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버린 대한민국, 천 년의 유산을 잃다
[동아시아를 묻다] 개화(開化)와 심화(深化)
한문 버린 대한민국, 천 년의 유산을 잃다
꾸억 응우(quốc ngữ)와 국어(國語)

베트남어는 묘하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어려운 것은 어순이 다른 탓이다. 형용사가 명사 뒤에 자리한다. 머릿속으로 한 차례 순서를 바꾼 다음에야 입술이 떨어진다. 성조는 또 여섯이나 되어서 혀 놀림은 난처하다. 그러면서도 쉽다. 문법은 단순하고, 어휘는 익숙하다.

단어의 70퍼센트가 한자에서 비롯한다. 한자가 어떻게 발음되는지 감을 잡으면 어휘는 금방 늘릴 수 있다. 말하기는 힘들고, 읽기는 수월한 것이다. 남방의 오스트로아시아 어족(Austroasiatic languages)에 속하면서도, 중화 문명의 유산을 상속한 베트남의 독특한 지리 역사의 소산이다.

한편으론 심란하다. 로마자 표기가 현재의 베트남어, 즉 '국어(quốc ngữ)'가 되어간 사정이 고약하다. 프랑스 식민 통치의 직접적 산물이다. 프랑스가 다낭(Ðà Nẵng)을 포격하며 베트남에 진입한 것은 1858년이다. 그 후 30년에 걸친 세력 확대 끝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이 성립되었다.

프랑스의 침략을 야만(武)의 문명(文)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저항의 전위에 선 것은 유림들이었다. 한문학은 대불 항쟁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역풍이 거셌다. 또 다른 '문명화'의 책무를 자임한 프랑스는 한문적 교양의 제거를 으뜸의 목표로 삼았다. 좁게는 베트남의 전통 문화를, 넓게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를 지우고자 했다. 베트남의 전면적 정신 개조를 위하여 로마자 표기법이 도입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전도를 위해 고안한 문자 체제가 식민 통치의 핵심 방편으로 활용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역설로 점철된다. 로마자 '국어'는 프랑스를 겨누는 비수가 되었다. 쉬운 문자의 대중적 확산이 프랑스 통치를 뒤흔드는 화근이 된 것이다. 1930년대부터 전역에서 전개된 '국어 전파회' 활동은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이다. 좌파들도 힘을 보탰다. 수많은 문화 전사를 동원하여 국어를 통한 혁명 어휘를 개발하고 교육과 선전에 정성을 쏟았다. 그 동력으로 프랑스를 물리치고, 끝내는 미국도 몰아낼 수 있었다. 대단한 성취이다.

▲ 호치민. ⓒwikipedia.org
그럼에도 왠지 착잡하다. 개화(開化) 100년 만에 한자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1000년을 사용한 문자에 도통 까막눈이다. 'Ho Chi Minh'은 알아도 '胡志明'은 잘 모른다. 호치민이 옥중에서 남긴 절창의 한시(漢詩)조차 '꾸억 응우(quốc ngữ)'로 접할 뿐이다. 참맛을 제대로 느낄 리가 없다.

남일 만도 아니다. 한글도 빗대어 보인다. 20세기는 한글이 한자를 대체한 세기였다. 갑오개혁(1894년)부터 자각이 뚜렷했다. 우리글을 '국문', 우리말을 '국어'라고 불렀다. 순한글 문체가 등장한 첫 매체는 <독립신문>(1896년)이었다. 독립은 국가적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한자 문명과의 단절 선언이었다.

서재필은 '徐載弼'보다는 'Philip Jaisohn'이었다. 이승만과 윤치호 등 독립협회 주역들도 영어에 친근했다. 평생에 걸친 윤치호의 영어 일기는 꽤나 유명하다. 애당초 한글 보급은 기독교와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성경 번역이 한글 전용의 실질적인 출발이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이기도 했다. 과연 한글은 영어에 가깝다. 양쪽 모두 '알파벳'이다. 발음을 표기하는 음성 문자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표음 문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문자의 전환은 세계관의 전환을 수반했다. 개화파와 계몽파는 '봉건 문명'을 상징하는 한자를 배척했다. 한글 전용은 애국이요, 국한 혼용은 사대주의라 했다. 과격한 논법이다. 그만큼 시절이 험했다. 그렇게 한자는 주춤거렸다. 식민지를 거치며 한글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중추로 자리했다. 한글은 근대적 문자이고, 한문은 봉건적 문자라는 이분법은 한층 심해졌다.

