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전쟁인가, 대량살상의 현실인가?
[프레시안 books] 권헌익의 <또 하나의 냉전>
상상의 전쟁인가, 대량살상의 현실인가?
1990년 11월 21일 유럽 각국의 지도적 정치가들이 파리에서 한데 모여 "유럽의 대결과 분열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 장엄한 '냉전 종언' 선언에 같이 손들며 환호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 후 냉전사의 후주쯤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989년 이후 '탈냉전'은 어느새 세계사의 새로운 현재 규정이 되었고, 20세기 후반 인류의 삶은 하나의 단일한 시간 흐름과 단층적 성격을 갖는 집합단수로서의 대문자 냉전(The Cold War)으로서 '역사'가 되었다. 그 주류 냉전사 서술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을 각각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적 양극 냉전 체제가 1947년부터 형성되어 1989~91년 '자유주의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냉전을 지구적 차원에서 하나의 단일한 충돌로 보는 인식이다.

▲ <또 하나의 냉전>(권헌익 지음, 이한중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케임브리지 대학교 석좌 교수 권헌익의 <또 하나의 냉전: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이한중 옮김, 민음사 펴냄)은 바로 그와 같은 냉전 서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물론, 최근 국제 냉전사 연구에서 저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냉전의 다극성과 지역별 고유의 맥락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다. 하지만 대개 그것은 주류 냉전 서사에 대한 보충 내지 심화이거나 작은 교정에 불과했다. 그것에 반해 이 책은 지역적으로 특수한 다수의 역사적 현실과 다양한 인간 경험을 내세워 냉전을 단일하고 포괄적인 지정학적 질서로 보는 주류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뒤엎고자 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극적이고 전진적이다.

단선적이고 중심 통합적인 냉전 서사에 대항해 저자가 제시하는 길은 둘인데, 둘은 만난다. 먼저, 냉전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인식의 극복이다. 유럽과 북미에서의 냉전은, 대결의 위험과 적대적 경쟁이 상존했지만 기본적으로 '오랜 평화'의 시기였다. 이에 반해 나머지 지역에서는 대부분 실제 전쟁과 정치 폭력의 대량살상이 난무했다. 저자는 냉전 시대에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수가 4000만 명에 달한다는 보고를 제시하며 냉전이 한편에서는 '상상의 전쟁'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대량살상의 전쟁과 폭력의 시기였음을 부각했다. 상대적 안정과 평화의 냉전과 나란히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또 하나의 냉전'이 존재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다.

그런데 이런 지적에 대해 주류 냉전사는 흔히 양극 체제의 '중심'에서는 핵전쟁의 공포로 인해 결국 세력 균형이 유지되고 경쟁 대결이 억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만 '주변'이 '작은 전쟁들'을 경험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주변'에서 전쟁들이 발발했다고 해도 '중심'에서 핵전쟁이 발생하지 않았기에 그 전쟁들은 기껏 '냉전 속의 열전'이자 '대리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비유럽 지역의 전쟁들은 냉전의 중심 내지 본류가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권헌익이 주장하듯, 그것을 "주변적인 사건들로 여기기보다는 많은 공동체들이 겪었던 엄청난 불행을 포함하는 역사로 접근해야 한다."

기실 다양한 조류의 인습적인 냉전사 연구가 비유럽 지역의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인명 살상과 고통을 냉전 시기의 주변적 현상으로 내모는 것은, 유럽중심주의라는 오랜 관성에 빠진 채 여전히 성찰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유럽과 북미 지역의 냉전사가들이 그 지역의 상대적 안정과 '오랜 평화'에 현혹되어 다른 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눈을 닫고 있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냉전 시기 누구나 공포로 그렸던 핵전쟁이라는 가상의 전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냉전 시기 만연했던 대규모 핵전쟁의 공포와 위기가 비유럽 지역에서 발생한 현실로서의 전쟁을 주변화하고 상대화하는 이 지적 학문적 성좌를 충분히 분석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상상의 공포와 위기의식이 지닌 지적 효과와 조건 및 학문적 압박과 유인이 더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가상의 핵전쟁을 내세워 실제로 발생했던 '열전'들을 여전히 냉전사의 계기적 주석이나 지역적 변이 정도로만 간주하는 기성의 인지와 해석틀이 정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극 시대 역사를 다원화하고 탈중심화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냉전'을 소개하거나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 오류이자 오만이라고 말하는 것 못지않게 '중심'과 '주변'의 그 이분법이 지닌 인식 전제들을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를 더 비판적으로 문제 삼고 복합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두 번째 길은 앞에서 언급한 대량살상과 폭력의 경험과 기억이 갖는 함의를 결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냉전 연구가 기존의 지배적인 지정학적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 차원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냉전은 지정학적 차원, 즉 구체적 삶의 현장 저편에 존재하는 경계 바깥의 일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공동체 내부에서 심대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 가족과 친족 사회에서 벌어진 냉전의 폭력적 충돌 경험은 더욱 파괴적이고 장기 지속적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쏘이 더우'라는 베트남의 흑백 혼재 제사떡처럼 한 공동체가 양 진영 모두를 받아들이는 경험을 낳았다.

