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 말의 진심은?
[장석준이 사랑하는 저자]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 말의 진심은?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책 제목은 그 책의 내용으로 인도하는 첫 번째 안내판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제목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것만으로 책 내용을 지레 짐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제목이 안내판 역할을 하기보다는 장벽 노릇을 하기도 한다. 제목만으로 그 책을 어떤 전형적인 입장으로 분류하게 하고 독서 자체를 꺼리게 만든다. 이것은 특히 제목만 먼저 알려진 외국 책들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국내에서 이런 대접을 받은 대표적인 책들 중 하나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이다.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원전 출판 이후 30년이 지난 2011년이지만, 그 제목만은 좌파 사회과학 서적 독자층에게 그 전부터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영어 번역본은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이 던져주는 인상은 한 마디로 좌파 정치의 근간인 노동 운동에 대한 부정이고 그 청산이었다.

게다가 이 책의 국역 이전에 그 내용을 단편적으로 소개, 인용한 저자들(대표적으로,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손호철 옮김, 창비 펴냄)의 엘렌 메익신스 우드)이 이 책의 함의를 그런 투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르의 이 대표작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격하게 진행되던 운동권 논쟁 과정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한 사례쯤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누군가에게는 읽지 말아야 할 책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생태 사회주의'로 기억되어야 할 저자, 앙드레 고르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한때 앙드레 고르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있기는 했다. 한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고르의 대표작을 출간하겠다는 광고를 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책은 나오지 않았다.

정작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에 그가 아내 도린과 동반 자살하면서였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자살한 저명 좌파 사상가"는 협소한 사회과학 서적 독자층을 넘어서 호기심을 끌 만한 주제였다. 그래서 (임희근 옮김, 학고재 펴냄)라는 제목을 단, 아내 도린에게 바치는 사랑의 편지가 고르의 첫 번째 한국어 번역 저작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이 관심이 일회적인 에피소드에 그치지 않고 그의 다른 저작들이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망한 지 1년 뒤에 고르의 유작 <에콜로지카>(임희근 외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가 번역된 데 이어 2011년에는 드디어 그의 대표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 한국 독자들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

막상 우리에게까지 와 닿은 이 책들의 메시지는 책 제목이나 비우호적인 인용자들을 통해 어림짐작하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저 악명 높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보자. 과연 이 책은 마르크스의 노동 계급 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 운동에 절교장을 던지고 혁명이라는 목표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식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결론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노동 계급 운동'을 아프게 헤집지만 그것은 오직 현실의 '노동 해방 운동'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청산이고 탈자본주의 변혁의 포기를 뜻한다면 고르는 결코 그런 의미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고르의 책은 도리어 마르크스주의의 화석 같을지 모른다. 여전히 '노동 해방'을 이야기하며, '계획 경제'를, '자주 관리'를 주창하니 말이다.

고르의 비판이 과녁으로 삼은 것은 사실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어떤 핵심 전제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서론'에서 저자는 이것을 두 개의 명제로 압축, 정리한다. 하나는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력 발전이 탄생시킨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의 사회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8쪽). 고르가 작별을 고하려는 '노동 계급'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시키는 생산력의 담지자'인 노동 계급, 그래서 '사회주의의 대문자 주체로 예약되어 있는' 노동 계급이다.

고르는 이 명제들을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의 뼈저린 경험과 대면시킨다.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력에는 자본주의의 본성이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그 생산력은 사회주의적 합리성에 따라 경영될 수도, 작동될 수도 없다"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은 이것을 이용하는 노동자 집단이 생산력을 직접 소유하지 못하게끔 이루어져 왔다"(9쪽)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 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을 이야기하며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을 부르짖던 이 마르크스의 후예는 이반 일리치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루돌프 바로 같은 생태주의자와 만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노동자 자주 관리'를 핵발전소를 전력회사 사장 대신 그 노동자들이 직접 운영하거나 거대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속도를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는 것 따위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자주 관리'는 오히려 그런 핵발전소나 대공장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노동자들의 삶에 자율성을 회복하는 과제로 다가오게 된다. 노동자가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키며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삶의 마당 자체를 되찾는 문제가 된다.

즉, 프롤레타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고르가 현실의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대안은 생태주의화된 사회주의, 즉 '생태 사회주의(혹은 녹색 사회주의)'였다. 이제야 한국의 독자들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랑스 지식인, 장 폴 사르트르의 총애를 받던 사상가이자 유럽 여러 나라 좌파 정당과 노동 운동의 존경받는 멘토였던 실천가의 메시지가 속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임을 알게 되었다. 진실의 확인으로서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한국 사회에 도착한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더욱 수신되어야 할 고르의 메시지들

적시에 도착한 메시지라는 것은, 가령 고르가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대신 새로운 변혁 운동의 주체로 주목하는 '새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년 전의 한국 사회라면 이 '새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낯설어 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고르가 말하는 이 '새 프롤레타리아',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110쪽)이 누구인지 모를 한국인은 거의 없다. 그리고 노동 운동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운동가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앙드레 고르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를, 심지어는 이 체제를 대체하겠다는 세력까지도 몰아넣고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에 상상력의 신선한 틈을 열어준다. 모두가 다 고르의 결론에, 그러니까 노동 시간의 획기적 단축으로 모든 시민이 다 일종의 파트타임 노동자가 되고 소득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지급하는 시민 기본 소득으로 해결하는 사회에 곧바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적어도 고르 식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빠는 자가용 승용차 타고 회사에 가서 사장을 투표로 뽑고 엄마는 그 시간에 적정 수준의 급여로 집안일을 꾸리면 그게 대안 사회인 것일까? 주주나 재벌 회장이 아니라 이제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브(SUV) 차량을 판매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누구에게나 다 아파트 입주권이 돌아가면 그게 사회주의인 것일까?

아니, '사회주의'니 '코뮌주의'니 하는 거창한 말을 굳이 들이밀지 않더라도 좋다. 이제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로 예정된 박근혜까지 주창하는 '복지 국가'만 하더라도, 과연 박정희식 근대화가 만들어놓은 '수도권 공화국', '토건 경제' 그리고 '학벌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 여기에 복지 정책 몇 개 더한다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을 제대로 던지고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에 신선한 바람 구멍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고르가 필요하다. 앙드레 고르의 저작들(가령, <경제적 합리성 비판>이나 <자본주의, 사회주의, 생태주의> 등)이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하고, 고르의 생태 사회주의 친구들의 고민과 제안들(가령, 크리시스 그룹의 <노동을 거부하라!>(김남시 옮김, 이후 펴냄)나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 숭배>(김홍식 옮김, 바오출판사 펴냄) 역시 더 많이 읽혀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지구 생태계의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 시대에 우리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독서와 토론 그리고 실천의 광맥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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