해방 후 남과 북은 경쟁적으로 한글 전용으로 내달렸다. 어문 정책을 책임진 북의 김두봉과 남의 최현배는 공히 주시경의 제자들이다. 북은 봉건 유산을 청산하고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든다며 한글 전용을 실시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학술서에서도 한자가 빠졌다. 이는 '주체'의 커다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정작 북조선은 민족성이 담겨 있는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었다. 선조의 문화 유산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함으로써 조선 문명과 가장 거리가 먼 군사 국가가 되었다. 김일성 장군(將軍)을 태양처럼 떠받드는 '쇼군(將軍)의 나라'가 된 것이다. 선군 정치를 일제 탓, 미제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남쪽에는 박정희 장군이 있었다. 박정희도 한글 전용을 강조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은 상징적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지 500년이 넘도록 한글을 전용하지 않고 주저하는 것은 비주체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며, 본인이 직접 광화문 현판을 한글 친필로 달았다. 그리고 관변 한글학자들을 동원해 국어 순화 운동을 전개했다.

이 또한 커다란 역설이다. 경복궁의 정문 이름을 '光化門'으로 고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조선 개국 무렵에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 조선이 100년의 기틀을 다지면서 세종이 친히 개명한 것이다.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문치(文治)의 이념을 부러 깊이 새긴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들고 나는 이들은 정문에서 '光化門'의 뜻부터 헤아려야 했다. 이를 '광화문'으로 고쳐 쓴 박정희는 4년 후 메이지유신을 본 뜬 유신 체제를 선포한다. 光化門의 이상과는 전혀 어긋나는 무사 정권의 영구 집권을 획책한 것이다. 뜻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았다.

남도 북도, 세종의 뜻을 곡해하지 말아야겠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셨다. 훈민이 목적이고, 정음은 수단이다. 한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물론 한문을 모르는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셨다. 하지만 한문 발음을 제대로 표기함으로써 <예기>의 대동 사회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것이 궁극적 이상이었다. 사대부의 고급 교양을 국민적 교양으로 고양시켜 일반 백성까지도 유학적 주체로 갱신코자 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을 중원 못지않은 (소)중화(中華)로 이루고자 한 것이다. 한글 창제를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접수하는 것은 세종의 복심을 거스르는 것이다. 불충(不忠)이다.

개화와 심화

박정희는 저격되었지만, 그 후예들은 나고 자랐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1987년 민주화를 이끈 '386 세대'를 말한다. 이들은 1960년대 '조국 근대화'의 물결에서 태어나, 1970년대 한글 전용 교육을 받고, 1980년대 대학을 다녔다. 영판 한자를 읽지 못하지는 않았다.

<한겨레>가 등장하기 전까지 주요 신문은 핵심어를 한자로 표기했다. 지하 써클에서 복사해 읽은 일본판 이념 서적도 한자로 빼곡했다. 그럼에도 한자에 그쳤지 한문은 아니었다. 한학(漢學)과 전면적으로 단절된 첫 세대, '신청년'이었다. 그들도 '민주 선생'을 모시고, '과학 선생'을 섬겼다.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해외파는 PD(민중민주)로, 토착파는 NL(민족해방)로 갈라섰다.

신청년 가운데 일부는 1990년대 학위를 받고 2000년대 학계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식민지 근대론'이 번성했다. 선생들이 주장했던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했다. '실학'에서 근대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조선 후기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던 시도는 기각되었다. 옳은 말이다. 식민지 열등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또 다른 편향이 돌출했다. 과거와는 담을 쌓고 벽을 쳤다. 관심과 시야가 좀체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의 흔적을 찾고 수집하기에 바쁘다. 자연스레 일어 근대, 한글 근대에만 몰두한다. 모든 게 이 무렵 '발명'되고, '탄생'하고, '창조'되었다고 한다. 20세기는 19세기와 전혀 다른 '신천지'라는 것이다.