이 냉전의 대량살상의 지역적 맥락은 탈식민화다. 그렇기에 양극 질서의 구체적 발현, 특히 폭력 폭발은 탈식민화와 직접 만난다. 탈식민 국가와 사회에서는 민족 해방과 자결의 다기한 주장과 과정의 충돌이 바로 양극시대를 –유럽과는 달리- 폭력과 전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음 대목이다. 탈중심화된 지역적 맥락의 냉전의 유산, 즉 폭력 충돌의 경험과 기억을 해결하는 창의적 지혜가 지역 공동체의 전승 문화 또는 가족과 친족의 유대와 연대('친족관계의 민주화', '민주적 가족')에서 발현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냉전>의 4장과 5장은 각각 베트남과 한국의 경험에 의거해 그 핏빛 삶의 현장에서 꽃피는 "창조적인 도덕 관행들"을 다룬다. 과문한 탓에, 폭력과 전쟁의 '그 후' 사회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공동체나 가족 또는 친족 관계의 도덕적 회복 잠재력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 평가가 정당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크게 의미를 부여한 제주 4.3의 '그 후' 회복 과정은 한국의 폭력 경험 치유 역사에서 오히려 매우 특수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게다가 좌와 우의 정치 폭력을 동일한 지평에서 크게 뭉뚱그려 화해로 걸어가기도 어려워 보인다. 대량살상으로서의 냉전과 관련해서는 도처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적대와 권력 관계가 여전히 강력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E. P 톰슨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문화의 지나친 이상화와 낭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문제와는 무관하게 저자가 냉전의 경험사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인습적인 냉전문화사를 극복하고 있는 것은 매우 신선하다. 냉전 이데올로기나 선전의 문화적 확장 또는 미시적 냉전 현상에 대한 탐구를 넘어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지닌 독자성과 고유의 활력에 주목하면 냉전사는 더 많은 냉전의 '구체적 실재'를 보여줄 수 있다. 아울러 냉전 극복의 실천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기도 하다. 저자가 주목한 대로, 정치 폭력의 경험과 기억은 냉전 시기 예외적 현상의 사후적인 흔적이나 곧 잊힐 잔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의 학문적 인지와 정당한 재배치 및 폭력(경험)의 문화적 극복과 대안적 함의 모색은 '냉전의 해체' 과정에 필수적이다. 망각된 경험과 기억의 복원과 재배치야말로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자극하며 평화 문화의 대안을 생산하는 출발이다.

다만 유럽 냉전과 비유럽 지역 냉전의 집단적 경험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과잉해석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경험사에 기초해 중심 통합적 관점을 해체한다는 것은 새로운 또 다른 중심 하나를 통합적으로 구축해 기성의 중심에 병렬적으로 세우는 것은 아닐 테다. 비유럽에서의 '상상의 전쟁' 내지 상대적 평온 그리고 반대로 유럽에서의 폭력과 억압 경험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어쨌든 '아래로부터의 냉전사'로서 경험과 기억을 분석하면 새로운 행위 주체들을 거듭 만나게 되며, 그들은 끊임없이 단일한 서사들에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복수로서의 냉전들(multiple cold wars)'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장점과 덕목은 넘친다. 각 장과 절마다 다양한 분과 학문의 이론과 관점을 접할 수 있다. 폭 넒은 냉전사 문헌들의 소개와 논평은 다소 혼란스럽기는 해도 꼼꼼히 읽어 보면 지적 자극이 그치지 않아 머리카락이 수시로 선다. 다만, 냉전에 대한 통사적 서술이 아니기에 체계적인 냉전사 조망을 기대하는 이들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아울러 핵심 주장이 좀 불필요할 정도로 반복되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유럽과 북미의 완강한 인습적 냉전사가들을 두드리느라고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하여 저자의 향후 학문적 활동이 머리 굳은 서양의 학자들에게 가하는 망치로서만이 아니라 갈길 더듬는 한국과 아시아 냉전사가들의 지팡이가 되면 더욱 좋겠다. 평화와 화해를 지향한다면서 흔하고 낡은 교본 같은 말들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저자가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이렇게 새로운 관점과 지평, 탄탄한 근거와 숙고를 가지고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범한 냉전사 연구서를 쓴 그는 인류학자다. 역사학과 인류학,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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