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노인들의 싸움은 '서울 노예 해방' 선언!
[장석준 칼럼] 한국 사회에 필요한 또 다른 혁명
밀양 노인들의 싸움은 '서울 노예 해방' 선언!
한국전력은 고리 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에 공급하고자 밀양에 기어이 송전탑을 세워야겠다고 한다. 오랫동안 땅과 하나 되며 살아온 주민들이 목숨 걸고 맞서도 아랑곳없다. 농민들을 몰아내고 나리타 국제공항을 건설하려는 정부에 맞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계속된 일본의 산리즈카 투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이제 제주도 강정에 이어 경상남도 밀양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사실 한국전력의 완강한 태도에는 이들이 주장하는 수도권 전력 공급 말고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은 이명박 정부가 아랍에미리트와 맺은 핵발전소 수출 협약과 연관돼 있다는 게 이미 언론 보도로 드러났다. 협약상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할 원자로를 2015년까지 한국에서 먼저 가동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러자면 밀양에 지금 반드시 송전탑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력 대란 해결 운운 하던 주장과는 사뭇 다른 이유다.

그럼에도 한국전력의 수도권 전력 공급론은 여전히 많은 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밀양 주민들이 "사람이 전력보다 먼저!"라고 하면, "사람이 살기 위해 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송전탑 건설 지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의 "사람"은 물론 밀양 주민들이 말하는 "사람"과는 같지 않다. 그것은 결국 수도권 주민(나도 그 중 한 명이다)이다. 어쩌면 '먼저 살아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맞서 송전탑 건설 반대 진영에서는 이런 외침도 나온다. "그럴 거면 차라리 수도권에 핵발전소를 지어라!" 그러면 대번 이런 반박이 되돌아온다. "어떻게 대도시 인근에 그런 시설을 짓겠는가." 이런 반박에는 '대도시'와 '대도시 아닌 곳' 사이의 묘한 구분이 깔려 있다. 아니,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차별이다. 역시 '먼저 고려해야 할' 지역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근본 모순을 뼈아프게 확인한다. 그것은 바로 수도권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불평등이다. 한반도 남쪽은 수도권이라는 거대 도시에 나머지 지역들이 철저히 종속된 형태로 공간이 편제되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 하나가 버티고 있고, 나머지는 이를 지탱해주는 배후지일 뿐이다. 서울에 전력을 대기 위해 영남 바닷가에는 핵발전소가 더 생겨야 하고 이를 위해 밀양은 전기 길목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 이런 주종 관계 외에 다른 무엇을 떠올리기란 힘들다.

물론 배후지 안에도 다시 위계가 있다. 서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근 지역에 비해 인구 과밀인 대도시들이 있다. 이들 대도시를 에워싼 나머지 지역은 이 대도시를 지탱하는 이중의 배후지 역할을 한다. 거대 도시와 나머지 지역 사이의 주종 관계가 각 권역에서 좀 더 작은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력도 수도권 전력 공급론만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지자 새 카드로 이번에는 대구광역시에 전기를 대기 위해 밀양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꺼내드는 형편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러한 중층의 지역 간 불평등 구조가 우리가 살아왔고 또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방식의 공간 편제를 상상할 틈이 없다. 우리를 보다 행복하게 할 삶의 다른 공간적 단위가 가능하다는 예감이 끼어들 겨를이 없다. 그래서 수도권은 더욱 더 집중화되고 지역은 점점 더 공동화된다.

ⓒ연합뉴스

300여 년 전, 장자크 루소는 당시 막 등장하던 중앙 집권 국가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개탄했었다.

"도시의 성벽은 시골집들의 잔재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명심하라. 수도에 궁전이 세워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나라 전체가 누옥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회계약론>(김중현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132쪽)

이 탄식은 지금 영락없이 우리의 것이다.

한국 사회를 고통스럽게 하는 다른 모순들과 마찬가지로 지역 간 불평등 역시 그 발단은 박정희 시대에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압축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의 산물이다. 비록 조선 시대나 일제 치하의 영향도 있지만, 수도권이 나머지 지역의 자원과 잉여를 게걸스레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구조가 본격 등장한 것은 압축 성장을 통해서다. 따라서 이 거대한 소용돌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덫 안에 갇힌 신세일 뿐이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인 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 박정희가 열어놓은 역사의 철길에서 한 치도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진짜 문제다. 밀양 송전탑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아직 우리가 박정희의 아이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우회하고는 '복지 국가'도, '노동 해방'도 공허하다. 보다 바람직한 사회, 보다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할 공간 단위에 대한 고민을 빼놓을 수 없다. 수도권에 대해서 나머지 지역이, 대도시에 대해서 나머지 지역이 사실상의 식민화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정부의 복지 지출만 늘어난다고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상태 그대로 노동자, 민중 세력이 권력을 쥔다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 사회 대변화의 목록에는 이제 수도권 도시 국가의 타파가 맨 위 항목들 중 하나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이러저런 현대의 사회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위에 인용한 루소가 더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루소의 이상은 '소국'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오직 소국에서만 민중의 참여와 자치에 기반을 둔 제대로 된 민주 공화국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국가들을 그런 이상적 소국으로 분할하기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루소가 제시하는 차선책은 이렇다.

"그렇지만 만일 국가를 적절한 크기로 축소시킬 수 없다면, 아직 한 가지 해결책이 남아 있다. 수도를 절대로 허용하지 말고, 정부를 각 도시에 번갈아 소재시키며, 국가 회의를 돌아가면서 소집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

영토에 골고루 주민이 살게 하라. 어디를 가나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라. 어디에서나 풍요와 활기를 똑같이 향유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가는 가장 강력하게 되는 동시에 최대한 가장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사회계약론>, 132쪽)


요즘 말로 하면, "자립 가능한 지역들의 연방"을 만들자는 것이다. 루소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해서 이게 곧 농촌 사회로 회귀하자는 주장인 것은 아니다. 루소는 "인민의 힘은 집중될 때에만 효과적"(<사회계약론>, 123쪽)이라고 단언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쨌든 도시적 삶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이게 우리에게 친숙한 거대 도시는 분명 아니다. 루소식 대안은 주위 농촌과 통합돼 자립적 생활권을 이루는 중소 도시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이런 지역 자립 상태로 바뀌기란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세대가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출발점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사회의 하부 구조 중에서도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하부 구조는 에너지 확보 체계다. 지역 자립은 분권적 에너지 확보 체계를 요구하며, 지금까지 인간이 아는 에너지원 중에서 이런 체계에 적합한 것은 재생 가능 에너지, 그 중에서도 태양 에너지다.

화석 에너지나 핵 발전에 기반을 둔 중앙 집권형 에너지 체계로부터 태양 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자립형 에너지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또 다른 혁명, 지역의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당장 내년(2014년) 지방 선거에서 주요 쟁점들 중 하나로 부상해야 한다. 밀양의 대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에게 한꺼번에 풀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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