100년을 과장하고 1000년을 좌시하는 습벽이 생긴 것이다. 그러할 수밖에 없다. 어학 능력이 원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건만, 그마저도 갖추지 못했다. 한문은 과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박정희가 흠모했던 일본적 근대가 '식민지 근대'와 '번역된 근대'로 추인받기에 이른다. 탈식민은 재식민으로 굽어갔다. 이를 발판삼아 뉴라이트도 등장했다.

식민지 조선은 다채롭고 복합적이었다. 한글과 일어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베트남도 그러했다. 프랑스어와 국어만 있던 것이 아니다. 1919년 과거제가 폐지되고 국자감이 해체되자, 마을에 서당을 차리고 민중을 일깨우는 소임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한자를 고수했다. 유학의 하방, 유학의 민주화였다. 다만 베트남을 사회주의로 통일한 '신청년'들이 그 유산들을 외면했을 뿐이다. 1920년대 프랑스가 세운 '불월학교'에서 신교육만을 받고 자라나 한학과 격절되었기 때문이다. 1890년생 호치민만 해도 그러하지 않았다.

20세기에도 여전히 한문으로 쓰고 기록한 문헌들이 생산되었다. 그 간난의 시절을 통과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또박또박 한문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래서 한문은 옛 언어인 동시에, 새 언어이기도 했다. 신채호 사상의 정수는 망명지 중국에서 한문과 백화문으로 쓴 문장들이다. 동양에 굴종하지도 않고, 국수를 고집하지도 않으면서, 동방으로 활짝 트인 만년의 사상이 만개했다. 따라서 '한문 근대'를 망실하는 것은 20세기 한국 사상사의 큰 수맥을 놓치는 것이다. 근대 안에서 근대 밖을 꿈꾸었던 풍요로운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세상과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유력한 방편이기도 하다.

20세기가 개화(開化)라면, 21세기는 심화(深化)이다. 외부로 열린 만큼이나, 안으로 깊어져야 한다. 속을 차리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 한글은 개화의 방편이었다.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모두 개화의 지속이었다. 그렇게 100년을 내달리며 정작 한글을 선사해준 세종의 본뜻과는 크게 멀어지고 말았다. 한문을 잃은 한글은 초라했다. 고작 100년, 한글로 축적된 문화 토양이 원체 옅은 탓이다. 영어의 공세 앞에 한글이 무력한 근본적 까닭이다. 대학(大學)에 대가(大家)가 없고 소가(小家)만 남은 것도 한학의 결여가 십중팔구이다. 만시지탄일망정, 천 년의 유산과 재접속하고 재점화할 때이다.

협동조합가입배너

천자문은 출발부터 독특하다. 하늘 천, 땅 지, 집 우, 집 주, 천지와 우주부터 배운다. 너는 누구니? 나는 누구야, 를 앞세우는 외국어 교육과는 퍽이나 다르다. 너와 나를 알기 전에 천지부터 깨우쳤다. 너와 나 이전에 하늘과 땅이 있었다. 그래서 천, 지, 인이라 했다. 그렇게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고분하고 겸손한 존재였다. 너와 내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다투며 천지를 정복하는 세상과는 판이한 세계관이다. 차마 인권(human right)을 내세우지 않았다.

한학의 복원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한학은 중국 중심이다. 서학은 서구 중심이다. 국학은 또 자국 중심이다. 한문, 한글, 알파벳,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아니 되겠다. 셋을 아울러 동학(東學)으로 크게 회통할 일이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새천년 실력 양성 운동의 첩경일 것이다.

이 심화로의 회심을 통하여 지난 100년 유난히도 모질고 가혹했던 북과 남이, 또 베트남이 맑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tyio@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