선택적으로 도입하려 했다.

친일 문제와 관련하여 갑신정변 때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김옥균은 외세의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끌어들였겠지만, 아무리 '주체적'이라 해도 외세를 끌어들인 위험성은 비판받아야 하며 저자 또한 비판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조선에 식민지적 권력을 행사하는 청을 몰아내기 위한 반청(反淸) 독립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또한 굳이 친일·친미 등 '친'자를 붙이자면, 일본 공사보다는 미국 공사와 더 친했고, 친미 쪽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망명 후에는 일본 정부의 냉대 속에 이곳저곳으로 유배되면서 냉엄한 국제 질서를 다시 보았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반일적' 성향을 띠어갔다. 또한 중국을 맹주로 한 조선의 중립국 방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로서는 김옥균의 주체적 자주독립론의 '위험성'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옥균 암살 모의를 방조하고 협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책의 곳곳에서 강조해 왔다. 하지만 김기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화파를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갑신정변의 주체는 일본 공사이며 김옥균은 일본 공사의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주장의 근거가 '정황 증거'와 '감'이라는 점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김기협이 수시로 들이대는 '식민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치밀한 논증과 자료적 뒷받침 아래 논리적 반박이 이루어져야만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정확한 논증과 자료적 뒷받침 없이 '정황 증거'와 '감'을 들이댄다면, 오히려 상당한 실증적 자료에 기반 한 식민사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기협의 '정황 증거'에 의한 식민사학 비판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식민사학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매우 위험한 태도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사사건건 식민사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처럼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바라보는 입장은 '거의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다. 김기협은 그것을 '유교 질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언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를, 전환기 근대 변혁 운동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방법론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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